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하려고 빌린 남자가 알고 보니 나만 사랑하는 CEO였다

복수하려고 빌린 남자가 알고 보니 나만 사랑하는 CEO였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3
By:  花柳響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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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잖아! 내 인생이 걸렸다고.” 나를 배신한 전 남자친구와 절친의 결혼식. 복수하려고 가짜 애인을 예약했는데, 내가 다짜고짜 붙잡은 남자는 예약한 대행 남친이 아니라 호텔 재벌가의 CEO 강민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월 3천만 원에 나를 가짜 약혼녀로 고용하겠단다. 동거는 필수. 업무 외 접촉은 금지. 함께 보낸 그 밤은 언급하지 말 것. 대표님, 우리는 계약 관계일 뿐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나를 놓아줄 생각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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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금요일 밤의 라운지

“……태오?”

 금요일 밤, 호텔 라운지 안쪽에서 내 목소리만 유난히 작게 울렸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아직 얼음이 다 녹지 않은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재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겉으로는 더없이 점잖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삼 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허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감싸고 있었다.

 상대는 유나였다.

 대학 때부터 가장 가까웠던 친구. 내 방에서 새벽까지 연애 이야기를 하고, 편의점에서 산 푸딩 하나를 반씩 나눠 먹고, 울면서 “아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던, 바로 그 유나.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우연히 입술이 닿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서로에게 기댄 어깨도, 얽혀 있던 손가락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떨어지는 몸도. 하나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나만 몰랐던 시간의 냄새가 났다.

“아린아……?”

 태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유나는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내가 가장 약해지던 얼굴이었다. 유나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먼저 물러서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린아. 이건……”

“뭐가 아닌데?”

 손끝은 떨렸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 먼저, 가슴 밑바닥이 차갑게 식어 갔다. 분노는 뜨거운 감정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말로 상처를 받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내 생일에 일해야 한다던 그날 밤에도, 유나 집에 있었던 거야?”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나의 입술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들켰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냥 내가 바보였던 거구나.

 남자친구의 거짓말도, 친구의 다정함도. 믿고 싶은 대로 전부 진짜라고 믿었다.

“내가 너한테 고민 털어놓을 때, 재미있었어?”

“아린아, 그만해. 여기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사람들 앞이라 곤란해?”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낮았다.

“내 앞에서는 곤란하지도 않았으면서.”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아,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유나를 탓하는 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아니라, 유나를 감싸는구나.

 삼 년이나 만난 끝에 태오가 선택한 사람은, 역시 그녀였다.

“됐어.”

 목 안쪽이 꽉 막혔다. 여기 더 있다가는 두 사람 앞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우리 헤어져.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잠깐만, 아린아. 얘기 좀……”

“듣기 싫어.”

 뻗어 오는 손을 피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유나가 가냘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 저런다. 유나는 언제나 자신이 불리해지면 먼저 울었다.

 나는 돌아섰다.

 등 뒤로 태오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유나의 작은 흐느낌도 들렸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는 건 집에 가서 해도 돼.

 여기서 무너지면, 저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저 비참한 조연으로 남는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세면대를 붙잡고 무너지듯 울었다.

 울고, 토하고, 물을 마셨다. 조금 진정됐다 싶으면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동트기 전의 방은 푸르스름했고, 바닥에 내던진 가방 속에서는 휴대폰만 몇 번이고 진동했다.

 태오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

 유나가 보낸 메시지.

‘오해야.’

‘제대로 얘기하고 싶어.’

‘아린아, 너한테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보다 편리하고 잔인한 핑계를 알지 못한다.

 상처를 줬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검은 바지 정장을 입었다.

 컨실러로 눈 밑의 붉은 기를 가리고,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웃어. 사적인 감정은 일에 끌고 오지 마. 그렇게 다짐해도 속은 여전히 묵직했다.

 나는 윤아린. 스물다섯 살.

 고급 웨딩 살롱 ‘펠리체 루체’의 수석 웨딩 플래너다.

 누군가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행복을 준비하는 것. 그게 내 일이다.

