LOGIN여덟 번 죽고 마지막 꼬리만 남은 구미호 윤해원. 아홉 번째 생에서 정략결혼을 거부한 그녀 앞에, 매번 죽음의 끝에서 마주친 수사관 차시헌이 손을 내민다. 살인자인가, 구원자인가. 조작된 혼인계약의 진실을 쫓으며 두 사람은 빚도 운명도 아닌 서로의 선택이 되어 간다.
View More서울의 불빛이 아래에서부터 꺼지고 있었다.
윤해원은 두꺼운 강화유리 너머로 검은 도시를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내려다본다고 믿었다. 지하 120m, 국가영맥 중앙핵에는 창문이 없었다. 벽을 가득 메운 관측 화면이 한강과 도로, 빌딩 숲을 실시간으로 비출 뿐이었다.
[중앙 안정률 18%]
[제1 봉인실 생존 신호 확인]
[제2 봉인실 생존 신호 확인]
붉은 경고문 사이로 선우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원아. 들려?
“응.”
목 안에서 쇠 맛이 났다. 해원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붉은 피 사이로 은빛 불씨가 섞여 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꼬리는 이제 두 개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중앙핵에서 뻗어 나온 검은 도관에 붙들린 채 반투명하게 흔들렸다.
―이나 쪽 정화로가 먼저 끊어졌어.
도하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침착했다. 재난 현장에서 수천 명을 살려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서이나를 먼저 꺼내야 정화망이 유지돼. 그다음 바로 네 쪽으로 갈게.
해원은 맞은편 화면을 봤다. 다른 봉인실 안에서 서이나가 의식을 잃은 채 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흰 빛이 꺼질 때마다 서울 지도 위 붉은 영역이 넓어졌다.
“둘 다 열 수는 없어?”
잠깐의 침묵.
―지금은 안 돼.
도하는 늘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리는 답을 골랐다. 그래서 해원은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지금 혼자 남겨졌다.
“얼마나 걸려?”
―3분. 버틸 수 있지?
도하는 물었지만, 이미 버틸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해원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안쪽에는 두 사람의 이름과 결혼 예정일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 식도 올리지 못한 반지가 피와 여우불에 젖어 있었다.
“응. 기다릴게.”
대답하자마자 제2 봉인실이 열렸다.
화면 속 도하가 서이나를 받아 안았다. 의료진이 달려들었고 정화망 수치가 6% 상승했다. 도하는 한 번 이쪽을 돌아봤다. 시선이 닿을 리 없는 거리였는데도 해원은 그가 자신을 본 것 같았다.
―곧 갈게.
통신이 끊겼다.
1분이 지났다.
중앙핵의 도관이 꼬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해원은 비명을 삼키며 양손으로 제어대를 붙들었다. 그녀가 손을 떼면 영맥이 먼저 폭주한다. 화면 위 예상 사망자 수가 초 단위로 올라갔다.
2분이 지났다.
봉인실 바깥 복도에서 폭발이 일었다. 통신 채널은 잡음만 토했다. 도하의 생체 신호는 살아 있었다. 서이나도 살아 있었다.
3분이 지났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중앙 안정률 9%]
[생체 연료 전환을 시작합니다.]
“도하야.”
답은 없었다.
해원은 도관에 붙잡힌 꼬리 하나가 조금씩 빛으로 부서지는 것을 바라봤다. 처음 겪는 일인데도 몸은 낯설어하지 않았다. 뼈마디마다 오래된 공포가 깨어났다. 꼭 이 순간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사람처럼.
닫힌 봉인문 너머에서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쾅!
문 한가운데 검은 선이 그어졌다. 두 번째 충격과 함께 합금문이 안쪽으로 무너졌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연기 속에서 걸어 들어왔다.
차시헌.
해원은 국가이변관리청의 위험한 퇴마사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먼저 공포를 기억했다.
시헌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날을 타고 붉은 피가 떨어졌다.
그가 해원을 향해 달려왔다.
“윤해원 씨. 제 말 들립니까?”
해원은 대답하려 했지만 숨이 나오지 않았다.
시헌은 도관을 향해 검을 들었다. 검 끝이 정확히 해원의 심장을 가리켰다.
역시 이 남자였구나.
희미한 확신과 함께 붙잡혀 있던 꼬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시헌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안 돼.”
검이 떨어졌다.
해원의 시야가 꺼졌다.
***
숨이 터졌다.
해원은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손끝까지 멀쩡했다. 피도, 도관도, 꺼져 가던 서울도 없었다.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 옆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2028년 3월 2일 오전 4:10]
알림 하나가 화면을 채웠다.
