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을 부르는 사이

네 이름을 부르는 사이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11
Por:  서담Actualizado ah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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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하랑은 스물네 살, 처음으로 ‘그냥 이하랑’으로 살아보기 위해 독립과 취업을 선언한다. 그렇게 들어간 세화주얼리 디자인2팀에서 만난 사람은 열 살 연상의 팀장 한기태. 사고뭉치 신입과 빈틈없는 팀장. ‘이하랑 씨’와 ‘팀장님’으로 시작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이름을 가장 다정하게 부르는 사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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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그냥 이하랑으로

“나 독립할래.”

저녁 식탁 위로 이하랑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족들의 젓가락이 동시에 멈췄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든 사람은 아빠 이무혁이었다.

“뭐?” “독립.”

“무슨 독립?” “집에서 나가서 살 거야.”

무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 있는데 왜 나가서 살아?”“나 스물네 살이야.”

“알아.” “그러니까 독립할 나이잖아.”

“스물네 살 되면 집이 없어져?”

하랑이 입술을 삐죽였다.“아빠는 꼭 말을 그렇게 해.”

상석의 백금희는 조용히 국을 떴고, 맞은편 큰아빠 이무진은 말없이 밥을 먹었다.

하랑이 슬쩍 무진을 바라봤다.

“큰아빠.” “안 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독립 안 돼.”

역시나였다.

이번에는 사촌오빠들을 바라봤다. 강진도 단호했다.

“나도 반대.”“오빠까지?”

“혼자 살 이유가 없잖아.” 마지막 희망은 강욱이었다.

“해보고 싶으면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하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치?”

무혁이 강욱을 노려봤다.“너 누구 편이야?”

“하랑이 편.” “나도 하랑이 편이야.”

“근데 왜 하랑이 말을 안 들어.” 무혁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쟤가 수의사라 다행이지.”

강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변호사가 둘이었으면 내가 이 집에서 못 살아.”

장진화가 우아하게 물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일단 하랑이 말부터 들어봐요. 갑자기 독립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역시 큰엄마밖에 없어.”

하랑이 반색하자 무혁이 서운한 얼굴로 딸을 봤다.

“아빠는?” “아빠는 방금 반대했잖아.”

“반대는 했어도 이유는 들을 수 있지.” “그럼 찬성할 거야?”

“그건 듣고 생각하고.” “결국 반대한다는 거잖아.”

“아직 모른다니까.” “아빠 표정에 쓰여 있어.”

무혁이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졌다.

금희가 혀를 찼다.“둘 다 밥이나 먹어.”

“네.” 아빠와 딸이 동시에 대답했다.

하랑은 밥을 한 숟갈 뜨는 척하다 내려놨다.

사실 오늘 할 말은 독립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 취직할 거야.” 이번에는 무혁의 젓가락만 멈췄다.

“취직?” “응.” “어디?”

“세화주얼리.”

무진이 처음으로 하랑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혁도 눈을 깜빡였다.

“우리 회사?” “응.”

“아빠한테 취직시켜 달라는 거야?”

“아니. 내가 지원할 거야.” “어디를?”

“디자인팀.” “경영 쪽 아니고?”

“응. 나 세공과 나왔잖아.”

하랑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무혁은 잠시 딸을 바라봤다. 하랑이 주얼리를 좋아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반짝이는 것만 보면 눈부터 빛났고, 대학도 자신의 뜻으로 세공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세화주얼리는 달랐다.

할아버지 이훈이 세웠고, 지금은 큰아빠가 회장이고 아빠가 상무로 있는 회사였다.

“하랑아.” 무혁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네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누구 딸인지 몰라?”

“알겠지.”“누구 조카인지도 알 거고.”

“그것도 알겠지.” “그런데?”

하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기 싫은 거야.”

웃음기 많던 얼굴이 드물게 진지해졌다.

“아빠 딸이라서 자리 하나 받는 것도 싫고, 큰아빠 조카라서 잘한다는 소리 듣는 것도 싫어. 처음부터 배울 거야. 신입사원으로.”

