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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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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고독한포켓

14일간의 계약 연애

14일간의 계약 연애

​"딱 보름만 제 애인인 척해 주시죠. 원하는 건 뭐든 들어드릴 테니." ​14일간의 시한부 가짜 연애. 그 아슬아슬하고 잔인한 비즈니스의 톱니바퀴가, 그렇게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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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8화
"파리에는 도현 씨 옷이 이만큼 있어요. 서울에도 제 공간을 똑같이 만들어 줘요."– 드레스룸 절반 비워 둘게."절반까지는 필요 없어요."– 필요해."저는 아직 파리에서 근무하잖아요."– 당신 자리라는 표시가 있어야 해."옷 몇 벌이면 충분해요."– 절반.도현은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소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파리 드레스룸도 절반씩 써요. 도현 씨가 한쪽 구석에 출장용 옷만 걸어 두는 건 싫어요."– 이번 주 안에 더 보내."옷장을 채우려고 항공 화물까지 쓰려고요?"– 당신이 옷장을 열 때마다 내 옷이 보여야 하니까."지금도 충분히 보여요."– 더 보여야 해.소율은 말릴 수 없다는 듯 웃었다.두 사람은 욕실 용품과 실내화, 충전기처럼 매번 가방에 넣었다 뺐다 하던 물건도 양쪽 집에 따로 두기로 했다. 파리에는 이미 소율이 쓰는 머그잔 옆에 도현의 검은 잔이 놓여 있었고, 성수동 주방에는 소율이 좋아하는 연한 헤이즐넛 커피를 채워 두기로 했다.주소는 달라도 어느 집에서든 상대를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남은 문제는 침실이었다.도현은 성수동 침실을 비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는 내가 정할게."왜 침실만 도현 씨가 정해요?"– 주방, 식탁, 서재까지 전부 당신 의견대로 했잖아."같이 정한 거죠."– 그럼 침실도 내 의견을 우선해서 같이 정해.소율은 화면 너머로 현재 침대를 바라봤다."뭘 바꾸고 싶은데요?"– 침대를 더 크게."지금도 충분히 커요."– 당신이 자다가 멀리 가."도현 씨가 가운데까지 오니까 제가 밀리는 거예요."– 그래서 더 큰 게 필요해."침대가 넓어지면 도현 씨도 더 멀리 따라올 것 같은데요."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침대 양쪽에 조명도 따로 두고, 당신이 책 읽을 수 있게 등받이도 바꿀 거야. 커튼은 완전 차광으로 하고."그건 좋아요."– 침대는?"조건이 있어요."– 말해."침대 크기보다 퇴근 시간부터 지켜요. 아무리 좋은 침대를 놓아도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87화
"그럼 나란히 놓아요."– 마주 보는 게 집중하기 좋지 않아?"도현 씨 얼굴 보면 집중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그러니까 같은 방향을 보자고요."– 옆에 있으면 더 가까운데."회의 중에 손잡지 않으면 돼요."– 그 조건은 동의 못 해.소율이 웃자 도현의 입가도 느슨해졌다.두 책상 사이에는 작은 수납장을 하나 두기로 했다. 절반은 도현의 서류, 나머지 절반은 소율이 서울에서 사용할 자료를 넣을 공간이었다. 충전기와 필기구도 각각 준비하되, 둘이 함께 쓰는 다이아몬드 만년필은 중앙 서랍에 두자는 의견까지 나왔다.자산관리 담당자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신규 주택 후보 검토는 전부 중단할까요?도현은 휴대전화 화면 속 소율을 바라봤다.– 당신 결정은 확실해?"네. 성수동 집을 고쳐서 같이 살고 싶어요."– 후회 안 해?"새집에는 우리 기억이 없잖아요."소율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저 집에서 처음 같이 밥을 먹었고, 가짜 커플 사진도 찍었어요. 비 오는 날 도현 씨 셔츠를 입고 밤을 보냈고요. 그때는 둘 다 그 집에서 진짜 연인이 될 줄 몰랐지만, 지금은 알잖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시작한 집을 우리답게 바꾸면 돼요."도현은 말없이 거실을 둘러봤다.오래전 소율이 어색하게 서 있던 자리, 카메라를 놓았던 소파 앞, 세탁한 셔츠와 메모를 발견했던 식탁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알겠어.그가 담당자를 향해 말했다.– 신규 주택 검토는 중단해 주세요. 성수동 펜트하우스 내부 공사 범위만 다시 산정해 주십시오.담당자가 바로 물었다.– 예산 기준은 어떻게 잡을까요?도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소율이 즉시 끼어들었다."필요한 만큼의 상한부터 정해 주세요. 집을 한 채 더 살 돈으로 식탁을 사면 안 돼요."담당자는 누구의 말을 최종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도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한 팀장 의견을 우선해 주세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86화
