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By:  고독한포켓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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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시기와 모함에 억울하게 스러져간 영웅들. 그들의 한(恨) 서린 육체에, 치열한 21세기를 악착같이 물어뜯며 살아남은 영업부장 강철민의 영혼이 깃든다. ​"핍박 당해 얌전히 죽으라고? 웃기지 마. 내 앞을 막는 건 다 씹어 먹을 거니까." ​첫 번째 무대, 임진왜란.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에 빙의한 그는 희생양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한다. 간자들의 수작도, 몰려드는 적들의 검격도, 야수처럼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 정교하게 다듬어진 움직임 대신,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무쌍으로 얽매인 사슬을 산산조각 낸다. ​하지만 김덕령의 피 튀기는 반격은 단지 시작이었다. 시대를 넘어, 또 다른 억울한 영웅들이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선을 넘어, 억울함이 남은 모든 역사 속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운명을 물어뜯는 빙의자의 압도적인 구원기가 시작된다! #로맨스 한스푼 아주 약간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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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억울하겠지만 빙의로 2회차 시작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그것이 내 45년 인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2025년 대한민국.

철강 제조 중소기업 부장 강철민의 삶은 참으로 볼품없이 막을 내렸다.

거래처 접대, 위에서 쪼아대고 아래에서 치받는 샌드위치 신세, 그리고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미결재 서류들.

그날도 가족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회사 모니터에 머리를 박은 채 숨이 끊어졌다.

사인은 과로사.

뉴스 사회면 한구석에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흔한 죽음이었다. 죽어가는 순간 뇌리를 스친 건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었다.

​지독한 피로감.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구나 하는 비겁한 안도감뿐.

​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고 생각했는데.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사무실 형광등 불빛이 아니었다. 누렇게 뜬 짚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흙천장.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메주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병원인가? 아니면 쓰러진 나를 누가 시골 요양원에라도 버려두고 간 건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평소라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몸의 반응이 이상했다.

​묵직했다.

마치 납덩이를 전신에 두른 것처럼, 아니 근육 자체가 고밀도로 압축된 강철이 된 것처럼 기이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반면 움직임은 폭발적이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상체가 용수철처럼 튕겨져 올라왔다.

​우득. 우드득.

​척추 마디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흡사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이게... 뭐지?"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걸걸하고 깊은 저음.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황급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솥뚜껑.

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디가 웬만한 성인 남자 손목만큼이나 굵었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이건 내 손이 아니었다. 사무직으로 20년을 구르며 볼펜이나 굴리던, 가늘고 하얀 그 손이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거칠거칠한 수염. 각진 턱선.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마치 잘 무두질한 가죽 소파처럼 질기고 단단했다.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덕령아! 일어났느냐!"

​덕령이?

누굴 부르는 거야.

​드르륵.

​낡은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웬 상투 튼 사내가 들어왔다. 깐깐하게 생긴 눈매에 하얀 도포를 입은 꼴이 영락없는 사극 배우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잠이나 자다니. 형으로서 참으로 민망하구나. 어젯밤에 또 술을 퍼마시고 들어온 게냐?"

​형?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마치 누군가 뇌 속에 억지로 USB를 꽂고 대용량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처럼,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전라도 담양. 석두촌.

내 이름은 김덕령.

그리고 눈앞의 저 잔소리꾼은 형 김덕홍.

​"윽..."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밀려드는 기억의 편린 속에서 내 정체가 선명해졌다.

​김덕령(金德齡).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억울하게 역모 누명을 쓰고 옥사한 비운의 장수. 교과서에서, 아니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조선왕조실록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그 이름.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꿈이 아니다. 이건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다. 엉덩이에 닿는 까칠한 돗자리의 감촉,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눈앞에서 잔소리를 퍼붓는 저 양반의 침 튀기는 모습까지.