무진의 시선이 조용히 하랑에게 머물렀다. “힘들어.”

“알아.”

강진이 덧붙였다.“울 수도 있어.” “나 그렇게 맨날 울진 않아.”

식탁에 앉은 모두가 하랑을 바라봤다.

“……왜 다 그렇게 봐?”

강욱은 웃음을 참으며 물을 마셨고, 진화도 입가를 가렸다.

무혁만 진지했다. “진짜 하고 싶어?”

“응.” “왜?”

하랑은 잠시 생각하다 아빠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냥 이하랑으로 해보고 싶어.” 식탁이 조용해졌다.

회장 이무진의 조카도 아니고, 상무 이무혁의 딸도 아닌.

그냥 이하랑.

그때 금희가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시키자.”

“어머니.” “애가 평생 우리 품에서만 살 것도 아니고.”

“그래도 혼자 사는 건…….” “너도 나가 살았어.”

“저는 남자였잖아요.”

금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

무혁의 입이 닫혔다. 하랑이 몰래 웃었다.

이 집에서 이무혁 상무의 입을 한마디로 닫을 수 있는 사람은 백금희뿐이었다.

“대신.” 금희가 하랑을 바라봤다.

“하다가 힘들다고 집안 이름부터 찾으면 안 된다.”

“응.” “회사에서도 똑같아.” “응.”

“할 수 있겠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할 수 있어.”

그날 밤, 하랑은 침대에 엎드려 오피스텔 매물을 들여다봤다.

독립. 취직.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벌어 쓰는 월급.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휴대전화에 메일 알림 하나가 떴다.

[세화주얼리㈜ 신입사원 채용]

하랑은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지원서를 열고 이름을 입력했다.

이하랑. 세 글자를 한참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조카도 아닌.