소율은 사진을 끝까지 본 뒤 도현에게 물었다."마음에 들어요?"– 조건은 좋아."살고 싶어요?"도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소율은 그 침묵에서 답을 읽었다. 숫자와 조건으로는 부족한 점이 없지만, 도현에게도 저 집은 아직 주소와 평면도에 불과했다."설마... 계약부터 한 건 아니죠?"– 안 했어.도현의 대답이 단호하게 돌아왔다.– 후보만 준비했어. 당신이 싫다고 하면 전부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고.소율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예전의 도현이었다면 가장 좋은 집을 먼저 계약한 뒤 소율에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 그녀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더 비싸고 더 큰 집을 찾았을지도 몰랐다.지금은 결정을 멈춰 두고 소율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저는 새집 싫어요."– 이유를 말해줘."지금 성수동 집이 좋아요."도현이 거실을 둘러봤다.– 생활감이 없잖아."그럼 만들면 되죠."소율은 노트북 옆에 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영상통화로 바꿔요. 집 안을 보여줘요."– 지금?"네. 새집 보러 갈 필요 없이 우리가 살 집부터 제대로 볼래요."도현은 담당자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휴대전화로 통화를 전환했다. 화면이 흔들리다가 성수동 펜트하우스의 거실을 비췄다."우선 창가로 가요."– 왜?"햇빛 확인하려고요."도현은 순순히 창가로 걸어갔다. 서울의 오후 햇빛이 통유리창을 통과해 거실 바닥 위로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저기 작은 식탁을 놓으면 좋겠어요."– 지금 식탁이 있는데?카메라가 8명이 앉아도 넉넉한 긴 식탁을 비췄다. 도현이 혼자 살 때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식사보다 서류를 펼쳐 놓는 날이 더 많았다."저건 회의용 같아요. 아침에 둘이 마주 앉으면 거리가 너무 멀어요."– 내 옆에 앉으면 되잖아."그러면 작은 식탁이면 더 가깝죠."도현은 반박하지 못했다.소율은 창가를 다시 보여 달라고 했다. 햇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를 확인한 뒤 2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식탁을 놓자고 제안했다. 도현은 바로 자산관리 담당자에게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85화
[파리 센강 프러포즈로부터 약 4개월 2주 후, 결혼식 약 6주 전]서울 시각 일요일 오후 3시.한소율은 파리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화면 속 차도현은 서울 성수동 펜트하우스의 긴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부동산 자산관리 담당자가 두꺼운 서류철 4개를 가지런히 펼쳐 놓고 있었다.서류 표지에는 서울의 최고급 단독주택과 펜트하우스 주소가 적혀 있었다."이게 다 뭐예요?"소율이 묻자 도현은 첫 번째 서류철을 카메라 앞으로 밀었다.– 서울 신혼집 후보."우리 서울 집은 지금 도현 씨가 앉아 있는 곳이잖아요."– 혼자 살 때 고른 집이야. 당신하고 같이 살기에는 부족한 게 많아.소율은 화면 너머로 익숙한 거실을 살폈다.무채색 소파와 낮은 테이블, 벽면을 채운 책장, 장식 하나 없이 정돈된 넓은 공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사람의 체온보다 모델하우스의 냉기가 먼저 느껴지던 집이었다.계약 연애 4일 차, 도현은 저 거실에 삼각대를 세우고 다정한 연인의 집 데이트를 연출하려 했다. 배달 음식까지 반듯하게 옮겨 담은 남자가 웃는 표정은 준비하지 못해 몇 번이나 사진을 다시 찍었다.폭우가 내리던 밤에는 젖은 소율에게 자신의 셔츠를 내줬고, 침실을 양보한 채 거실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소율은 세탁한 셔츠와 짧은 메모만 식탁에 남기고 먼저 출근했다.차갑고 완벽하던 집에는 이미 두 사람의 서툰 시작이 남아 있었다."어떤 점이 부족한데요?"– 우선 주방이 좁아."도현 씨 혼자 살 때는 넓다고 했잖아요."– 혼자 쓸 때 기준이지."파리에서는 둘이 잘 쓰고 있는데요."– 당신이 요리할 때 내가 옆에 서면 자꾸 비키라고 하잖아."칼 쓰는 사람 옆에서 계속 집어 먹으니까 그렇죠."– 그걸 막으려면 조리대가 더 넓어야 해.도현은 진지했다.소율은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그 이유로 집을 새로 사려고요?"– 그것만은 아니야. 당신 물건을 둘 공간도 부족하고, 서재 책상도 하나뿐이야.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84화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쇼룸 책임자였다."그러면 예정된 하객 규모에 맞춰 드레스 동선도 그대로 준비하겠습니다."도현이 낮게 덧붙였다."대신 신부 대기실 경호는 늘려 주십시오.""도현 씨.""선택은 존중했어. 협상은 별개야.""협상도 끝났어요.""그건 아직 합의 안 했는데."이 회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신랑 출입 금지에 이어 신랑 발언 금지도 붙이기 전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최종 피팅은 11시 40분에 끝났다.소율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피팅룸에서 나왔다. 