​나는 45세 강철민의 기억을 가진 채, 조선 시대 김덕령의 몸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야근 피해서 도망쳤더니, 하필이면 헬조선, 그것도 전쟁 직전의 조선이라니."

​기가 찼다.

​지금이 몇 년도지? 기억을 더듬었다. 신묘년. 서기 1591년이다.

내년이면 임진왜란이 터진다.

​온 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하며, 왕이란 작자는 의주로 도망을 치는 그 지옥도가 펼쳐지기 딱 1년 전.

​그리고 나는 전쟁 영웅이 되었다가, 그 도망친 왕에게 의심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질 때까지 고문당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싫은데."

​단호하게 뱉었다. 김덕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 싫다는 게냐?"

​"아닙니다. 형님. 잠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나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20년 직장 생활로 다져진 처세술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김덕홍은 내 공손한 태도에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쯧. 덩치만 컸지 철이 없어서야. 어서 세수하고 나오거라."

​김덕홍이 나가자마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키가 거의 190cm는 되어 보였다. 조선 시대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이건 거인을 넘어선 괴물 수준이다.

​방구석에 놓인 청동 거울을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비친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부리부리한 눈매, 짙은 눈썹. 호랑이 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맹장의 관상.

​"잘생기긴 했네. 무식하게 생겨서 문제지."

​거울을 내려놓으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아귀에 잡히는 공기가 터져 나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넘쳤다. 그냥 넘치는 수준이 아니라, 몸 안의 피가 끓는 용광로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게 역사서에 기록된 김덕령의 신력(神力)인가.

​실록에 따르면 김덕령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씨름하다가 황소를 들어 울타리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했다. 과장이 섞인 야사인 줄 알았는데, 지금 내 몸 상태를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트가 필요해."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따스한 봄 햇살이 마당에 내리쬐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 닭들이 모이를 쪼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 평화가 시한부로 보였다. 1년 뒤면 이곳은 왜군들에게 짓밟힐 테니까.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과로사한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그렇게 죽도록 일해봤자 남는 건 없었다. 회사는 나를 대체할 부품을 금방 찾았을 것이고, 남겨진 가족들은...

​"젠장."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번 생은 달라야 한다. 개죽음은 한 번으로 족하다. 억울하게 누명 쓰고 죽는 엔딩? 절대 사절이다.

​나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다듬이돌을 바라보았다. 족히 쌀 두 가마니 무게는 나갈 법한 큼지막한 화강암 덩어리였다.

​저걸 들어볼까.

아니, 드는 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다듬이돌 앞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했다.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흡!"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쾅-!

​둔탁한 타격음이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하얀 돌가루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내 주먹과 다듬이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듬이돌 한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었다. 마치 찰흙에 주먹을 박아 넣은 것처럼 선명한 자국. 그런데 내 주먹은?

​멀쩡했다.

​까진 곳 하나 없이, 붉게 달아오르지도 않았다. 통증? 모기에 물린 것보다도 덜했다. 오히려 시원했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무협지에서나 보던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이 몸, 생각보다 물건이다.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다. 피부와 뼈 자체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이 정도 내구도라면 조총 탄환도 튕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전생의 강철민은 힘없는 월급쟁이였지만, 현생의 김덕령은 조선 최강의 피지컬 몬스터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벌어질 역사의 모든 데이터가 들어있다.

​이건 해볼 만한 게임이다.

​"이순신 장군님."

​나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당신은 바다만 지키쇼. 육지의 쓰레기들은 내가 다 청소해 줄 테니까."

​꼬르륵.

​비장한 다짐을 하기가 무섭게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엄청난 허기였다. 이 거대한 몸뚱이를 유지하려면 연비가 장난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밥심이 있어야 역사를 바꾸든 말든 하지."

​나는 부엌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마당의 흙바닥이 움푹움푹 패였다.

​부엌문을 열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훅 끼쳐왔다.