그냥 이하랑으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 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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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냥 이하랑으로
“나 독립할래.”저녁 식탁 위로 이하랑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족들의 젓가락이 동시에 멈췄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든 사람은 아빠 이무혁이었다.“뭐?” “독립.”“무슨 독립?” “집에서 나가서 살 거야.”무혁의 미간이 좁아졌다.“집 있는데 왜 나가서 살아?”“나 스물네 살이야.”“알아.” “그러니까 독립할 나이잖아.”“스물네 살 되면 집이 없어져?”하랑이 입술을 삐죽였다.“아빠는 꼭 말을 그렇게 해.”상석의 백금희는 조용히 국을 떴고, 맞은편 큰아빠 이무진은 말없이 밥을 먹었다.하랑이 슬쩍 무진을 바라봤다.“큰아빠.” “안 돼.”“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독립 안 돼.”역시나였다.이번에는 사촌오빠들을 바라봤다. 강진도 단호했다.“나도 반대.”“오빠까지?”“혼자 살 이유가 없잖아.” 마지막 희망은 강욱이었다.“해보고 싶으면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하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치?”무혁이 강욱을 노려봤다.“너 누구 편이야?”“하랑이 편.” “나도 하랑이 편이야.”“근데 왜 하랑이 말을 안 들어.” 무혁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쟤가 수의사라 다행이지.”강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변호사가 둘이었으면 내가 이 집에서 못 살아.”장진화가 우아하게 물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일단 하랑이 말부터 들어봐요. 갑자기 독립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역시 큰엄마밖에 없어.”하랑이 반색하자 무혁이 서운한 얼굴로 딸을 봤다.“아빠는?” “아빠는 방금 반대했잖아.”“반대는 했어도 이유는 들을 수 있지.” “그럼 찬성할 거야?”“그건 듣고 생각하고.” “결국 반대한다는 거잖아.”“아직 모른다니까.” “아빠 표정에 쓰여 있어.”무혁이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졌다.금희가 혀를 찼다.“둘 다 밥이나 먹어.”“네.” 아빠와 딸이 동시에 대답했다.하랑은 밥을 한 숟갈 뜨는 척하다 내려놨다. 사실 오늘 할 말은 독립만이 아니었다.“그리고 나 취직할 거야.” 이번에는 무혁의 젓가락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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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상한 애가 들어왔다
월요일 오전 열 시.한기태와 한로로는 나란히 상무실에 앉아 있었다.이무혁이 두 사람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신입 한 명 들어옵니다.”로로가 눈을 깜빡였다.“신입 때문에 저희 둘을 부르셨어요?”“제 딸입니다.”“……네?”기태도 무혁을 바라봤다.“이하랑. 스물네 살이고 민하대 세공과 졸업했습니다.”무혁은 잠시 뜸을 들였다.“우리 집안에 거의 백 년 만에 나온 딸이에요. 외동이고요. 애 엄마가 몸이 약했는데 하랑이 낳고 더 안 좋아져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로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래서 집에서 많이 예뻐하셨겠네요.”“많이 정도가 아니죠.”무혁이 한숨을 쉬었다.“할머니에 큰아빠, 큰엄마, 사촌오빠 둘까지 전부 하랑이라면 껌뻑 죽습니다.”“상무님도 포함이고요?”로로가 묻자 무혁이 헛기침했다.“……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기태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중요한 것 같았다.“혼자 살아보겠다고 오피스텔까지 얻었는데 라면 물도 제대로 못 맞춥니다. 입도 짧고 까다로워요. 잘 울기도 하고.”“잘 울어요?”“근데 금방 또 웃어요. 길에서 할머니 짐 들어드리다가 자기가 넘어져서 울고, 할머니 집까지는 또 끝까지 데려다드리는 애예요.”기태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대체 어떤 신입이 들어오는 건가 싶었다.무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그래도 회사에서는 제 딸 아닙니다.”목소리가 단호해졌다.“제 딸이라고 봐주지 마세요. 그냥 신입사원 이하랑으로 대해주세요. 실수하면 혼내고, 못하면 가르치고.”“디자인은요?”기태가 묻자 무혁이 바로 답했다.“감각은 있습니다. 예쁘고 반짝이는 건 어릴 때부터 환장했고요. 실무는 아직 많이 배워야겠지만.”로로가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그래서 어느 팀인데요?”“그걸 아직 못 정했습니다.”기태가 무혁을 바라봤다.“디자인팀 지원 아닙니까?”“맞아요. 그래서 둘 중 한 팀으로 보내려고요.”로로와 기태의 시선이 마주쳤다.잠시 정적이 흘렀다.“가위바위보 할래?”“그걸 왜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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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먹을래요?