도현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고, 이번에는 화면도 정상적으로 넘기고 있었다.그는 소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났어?""네. 이제 회장님과 점심 먹고 회사로 가면 돼요.""드레스는 확정했고?""확정했어요. 결혼식 날까지 변경 없음. 사전 공개도 없음."도현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이 회장이 먼저 가방을 들었다."나는 먼저 내려가마. 소율아, 10분 뒤에 식당으로 와라.""네, 회장님."회장은 도현을 한 번 바라본 뒤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수행비서도 눈치를 살피다 결재된 태블릿을 챙겨 뒤따랐다.도현은 빈 쇼룸 입구를 확인했다."왜 당신만 남으래?""저만 남으라고 하신 적 없는데요.""10분을 줬잖아.""회장님이 도현 씨한테 주신 시간일 수도 있죠. 드레스 못 본 충격에서 회복하라고요."소율은 태연하게 말한 뒤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지나도 도현이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봤다."안 와요?"그제야 도현이 움직였다.소율이 멈춘 곳은 공식 피팅룸과 떨어진 작은 쇼룸이었다. 문에는 예약 중이라는 표시가 걸려 있었고, 안쪽 조명은 모두 켜져 있었다."여긴 왜 왔어?""회장님이 준비하신 두 번째 드레스가 있어요. 본식 드레스보다 간소해서 저녁 행사 때 입을지 고민 중이에요.""그것도 결혼식 날까지 못 봐?""이건 보여주려고 데려왔어요."도현의 표정이 달라졌다.소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183화
첫 번째 드레스는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묵직했다.직원 3명이 치맛자락을 펼치고 허리선을 맞췄다. 소율은 높은 단상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거울 속에는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천과 길게 이어진 스커트가 한꺼번에 담겼다.이 회장은 소율의 뒤에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회장님, 이상한가요?""이상해서 보는 게 아니다."회장은 거울 속 소율과 눈을 맞췄다."잘 골랐구나. 네가 드레스를 입은 건데, 드레스보다 네 얼굴이 먼저 보인다."소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도현 씨는 드레스만 볼 수도 있어요. 가격이 얼마인지, 움직일 때 위험한 부분은 없는지부터 확인할 사람이잖아요.""그 녀석이 오늘 가격을 물으면 내가 성북동 결혼식 비용까지 전부 청구할 게다.""그러면 결혼식을 비공개로 바꾸자고 할지도 몰라요.""설마 거기까지 가겠느냐."커튼 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합니까?"회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 커튼을 바라봤다."아직 7분밖에 안 지났다.""안에서 제 이름이 들렸습니다.""네 흉을 보고 있었다. 들어올 명분으로 쓰지 마라.""소율아."이번에는 부르는 대상이 바뀌었다."왜요?""불편한 데 없어?""네, 괜찮아요.""정말 괜찮아?""도현 씨가 밖에서 계속 말 거는 것만 빼면요."커튼 너머가 조용해졌다.소율은 거울을 보다가 문득 장난기가 생겼다. 결혼식 날까지 온전한 모습을 숨기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기다리는 도현의 표정도 궁금했다.그녀는 직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잠시 뒤, 커튼 아래로 하얀 드레스 자락이 천천히 밀려 나갔다. 자수와 작은 비즈가 조명 아래서 잔잔하게 반짝였다.바깥에서 움직이던 기척이 멎었다."...한소율.""왜요?""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자락만 보여주는 거.""커튼이 조금 짧은가 봐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율은 드레스 자락을 거둬들였다가 몇 초 뒤 다시 내보냈
Last Updated: 2026-09-20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역사 속, 시기와 모함에 억울하게 스러져간 영웅들. 그들의 한(恨) 서린 육체에, 치열한 21세기를 악착같이 물어뜯며 살아남은 영업부장 강철민의 영혼이 깃든다. ​"핍박 당해 얌전히 죽으라고? 웃기지 마. 내 앞을 막는 건 다 씹어 먹을 거니까." ​첫 번째 무대, 임진왜란.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에 빙의한 그는 희생양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한다. 간자들의 수작도, 몰려드는 적들의 검격도, 야수처럼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 정교하게 다듬어진 움직임 대신,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무쌍으로 얽매인 사슬을 산산조각 낸다. ​하지만 김덕령의 피 튀기는 반격은 단지 시작이었다. 시대를 넘어, 또 다른 억울한 영웅들이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선을 넘어, 억울함이 남은 모든 역사 속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운명을 물어뜯는 빙의자의 압도적인 구원기가 시작된다! #로맨스 한스푼 아주 약간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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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4화: 인간 믹서기 2