​부엌 안에는 형수님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솥뚜껑을 닫았다. 김덕령이라는 놈이 평소에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 형수님의 눈빛에 미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형수님. 배가... 고픕니다요."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21세기 직장인의 매너를 장착한 목소리. 그리고.

꼬르르르륵-!!!

그렇지 못한 비매너적인 천둥소리가 부엌 안을 무참히 울렸다.

주인 닮아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배꼽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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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억울하겠지만 빙의로 2회차 시작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그것이 내 45년 인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2025년 대한민국.철강 제조 중소기업 부장 강철민의 삶은 참으로 볼품없이 막을 내렸다. 거래처 접대, 위에서 쪼아대고 아래에서 치받는 샌드위치 신세, 그리고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미결재 서류들. 그날도 가족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회사 모니터에 머리를 박은 채 숨이 끊어졌다. 사인은 과로사. 뉴스 사회면 한구석에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흔한 죽음이었다. 죽어가는 순간 뇌리를 스친 건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었다.​지독한 피로감.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구나 하는 비겁한 안도감뿐.​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고 생각했는데.​"으음..."​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사무실 형광등 불빛이 아니었다. 누렇게 뜬 짚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흙천장.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메주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병원인가? 아니면 쓰러진 나를 누가 시골 요양원에라도 버려두고 간 건가.​상체를 일으키려 했다.평소라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몸의 반응이 이상했다.​묵직했다.마치 납덩이를 전신에 두른 것처럼, 아니 근육 자체가 고밀도로 압축된 강철이 된 것처럼 기이한 중량감이 느껴졌다.​반면 움직임은 폭발적이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상체가 용수철처럼 튕겨져 올라왔다.​우득. 우드득.​척추 마디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흡사 기왓장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이게... 뭐지?"​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걸걸하고 깊은 저음.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황급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솥뚜껑.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디가 웬만한 성인 남자 손목만큼이나 굵었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이건 내 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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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야근하다 죽었더니 조선의 항우가 되었다
이놈의 뱃속에서 우러나온 소리는 전혀 점잖지 못했다.형수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뱃속에서 나오는 우렁찬 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밥 줘!"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도련님이 갑자기 존댓말을 쓰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어? 어... 그래. 상을 차려주마."밥상은 소박했다.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에 시래기 된장국, 그리고 나물 몇 가지. 솔직히 말하면 에피타이저 수준이었다. 이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요구하는 칼로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숟가락을 들었다.와구작.​숟가락이 입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밥을 퍼 올리는 순간, 놋숟가락 목이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힘 조절 실패다. 나는 뻘쭘하게 휜 숟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 아주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 이놈의 악력은 섬세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형수님이 기겁하며 새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엔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신생아 다루듯 숟가락을 쥐고 밥을 입에 넣었다.​맛있다.​MSG 하나 없는 천연의 맛인데, 혀끝에 감기는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아니, 그냥 내 몸이 영양분을 미친 듯이 갈구하고 있었다. 국그릇을 들고 마시려는데, 꿀꺽꿀꺽 넘어가는 목 넘김이 폭포수 같았다.