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양, 경복궁(은 불타서 없고 임시 행궁).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선조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진주성에서 올라온 장계가 구겨진 채 들려 있었다.[익호장군 김덕령, 왜군 10만 대파. 적장 가토와 고니시 패주. 호남 방어 성공.]보통의 왕이라면 춤을 추며 기뻐했을 소식이다.하지만 선조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10만... 10만을 막았다고? 고작 의병 나부랭이가?"선조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관군도 못 막은 걸, 명나라 군대도 무서워서 도망친 걸, 그놈 혼자서 막았단 말이냐? 그게...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냐?"그의 머릿속에서 김덕령은 더 이상 충신이 아니었다.왕보다 더한 권위를 가진,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었다.백성들이 왕인 자신보다 김덕령을 더 따르고 칭송한다는 보고가 비수처럼 꽂혔다."전하, 진정하시옵소서."도승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선조는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그, 그놈은 칼도 안 들어가고 힘은 산을 뽑는다지 않느냐! 저놈이 마음만 먹으면... 한양으로 쳐들어오는 건 일도 아닐 게다!"의심병.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을 괴롭혔던 그 지독한 의심병이, 이번엔 김덕령을 향해 발작하고 있었다."잡아들여야 한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해."선조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금부도사를 보내라! 아니, 암행어사를 보내! 그놈의 뒤를 캐서 털끝만한 죄라도 나오면 당장 잡아들이라고 해!""전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그때, 밖에서 류성룡이 들어왔다. 비에 젖은 관복을 입은 채였다."영상! 경도 들었지 않소! 그놈이 사병을 3천이나 거느리고 왕 노릇을 하고 있다오!""전하. 김덕령은 나라를 구한 영웅입니다. 지금 그를 건드리면 민심이 요동칩니다. 호남의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류성룡이 엎드려 읍소했다.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김덕령을 치는 건, 벌집을 건드리
1593년 7월.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담양으로 들어오는 길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오신다! 장군님이 오신다!"망루에서 보초를 서던 이가 목청껏 소리쳤다.그 외침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빗속을 뚫고 꽹과리와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저 멀리, 빗줄기 사이로 거대한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선두에는 붉은 누빔옷을 입고 흑단목 방망이를 찬 거구의 사내가, 그 뒤로는 위풍당당한 현무 6대와 3,000명의 익호군이 따르고 있었다.나였다.진주성에서 10만 대군을 갈아마시고 돌아온, 조선의 적귀(赤鬼)."만세! 김덕령 장군 만세!""우리 아들 살아서 왔구나!"비에 젖은 백성들이 진흙탕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들의 눈빛은 단순한 존경을 넘어, 마치 구세주를 영접하는 광신도에 가까웠다.마을 어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마을 사람들의 입담이 빠질 수 없었다."워메, 저 기세 좀 보소. 10만 대군을 혼자서 다 때려잡고 오셨다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지 않소? 저게 사람이야, 신령이야?"마을 사람이 침을 튀기며 감탄하자, 옆에 있던 아낙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장구를 쳤다."그것뿐인가! 내 듣자 하니 장군님이 소리 한 번 지르니까 왜놈들 수만 명이 오줌을 지리고 기절했다드라! 그리고 장군님이 휘두르는 저 검은 방망이에 맞으면 뼈도 못 추리고 가루가 된다던데?"구석에서 곰방대를 빨던 촌로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끼어들었다."어허, 이 사람들이 겉만 보고 속은 모르네. 그게 다 장군님 양기(陽氣)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그런 거여. 내가 저번에 공용 뒷간에서 볼일 보시는 걸 옆 칸에서 슬쩍 봤는데... 어우야. 오줌발이 어찌나 센지 뒷간 항아리가 깨지는 줄 알았어! 그리고 그... 다리 사이에 달린 거시기가 전쟁터에서 기를 받았는지 더 묵직해졌드라! 아주 흉기여, 흉기! 저런 대포를 달고 있으니 왜놈 기집애들도 다리가 풀려서 꼼짝 못 하는 거제.""......!!"현무 위에