입사 사흘째.점심시간이 되자 디자인2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한정훈 주임이 하랑을 돌아봤다.“이하랑 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해요.”서류를 정리하던 기태가 고개를 들었다.상무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입이 짧고 까다롭다.“진짜 아무거나 괜찮습니까?”“네!”십 분 뒤, 하랑은 식당 메뉴판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매운 건 조금 그렇고, 생선은 가시가 있고, 오늘은 국물도 별로 안 당기고…… 제육볶음 먹을게요.”정훈과 기태의 시선이 마주쳤다.“그게 아무거나입니까?”“결국 골랐잖아요.”식사가 나온 뒤에도 기태는 한 번 더 의문이 들었다. 하랑은 젓가락질 몇 번 하고 물을 마시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접시에는 음식이 반 이상 남아 있었다.“다 먹었습니까?”“네.”“거의 안 먹었는데요.”“저 많이 먹었어요. 제 기준에는요.”“오후에 배고프다고 하지 마요.”“저 간식 있어요.”“간식이 식사는 아니죠.”하랑이 진지하게 답했다.“저한테는 거의 식사인데요.”정훈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회사로 돌아가는 길, 하랑이 갑자기 멈췄다.“잠깐만요! 간식 사려고요.”디저트 가게로 뛰려던 하랑이 기태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어제 들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회사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는 연습부터 합시다.하랑은 슬그머니 속도를 줄여 얌전히 걸었다.“교육 효과 빠르네요.”정훈의 말에 기태는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후 하랑은 작은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자기 것만 산 줄 알았는데 사무실에 들어오자 팀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오후 회의를 앞두고 기태가 양손에 서류를 든 채 복도를 지나는데 하랑이 따라왔다.“팀장님도 드실래요?”“괜찮습니다.”“맛있는데.”“이하랑 씨 드세요.”바스락.기태가 돌아보자 하랑이 포장을 뜯은 간식을 그의 입 앞에 내밀고 있었다.“아.”“……뭐 합니까?”“드리려고요.”“그러니까 왜 입에다 줍니까?”하랑이 기태의 양손을 내려다봤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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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자꾸 눈에 들어오는 신입
사흘 뒤, 오전 열 시.회의실에는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디자인1팀 한로로 팀장과 얼마 전 주임으로 승진한 민지. 맞은편에는 디자인2팀 한기태 팀장과 한정훈 주임, 그리고 입사 일주일 차 이하랑.“우와.”하랑은 첫 프로젝트 회의에 신이 나 있었다. 새 노트를 펼치고 눈을 반짝이는 하랑을 보며 로로가 기태를 힐끗 봤다.“잘 키웠네.”“일주일 됐습니다.”“일주일 치고 멀쩡해 보여.”“회의 시작하시죠.”“뭔가 있었구나.”로로는 더 묻지 않았다.“이번 프로젝트는 기존 라인보다 금속 비중을 높이는 방향이에요.”민지가 태블릿을 넘기자 하랑의 표정이 달라졌다. 소재와 두께, 세공 방식, 원가를 빠르게 적었다.“이 부분은 두께를 유지하면 무게가 너무 올라가지 않을까요?”“맞아요. 그래서 오늘 같이 보려고 했어요.”“안쪽을 조금 비우는 방식은 어려워요?”기태가 답했다.“가능은 한데 체결 부분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하랑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집중할수록 입술이 조금씩 앞으로 나왔다.왜 저러지.“한 팀장?”로로의 부름에 기태가 시선을 돌렸다.“여기 체결 부분은 2팀 수정안이 낫겠는데?”“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툭.하랑의 펜이 떨어져 기태의 구두 앞까지 굴러갔다. 하랑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서 내려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잠시 뒤 발밑의 인기척에 기태가 고개를 내렸다.하랑이 펜을 줍고 있었다.“이하랑 씨.”“네!”하랑이 벌떡 일어나자 머리가 기태와 테이블 사이로 쑥 올라왔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왜 거기서 나옵니까.”“펜 주웠는데요?”하랑은 펜을 보여주다 주위를 둘러봤다.“저 어디로 나가요?”민지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로로와 정훈도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아하하! 저 왜 여기로 나왔지?”기태만 웃지 않았다.“제발…… 다음부터는 의자 쪽으로 나오세요. 펜 하나 떨어졌다고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지 말고요.”“근데 팀장님 발 앞에 있어서요.”“저한테 주워달라고 하면 되잖습니까.”하랑의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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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예쁜 것만으로는 안 돼요