 내 행복이 막 산산조각 난 뒤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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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Kabanata
제1화 금요일 밤의 라운지
“……태오?” 금요일 밤, 호텔 라운지 안쪽에서 내 목소리만 유난히 작게 울렸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아직 얼음이 다 녹지 않은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재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겉으로는 더없이 점잖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삼 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허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감싸고 있었다. 상대는 유나였다. 대학 때부터 가장 가까웠던 친구. 내 방에서 새벽까지 연애 이야기를 하고, 편의점에서 산 푸딩 하나를 반씩 나눠 먹고, 울면서 “아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던, 바로 그 유나.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우연히 입술이 닿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서로에게 기댄 어깨도, 얽혀 있던 손가락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떨어지는 몸도. 하나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나만 몰랐던 시간의 냄새가 났다.“아린아……?” 태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유나는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내가 가장 약해지던 얼굴이었다. 유나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먼저 물러서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그런 거 아니야, 아린아. 이건……”“뭐가 아닌데?” 손끝은 떨렸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 먼저, 가슴 밑바닥이 차갑게 식어 갔다. 분노는 뜨거운 감정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말로 상처를 받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내 생일에 일해야 한다던 그날 밤에도, 유나 집에 있었던 거야?”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나의 입술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들켰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냥 내가 바보였던 거구나. 남자친구의 거짓말도, 친구의 다정함도. 믿고 싶은 대로 전부 진짜라고 믿었다.“내가 너한테 고민 털어놓을 때, 재미있었어?”“아린아, 그만해. 여기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사람들 앞이라 곤란해?”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낮았다.“내 앞에서는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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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웃으며 건넨 부탁
 출근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직장에서 또 한 번 지옥을 마주하게 됐다. 은은한 조명이 내리비치는 상담 공간. 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 벽을 가득 채운 새하얀 드레스들.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해야 할 그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났다.“아린아. 일하는데 미안해.” 태오였다. 그 옆에는 유나가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는 똑같은 백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살롱의 조명을 받아 유난히 날카롭게 빛났다. 헤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다. 두 사람은 내게 들키기 전부터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속이 불쾌하게 뒤틀렸다.“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웨딩 플래너의 미소. 거울 앞에서 수없이 확인했던, 단정하면서도 적당히 친근한 표정이었다. 무너지지 마. 여기서는 무너질 수 없어. 유나가 태오의 팔을 끌어안았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그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말은 나왔다. 혀끝에서 쇠 맛 같은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그래서 말인데, 아린아. 부탁이 있어.” 유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예전에는 귀엽다고 생각했던 몸짓이었다. 지금은 그저 속이 서늘하게 식을 뿐이었다.“우리 결혼식, 네가 맡아 줬으면 해.”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맡으라고? 내가? 내 눈을 피해 뒤에서 서로 끌어안던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하라는 거야?“유나랑도 얘기했어. 네 안목이 최고잖아.” 태오가 웃었다.“우리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너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테이블 아래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윗선에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태오가 다니는 회사는 우리와 제휴한 호텔 그룹의 큰 고객이었다. 유나의 집안도 우리에게 손님을 많이 소개해 주는 곳이었다. 내가 사적인 감정으로 거절했다가는 담당자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살롱에도, 후배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 거기까지 계산하고 찾아온 것이다.“……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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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십오 분 전
“……안 오네.” 전 남자친구와 전 절친의 피로연이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십오 분. 나는 예식장 입구에서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화면은 새까맸다. 배터리가 다 닳아 버렸다. 예약해 둔 대행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는지조차 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늘 나는 겉모습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샴페인 골드빛 드레스. 새벽부터 손질한 머리. 흐트러지지 않은 화장. 구두 때문에 발이 조금 아팠지만, 그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어야 할 남자만 없었다. 접수대로 향하는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 무거운 문 너머에는 태오와 유나가 있었다. 혼자 들어가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남자친구는 어쨌냐고. 역시 거짓말이었냐고. 역시 아린이는 아직 나를 못 잊었구나, 하고.“최악이야…….” 목소리가 목 안으로 가라앉았다. 도망칠까? 아프다는 핑계를 댈까? 아니, 도망치면 끝이다. 두 사람 앞에서 큰소리쳤던 나까지 전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목이 조이고 눈앞이 흐려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호텔 기둥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가 컸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남색 정장이 몸에 꼭 맞았다. 차림새부터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무심하게 쓸어 올린 검은 머리. 길고 날렵한 눈매. 흰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시계는 분명 내 연봉보다 비쌀 터였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듯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이 사람이야.’ 평범한 하객이 아니다. 이런 남자가 우연히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시간당 50만 원짜리, 완벽한 가짜 연인. 그렇게 믿어 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현실감이 없는 남자였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두 굽 소리가 입구에 높이 울렸다.“늦었잖아!”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단단했다. 정장 너머로도 다부진 팔과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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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빌린 남자의 팔