​순식간에 밥 두 그릇을 비웠다.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눈치가 보여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잘 먹었습니다."​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여전히 아까 내가 박살 낸 다듬이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본격적으로 스펙 분석에 들어갔다.​첫째, 금강불괴(金剛不壞).아까 돌을 쳤을 때 확인했다. 통증 차단 및 내구도 무한. 이건 확실하다. 역사 속 김덕령이 옥사할 때 "정강이뼈가 부러지지 않아 고문하던 자들이 지쳤다"는 기록이 팩트였던 모양이다.​둘째,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힘이다. 마당 구석에 있는 굵직한 통나무를 쳐다보았다. 땔감으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지름이 내 허벅지만 했다. 나는 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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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 구역의 미친 호랑이
​탁.​허공을 가르던 몽둥이가 내 왼손에 잡혔다.​내 눈앞에는 잔뜩 겁에 질린 졸개의 얼굴이 있었다. 놈은 있는 힘껏 휘둘렀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동체 시력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슬로 모션에 불과했다.​"어?"​졸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놈은 본능적으로 몽둥이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내 손아귀에 잡힌 참나무 몽둥이는 마치 바위 틈에 박힌 고목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런 건 산에 가서 멧돼지 잡을 때나 쓰는 거야. 사람한테 휘두르면 쓰나."​나는 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손목을 가볍게 비틀었다.​우지끈!​경쾌한 파열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두께가 내 팔뚝만 한 생나무 몽둥이가 비스킷처럼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놈의 얼굴을 때렸다.​"히익!"​졸개가 부러진 몽둥이 자루를 쥔 채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손에 남은 부러진 조각을 바닥에 툭 던졌다. 흙먼지가 푸석 일었다.​"다음."​이번엔 왼쪽에서 낫을 든 놈이 덤벼들었다.​"죽어라!"​시퍼런 낫 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이건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명백한 살의.내 안의 무언가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현대인 강철민의 이성은 잠시 뒤로 물러나고, 김덕령의 야성이 고개를 쳐들었다.​나는 놈이 낫을 휘두르기도 전에 한발 앞서 파고들었다.​오른발을 깊숙이 찔러 넣고, 어깨로 놈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무협지에서나 보던 철산고(鐵山靠). 아니, 그냥 110kg의 체중을 실은 몸통 박치기였다.​퍼억!​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놈의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다.​"퀘엑!"​놈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날아갔다. 대문 밖 흙바닥에 처박힌 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였다.​순식간에 두 명이 리타이어.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우두머리 최가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덩치만 큰 순둥이 호구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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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동업자, 그리고 진짜 호랑이 1
​여기군.​나는 걸음을 멈췄다. 객주 마당이 소란스러웠다.​"빛 갚으라고! 엉?""이거 안 놔? 이년이 아주 앙큼하기가 구미호 뺨치네!"​고함과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객주 마당에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덩치 큰 떡대들이었다. 그들 앞에는 한 여인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서백설이었다.​남루한 무명치마에 머리에는 수건을 둘렀지만, 흙 속의 진주처럼 빛나는 외모였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칠흑 같은 눈동자. 그 눈빛에는 공포 대신 서슬 퍼런 독기가 서려 있었다.​"약속한 날짜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떨림이라곤 없었다.​"그리고 이자는 원금의 3할을 넘지 못한다고 관아에서도 정했습니다. 원금의 두 배를 내놓라니요, 이건 명백한 수탈입니다!"​"뭐, 수탈? 이년이 입만 살아서!"​빚쟁이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몽둥이를 바닥에 쾅 찍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험상궂은 인상이었다.​"야, 우리가 관아 법 따지면서 장사하는 줄 아냐? 우리 법은 이거야, 이거!"​놈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오늘까지 이자 안 내놓으면 이 객주, 우리가 접수한다. 그리고 너는..."​놈의 음흉한 시선이 서백설의 몸을 훑었다.​"섬에 팔려가서 몸으로 때워야지. 반반하게 생겨서 값은 좀 받겠구먼. 낄낄!"​주변의 졸개들이 따라 웃었다. 서백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논리와 법으로는 이길 수 있어도,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법.