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새로 온 본부장님이랑 말이야. 압구정에 그 바 알지.”
“어디, 누아르 오크?” “어, 거기. 둘이 같이 나갔어. 어제.” 아뿔싸. 선우의 몸이 하마터면 크게 휘청일 뻔했다. “…….” 선우가 황급히 벽에 손을 짚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벽 너머로 튀어나갈 뻔했다. 부정맥이고 나발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누가 봤어? 어제 누아르 오크에서 에단과 함께 나왔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망설이면 원액까지 오염됩니다.’ ‘김선우 씨라고 다르진 않을 텐데요.’ 요상한 이야기도 되게 많이 했는데. 혹시 들었나? 생존을 위한 상황 파악. 선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선우가 결국 벽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을까. 선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한 채 코너를 돌아, 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목표였다. 발끝이 바빠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코너를 돌아서야 했다. “후우…….” 모퉁이를 돌아서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힘도 조금 풀렸다. 본의 아니게 전시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본인도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남의 입을 거치자 아주 그럴듯한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그제야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떠올랐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그러게. 발 없는 말은 천 리가 아니라 만 리도 갈 판이었다. 술에 취해서였는지, 분위기에 절여져서였는지. 어제의 선우는 평소답지 않게 경계심이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술이 문제야! 점심의 소란에 저녁의 동행까지 겹쳐지니, 마치 누군가 자신의 사생활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뒤 하나씩 해부해놓은 기분이었다. 선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건 흑역사를 제가 직접 삽으로 파서 캐낸 수준이었다. 나 오늘부터 금주야. “일만 하자.”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일만.”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선우를 휩쓸 듯 지나갔다. 선우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섞여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형식적인 인사가 몇 번 오갔다. 그 사이 선우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표정을 정리했다. 1층 로비에 내려오자마자 카페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줄은 길지 않았다. 선우는 진열대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입맛은 십 원어치도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했다. 지금 상태로 오후 업무까지 버티려면 최소한 위장에 먹을거리라는 걸 넣어줘야 했다.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네, 다행이다. 선우가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포장을 뜯지 못했다. 속이 여전히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칠했다. 손은 샌드위치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입에 넣을 생각만 하면 속부터 울렁거렸다. “하…….”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이라 그동안 꾹 눌러두었던 한숨이 마음껏 새어 나왔다. 명치께가 묵직했다. 사랑싸움이니, 본부장님과 무슨 사이니. 그런 가십 자체는 별것 아니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소음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생길 테고, 사람들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옮겨갈 터였다. 그런데. “…….” 선우의 시선이 책상 위 휴대폰으로 움직였다. 알림 하나 없었다.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은 무채색의 직사각형. 권윤오.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거냐고. “……바보상자.” 선우가 휴대폰을 한 번 노려봤다. 그때였다. “점심이에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선우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본부장님?” 에단이었다. 본부장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무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 노트북을 펼쳐놓은 채 화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점심시간 특유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간. 사람 하나 없는 사무실에서 에단만이 혼자 조용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선우와 너무 가까웠다. “식사 안 하시고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선우는 말을 꺼내놓고 속으로 덧붙였다. 불편하게……. 에단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답답해서요.” ……이 사람은 홧병이 있나. 선우의 시선이 슬쩍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지금.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이런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아까 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이 아주 제대로 완성될 것 같았다. “본사는 오픈 구조라서요. 사방이 막힌 공간은 조금 어색하네요.” “아…… 네.” 뭐가 어색하다는 건지. 선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샌드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식사 안 하셨으면 이거 드시겠어요?” 에단의 시선이 샌드위치에서 선우에게로 올라왔다. “No, thanks.” “아…… 네.” 머쓱해진 선우가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던 찰나였다. 지잉.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고 묵직하게 울렸다. 선우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내려갔다. 화면에 뜬 이름. 윤오! 쿵. “……아.” 선우의 손이 왼쪽 가슴께로 올라갔다. 진짜 이놈의 심장새끼. 옆에서 에단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선우는 더 진동이 울리기 전에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 “점심은.” 언제 서로에게 그렇게 날을 세웠냐는 듯한 평소의 목소리. 투박하고 무심한데, 권윤오다운 화해였다. 선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번졌다. “이제 먹으려고. 너는?” 시선이 아주 잠깐 옆으로 흘렀다. “…….” 에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 채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ㅡ “나도 이제 먹으려고. 오삼불고기.” 선우가 피식 웃었다. “맛있겠다, 야.”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다. 이 평범함이 좋았다. 하루 종일 꼬여 있던 속이 거짓말처럼 조금씩 풀렸다. ㅡ “약속 없으면 저녁에 나와.” 선우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윤오가 덧붙였다. ㅡ “같이 먹자. 저녁.” ㅡ “이따 데리러 갈게.” 거듭 강조하지만, 선우에게 권윤오의 거부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어. 퇴근할 때쯤 연락할게.” ㅡ “응. 이따 봐.” “응.” 뚝. 통화가 끊겼다. “…….” 한동안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바라봤다. 고작 몇 분이었다. 종일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거짓말처럼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역시 권윤오였다. 목소리 하나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복도에서 들었던 수군거림도. 사람들의 날 선 시선도. 혼자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던 흑역사의 잔해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겁던 것들이, 전화 한 통에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권윤오. 너는 도대체 나한테 어떤 무게인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사실이 조금도 싫지 않은 걸까. 웃기게도,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건넨 한마디를 붙잡고 하루를 보내는 것. 그리고 너를 기다리는 것. 온종일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언제 올까. 몇 시쯤이면 나타날까. 그러다 기어코 네가 나타나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잔잔했던 마음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별다를 것 없던 하루를, 너 하나 때문에 전혀 다른 하루로 만들어버리는 것. 이게 사랑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십이 년째 이어지고 있는 낡은 습관인지. 선우는 아직 답을 알지 못했다. *** 점심시간이 끝난 뒤부터 시간이 미친 듯이 느려졌다. 메일 하나 보내고 시계를 보면 3분. 결재 하나 올리고 다시 보면 5분. “장난하나.” 선우는 모니터 우측 하단에 박힌 시계를 노려봤다. 17:53. 잠깐 일하다가 다시 확인했다. 17:56. 조금 더 지나 다시 봤다. 17:58. “……진짜.” 시간이 이렇게 안 갈 수도 있나. 선우가 손으로 입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고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다. 17:58. 17:59. 드디어. 주변에서 의자가 하나둘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모니터를 끄고, 누군가는 가방을 챙겼다. 사무실 곳곳에서 퇴근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번졌다. 그제야 공기에도 느슨한 해방감이 퍼졌다. 선우의 눈이 다시 시계로 향했다. 18:00. “살았다!” 선우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외치듯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가방끈을 고쳐 매고 주변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봐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선우가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ㅡ “선우 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느슨해졌다. “……네.” ㅡ “아버님은 뵙고 왔어요?” 인사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 목소리.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선우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네. 방금 뵙고 나왔어요. 본부장님 말씀대로 손도 꼭 잡아 드렸고요.” ㅡ “잘했네.” 짧은 대답 뒤에 부드러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ㅡ “많이 걱정했을 텐데, 조금은 마음이 놓이겠어요.” “……네. 검사 결과도 괜찮대요.” ㅡ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참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에단의 낮은 웃음이 들렸다. ㅡ “연락 기다렸습니까?” 잠깐의 여유가 흘렀다. 그 사이로 어딘가 낯선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 에단은 분명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락 안 하셨어요?’ ……너무 따지는 것 같았다. ‘저 문자 기다렸는데.’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병실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는지, 윤오의 다정함 앞에서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