 태오의 목소리에는 떠보는 듯한 가시가 있었다. 내가 대답하려던 순간, 민준이 먼저 한 걸음 나섰다.“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일어서기만 했는데도 태오가 작아 보였다. 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 시선을 두는 곳, 침묵을 사용하는 법. 남자로서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태오 자신이 절감한 얼굴이었다.“아린이의 약혼자 민준입니다. 오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중한 말. 완벽한 미소. 하지만 목소리에는 온기라고는 없었다.“꽤 갑작스럽네요. 아린이와는 언제부터 만나셨나요?” 태오가 웃었다. 적어도 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아린이가 가장 힘들어하던 때부터입니다.” 연회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직접 탓하지도 않았다. 바람이라거나 배신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로 상처받은 쪽이 나라는 사실이 전해졌다. 태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나가 입술을 깨물었다.“아린이가 워낙 마음이 여려서요.” 민준은 내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내 몸에 직접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뒤에서 나를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두 분의 새 출발을 끝까지 축하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군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을 막아 버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저는 아린이가 무리하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주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나의 미소는 이제 거의 모양만 남아 있었다.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울 것 같았다. 분해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내 편에 서 준 것 같아서였다.◇ 피로연은 긴 악몽처럼 이어졌다. 유나가 테이블의 초에 불을 밝히며 인사를 하러 다가올 때마다, 민준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오가 이쪽을 볼 때마다 잔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웃고 있었다. 일할 때의 미소도, 승자의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무너지지 않고 앉아 있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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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연장된 밤
“……뭐?” 계약 연장?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호텔 입구로 불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갑자기 생생하게 느껴졌다.“계약…… 연장이라니, 무슨 말이야? 저 둘은 이제 없어. 내 복수는 끝났다고. 네 일도 여기까지야.”“과연 그럴까?” 민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사람을 놀리는 듯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도시의 네온을 비추는 눈빛은 속을 알 수 없이 빛났다.“그냥 돌아갈 생각이었어? 저 두 사람…… 태오라고 했던가. 우리가 정말 사귀는 건지 아직 의심하고 있다면?”“……!” 차가운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완벽하게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남자 누구야?’, ‘정말 사귀는 거 맞아?’ 하고 공통 지인들에게 캐물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면 오늘의 승리는 순식간에 비참한 광대의 허세로 전락한다.“어설픈 복수는 오히려 자기 목을 조이는 법이지. ……아닌가?”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내 얄팍한 자존심과 그 뒤에 숨은 나약함까지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그래서. 연장하면 얼마인데? 미리 말해 두지만, 나 돈 그렇게 많지 않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지갑을 움켜쥐고 노려보자, 민준은 정말 우습다는 듯 짧게 웃음을 흘렸다.“요금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지. 따라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힘 있는 손가락이었다. 높은 체온에 어깨가 움찔했다.“잠깐, 어디 가는 건데!”“내 일터.” 저항할 틈도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놀랍게도 방금 결혼식이 열린 호텔의 상층부로 이어지는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려 우리를 삼켰다. 버튼에는 ‘Executive Floor’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말도 안 돼.” 숨이 멎는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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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혼자 남은 아침
 눈을 떴을 때 방은 조용했다. 소파에 기대 잠든 모양이었다. 어깨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고, 탁자 위 물잔에는 물이 새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는 조금 무거웠지만 아까처럼 시야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민준 씨?” 창가에 서 있던 그가 돌아봤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천천히 다가왔다.“한숨 잤네. 속은 괜찮아?”“응. ……지금 몇 시야?” 그가 시간을 알려 주었다. 눈을 감은 뒤로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가방을 찾아 무릎 위에 올렸다. 집에 가야 한다. 씻고, 잠들고,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출근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텅 빈 집의 공기가 목을 눌렀다. 민준은 방문 쪽을 가리켰다.“차를 부를까? 아니면 안쪽 방에서 자고 가도 돼. 난 여기 있을 테니까.”“……너는 안 들어와?” 말이 먼저 나갔다. 민준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가방 끈을 쥐었다가 놓았다.“혼자 있고 싶지 않아.” 그 말을 인정하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복수에 성공한 여자인 척할 필요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곁에 앉았지만 나를 안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창밖만 보았다. 유리에 비친 두 사람 사이에는 손 하나쯤 들어갈 틈이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손을 내려놓았다.“아까 보수라고 한 말.”“미안해. 네가 화낼 만했어.”“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갈 거야.”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장난스러운 웃음은 없었다.“그런 뜻으로 널 붙잡진 않아.”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오늘 내 편에 서 주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가까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얹었다. 따뜻했다.“……입 맞춰도 돼?” 내가 묻자 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아린아. 오늘 많이 힘들었잖아.”“알아. 그래서 네가 전부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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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남겨진 선물