그때였다.​툭.​내 손에 들린 미숙이의 머리 부분이 부러져 나갔다.너무 세게, 너무 많이 때린 탓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참나무라도 내 괴력과 왜군의 갑옷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아, 젠장. 미숙아..."​나는 부러진 자루를 보며 혀를 찼다. 미령이가 써준 글씨가 반으로 갈라졌다. AS 맡겨야겠네.​내가 무기를 잃자, 왜군들의 눈이 다시 번들거렸다.​"무기가 부러졌다! 지금이다!""쳐라!"​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쇄도했다.​나는 부러진 막대기를 던져버리고 빈손을 펴 보였다.​"무기가 없으면 못 싸울 줄 알았냐?"​나는 달려드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렸다.​"너, 내 무기 해라. 우린 오늘부터 1일이야."​"나, 나니...?"​나는 놈의 발목과 목덜미를 잡고, 인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붕!​"으아아악!"​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다른 왜군들을 후려쳤다. 갑옷 입은 성인 남자의 무게 70kg. 거기에 내 회전력이 더해지니 웬만한 철퇴보다 위력이 좋았다.​퍼억! 콰당탕!​인간 몽둥이에 맞은 놈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내 손에 잡힌 놈은 충격으로 기절해 혀를 빼물고 있었다. 내구도가 다 되었군."남자가 이래서야. 헤어져."​나는 놈을 적진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다.​"자, 다음 무기!"​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왜군의 장창을 집어 들었다. 3미터가 넘는 긴 창.​나는 창을 잡고 휠윈드를 돌았다.​슉! 슈슉!​창날이 춤을 추며 놈들의 목을 베고 다리를 잘랐다.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리치.​"히, 히익...""도망쳐! 저건 사람이 아니야!""오니! 오니가 나타났다!"​결국 놈들이 무너졌다.지휘관은 죽었고, 정예병들은 갈려 나갔다. 눈앞에 있는 건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3미터 거인(놈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공포는 전염병보다 빨랐다.나를 에워쌌던 놈들이 무기를 버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튀어라! 살고 싶으면 튀어!"​한 명이 등을 보이자,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59화: 인간 믹서기 1
​두두두두!​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붉은 갑옷을 입은 왜군 부장. 그가 쥔 긴 창(야리)의 끝이 내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에 장수의 체중까지 실린, 운동에너지의 결정체.​보통 사람이라면 피하거나 방패 뒤로 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뒤에 있는 현무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 부하들이 다친다.​나는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바닥에 박았다.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다.​'와라.'​거리는 10보, 5보, 1보.​놈의 기합 소리와 함께 창끝이 섬광처럼 찔러 들어왔다.​"죽어라!"​나는 왼손을 뻗었다.창날을 잡는 게 아니다. 그건 도박이다. 나는 창대, 정확히는 날 바로 밑의 목 부분을 노렸다.​탁!​잡았다.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마찰열이 느껴졌다. 엄청난 충격이 어깨를 타고 척추까지 전해졌다. 내 몸이 뒤로 밀려나며 흙바닥에 두 줄기 고랑이 파였다.​"크윽...!"​하지만 거기까지였다.나는 밀려나는 와중에도 버텼다. 금강불괴의 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역발산의 근육은 버텨냈다.히히힝! 푸르르!​말이 울며 앞발을 쳐들었다. 내가 창을 잡고 버티자, 달 리던 말의 목이 꺾일 듯 멈춰 섰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는 강제 정지.​"뭐, 뭐냐!"​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기마 돌격을, 그것도 정면에서 한 손으로 막아내다니. 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내 차례다."​나는 잡은 창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안장 위에 있던 부장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놈은 창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내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내려와서 얘기해."​나는 창을 놓아버리고, 허공에 뜬 놈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콰앙!​"끄악!"​놈의 등짝이 흙바닥과 키스했다. 붉은 갑옷이 찌그러지고 투구가 벗겨져 나갔다.​나는 놈의 가슴팍을 밟았다.우지끈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조선의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52화: 현무(玄武), 시동 2
