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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20:43:58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 없을까.

선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대로 코너를 돌아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후우.”

코너를 돌자 ​그제서야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본의 아니게 전시되어버린 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히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머릿속에서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스쳐 지나갔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정말 그랬다. 술에 취했었는지, 분위기에 절여졌었는지. 어제의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성이 없었다.

점심의 소란과 저녁의 동행이 겹쳐지니, 자신의 처지가 낱낱이 해부되는 기분이었다.

흑역사를 스스로 채굴한 기분이라 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만 하자. 진짜, 일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인파 사이로 선우가 밀려 들어갔다. 가볍게 치이는 흐름 속에서 형식적인 인사들이 오갔다.

1층 로비로 내려온 선우는 카페 구석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단 십 원어치도 없었다. 하지만 버티려면 뭐라도 씹어 삼켜야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공간에는 서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선우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속은 모래를 씹은 듯 까칠했다. 손은 샌드위치를 쥐고 있었지만, 포장지를 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참았던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땅이 꺼져라 내뱉는 숨결마다 명치의 통증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사랑싸움이니 뭐니 그런 가십 따위는 저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익숙해지면 그만인 소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책상 위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화면은 고요했다.

아무런 알림도, 누구의 흔적도 떠오르지 않는 무채색의 직사각형. 그 정적이 선우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권윤오.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거냐구.

​“점심이에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본부장님?”

​에단이었다. 본부장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무실 한편에 자리를 잡은 채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점심시간 특유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정적의 공간. 에단은 그 고립을 자처한 쪽이었고, 공교롭게도 그가 선택한 자리는 선우와 매우 가까웠다.

“식사 안하시고 왜 여기 나와계세요?”

​불편하게…….

선우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에단은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킨 채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이었다.

​“답답해서요.”

이 사람은 홧병이 있나…….

선우의 눈이 텅 빈 사무실 문 쪽을 불안하게 훑었다.

단둘뿐인 공간. 누구라도 본다면 방금 복도에서 들었던 수군거림에 확신을 불어넣어주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본사는 오픈 구조라서요. 사방이 막힌 공간은 조금 어색하네요.”

“아, 네.”

​선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포장도 뜯지 못한 샌드위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식사 안 하셨으면 이거 드시겠어요?”

​에단의 시선이 찰나 선우를 스쳤다.

​“No, thanks.”

머쓱. 선우가 손을 거두려던 그때였다.

​지잉ㅡ.

​테이블 위에서 짧고 묵직한 진동이 일었다.

[윤오]

쿵.

“……아.”

저릿한 통증에 선우가 왼쪽 가슴께로 손을 가져다댔다. 그 작은 소리에 에단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선우는 진동이 더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 “점심은.”

​언제 서로에게 날을 갈았냐는 듯한 말투. 투박해서 더 윤오다운 화해 신청이었다.

선우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선우의 시선이 아주 찰나의 순간 옆으로 흘렀다.

에단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분주하게 자판을 두드리며 모니터 속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이제 먹으려고. 너는?”

ㅡ “나도 이제 먹으려고. 오삼불고기.”

​선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주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맛있겠다 야.”

ㅡ “약속 없으면 저녁에 나와.”

선우의 어깨가 잠시 경직됐다.

ㅡ “같이먹자, 저녁.”

​선우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윤오가 그 공백을 채우고 들어왔다.

ㅡ “이따 데리러갈게.”

거듭 강조하지만 선우에게 권윤오 거부권이란 게 있을리가.

“……알겠어. 퇴근할때쯤 연락할게.”

ㅡ “응. 이따봐.”

“응.”

​뚝.

선우는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고작 몇 분짜리 통화였다. 종일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거짓말처럼 가볍게 굴러떨어졌다.

역시 권윤오였다. ​

목소리 하나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가시 돋친 수군거림도, 타인들의 날 선 시선도, 스스로 파헤치던 흑역사의 잔해도 전부 다.

전화 한 통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권윤오.

너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무게야.

그리고 왜 나는 이 사실이 조금도 싫지 않은 걸까.

웃기게도.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건넨 한마디를 오래 붙잡고 하루를 지내는 것.

그리고 너를 기다리며 온종일을 낭비하는 것.

그래서 기어코 나타난 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잔잔했던 마음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별다를 것 없던 순간을 너 하나로 완전히 바꾸어 놓기를 고대하는 것.

이게 사랑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십이 년째 이어지고 있는 낡은 습관인지.

***

점심시간이 끝난 뒤부터 시계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메일을 하나 보내고 시계를 보면 3분. 결재를 올리고 시계를 보면 5분.

