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늦었잖아! 내 인생이 걸렸다고.” 나를 배신한 전 남자친구와 절친의 결혼식. 복수하려고 가짜 애인을 예약했는데, 내가 다짜고짜 붙잡은 남자는 예약한 대행 남친이 아니라 호텔 재벌가의 CEO 강민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월 3천만 원에 나를 가짜 약혼녀로 고용하겠단다. 동거는 필수. 업무 외 접촉은 금지. 함께 보낸 그 밤은 언급하지 말 것. 대표님, 우리는 계약 관계일 뿐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나를 놓아줄 생각은 없는 거죠?
view more“……태오?”
금요일 밤, 호텔 라운지 안쪽에서 내 목소리만 유난히 작게 울렸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아직 얼음이 다 녹지 않은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재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겉으로는 더없이 점잖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삼 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허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감싸고 있었다. 상대는 유나였다. 대학 때부터 가장 가까웠던 친구. 내 방에서 새벽까지 연애 이야기를 하고, 편의점에서 산 푸딩 하나를 반씩 나눠 먹고, 울면서 “아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던, 바로 그 유나.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우연히 입술이 닿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서로에게 기댄 어깨도, 얽혀 있던 손가락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떨어지는 몸도. 하나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나만 몰랐던 시간의 냄새가 났다. “아린아……?” 태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유나는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내가 가장 약해지던 얼굴이었다. 유나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먼저 물러서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린아. 이건……” “뭐가 아닌데?” 손끝은 떨렸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 먼저, 가슴 밑바닥이 차갑게 식어 갔다. 분노는 뜨거운 감정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말로 상처를 받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내 생일에 일해야 한다던 그날 밤에도, 유나 집에 있었던 거야?”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나의 입술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들켰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냥 내가 바보였던 거구나. 남자친구의 거짓말도, 친구의 다정함도. 믿고 싶은 대로 전부 진짜라고 믿었다. “내가 너한테 고민 털어놓을 때, 재미있었어?” “아린아, 그만해. 여기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사람들 앞이라 곤란해?”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낮았다. “내 앞에서는 곤란하지도 않았으면서.”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아,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유나를 탓하는 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아니라, 유나를 감싸는구나. 삼 년이나 만난 끝에 태오가 선택한 사람은, 역시 그녀였다. “됐어.” 목 안쪽이 꽉 막혔다. 여기 더 있다가는 두 사람 앞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우리 헤어져.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잠깐만, 아린아. 얘기 좀……” “듣기 싫어.” 뻗어 오는 손을 피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유나가 가냘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 저런다. 유나는 언제나 자신이 불리해지면 먼저 울었다. 나는 돌아섰다. 등 뒤로 태오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유나의 작은 흐느낌도 들렸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는 건 집에 가서 해도 돼. 여기서 무너지면, 저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저 비참한 조연으로 남는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세면대를 붙잡고 무너지듯 울었다.
울고, 토하고, 물을 마셨다. 조금 진정됐다 싶으면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동트기 전의 방은 푸르스름했고, 바닥에 내던진 가방 속에서는 휴대폰만 몇 번이고 진동했다. 태오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 유나가 보낸 메시지. ‘오해야.’ ‘제대로 얘기하고 싶어.’ ‘아린아, 너한테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보다 편리하고 잔인한 핑계를 알지 못한다. 상처를 줬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검은 바지 정장을 입었다. 컨실러로 눈 밑의 붉은 기를 가리고,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웃어. 사적인 감정은 일에 끌고 오지 마. 그렇게 다짐해도 속은 여전히 묵직했다. 나는 윤아린. 스물다섯 살. 고급 웨딩 살롱 ‘펠리체 루체’의 수석 웨딩 플래너다. 누군가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행복을 준비하는 것. 그게 내 일이다. 내 행복이 막 산산조각 난 뒤라 해도.‘……고용된다고?’ 나는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시간당 50만 원에 고용했다고 생각했던 남자. 나를 스위트룸에서 휘두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 오늘 아침 내 직장에 찾아와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다”고 말하며 나를 비참하게 만든 남자. 그 남자가 지금 나를 ‘약혼자 역할로 고용하고 싶다’고 한다.“……너, 이제 적당히 좀 해.”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내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어제부터 계속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남의 마음도 몸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마음과 몸을 가지고 놀았다고.” 민준은 내 말을 정정하기라도 하듯 되뇌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한 조각도 없었다. 남은 것은 차가운 계산뿐이었다.“이건 비즈니스 얘기야. 어젯밤 일과는 별개로 생각해. 지금은 계약 조건만 보라는 뜻이야. 너한테도 이득은 있어.”“별개로…… 생각하라고?”‘……최악이야, 이 남자.’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입맞춤도, 맞닿았던 피부의 감촉도, 우리가 함께 나눴다고 믿었던 짧은 감정도. 