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저를 막을 작정이십니까?”여자가 물었다.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쥐고 있던 환도(環刀)를 천천히 뽑을 뿐이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시간이 멈춘 듯했다.바람이, 대지가, 마음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정지한 채로 살피고 있는 듯했다.이렇게 될 줄 알았던가.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었다. 결국 일은 저질러졌다. 결코 섞여서도, 결코 섞일수도 없는 둘이 이렇게 마주했으니 남은 것이라곤 이제 한쪽이 지고, 한쪽이 일어나는 일일 뿐.스릉-남자의 칼날이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광채를 뿜었다.칼끝에 물방울과 서리가 맺혀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듯했다.“끄겠습니다.”남자가 말했다.“그대의 세상을.”남자의 목소리는 슬프나, 또한 담담하였다.마치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잡고 싶으나 잡을 수 없고, 잡을 수 있다하나 잡아서는 안 되는 그런 정인을.여자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고운 눈가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그리고 잠시 후 여자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망울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태우겠습니다.”여자가 소매 밑으로 손을 뻗었다.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하나, 또한 슬펐다.“그대의 세상을.”여자의 손끝에 붉은 불길이 일렁였다.산과 들을, 사람을, 심장까지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 법한 불길이었다.세종 10년.1428년 7월 7일.물과 불이, 그렇게 맞붙었다.
Última atualização : 2026-03-11 Ler m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