며칠 뒤.오전, 디자인2팀으로 첫 샘플이 올라왔다.하랑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케이스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반짝였다.“팀장님! 나왔어요.”기태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압니다.”“제가 그린 게 진짜 나왔어요.”“그게 샘플입니다.”“알아요. 그래도 신기하잖아요.”하랑은 조심스럽게 샘플을 꺼냈다. 화면으로만 보던 디자인이 실제 금속의 형태를 갖추고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었다.한참 이리저리 살피던 하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입술도 조금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기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샘플로 시선을 내렸다.집중했네.이제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하랑이 직접 착용해보더니 손을 멈췄다.“팀장님.”“왜요?”“이거 예쁜데 불편해요.”기태가 하랑에게 다가갔다.“어디가요?”“여기요.”하랑이 손가락으로 안쪽을 짚었다.“여기가 살에 닿아요. 지금은 괜찮은데 오래 차고 있으면 아플 것 같아요.”기태가 샘플을 받아 확인했다.하랑의 말이 맞았다.“그럼 어떻게 바꾸면 될 것 같습니까?”“제가요?”“네.”하랑은 다시 샘플을 들여다봤다.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이쪽저쪽 돌려보는 동안 입술이 점점 앞으로 나왔다.기태의 시선이 잠깐 그 입술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한참 고민하던 하랑이 고개를 들었다.“곡률을 조금 더 완만하게 하고 안쪽 모서리를 죽이면 안 돼요? 그러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덜할 것 같은데.”“해봐요.”하랑의 눈이 커졌다.“제가요?”“이하랑 씨가 발견했잖아요.”“제가 수정해도 돼요?”“신입사원도 디자이너입니다.”하랑은 잠시 기태를 바라봤다.그리고 활짝 웃었다.“네!”자리에 앉은 하랑은 곧바로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한번 집중하자 주변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입술은 또 앞으로 나와 있었다.기태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하랑이 그를 불렀다.“팀장님, 봐주세요.”기태가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여기는 조금 더 완만하게 했고요. 안쪽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너무 많이 바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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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한 팀장이 잘 가르쳐줘?
금요일 저녁.하랑은 퇴근하자마자 본가로 향했다.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왔냐?”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강진이 고개만 돌렸다.“오빠 왔어?”“네가 늦게 온 거지.”“강욱 오빠는?”“주방.”하랑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이강욱이 접시를 옮기고 있었다. 큰엄마 장진화는 샐러드를 담고 있었고, 백금희는 식탁 한가운데 찌개를 내려놓았다.“하랑이 왔어?”“할머니!”하랑이 금희에게 달라붙자 뒤에서 무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빠는 안 보여?”“아빠도 있었어?”“내가 네 아빠다.”하랑이 웃으며 무혁에게도 팔을 벌렸다.“아빠!”“됐어. 순서 밀렸어.”마지막으로 들어온 무진이 의자를 빼며 짧게 말했다.“밥 먹어.”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화가 하랑을 바라봤다.“회사 생활은 어때?”하랑의 젓가락이 바로 멈췄다.“재밌어.”“안 힘들고?”“힘들긴 한데 재밌어.”“안 울었어?”강진의 질문에 하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오빠.”강욱이 웃었다.“그건 물어볼 만하지.”“나 그렇게 맨날 안 운다니까?”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동시에 하랑을 바라봤다.“왜 다들 그렇게 봐?”금희가 국을 떠주며 말했다.“먹어.”“할머니까지.”무혁은 딸의 앞접시를 한번 확인했다.“회사 밥은 잘 먹고?”“응.”“거짓말.”“왜?”“네가 회사 밥을 잘 먹을 리가 없잖아.”“나 먹어.”“얼마나?”하랑이 잠시 생각했다.“내 기준으로 많이.”무혁이 한숨을 쉬었다.“그게 제일 불안한 말이야.”강욱이 웃음을 터뜨렸다.“삼촌, 포기해요. 하랑이 평생 저렇게 먹었잖아요.”하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집어 먹었다.“나 이번 주에 칭찬도 받았어.”무혁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누구한테?”“우리 팀장님.”“한 팀장?”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샘플 수정했는데 좋다고 했어.”“한 팀장이 좋다고 했다고?”“응.”무혁이 묘하게 놀란 얼굴을 했다.하랑이 눈을 깜빡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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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잘 좀 잡아줘요