​주변 상인들은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저 빚쟁이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알기 때문이리라.​'타이밍 좋네.'​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백마 탄 왕자님? 아니다. 나는 그런 로맨틱한 역할이 아니다.나는 해결사다. 다 때려 부수는 해결사.​그리고 이것은 비즈니스다.가장 극적인 순간에 등장해야 내 가치가 올라가는 법.​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작은 자갈 하나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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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동업자, 그리고 진짜 호랑이 2
​"야."​"히, 히익! 오, 오지 마!"​놈은 부러진 손목을 감싸 쥐고 엉덩이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이자 3할. 법대로 하자고. 그 이상 받으려고 하면..."​나는 바닥에 떨어진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뚝 부러뜨렸다.​우지끈.​"다음엔 네 목이 이렇게 될 거야. 알겠어?"​"아,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다시는 안 오겠습니다!"​우두머리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가."​내 한마디에 놈들은 부상자들을 부축해 도망쳤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는 꼴이 어제 최가 패거리와 판박이였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양아치들의 도주 패턴도 똑같네.​주변이 조용해졌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괜히 휘말리기 싫어서겠지. 마당에는 나와 서백설, 둘만 남았다.​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보통 여염집 규수라면 놀라서 주저앉거나, 고맙다고 울먹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백설은 달랐다. 그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그 눈빛.두려움은 없었다. 대신 강렬한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가치를 가늠하는, 철저한 상인의 눈빛.​"도와줘서 고마워요."​그녀가 입을 열었다.​"하지만 공짜는 아니겠죠?"​오, 역시.내 예상이 맞았다. 이 여자는 물건이다.​나는 씨익 웃었다.​"눈치가 빠르시네. 맞습니다. 공짜 아닙니다."​"얼마나 원하시나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없는데."​그녀는 당당했다. 빈털터리 주제에 기세 하나는 대단했다.​"필요 없어. 대신..."​나는 한 발짝 다가갔다. 내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나랑 동업합시다."​"동업이요?"​서백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웬 산적 같은 놈이 와서 동업을 하자니 황당할 것이다.​"당신, 장사 수완 좋다는 소문 들었어. 근데 힘이 없어서 저런 파리 떼들한테 뜯기고 있고."​나는 내 알통을 툭 쳤다.​"나는 힘은 차고 넘치는데, 재산을 굴릴 머리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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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동업자, 그리고 진짜 호랑이 3
​"어디 가느냐."​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이었다. 잠귀가 밝은 양반이라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모양이다. 사랑방 문을 열고 나온 김덕홍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일찍 일어나셨습니까."​나는 짐짓 밝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몸이 좀 찌뿌둥해서 운동이나 다녀오려고요. 뒷산에 약초도 좀 캘 겸 해서요."​"약초? 네가 언제부터 풀뿌리에 관심이 있었느냐."​형님의 시선이 내 빈손에 머물렀다. 호미도, 망태기도 없었다. 거짓말이 서툰 건지, 형님의 눈치가 백 단인 건지.​"맨손으로 가는 게 운동이 더 잘 됩니다. 그리고 요즘 산에 칡이 좋다더군요. 형수님 달여 드릴 것 좀 찾아보겠습니다."​"......"​김덕홍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어제 왈패들을 쫓아내던 동생의 괴력을 목격한 뒤로, 형님은 나를 대하는 게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걱정과 의구심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추월산(秋月山) 쪽은 가지 마라."​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요새 그쪽에 험한 짐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돈다. 나무꾼들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알고 있다.그래서 가는 거다.​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십쇼. 제가 뭐 간 덩이가 부은 놈도 아니고, 위험한 데를 왜 가겠습니까. 그냥 동네 뒷동산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점심때까진 돌아와라. 오늘은 글 공부를 좀 봐줄 테니."​"예, 예. 다녀오겠습니다!"​나는 형님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대문을 나섰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모른 척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오늘 글공부는 땡땡이 좀 쳐야겠습니다. 대신 쌀가마니를 들고 올 테니 용서해 주십쇼.​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속도를 높였다.​타닷.​발바닥이 흙길을 박차는 감각이 경쾌했다. 전생의 몸이었다면 10분도 안 돼서 헉헉거렸겠지만, 지금의 심장은 지칠 줄을 몰랐다. 펌프질할 때마다 전신으로 뿜어지는 에너지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담양의 진산, 추월산.​가을 달이 아름답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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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산군(山君) 사냥 1
