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의 피곤함과 해방감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선우는 틈새에 몸을 바짝 붙였다. 빨리 회사를 나가고 싶었다. 정확히는 빨리 윤오를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 어젯밤 바에서도 맡았고, 오늘 아침 회의실에서도 맡았던 향. 선우의 몸이 먼저 알아챘다. 안 봐도 알았다. 에단이었다. 뒷덜미가 서늘했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선우는 시선을 바닥으로 푹 떨어뜨렸다. 제발. 그냥 조용히 내려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좁은 공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선우도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슬쩍 바닥을 내려다봤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 정장 구두. 잘 재단된 슬랙스의 끝단만 봐도. 진짜 바로 옆에 있네. “…….” 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이 이상할 만큼 사람을 신경 쓰이게 했다.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집요한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남의 생각을 읽을 리가 있나. 그런데 에단 앞에만 서면 자꾸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우는 더 고개를 숙였다.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15F.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10F. 7F. 4F. 층수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선우의 긴장도 조금씩 올라갔다. 괜히 말을 걸지 마라. 그리고 제발 빨리 내려가자. 띵. 1F.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빠져나갔다. 선우도 그 틈에 섞여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후. 살았다. 유쾌. 상쾌. 통쾌! 선우가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으악!” 선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본부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형식적인 인사. 딱 그 정도였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 선우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너무 익숙해서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권윤오였다. 눈이 정확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굳어 있던 선우의 얼굴이 활짝 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말끝이 거의 튀어 올랐다. 선우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윤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의 뛰었다. “초딩이냐.” 윤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뛰지 마.” 짐짓 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숨은 다정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 가로등 아래 나란히 선 두 사람. 감청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 그 풍경에 머물렀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남자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갔다. “짠.” 소주잔이 투박하게 부딪혔다. 두 사람은 마치 수천 번 반복해 온 일처럼 자연스럽게 마주 앉아 있었다. 치익. 윤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게를 움직였다. 고기를 뒤집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가장 잘 익은 조각을 골라 선우의 앞접시에 올려놓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이었다. “…….” 회사에서 하루 종일 조였던 신경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선우의 입꼬리가 제 주인의 속도 모르고 하염없이 올라갔다. 윤오 앞에만 서면 감정에 걸어둔 빗장이 자동으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김선우 설정값. “먹어. 넋 놓고 있지 말고.” “응.” “뜨거우니까 불어 먹어.” 말투가 참. 내가 개냐? “응.” 속내와 반대로 입 밖으로 나가는 음절은 매우 순종적이었다. 갓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자 고소한 육향과 뜨끈한 기름기가 입안에 퍼졌다. “맛있어.” 선우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확인한 윤오가 시선을 불판으로 내렸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덕분에요.” 선우가 웃었다. “너 주차 진짜 예쁘게 해놨더라? 거의 발렛이던데.” “돈은 안 받았잖아.” 짧은 농담에 둘 다 웃었다. 그렇게 선우는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수정의 바. 우연히 마주친 에단. 위스키 이야기.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들이 그걸 봤다는 것까지. “…….” 윤오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고기를 뒤집고. 자르고. 선우의 앞접시에 올려주고. “먹어.” 그러면 선우는 당연하다는 듯 젓가락을 뻗었다. “근데 그걸 회사 사람들이 본 거야.” 선우가 한숨처럼 웃었다. “내가 조심성이 없었지, 뭐.” 윤오는 여전히 평온했다. 집게를 움직이는 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선우는 윤오의 평온함을 사랑했다. 윤오 옆에 있으면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괜찮았다. 그 무던함에 기대어 있으면 세상 어떤 해일이든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잔잔해졌다. “너도 좀 먹어.” 선우가 젓가락을 들었다. “이제 내가 구울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헤헤.” 윤오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 선우도 따라 웃었다. 그래, 이거면 됐다. 연애가 끝나면 지저분하게 따라붙던 감정의 부산물들조차, 지금 이 순간의 안도감에 비하면 부차적인 소음일 뿐이었다. 선우가 불판에서 갓 건져 올린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후. 괜히 입술을 모아 한 번 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윤오 쪽으로 내밀었다. “아ㅡ해.” “덜 익은 거 아냐?” “뭐라는 거야, 진짜.” 선우가 민망해서 젓가락을 거두려던 순간이었다. 윤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선우의 젓가락 끝에 있던 고기를 입에 물었다. “…….” 시간이 멈췄다. 쿵. 쿵쾅. 쿵쾅, 쿵쾅. 이젠 아주 뛰는 게 아니라 발길질을 해대는 수준이었다. 으어억. 당장 소리를 지르며 식탁 밑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덜 익었어.” “진짜?” 선우가 화들짝 놀라 불판을 들여다봤다. “어디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적이며 허둥대는 선우를 보던 윤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풉.” “……야.” 툭. 선우가 젓가락 끝으로 윤오의 어깨를 쳤다. 윤오는 맞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고스란히 맞아준 뒤 다시 집게를 움직였다. 선우는 괜히 입술만 달싹였다. “…….” 툭 치면 맞아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추우면 겉옷을 벗어주고. 아프면 온갖 호들갑을 떨며 병원으로 데려가고. 끝까지 옆에 있어주면서도.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 윤오의 평온함은 선우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아프게 했다. 저 다정함 안에 자신과 같은 흔들림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뭘 그렇게 봐.” 윤오가 집게 끝으로 불판을 툭툭 두드렸다. “탄다.” 선우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냥.” 시선을 불판으로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너 고기 잘 굽는다고 생각했어.” “새삼스럽게.” 선우의 컵에 물이 절반쯤 비어 있는 걸 확인한 그가 냉수를 채워 넣었다. 찰랑. 맑은 물소리가 잔 안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자신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 더 선명해졌다. 어리석은 기대는 계절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현실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너 왜 이렇게 놀리기가 쉽냐?” “누가 놀리래?” “표정이 다 보여.” “안 보여!” “다 보이는데.” 나쁜 놈. 진짜 나쁜 놈의 새끼. 아니, 취소. 그의 첫사랑, 첫 이별, 그리고 수많은 일상의 파편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선우는 제 마음을 깎아 우정이라는 예쁜 조각상을 만들었다. 사랑이라고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서. 대신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기 좋게 다듬고. 모서리를 감추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 말하고 싶었다. 회사 사람들의 수군거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정작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네가 혹시라도 오해해서 나를 멀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친구라는 이름은 너무 오래된 방패였다. 너무 견고해서. 그래서 오늘도 그 뒤에 숨어 제 진심을 혼자 삼켰다.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