월요일 오전.한기태는 출근하자마자 상무실로 호출됐다.“앉아요, 한 팀장.”이무혁이 결재 서류를 덮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기태가 자리에 앉자 무혁은 먼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관해 몇 가지를 확인했다.업무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무혁은 그를 보내지 않았다.“한 팀장.”“네.”“하랑이는 좀 어떻습니까?”기태는 잠시 생각했다.“잘 적응하고 있습니다.”“사고는요?”“…….”무혁의 눈썹이 올라갔다.“왜 대답을 안 합니까?”“어디까지 사고로 봐야 할지 생각했습니다.”무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많이 칩니까?”“많다고 하기는 그렇고…… 자주 있습니다.”책상에 이마를 박고, 의자 바퀴에 걸리고, 펜 하나를 줍겠다고 회의실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기태의 머릿속에 지난 일주일이 빠르게 스쳤다.“그래도 배우는 속도는 빠릅니다. 디자인 감각도 있고요. 한번 설명한 건 잘 기억합니다.”무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렸다.“그래요?”“네.”“금요일에 칭찬받았다고 좋아하던데.”기태가 무혁을 봤다.하랑은 아빠에게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었다.“본인이 말했습니까?”“집에서 회사 얘기하다가요. 한 팀장이 좋다고 했다면서요.”“수정안이 좋다고 했습니다.”“하랑이한테는 그게 칭찬인가 보죠.”그건 기태도 이미 들었다.무혁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래서 말인데, 한 팀장.”“네.”“우리 하랑이 좀 잘 잡아줘요.”기태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잡으라고요?”“애가 워낙 덤벙대잖아요. 집에서는 누가 하나씩 보고 있으니까 괜찮았는데 회사에서는 그럴 수 없고.”무혁은 곧 표정을 바로잡았다.“내 딸이라고 봐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알고 있습니다.”“잘못하면 혼내고, 모르면 가르치고. 회사에서는 한 팀장 팀원이니까 제대로 가르쳐줘요.”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원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무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그래서 하랑이가 한 팀장한테 간 게 다행이라는 겁니다.”“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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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헤헤~
금요일 저녁.디자인1팀과 2팀은 프로젝트 시작을 겸해 함께 회식을 했다.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정훈이 하랑의 잔을 보며 물었다.“이하랑 씨, 술 잘해요?”“저요? 잘 모르겠어요.”“잘 모르겠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하랑이 고개를 갸웃했다.“많이 안 먹어봤어요.”기태가 젓가락을 멈췄다.“그럼 조금만 드세요.”“네!”대답은 잘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하랑 씨, 입사 축하해요.”“감사합니다!”한 잔.“이번 프로젝트도 잘해봐요.”“네!”또 한 잔.한 사람씩 따라주는 술을 하랑은 거절하지 않고 꼬박꼬박 받아먹었다.기태도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진 하랑을 봤다.양 볼이 발그레했다.정훈이 먼저 불렀다.“이하랑 씨?”하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헤헤~”“……왜 웃어요?”“몰라요. 헤헤~”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민지가 하랑을 보며 물었다.“하랑 씨, 취했어요?”“아니에요.”“근데 왜 계속 웃어요?”하랑은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쌌다.“기분 좋아서요. 헤헤~”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로가 피식 웃었다.“쟤 술버릇 귀엽네.”기태는 미간을 좁혔다.“이하랑 씨.”하랑의 고개가 기태 쪽으로 돌아왔다.“네에.”“괜찮습니까?”하랑이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웃었다.“헤헤~ 팀장님이다.”“……저 팀장 맞습니다.”“알아요.”“그런데 왜 웃습니까?”“팀장님이니까요.”“그게 무슨 말입니까.”하랑이 잠시 고민했다.“몰라요. 헤헤~”기태는 말문이 막혔다.옆에 있던 팀원이 하랑의 빈 잔을 보고 술병을 들었다.“하랑 씨, 한 잔 더?”기태가 먼저 잔을 가져갔다.“그만 주세요.”“저 한 잔밖에 안 줬는데요?”“한 사람씩 한 잔씩 줬잖아요.”기태는 술잔을 멀리 밀고 물컵을 하랑 앞에 놓았다.“이제 물 드세요.”하랑이 테이블을 두리번거렸다.“제 술 어디 갔어요?”“제가 치웠습니다.”“왜요?”“취했으니까.”“저 안 취했는데.”“이하랑 씨.”“네에?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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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저 뭐 했어요?
