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미르가 필요 없음을 천지신명께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그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요. 착실하게.”
“그게 무슨……”
“사람들도 애초부터 우리를 노리고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벌이는 일이 우연찮게도 미르를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지요.”
“무슨 일입니까, 그게? 정확히 말 좀 해주시오!”
천우가 답답한 심정에 목소리를 크게 냈다.
엄청난 고함소리였다.
미르의 그것과도 같았다.
산 전체가 우르릉- 울리는 듯했다. 나뭇잎
붉빛미르가 이어 말했다.“우리 두 미르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나 천문을 읽게 되는 순간,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알고 있소.”“저는 그것이 싫어 불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의 행보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물빛미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만을 바라보셨지요. 사람과 섞여 사셨고요.”머리칼을 가만히 넘기는 기척이었다.“저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일지 궁금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보다는 미르에 가까운 넋이었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고 폭력적인 생물이지요. 그렇지만 미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생명이기도 하고요.”“…….”“물빛미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겨우 깨달았습니다. 나와 같은 미르가,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미르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 붉빛미르가 일으킨 사단은 항상 울음소리와 피만을 불러왔지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언제부턴가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도 인정 못하고 마지막 발악으로 내가 당신을 가장 미워하던 때로 시간을 돌려 싸워보기도 하였고요.”“이포교를 숙주로 삼았을 때의 말이로군.”“네. 그리고 결국 물빛께서 저와 대등하게 맞서셨지요. 그리고 천지신명께서도 직접 답을 주셨고요.”붉빛미르의 고개가 올라갔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뉘십니까?”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여인의 목소리였다.“지나가던 길손인데, 말씀 좀 묻겠소.”천우가 의아함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끼익-문이 열렸다.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엇…….”놀란 천우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냈다.어리였다.틀림없는 어리였다.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보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붉빛?”천우가 부지불식중에 그리 불렀다.“네?”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외람되지만, 선비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빙긋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어리였다.그 바람에 천우는 뒤로 물러서며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물보라를 일으켜 다시금 물과 불의 다툼을 재현할 작정이었다.“나, 나는…….”천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백……. 백천우라고 하는데&he
“시간을 바꾸다니요?”지운이 아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따지고 보면 미르가 존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 아니오? 필요할 때 비를 주시고, 필요할 때 불과 무력을 주시는 것도 사람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 그러니 시간을 바꾸는 것도 일어날 수 없지만 또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일겁니다.”“그렇다면…….”“아마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베어내시면서, 우리가 있는 시간대가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되오.”이도가 조곤조곤 읊조렸다.맑은 두 눈에 지성(至聖)의 빛이 반짝 빛났다.“나 또한 천문 연구에 돌입하면서 조금이나마 깨달은 이치가 있소.”이도의 말이 이어졌다.“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점과 점이 이어져 길게 이어지는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오. 다만 그것이, 점점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보이는 것이지.”“그 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하?”“우리의 선택으로 빚어진 시간이오. 모든 선택이 한데 모여 길고 긴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 물빛미르께서 한양으로 올라오기로 결심하신 선택, 저자의 사람들을 돕기로 하신 선택, 붉빛미르를 무찌르신 선택 등이 말이오.”이도가 거기까지 말하곤 천우를 흘깃거렸다.“그리고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벤 그 선택으로 시간이 뒤바뀐거요. 이미 그려진
향기로운 화차(花茶)한잔과 함께, 천우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백사성을 찾아 한양으로 올라왔고, 곰보에게 목걸이를 빼앗겼고, 불이 났고, 비를 불렀다가 의심받았고, 이포교를 만났고 궁궐로 불려왔으며 주상전하를 뵈었고, 이포교와 함께 양녕대군의 식객으로 갔다가 어리라는 여인을 만났고, 어리가 붉빛미르임이 드러났으며, 여러 사건사고를 거쳐 어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그렇게 마지막 전투에서 붉빛미르를 칼로 베어낸 끝에 다시 처음 이때로 돌아왔다는 말이냐? 천우 네 말에 따르면?”백사성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물었다.“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모든 것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동일하게 흘러갔습니다. 만나는 사람, 마주치는 상황, 함께 나누는 대화까지 모든 것이 말입니다.”“믿기가 힘들군…….”“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붉빛미르며, 대군마마 이야기에, 천문연구에 대한 사실까지 다 알고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고, 바로 직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합니다.”천우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사당에 모여 있던 모두 크게 놀란 기색으로 입을 벌리고 있거나 이쪽 얘기를 경청 중에 있었다.“천문 연구는…….”이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n
“별좌께서는 이 일이 정말로 적성에 맞으신 듯 합니다.”“그런 듯 합니다.”장영실이 하하- 웃어보였다.이제 한동안 입 다물고 밤하늘을 관측할 차례니,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잠시만 이해하달라며 양해를 구했다.천우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을 하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어차피 장영실이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 천우는 서촌으로
서촌까지 다다르는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질 않았다.저자를 통과하는 사이에 혹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지 않나, 뒤를 밟는 발걸음이 있지 않나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렸지만 딱히 수상한 움직임은 포착되질 않았다.한시름 놓였지만, 반대로 그만큼 불안하기도 했다.차라리 일이 터질 것이면 가급적이면 빨리 터졌으면 하는 기분이었다.“이런…….&rdq
“미치지 않고서는.”장영실은 군왕의 타박에도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기계 만들고 역법 연구하고 이런 일 못하옵니다. 전하. 몸은 힘들지, 머리는 복잡하지, 다리는 붓지, 녹봉은 많이 안 늘지…….”“이놈아. 업무 추진하라고 이것저것 안겨주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이도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빽- 소리쳤다.긴장이 풀린 투였다.군왕과 신하가 아닌, 오래 알고 지낸 동무 같은 모습이었다.“그렇게.”장영실이 조금 웃음기가 가신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전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와 지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역법
“그렇습니다.”이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물빛과 함께 칼부림을 했던, 그 곰보 놈 때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붉빛미르가 곰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찾아왔다고. 그리고 곰보는 의식이 없어진 채로 조종당하고 있었지요. 혹여 붉빛미르가 백사성을 이용해 그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목소리라도 수집하는 것이라면요? 그럴 목적으로 일부러 놓아버린 것이라면?”“권사가 우연히 아버님을 구조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