이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을 하룻밤 일로 접어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계약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느꼈던 죄책감과 희미한 설렘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남은 건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조용한 살롱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남았다.‘……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그게 무슨 뜻인데?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온 거 아니었어? 설마――‘――나를 진심으로 놀리는 거야?’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프로다운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손끝이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굳어 있던 나를 보고, 민준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문득 지웠다. 그는 지금까지의 대화가 전부 장난이었다는 듯, 나에게만 들리도록 귀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귓가에서 들었던 뜨거운 속삭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농담이야. 할 얘기가 있어.”“네……?”“여긴 곤란해. 잠깐 같이 가.”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았다.“잠깐만요……! 고객님? 저 지금 근무 중인데……!” 뜨거웠다. 어젯밤 나를 가볍게 안아 올리고, 내 뜻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던 그 손.“상관없어.” 나는 호기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후배 직원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며,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 억지로 끌려 살롱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잠깐! 놓으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살롱에서 멀지 않은 호텔 라운지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어젯밤, 나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왜 네가 여기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을 후배 직원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시야 한쪽에 들어왔다.“팀장님? 무슨 일이세요?”“……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민준은 나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에는 어제 침실에서 나를 원하던 열기도, 나를 몰아붙이던 냉혹함도 없었다. 처음 보는 매장 직원을 대하듯 무관심하게, 값을 매기듯 나를 살피는 차가운 시선이었다.‘……그 눈빛은 뭐야.’ 어젯밤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예 나를 모른다는 것처럼. 나만 그 스위트룸에서의 일과 살갗의 온기, 굴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어금니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수석 웨딩 플래너로서의 자존심. 프로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 필사적인 미소를 보고서야 민준의 입가에 그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잔인한 말을 또렷하게 내뱉었다.“아,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어.”‘……약혼자?’ 숨이 막혔다. 약혼자.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에 꽂혔다. 아, 그랬구나. 이 남자에게는 진짜 ‘약혼자’가 있었구나. 지난밤의 일은 나를 갖고 논 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약혼자를 두고 나를…… ‘불장난’ 상대로 삼은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마음만 흔들린 게 아니었다. 몸도 자존심도 전부 그 남자에게 휘둘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눈앞이 검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제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 남자가, 오늘은 손님으로 찾아와 자기 약혼자의 드레스를 고르라고 하
멍하니 둘러본 넓은 스위트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어젯밤의 향이 희미하게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시트에 남았을 그의 체온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 있었다. 지난밤의 모든 일이 술기운이 보여 준 나쁜 꿈 같았다. 하지만 침대 옆 테이블에는, 그 꿈이 현실이었다는 증거처럼 카드 키 한 장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오늘 보수는 너로 하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어젯밤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보수.’ 그 말의 의미를 곱씹자, 이번에는 굴욕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나는 그 남자를 시간당 50만 원짜리 복수의 도구로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거둬들였던 ‘보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에 나눈 말과 손길에 나 혼자 의미를 둔 걸까. 그에게도 같은 밤이었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벗어 놓은 어젯밤의 드레스를 거칠게 집었다. 구겨진 실크가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침대 발치에 어젯밤에는 없던 새 쇼핑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나도 아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메모.‘급한 일이 생겨 먼저 나간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야.’ 선물. 마치 일한 대가로 주는 ‘수당’처럼. 구겨진 드레스 대신 입으라는 건가? 아니면 입막음 값? 이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저렇게 흐트러진 드레스를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굴욕감에 떨리는 손으로 원피스를 입었다. 놀랄 만큼 몸에 꼭 맞았다. 그것이 또 그의 익숙한 태도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더 비참해졌다. 다시는 저 남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혼란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임페리얼 드래곤 호텔을 죄인처럼 몰래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욕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고 머리부터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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