월요일 아침.하랑은 평소보다 십 분 일찍 출근했다.금요일 회식 이후, 주말 내내 찝찝했다.고기를 먹은 것도 기억났다.팀원들과 술잔을 부딪친 것도 기억났다.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어떻게 식당에서 나왔는지,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택시는 어떻게 타고 왔는지.회식 후반부가 깨끗하게 날아가 있었다.토요일 아침부터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그렇다고 주말에 회사 사람한테 연락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결국 월요일까지 기다렸다.자리에 앉은 하랑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정훈 쪽을 슬쩍 봤다.“주임님.”“네?”“저 금요일에…….”“금요일에요?”정훈이 돌아보자 하랑은 입을 다물었다.괜히 물어봤다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아니에요.”“뭔데요?”“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랑이 슬그머니 모니터 쪽으로 돌아섰다.그때 기태가 출근했다.“좋은 아침입니다.”“좋은 아침입니다.”하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잠시 망설이던 하랑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팀장님.”“왜요.”“저 금요일에 뭐 했어요?”가방을 내려놓던 기태가 하랑을 봤다.“기억 안 납니까?”“……네.”“하나도?”하랑이 손으로 애매한 지점을 그었다.“중간까지는 나는데 그 뒤가 없어요.”기태가 짧게 대답했다.“웃었습니다.”“네?”“계속 웃었습니다.”하랑이 눈을 깜빡였다.“웃은 게 왜 문제예요?”“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처음에는요?”옆에서 듣고 있던 정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불길했다.“……얼마나 웃었는데요?”“회식 끝날 때까지요.”결국 정훈이 터졌다.“헤헤~”하랑이 홱 돌아봤다.“뭐예요?”정훈은 두 손으로 볼까지 감싸며 하랑을 따라 했다.“기분 좋아서요. 헤헤~”하랑의 눈이 커졌다.“제가 그랬어요?”“네.”“설마.”기태가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했습니다.”정훈이 이번에는 기태를 보며 재연했다.“헤헤~ 팀장님이다.”하랑이 그대로 굳었다.“……제가 진짜 그랬어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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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빈 상자
월요일 오후.디자인1팀과 2팀의 공동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1차 디자인 시안과 샘플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하랑은 평소보다 조용했다.로로가 설명하는 동안 빠르게 메모했고, 샘플이 돌기 시작하자 하나씩 직접 착용해봤다.어느 순간 입술이 조금씩 앞으로 나왔다.기태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았다.집중하고 있었다.하랑이 손목에 채운 샘플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기태를 불렀다.“팀장님.”“왜요.”“여기 조금만 더 완만하게 하면 안 돼요?”“이유는요?”“지금도 예쁜데 착용하면 여기가 눌릴 것 같아요. 안쪽 마감도 조금만 부드럽게 하면 오래 차고 있어도 덜 불편할 것 같고요.”옆에서 듣던 로로가 손을 내밀었다.“나도 한번 줘봐.”샘플을 받아 직접 착용해본 로로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그러네. 확실히 여기가 좀 눌리겠다.”하랑의 눈이 반짝였다.“보이세요?”“응. 너 이거 바로 보였어?”“네. 이상한가요?”“아니.”로로가 샘플을 돌려주며 웃었다.“잘 보이는데?”“감사합니다.”하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기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하랑이 착용감이나 작은 구조 변화를 꽤 잘 잡아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그때 로로가 기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한 팀장.”“왜.”“신입 잘 키웠네?”기태가 하랑이 들고 있는 샘플을 한번 봤다.“아직 한참 남았습니다.”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하랑이 고개를 들었다.“저 여기 있는데요.”“들으라고 한 말인데?”로로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하랑도 지지 않았다.“그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로로가 피식 웃으며 기태를 봤다.“쟤 은근히 안 지네.”“압니다.”대답이 너무 빨랐다.하랑이 이번에는 기태를 돌아봤다.“제가 언제요?”기태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서류를 펼쳤다.“회의부터 합시다.”“대답 피하시는 것 같은데요.”“이하랑 씨.”“네. 회의하겠습니다.”로로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웃었다.오후에는 수정 샘플 확인이 이어졌다.“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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