​우지끈.​굵은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숲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적막 속에서, 놈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크다.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동물원에서 보던 유리 벽 너머의 호랑이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놈은 차원이 달랐다. 어깨높이만 내 가슴팍에 닿을 정도였고, 꼬리까지 합친 길이는 소형차 한 대보다 길어 보였다.​근육으로 꽉 찬 앞발은 성인 남자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저기에 한 대 스치기만 해도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겠구나. 황금빛 털 위로 흐르는 윤기, 그리고 검은 줄무늬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가히 산의 주인이라 불릴 만했다.​"어흥!"​놈이 포효했다.​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충격파였다.​쿠아아아앙-!​고막이 먹먹해지고 내장이 울렸다. 주변의 나뭇잎들이 후두둑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본능적인 공포. 다리가 후들거리고 당장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뇌를 지배하려 했다.​이것이 호환(虎患)의 공포구나.옛사람들이 왜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모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짐승이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다.​하지만.​'시끄럽네.'​내 이성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들끓어 오르다가도, 금강불괴의 육체가 주는 절대적인 자신감 앞에서 사그라들었다.​나는 귀를 후비며 놈을 쳐다보았다.​"목청 좋네. 근데 침은 좀 튀기지 말자."​놈의 눈이 가늘어졌다.자신을 보고도 얼어붙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었으리라. 놈은 자세를 낮추고 어슬렁거리며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탐색전. 꼬리가 채찍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바닥을 탁탁 쳤다.​나는 놈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맹수와 눈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다.​"크르르..."​놈이 이빨을 드러냈다. 송곳니 길이가 내 손가락보다 길었다. 입가에 엉겨 붙은 핏자국이 놈이 식인 호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덤벼.'​나는 양팔을 벌렸다.​놈의 뒷다리 근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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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산군(山君) 사냥 2
환호성이 들려야하는데 아쉽다.​바닥에 있던 바위가 쩍 갈라지고, 흙먼지가 폭죽처럼 솟구쳤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켁!" 하는 단말마와 함께 입에서 거품을 물었다.​보통 짐승이라면 즉사했을 충격. 척추가 부러지거나 내장이 파열됐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놈은 끈질겼다. 비틀거리며 다시 네발로 일어서려 했다.​"맷집 하나는 인정한다."​나는 놈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일어나려는 놈의 등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마운트 포지션 점령.300kg의 호랑이 위에 110kg의 내가 올라타 눌러버리는 형국.​"크르릉! 캬아악!"​놈이 고개를 돌려 내 허벅지를 물려 했다.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송곳니가 내 살을 파고들려 했다.​나는 주먹을 쥐었다.그대로 놈의 정수리를 내려칠까 하다가 멈췄다. 두개골이 깨지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서백설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가죽 상하게 하면 돈 깎아요.'​젠장. 비즈니스가 이렇게 힘들다.​나는 주먹 대신 팔을 뻗었다.​"가만히 있어! 가죽 상한다고!"​나는 놈의 목을 팔로 감았다.리어 네이키드 초크(Rear Naked Choke).​경동맥을 조여 뇌로 가는 혈류를 차단한다.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숨을 못 쉬고 피가 안 통하면 기절할 수밖에 없다.​내 팔뚝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놈의 굵은 목을 쇠사슬처럼 조였다.​"끄르르...!"​놈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숲 바닥의 흙이 사방으로 튀고, 놈의 뒷발이 내 등을 마구 긁어댔다. 옷이 찢어지고 등이 따끔거렸지만, 나는 그립을 풀지 않았다. 금강불괴가 아니었다면 이미 등짝이 다진 고기가 되었으리라.​"자라. 제발 좀 자라."​나는 이를 악물고 압력을 높였다.​1분 같은 10초가 흘렀다.​놈의 저항이 점차 약해졌다.크르르... 하는 그르렁 소리가 잦아들고, 파르르 떨리던 사지가 축 늘어졌다. 뒤집힌 눈동자에 흰자가 드러났다.​털썩.​놈의 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거친 숨소리가 멈추고, 산속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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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괴물, 영웅이 되다 1