장난하나.

선우는 손으로 입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고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다. 시선은 모니터 우측 하단 시계에 고정됐다.

17:53.

17:56.

17:58.

시간 참 더럽게 안 가네!

곧이어 주변에서 의자가 조금씩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모니터를 끄고, 누군가는 가방을 정리했다. 덕분에 사무실 공기에도 느슨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살았다!”

선우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가방끈을 고쳐 매며 주위를 한 번 훑은 그녀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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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5.

    “아직 안 주무십니까.” ​환청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본부장님.” “시차 때문인지 잠이 안 와서요.” 에단이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금방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낮 동안 몸에 배어 있던 오크와 알코올 향은 사라지고, 깨끗한 비누 향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맑은 액체가 담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잔을 선우 앞으로 밀었다. “괜찮으시면.”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우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버번이네요.” “맞습니다.” 에단이 옅게 웃었다. 선우가 한 모금 머금었다. 버번 특유의 결. 옥수수를 베이스로 만든 위스키라서 단향이 또렷하고, 복잡하게 꼬이지 않는다. 순간, 낯익은 손 하나가 기억 속에서 겹쳐졌다. ‘먹어.’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잘라 접시에 올려주던 손. “…….” 선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제는, 윤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 더 이상은 한계다. 선우는 요즘 그런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짧은 진동.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 휴대폰 화면 위로 선명하게 박힌 이름은 윤오였다. 언제나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선우를 지탱해 온 견고한 지지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다정함이 손끝에 닿을 듯 선명했다. 전화를 받으면, 평소처럼 밥은 먹었는지 묻고, 입국날 몇 시에 데리러 가겠노라 약속하며 선우를 다시 아늑하고 안온한 평화로 복귀시킬 터였다. “…….” 선우의 손끝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하지만 끝내 화면은 뒤집힌 채 테이블 위에 내려놓였다. “…….” 에단은 맞은편에서 잔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는 얼굴. 얼음을

  • 부정맥 메이커   14.

    “Thief.” 캘럼은 곧바로 기다란 금속 도구를 건넸다. 쇠끝이 캐스크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이윽고 잔 속으로 떨어지는 액체는 창고의 희미한 잔광을 머금고 짙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잔을 천천히 들어 빛에 비췄다. 색을 보고. 잔을 기울여 점도를 확인하고. 눈을 감은 채 향을 들이마셨다. “…….” 창고 안은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그 짧은 침묵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한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에서 굴리고. 입안 전체에 퍼뜨린 뒤. 천천히 삼켰다. “Too young.” (아직 덜 길들여졌네요.)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에단이 말했다. 캘럼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Figured.” (그럴 줄 알았어요.) 에단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금의 캐스크에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쓸 가치가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벌써 다음 오크통을 향해 있었다. “…….” 선우는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압도하던 것은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거대한 창고조차 한 남자의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심판하는 저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선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 에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Try.”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네가 가진 본질을 증명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저요?”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섞어 거들었다. “Go on.” (해보시죠.) 선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 손에 쥔 Thief의 차가운 금속이 긴장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투둑. 나무의 틈 사이로 도구를 밀어 넣자,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 부정맥 메이커   13.

    문이 열리자마자 스코틀랜드 특유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으, 진짜 쌀쌀하네. 선우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춥죠.” 새로 온 본부장은 눈치 하나는 귀신인 듯했다. 선우가 대답했다. “조금요.” “벗어드릴 옷은 없는데.” 에단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가볍게 상의를 벗는 시늉을 했다. 선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짧게 웃은 에단이 앞장섰다. “5월의 스코틀랜드입니다.” 에단의 낮은 음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공기에는 이 땅의 진짜 주인인 침엽수림의 짙은 송진 향과, 방금 비를 머금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동하시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가느다란 빗줄기는 쉬지 않고 내렸고, 젖은 아스팔트는 회색 하늘을 그대로 품은 채 묵직하게 빛났다. “…….” 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 주던 느긋한 미소는 어느새 흔적도 없었다. 코트 깃을 세운 그는 망설임 없이 빗속을 걸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안도감이 선우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다. *** 반나절이 넘는 비행 끝에 스코틀랜드에 도착했지만, 시차 덕분에 본사에 들어선 시각은 겨우 오후 두 시였다. “Ethan!” 낮고 굵은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에단과 선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Good to see you.” (오랜만이네요.) 스코틀랜드 특유의 거칠고 묵직한 억양이 귀를 두드렸다. “Long flight?” (비행 길었죠?) “Could’ve been worse.” (나쁘진 않았습니다.) ​에단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상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단의 옆에 선 선우에게 멎었다. “And you are…?” (이쪽 분은?) “She’s with me.” (저랑 같이 온 사람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단이 선우를

  • 부정맥 메이커   12.