 멍하니 둘러본 넓은 스위트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어젯밤의 향이 희미하게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시트에 남았을 그의 체온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 있었다. 지난밤의 모든 일이 술기운이 보여 준 나쁜 꿈 같았다. 하지만 침대 옆 테이블에는, 그 꿈이 현실이었다는 증거처럼 카드 키 한 장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오늘 보수는 너로 하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어젯밤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보수.’ 그 말의 의미를 곱씹자, 이번에는 굴욕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나는 그 남자를 시간당 50만 원짜리 복수의 도구로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거둬들였던 ‘보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에 나눈 말과 손길에 나 혼자 의미를 둔 걸까. 그에게도 같은 밤이었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벗어 놓은 어젯밤의 드레스를 거칠게 집었다. 구겨진 실크가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침대 발치에 어젯밤에는 없던 새 쇼핑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나도 아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메모.‘급한 일이 생겨 먼저 나간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야.’ 선물. 마치 일한 대가로 주는 ‘수당’처럼. 구겨진 드레스 대신 입으라는 건가? 아니면 입막음 값? 이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저렇게 흐트러진 드레스를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굴욕감에 떨리는 손으로 원피스를 입었다. 놀랄 만큼 몸에 꼭 맞았다. 그것이 또 그의 익숙한 태도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더 비참해졌다. 다시는 저 남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혼란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임페리얼 드래곤 호텔을 죄인처럼 몰래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욕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고 머리부터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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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약혼자의 드레스
 어젯밤, 나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왜 네가 여기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을 후배 직원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시야 한쪽에 들어왔다.“팀장님? 무슨 일이세요?”“……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민준은 나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에는 어제 침실에서 나를 원하던 열기도, 나를 몰아붙이던 냉혹함도 없었다. 처음 보는 매장 직원을 대하듯 무관심하게, 값을 매기듯 나를 살피는 차가운 시선이었다.‘……그 눈빛은 뭐야.’ 어젯밤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예 나를 모른다는 것처럼. 나만 그 스위트룸에서의 일과 살갗의 온기, 굴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어금니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수석 웨딩 플래너로서의 자존심. 프로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 필사적인 미소를 보고서야 민준의 입가에 그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잔인한 말을 또렷하게 내뱉었다.“아,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어.”‘……약혼자?’ 숨이 막혔다. 약혼자.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에 꽂혔다. 아, 그랬구나. 이 남자에게는 진짜 ‘약혼자’가 있었구나. 지난밤의 일은 나를 갖고 논 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약혼자를 두고 나를…… ‘불장난’ 상대로 삼은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마음만 흔들린 게 아니었다. 몸도 자존심도 전부 그 남자에게 휘둘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눈앞이 검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제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 남자가, 오늘은 손님으로 찾아와 자기 약혼자의 드레스를 고르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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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고용하는 쪽의 제안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조용한 살롱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남았다.‘……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그게 무슨 뜻인데?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온 거 아니었어? 설마――‘――나를 진심으로 놀리는 거야?’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프로다운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손끝이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굳어 있던 나를 보고, 민준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문득 지웠다. 그는 지금까지의 대화가 전부 장난이었다는 듯, 나에게만 들리도록 귀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귓가에서 들었던 뜨거운 속삭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농담이야. 할 얘기가 있어.”“네……?”“여긴 곤란해. 잠깐 같이 가.”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았다.“잠깐만요……! 고객님? 저 지금 근무 중인데……!” 뜨거웠다. 어젯밤 나를 가볍게 안아 올리고, 내 뜻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던 그 손.“상관없어.” 나는 호기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후배 직원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며,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 억지로 끌려 살롱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잠깐! 놓으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살롱에서 멀지 않은 호텔 라운지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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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허세의 값
‘……고용된다고?’ 나는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시간당 50만 원에 고용했다고 생각했던 남자. 나를 스위트룸에서 휘두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 오늘 아침 내 직장에 찾아와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다”고 말하며 나를 비참하게 만든 남자. 그 남자가 지금 나를 ‘약혼자 역할로 고용하고 싶다’고 한다.“……너, 이제 적당히 좀 해.”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내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어제부터 계속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남의 마음도 몸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마음과 몸을 가지고 놀았다고.” 민준은 내 말을 정정하기라도 하듯 되뇌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한 조각도 없었다. 남은 것은 차가운 계산뿐이었다.“이건 비즈니스 얘기야. 어젯밤 일과는 별개로 생각해. 지금은 계약 조건만 보라는 뜻이야. 너한테도 이득은 있어.”“별개로…… 생각하라고?”‘……최악이야, 이 남자.’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입맞춤도, 맞닿았던 피부의 감촉도, 우리가 함께 나눴다고 믿었던 짧은 감정도. 이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을 하룻밤 일로 접어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계약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느꼈던 죄책감과 희미한 설렘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남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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