진주성 관아 앞.나는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논개가 헝클어진 머리와 피 묻은 옷차림으로 관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나으리! 접니다! 주 씨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잠시 후, 문이 열리고 최경회 현감의 친척들과 하인들이 나왔다.논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싸늘했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오느냐?"집안의 어른으로 보이는 노인이 호통을 쳤다."아버님...""시끄럽다! 왜놈들 술판에 제 발로 들어간 년이, 무슨 낯짝으로 살아 돌아와? 정절을 잃은 계집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어, 억울합니다! 저는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그걸 누가 믿느냐! 왜놈들 틈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멀쩡하다고? 네가 정녕 가문을 생각한다면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지! 살아 돌아온 게 치욕이다!"노인이 소금을 뿌렸다.하인들이 달려들어 논개를 밀쳤다."나가라! 왜장과 투신하여 조선의 의기(義妓)를 세웠다 생각할 것이니, 썩 나가거라. 이름을 버리고 살아라. 본처도 아닌 것이. 에잉, 쯧쯧. 화냥년은 필요 없다!"논개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믿었던 가족,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가문. 그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그녀는 멍하니 닫힌 대문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터벅, 터벅.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논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붉은 누빔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 김덕령이었다."말했잖습니까. 후회할 거라고."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녀와 눈을 맞췄다.동정도, 조롱도 없었다. 그저 덤덤한 눈빛."세상은 당신 같은 여인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됩니다. 정절이니 열녀니 하는 껍데기만 찾지, 그 안에 담긴 진짜 용기는 볼 줄 모르니까요."논개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저는...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차라리 죽겠습니다...""죽긴 왜 죽습니까? 당신을 버린 놈들 보
논개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이건... 사람인가 곰인가? 아니면 산신령인가?' 하는 눈빛이었다."언니, 비켜 봐. 이 오빠는 내 취향이야. 크기가 딱 맞잖아."나는 게야무라 앞으로 걸어갔다.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마루가 찌지직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오, 오지 마라! 저리 가! 에이, 퉤! 재수 없게!"게야무라가 침을 뱉으며 칼을 뽑으려 했다.나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열 손가락에 끼워진 투박한 무쇠 가락지가 달빛을 받아 살벌하게 번뜩였다.우두둑. 우드득.나는 깍지를 끼고 손가락을 풀었다. 뼈 부딪히는 소리가 쇠파이프 구부리는 소리처럼 났다."오빠. 내 이름이 왜 번개인 줄 알아?"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쇠 가락지가 너클처럼 도드라졌다."내 손에 한 방 처맞으면, 대가리가 번개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번개야.""히, 히익!""오빠도 느껴볼래? 거기 딱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해줄께."나는 도약했다. 치맛자락이 휘날리며 내 튼실한 허벅지 근육을 드러냈다."뿌잉뿌잉이다! 이 새끼야!"콰아앙!내 오른 주먹이 게야무라의 안면을 강타했다.퍼억!둔탁한 타격음이 아니었다. 맷돌로 옥수수를 가는 소리였다.무쇠 가락지의 위력은 절륜했다. 게야무라의 앞니, 송곳니, 어금니가 팝콘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졌다."끄아아악!"게야무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나는 놈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어머, 오빠. 벌써 누우면 어떡해. 우리 춤춰야지."나는 쓰러진 놈의 허리춤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100kg이 넘는 거구였지만, 내겐 솜인형이었다.나는 놈을 내 가슴 쪽으로 꽉 끌어안았다.놈의 몸뚱이가 종이인형 마냥 흔들거렸다."우쭈쭈, 우리 오빠. 너무 신이 나서 춤이 절로 나오나 봐? 막 신나?""아악! 사, 살려줘! 허리! 내 허리!"게야무라가 발버둥 쳤지만, 내 팔은 쇠사슬보다 단단했다.나는 양손 깍지(쇠가락지 포박술)를 끼고 놈의 허리를 짓눌렀다.백브레이커(Back