[내일 오후 7시―도하 프러포즈. 라비앙호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여덟 번의 죽음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깨진 거울 사이에서 숨이 끊겼다.
백색 병동에서 저주에 잠겨 죽었다.
무너지는 대교 끝에서, 카메라가 켜진 청문실 뒤에서, 지하 혼인실의 차가운 제어대 위에서 죽었다. 도망치던 산속에서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도하가 서명한 격리실에서도 죽었다.
그리고 조금 전, 검게 꺼진 서울 아래에서 여덟 번째로 죽었다.
장소도 이유도 달랐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늘 같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선우도하.
그리고 피 묻은 검을 들고 나타난 차시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도하: 내일은 늦지 마. 중요한 날이니까.]
해원은 화면 속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이번에는 그 약속 장소에 가야 했다.
같은 대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하기 위해.
“8개요.”스피커 너머 서이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통제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해원은 자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남은 꼬리는 여전히 하나였다.“형태를 더 설명해 주세요.”시헌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실체가 있습니까?”“반투명해요. 푸른색이고…….”이나가 잠깐 말을 멈췄다.“병실을 열 때마다 꼬리 하나가 사라집니다.”이선경이 즉시 생체신호 지도를 확대했다. 8층 B구역에는 14개의 점이 떠 있었다.그중 복도 중앙을 이동하는 검은 표시 하나.“장비상 미확인 개체는 없습니다.”현장 분석관이 말했다.“생체도 영체도 0입니다.”해원이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있어요.”분석관이 돌아봤다.“무슨 근거입니까?”“냄새가 나요.”“여기는 1층 통제실입니다.”“그래도 납니다.”해원은 눈을 감았다.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희미한 탄내가 섞여 있었다.불에 탄 털.자신의 꼬리가 소멸할 때마다 맡았던 냄새였다.첫 생에서는 죽기 직전.다섯 번째 삶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여덟 번째에는 숨이 끊어진 뒤라 기억할 수 없었다.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맡은 냄새만으로 충분했다. 해원이 8층 평면도를 가리켰다.“이 복도 아니에요.”장비가 초록색으로 표시한 동쪽 통로였다.“저기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분석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현재 유일하게 영력 오염 수치가 정상인 구간입니다.”“그래서 이상해요.”“정상이라서요?”“네.”해원이 손목을 들어 보였다. 검은 감시각인은 동쪽 통로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조금씩 선명해졌다.“이게 저 길을 좋아합니다.”시헌은 바로 물었다.“반대쪽은요?”해원이 서쪽 서비스 복도를 짚었다. 장비에는 붉은 위험 표시가 빽빽했다.“저쪽은 아파요. 그런데 끌리지는 않아요.”분석관이 고개를 저었다.“오염농도 기준치의 4.8배입니다. 현행 매뉴얼상 진입 금지입니다.”시헌이 말했다.“매뉴얼 근거는 기록해 두십시오.”그리고 평면도 위의 진입선을 서쪽으로 바꿨다.분석관이
3월 8일 오전 열 시가 넘어 도착한 백야병원 앞에는 구급차보다 정부 차량이 더 많았다.해원은 차에서 내리기 전 건물부터 올려다봤다. 본관은 정상적으로 불이 켜져 있었다.문제가 생긴 곳은 별관 8층.창문 12개가 모두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밤도 아닌 오전인데, 그 층만 햇빛과 무관하게 발광하고 있었다.“그래서 백야병동인가요?”해원이 물었다.이선경이 고개를 저었다.“원래 이름입니다. 중증 이능력자 신경정화 병동이라 야간에도 조명을 끄지 않는 데서 붙은 명칭이고요.”“지금 저 빛은?”“정상 현상 아닙니다.”시헌이 태블릿을 해원에게 보여 줬다. 8층 평면도 일부가 검게 지워져 있었다.“07시 42분에 B구역 격리문이 닫혔습니다. 07시 49분부터 내부 CCTV 영상이 23분 전 기록을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사람은 몇 명 있죠?”“등록상 의료진 9명, 환자 4명.”“등록상?”“실제 생체신호는 14개입니다.”한 명이 더 있었다.해원은 협약을 맺던 날 새벽에 온 첫 알림과 오늘 아침의 검사 결과 문자를 떠올렸다.서이나.“그 사람도 안에 있습니까?”“네.”시헌이 화면을 넘겼다.서이나.31세.정화능력자.백야병원 정기검사 대상자.사진 속 여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단정한 인상이었다.해원의 손목이 욱신거렸다.“이번 생에서 이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현재 확인한 이번 생의 접점도 없습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의 검사 알림이 제 번호로 왔죠?”“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해원은 차에서 내렸다.시헌이 바로 뒤따르지 않았다.“윤해원 씨.”“왜요?”“이번 사건은 협약상 의무 참여 대상이 아닙니다.”해원은 그를 돌아봤다.“또 확인하는군요.”“네.”“갑니다.”“알겠습니다.”그제야 시헌이 같이 움직였다. 병원 로비에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몰려 있었다.직원들은 8층 사고를 전기시설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천장 모니터에는 이미 국가이변관리청 재난 코드가 떠 있었다. 해원과 시헌이 별도 통