​질질질.​거대한 물체가 흙바닥을 긁으며 끌려오는 소리가 마을 어귀의 정적을 깼다.​나는 어깨에 멘 칡덩굴을 고쳐 잡았다. 땀이 식으면서 등짝이 서늘했지만,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내 뒤에 매달린 300kg짜리 누런 덩어리가 뿜어내는 존재감 때문이었다.나의 명함이자, 자본금이며, 앞으로 내가 조선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밭에서 김을 매던 아낙네들이 고개를 들었다가, 내 뒤의 그림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어머나! 저, 저게 뭐야!""호, 호랑이다! 호랑이가 내려왔다!"​아낙들이 호미를 내던지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도망쳤다. 논에서 일하던 장정들도, 길가에서 놀던 아이들도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사람 살려! 산군이 내려왔다!"​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멀리서 보면 웬 거대한 산적 놈이 호랑이와 한 몸이 되어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도망가지 마십쇼! 잡은 겁니다!"​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도망치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그제야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호랑이가 살아서 뛰어오는 게 아니라, 축 늘어진 채 내 어깨에 연결된 덩굴에 묶여 질질 끌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담장 뒤에 숨어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촌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거... 덕령이 아니여?""세상에, 덕령이가 호랑이를 잡은겨?"​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공포가 호기심으로, 그리고 경악으로 바뀌는 건 찰나였다. 그들은 내 발치에 늘어진 거대한 황금색 털 뭉치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집채만 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마을 똥개들만 보던 그들에게 산군(山君)의 위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이보게, 이걸 정말 자네 혼자 잡았는가? 창도 활도 없이?""어제 산신령이 꿈에 나와서 꿀밤을 한 대 때리라길래 그랬더니 기절하더군요."​나는 농담을 던지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길 좀 비켜주십쇼. 이놈이 좀 무거워서요."​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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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괴물, 영웅이 되다 2
그때, 바닥에 엎드려 있던 최가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저, 저기... 대장님..."​"뭐야. 아직도 안 갔냐?"​내가 인상을 쓰자 최가가 바닥에 머리를 쾅 박았다.​"형님! 아니, 대장님! 저희를 받아주십쇼!""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똥을 푸라면 풀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겠습니다!"​뒤에 있던 빚쟁이 놈들도 덩달아 절을 했다.​"저희도 받아주십쇼! 어제는 저희가 눈깔이 삐었었습니다!"​나는 팔짱을 끼고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한심한 작태였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소인배들.​내치려 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있어 봤자 밥만 축낼 게 뻔하니까.​하지만 서백설이 내 팔을 툭 쳤다.​"일손 필요하지 않아요?"​"일손?"​"저 큰 걸 누가 해체해요? 당신이 할 거예요? 아님 내가 해요?"​아.맞다. 도축.​호랑이는 잡는 것도 일이지만, 해체하는 건 더 큰일이다.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추려내야 한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다.​서백설이 턱짓으로 놈들을 가리켰다.​"저 녀석들, 원래 백정 출신 왈패들이에요. 칼 쓰는 건 기가 막히죠. 마침 제 발로 기어 들어왔으니 부려먹으면 딱이겠는데요?"​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공짜 인력을 발견한 악덕 고용주의 눈빛이었다.​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이 여자는 물건이다.​"야, 니들."​내가 부르자 놈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살고 싶다고 했지?"​"네! 무조건 충성하겠습니다!"​"좋아. 그럼 밥값은 해야지."​나는 호랑이를 발로 툭 찼다.​"지금 당장 이거 작업해. 가죽 벗기고 고기 분류하고. 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면..."​나는 옆에 있던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볍게 으스러뜨렸다.​빠직.​"니들 뼈도 이렇게 분리될 줄 알아. 알겠어?"​"아,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놈들은 군말 없이 품에서 칼을 꺼내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내 주먹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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