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정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여지는 없었다. 서희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형수라고 불렀던 남자였다. 강수와 결혼해 있던 동안에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그런 정민이 지금은 정확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정민아.” “말씀하십시오.” 존댓말이었다. 서희의 입술이 굳었다. “오빠한테 내가 왔다고 말은 했어?” “안 했습니다.” “왜?” “말씀드릴 이유가 없어서요.” “내가 만나러 왔잖아.” “회장님은 만나겠다고 하신 적 없으시니까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너무하네.” 정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사라 역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아기띠 안의 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어젯밤에 하셨잖습니까.” 서희의 눈이 정민에게 향했다. 정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수에게 들은 건지 다른 경로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형님은 없으십니다.” “왜 자꾸 오빠가 할 말 없다는 얘기만 해?”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CH건설 1층 로비는 오전의 분주함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안내데스크 직원들이 교대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정문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김서희였다. 서희는 로비 한가운데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5년 전에도 몇 번 와본 곳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부분도 있었지만 익숙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서희가 안내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차강수 회장님 뵈러 왔는데요.” 직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약속 있으실까요?” “아니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서희요.” 직원이 방문자 확인을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 비서실로 인터폰이 연결됐다. “1층 안내데스크입니다. 회장님 방문객이 오셨는데요.” ― 성함이요? “김서희 님입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정민이었다. ― 약속 있습니까? “없으십니다.” 짧은 침묵 뒤 대답이 돌아왔다. ― 돌려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직원이 서희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현재 별도 방문객을 받지 않고 계셔서요.” 서희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직접 통화할 수 있을까요?
강수는 한동안 손을 내밀고 있는 사라를 바라봤다. “꼭 해야 돼?” “응.” “왜.” “나 바꿔달라잖아.” 강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라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줘.” 몇 초 뒤에야 휴대전화가 넘어왔다. 사라는 전화기를 귀에 댔다. “나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먼저 자신을 찾았으면서 서희는 막상 목소리를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바꿔달랬어?” ― 오늘 네가 한 말 때문에. “뭐.” ― 셋의 문제는 셋이서 하자고 했던 거. “응.” ― 그래서. 사라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강수는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화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갈 생각은 없는지 한 손은 사라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말해.” ― 나 강수 오빠 아직 좋아해. 사라가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건 아까 들었어.” ―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 내가 네 남편 아직 사랑한다는데. 사라는 잠깐 생각했다. “기분은 더럽지.” 강수의 시선이 돌아왔다. “내 남편 좋아한다는데
강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사라가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희랑 연락해?” 강수의 시선이 바로 사라에게 향했다. “아니.” 대답은 즉시 나왔다. “근데 전화가 와?” “지금 처음.”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질투라기보다는 의아함이 먼저였다. 백화점에서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서희와 강수가 따로 연락하는 사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강수가 휴대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 그냥. 강수의 표정이 더 무심해졌다. “끊는다.” ― 잠깐만. “왜.” ― 목소리 듣고 싶었어. 사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용한 침실이라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강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김서희.”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밤이 깊어진 르베르는 조용했다. 건이는 제 방에서 잠들었고, 진이도 몇 번을 칭얼거리다 겨우 깊은 잠에 빠졌다. 거실까지 불이 모두 꺼진 집에서 안방 문만 굳게 닫혀 있었다. 사라는 흐트러진 이불 위에서 강수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이 섞였다. 몇 년을 함께 살았고 아이가 둘이나 생겼는데도 이런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해지지 않았다. 강수의 체온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도. 가까워질수록 달라지는 숨소리도. 사라는 숨을 몰아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 목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순간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강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왜.” 사라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만 가늘게 떴다. “진이 깨.”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도 겨우 재웠다. 요즘 진이는 한 번 잠들면 제법 오래 잤지만, 가끔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고 울었다. 강수가 사라의 손목을 잡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오빠.” “왜.”
“네가 신경 쓸 사람 아니야.” 강수의 대답은 짧았다.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건이는 아빠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왜?” “어른 일이야.” “어른 일은 애가 신경 쓰면 안 돼?” “어.” “왜?” 강수가 아들을 내려다봤다. 역시 민사라 아들이었다. 하나를 대답하면 질문이 두 개가 되어 돌아왔다. “몰라도 돼.” “나 다섯 살이라서?” “그래.” 건이가 잠시 생각했다. “여섯 살 되면?” “안 돼.” “일곱 살은?” “차건.” “응.” “그만.” 건이는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몇 걸음이었다. “아빠.”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옆에서 걷던 사라가 결국 피식 웃었다. “왜.” “아빠는 저 이모 안 좋아해?” 이번에는 사라의 웃음도 멎었다. 강수는 잠깐 건이를 내려다봤다. 아이의 얼굴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 그저 궁금한 것이었다. 강수는 굳이 거짓말하지 않았다. “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