3월 8일, 공식 신고가 접수되기 전의 백야병원.서이나는 같은 꿈을 3일째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하얀 복도 끝에 여우가 앉아 있었다.아주 큰 여우였다.등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건 꼬리였다.단 하나.여우는 매번 자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문이 열리면, 안쪽에서 검은 손들이 나와 여우의 꼬리를 잡아당겼다.이나는 꿈속에서 늘 소리쳤다.도망가라고.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오늘은 달랐다.여우가 처음으로 이나를 향해 걸어왔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뒤, 사람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네 것이 아니야.’이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서이나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담당의가 손전등으로 동공을 확인했다.이나는 거친 숨을 골랐다.“네.”“현재 위치는요?”“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 검사실.”“오늘 날짜는?”“3월 8일.”답은 정확했다.의사는 안도한 듯 기록지에 체크했다.“영력 폭주 수치는 안정됐습니다.”이나는 손을 내려다봤다.손끝에서 새어 나온 하얀 빛은 사라졌지만 손바닥에는 낯선 푸른 잔광이 남아 있었다.“이건 뭐죠?”의사가 잠시 망설였다.“검사 중 일시적인 색 변화가 있었습니다.”“제 정화력은 흰색이에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파란색이죠?”“정확한 원인은 분석 중입니다.”누가 분석하는지, 누가 결과를 쥐고 있는지는 빠져 있었다.이나는 그 빈칸이 싫었다.누가 분석하고 있는지.누가 알고 있는지.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지.그런데 지금까지는 한 번도 깊게 묻지 않았다. 센터에서 정상이라고 하면 정상인 줄 알았다.“오늘 검사 기록 보여 주세요.”의사의 표정이 굳었다.“내부 분석이 끝나면—”“제 기록이잖아요.”“서이나 씨.”“제가 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처음으로 따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의사가 답하려는 순간 복도에서 경보가 울렸다.삐이익.검사실 조명이 꺼졌다가 켜졌다. 천장
3월 8일 새벽.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에서 서이나가 눈을 떴다.손끝에 하얀 빛이 불규칙하게 맺혔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고, 아직 꿈속인 것처럼 침대 발치를 더듬었다.“여우가…….”간호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서이나 씨, 악몽 꾸셨어요?”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꼬리가 하나뿐이었어요.”간호사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웠다. 담요 아래에서 푸른 불꽃 한 점이 피어났다가 꺼졌다.***같은 날 오전 10시.해원은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 모니터를 확인했다.차시헌 혼자였다.“들어오세요.”그는 서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지우는 도로가 막혀 5분쯤 늦는다고 연락을 보낸 참이었다.“먼저 꺼내 놓으세요. 검토는 지우가 오면 시작하고요.”시헌은 어제 앉았던 식탁 끝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해원은 자신의 수첩과 바느질 함을 치웠다. 다 마신 커피잔 자리에는 물 한 잔을 뒀다.시헌은 밀려 있던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원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잠깐 살폈다. 식탁 위로 펼친 문서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잠시 뒤 지우가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나 왔어. 시작하자.”“90일 협약 원본입니다. 수정된 조항 모두 반영됐습니다.”해원은 첫 장부터 읽었다.공동수사 우선.투약 동의권.정보 공유.일방 감독 금지.언제든 종료 요구 가능.협약을 정할 때 고쳤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별도 부속서가 있네요.”“현재 확인된 위험요소 목록입니다.”첫 번째는 감시각인.두 번째는 거울형 공간왜곡.세 번째는 월흔 반응.네 번째 항목에서 해원의 손이 멈췄다.[반복기억과 관련된 정신오염 가능성 — 미확인.]“이건 뭐죠?”시헌이 물잔을 내려놓았다.“월흔에 접촉할 때 과거와 현재의 감각이 겹칠 가능성이 있습니다.”“저를 정신이상으로 분류하는 겁니까?”“아닙니다.”시헌은 즉시 답했다.“기억의 진위와 별개로 감각 중첩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그의 시선이 멎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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