촉석루 안은 욕망과 공포가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바닥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옷이 찢긴 기생들은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그 한가운데, 거대한 짐승이 앉아 있었다.게야무라 로쿠스케.190cm가 넘는 거구에 온몸이 털로 뒤덮인, 인간이라기보단 곰에 가까운 사내. 놈은 전투에서 진 분풀이로 칼을 휘두르며 애꿎은 술상만 엎어대고 있었다."술 가져와! 조선 계집들은 왜 이리 뻣뻣해!"놈이 소리치며 칼등으로 기둥을 내리쳤다.그때, 누각 입구에서 향긋한 분냄새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섰다.서백설이었다."어머, 장군님들. 술맛 떨어지게 이게 무슨 행패십니까?"서백설은 당당하게 조선말로 쏘아붙였다.말은 통하지 않아도,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실린 여유와 기품은 만국 공통어였다. 살기를 뿜어대던 게야무라의 시선이 단번에 꽂혔다."오오...! 네년은 누구냐?""지나가던 기생이옵니다. 장군님들이 오셨다기에 술 한잔 올리러 왔지요."서백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놈의 옆에 앉아 술을 따랐다. 붉은 비단 치마 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는 요염한 동작에 왜장들의 눈이 뒤집혔다. 납치해 온 기생들과는 급이 달랐다.서백설은 술을 따르는 척하며, 슬쩍 기생들 틈을 살폈다.단 한 사람.다른 기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품이 역력하다.붉은 치마에 푸른 저고리를 걸친 그녀는, 서백설과 비교해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쌍꺼풀 없이 붓으로 한 번에 그은 듯 길고 고운 눈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선한 입매.화려함보다는 은은하고 단아한, 조선의 백자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다.하지만 그 청순한 얼굴 뒤에는, 서슬 퍼런 단도와 죽음의 결의가 숨겨져 있었다.의기(義妓).누가봐도 딱 감이 올 것 이다.논개(論介)였다.서백설은 취한 게야무라의 시선을 피해 논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논개의 손에 쪽지를 쥐여주었다.[절벽 쪽 난간으로 유인하세요. 복수를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다. '절세미녀가
확실히 미인이긴 하다. 한양에서도 먹어줄 미모다."네가 가게? 위험해.""저도 가지만... 주연은 대장님이에요.""......뭐?"내 귀를 의심했다."대장님이 가셔야죠. 결정타는 대장님이 날려야 하니까.""..."나는 양팔을 벌려 내 몸을 보여줬다."니 눈엔 내 꼴이 안보이니?"키 190cm. 몸무게 110kg.갑옷 위로 터질 듯한 근육. 땀과 피 냄새에 절은 산적 두목 같은 비주얼.이게 여자로 보이면 안과에 가봐야 한다."안 통해! 놈이 보자마자 토할걸?""그러니까 더 통하죠."서백설이 사악하게 웃었다."지금은 밤이에요. 그리고 놈은 술에 취해 있을 거예요. 흐릿한 달빛 아래, 치마 두르고 덩치 큰 여자가 나타나면... 놈 같은 짐승은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어요. '육덕진' 취향일 수도 있잖아요?""미령아, 말려라. 이 언니가 전쟁 후유증이 심하다."나는 구원을 요청했지만, 미령이마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어? 그거 일리 있는데요? 아저씨, 제가 분장해 드릴게요!""너까지 왜 이래!"하지만 반박할 논리가 궁색했다.인질을 구하려면 놈을 방심시켜야 하고, 놈을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내가 붙어야 한다.결국 내가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결론."하... 진짜."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조선 구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칼 맞고 화살 맞는 건 참겠는데, 치마 입는 건 진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하지만.촉석루 어딘가에서 떨고 있을 논개와 기생들을 생각하니, 똥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알았다. 해. 한다고! 대신 실패하면 니들 다 똥지게 질 각오 해라.""춘식아! 관아 창고 뒤져서 제일 큰 치마저고리 가져와! 특대 크기로! 없으면 천막이라도 뜯어와!"서백설이 신나서 소리쳤다. 저 여자,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잠시 후.진주성 내의 빈 객사(客舍)는 거대한 분장실로 변했다."흡! 으읍!"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에 칠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