볼링핀? 아니, 그보다 더 처참했다. 전면부 충각에 받힌 병사들은 뼈가 으스러지며 허공으로 솟구쳤고, 바퀴에 깔린 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짓이겨졌다.​우지끈! 뿌직!​끔찍한 파열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현무 2호기와 3호기도 뒤따라 적진을 유린했다.​"으아악! 다리가! 내 다리!""괴물이다! 괴물이 내려왔다!"​왜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열은 무너졌고, 지휘 체계는 마비되었다.​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발사!"​현무 2호기 안에서 나대용의 목소리가 들렸다.​펑! 펑! 펑!​현무의 옆구리와 전면부에 뚫린 총안(총구멍)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승자총통과 조총을 거치해 둔 것이다.​이동 요새.움직이는 토치카.​가까이 붙으려던 왜군 창병들이 산탄을 맞고 쓰러졌다.​"이때다! 돌격!"​나는 바위 뒤에서 튀어 나갔다.​"와아아아!"​익호군 본대가 내 뒤를 따랐다.현무가 길을 터주고, 혼란에 빠진 적들을 우리가 쓸어 담는 그림. 완벽한 전술이었다.​나는 몽둥이 '미숙이'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비켜! 길 막지 마!"​내 앞을 막아선 사무라이 하나가 칼을 휘둘렀다.​챙!​칼이 내 어깨를 때렸지만, 찢어진 건 옷뿐이었다.​"아프지도 않다."​나는 미숙이로 놈의 뚝배기를 깼다.​퍼억!​투구가 찌그러지며 놈이 고꾸라졌다.​"대장님! 뒤쪽!"​최가가 소리쳤다.돌아보니 왜군 창병 셋이 나를 에워싸고 찌르려 하고 있었다.​"합!"​나는 쇠스랑을 던져 한 놈의 가슴을 뚫고, 나머지 두 놈의 창을 겨드랑이에 끼웠다.​"어딜 쑤셔!"​힘을 주어 창대를 뚝 부러뜨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놈들의 머리채를 잡았다.​꽝!​박치기.두 놈의 이마가 부딪치며 쌍으로 기절했다.​"괴, 괴물...!"​주변에 있던 왜군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앞에는 무적의 전차, 뒤에는 칼이 안 통하는 거인. 그들에게 이곳은 지옥도였다.​하지만 왜군은 많았다. 1,000명이 넘는 병력이다. 선두가 무너졌어도 뒤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51화: 현무(玄武), 시동 1
​전투가 끝난 고갯길은 고요했다.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익호군 녀석들의 표정은 밝았다.​"대장님! 이 총이란 거, 생각보다 물건입니다!"​최가가 노획한 조총을 들고 벙글거렸다. 녀석은 어깨에 걸친 끈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조심해서 다뤄. 심지에 불붙어 있으면 오발 난다."​나는 녀석들에게 조총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전생에 군대에서 배운 사격술과는 다르지만, 원리는 간단했다. 화약 넣고, 총알 넣고, 쑤시고, 불 붙이고, 빵.​다행히 익호군 중에는 산에서 멧돼지 좀 잡아본 포수 출신들이 꽤 있었다. 그들에게 조총을 쥐여주니 금세 적응했다.​"활보다 사거리는 짧아도 위력은 죽여줍니다요. 멧돼지 가죽도 한 방에 뚫겠습니다."​"그래. 이제 우린 칼 들고 설치는 원시인이 아니다. 화력전이다."​나는 노획한 조총 50정을 포수들에게 지급했다. 나머지 병력은 창과 방패(전투 중에 주운 왜군의 갑옷 등)로 무장시켰다.​승리의 기쁨도 잠시, 척후를 나갔던 춘식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대,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왜. 똥이라도 마렵냐?"​"저, 저기 아래! 산 아래를 보십쇼! 새까맣습니다!"​춘식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이치 고개 아래, 굽이치는 산길.그곳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 사이로 수천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선봉대와는 차원이 달랐다.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족히 천 명, 아니 그 이상은 되어 보였다.​왜군 본대(本隊).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제6군 주력 병력이었다.​"워메... 저게 다 사람이여? 개미 떼여?"​최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방금 승리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공포가 엄습하는 듯했다. 100명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뒤에 1,000명이 넘게 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쫄지 마라."​나는 녀석의 등짝을 후려쳤다.​"어차피 이 좁은 고갯길엔 한 번에 많이 못 올라와. 병목 현상 알지? 놈들은 줄 서서 죽으러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50화: 첫 번째 손님 2