    오전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빌딩 숲은 평소와 다름없이 견고했으나, 문을 닫고 들어선 회의실 안은 전혀 다른 농도의 세계였다. 베이스 작업을 위해 모인 팀원들의 눈빛에는 ‘아르벨라 코리아’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에 대한 거대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스크린 위로 프로젝트의 이름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ㅡHEARTBEAT.ㅡ이제는 모두의 심박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에단이 먼저 침묵의 벽을 깼다.​“컨셉이 생명입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원액의 방향성이 어긋나면, 그건 마케팅이 아니라 기만이죠.”​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동의를 표했다.박 팀장이 조심스럽게 원액 확보 계획을 묻자, 에단이 손가락 사이로 펜을 가볍게 굴리며 답했다.​“직접 가죠. 스코틀랜드.”​무심하게 던져진 단어였으나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현지 창고에서 캐스크를 직접 확인하고, 즉석에서 샘플링까지 끝내겠습니다. 김선우 과장님과 제가 가죠.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이 현장에 있어야 조율이 빠를 테니까.”나? 저요?​주변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선우의 머릿속에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코틀랜드? 비행기만 10시간을 타야하는데, 거길 이 인간이랑 단둘이 가야 한다고?​“김 과장님. 문제 없죠?”​“물론입니다.”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국 지사 최고 결정권자의 명령을 거역할 배짱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회의는 그렇게 번복 불가능한 결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선우는 왼손에 캐리어를, 오른손에 여권을 쥔 채 출국장 특유의 소음 속에 서 있었다.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전광판을 확인하던 그때였다.“시간 맞춰 오셨네요.”고개를 돌린 선우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커졌다. 평소처럼 각이 살아 있는 수트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네이비 니트에 가볍게 걸친 코트. 힘을 뺀 듯 자연스러운 차림인데도 꾸미지 않은 여유가 오히려 더 어른스

  • 부정맥 메이커   11.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가 전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 특유의 피곤함과 들뜸이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선우는 틈 가장자리에 몸을 붙였다.그때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젯밤 바에서도. 오늘 회의실에서도.안 봐도 알았다.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시선이 따가워 선우는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좁은 공간 안으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제 직감이 맞다면 에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그 위로 보이는 검은 구두 한 켤레.잘 재단된 슬랙스 끝단.맞네.“…….”​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침마냥 가늘고 날카롭게 사람 속을 콕콕 찔렀다. 게다가 눈빛 하나로 생각을 읽는 것도 같았다(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더 숙였다. 15F.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10F.7F.4F.층수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띵.1F.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우도 작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유쾌, 상쾌, 통쾌!선우는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그 순간.​“오늘 수고하셨습니다.”으악. 선우가 흠칫 놀라 뒤돌아봤다.에단이었다.​“본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형식적인 인사 딱 그 정도였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선우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풍경처럼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권​윤오였다.눈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어 있던 선우의 입가가 헤벌쭉해졌다.“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선우의 말 끝이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윤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의 뛰듯이 달려갔다. 윤오가 헛웃음을 흘렸다.“초딩이냐. 뛰지마.”짐짓 엄한 척

  • 부정맥 메이커   10.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 없을까. 선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대로 코너를 돌아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후우.” 코너를 돌자 ​그제서야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본의 아니게 전시되어버린 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히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머릿속에서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스쳐 지나갔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정말 그랬다. 술에 취했었는지, 분위기에 절여졌었는지. 어제의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성이 없었다. 점심의 소란과 저녁의 동행이 겹쳐지니, 자신의 처지가 낱낱이 해부되는 기분이었다. 흑역사를 스스로 채굴한 기분이라 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만 하자. 진짜, 일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인파 사이로 선우가 밀려 들어갔다. 가볍게 치이는 흐름 속에서 형식적인 인사들이 오갔다. 1층 로비로 내려온 선우는 카페 구석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단 십 원어치도 없었다. 하지만 버티려면 뭐라도 씹어 삼켜야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공간에는 서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선우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속은 모래를 씹은 듯 까칠했다. 손은 샌드위치를 쥐고 있었지만, 포장지를 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참았던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땅이 꺼져라 내뱉는 숨결마다 명치의 통증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사랑싸움이니 뭐니 그런 가십 따위는 저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익숙해지면 그만인 소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책상 위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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