선봉대장.​그는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뛰어난 검술로 익호군 두어 명을 베어 넘기며 저항하고 있었다.​"오너라! 조선의 오니야!"​장수가 나를 발견하고 칼끝을 겨눴다. 눈이 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죽여주마! 내 이름은..."​"관심 없어."​나는 말을 자랐다. 죽을 놈 이름 따위 외워서 뭐 하나.​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장수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이야압!"​발도술(拔刀術).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베는 기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목을 노린 일격.​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나는 피하지 않았다.대신 왼팔을 들어 올렸다.​챙-!​맑은 쇳소리가 났다.장수의 칼이 내 팔뚝에 박히는 대신, 튕겨 나갔다. 옷감이 찢어지고 불꽃이 튀었지만, 내 피부는 멀쩡했다.​"뭐, 뭐야...?"​장수의 표정이 멍청해졌다.사람의 팔을 베었는데 쇠기둥을 친 것 같은 반동이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칼 좋네. 근데 주인이 좀 약하다."​나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이거 놔라! 이 괴물!"​놈이 발버둥 치며 칼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퍽, 퍽. 하지만 이쑤시개로 코끼리 가죽을 찌르는 격이었다.​"아프진 않은데, 옷이 망가지잖아. 이거 우리 마누라... 아니, 동업자가 만들어준 건데."​서백설이 밤새워 만들어준 붉은 누빔옷. 구멍이 숭숭 뚫린 걸 보니 등짝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화가 났다.​"변상은 네놈 목숨으로 해라."​나는 오른손에 든 미숙이를 들어 올렸다.​"잘 가라. 조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크으윽... 도요토미 님께서 복수를..."​퍼억!​놈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졌다. 더 이상의 유언은 없었다.​나는 놈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살아남은 왜군은 없었다. 도망치려던 놈들은 함정에 빠져 대나무 창에 꿰뚫렸거나, 매복조에게 덜미를 잡혔다.​"대장님! 상황 종료입니다!"​최가가 피 묻은 낫을 닦으며 달려왔다. 얼굴에 튀긴 피 때문에
Last Updated: 2026-09-19
Chapter: 49화: 첫 번째 손님 1
​콰아아앙-!​세상은 하얀 연기와 붉은 불꽃,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현무 3대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조란탄(鳥卵彈).새알만 한 쇠구슬과 날카로운 철편 수백 개가 부채꼴로 퍼져나가며 좁은 산길을 덮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강철의 비'였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죽음의 소나기.​"갸아아악!""메, 메가...!(내 눈이...!)"​선두에 섰던 조총수들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졌다. 뒤따르던 창병들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벌집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고갯길.매캐한 유황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나는 평상 위에 앉아 그 아비규환을 지켜보았다.손에 든 술잔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거참, 화력 한번 화끈하네."​나대용, 이 양반. 물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조선의 화포 기술에 현대의 산탄 개념을 섞었더니 이런 괴물이 탄생했다.​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100여 명의 선봉대 중 서 있는 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성한 놈은 거의 없었다.​"바, 바카나...(말도 안 돼...)"​왜군 장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고 있었다. 투구는 벗겨져 나갔고, 갑옷 여기저기에는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 운 좋게 직격탄을 피한 모양이다.​그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조선의 오합지졸 군대를 예상하고 왔을 텐데, 눈앞에 나타난 건 괴물 같은 전차와 총알을 튕겨내는 거인, 그리고 지옥불이었으니 멘탈이 나갈 만도 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삐걱거리는 평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어때? 조선의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드냐?"​내가 일본어로 묻자, 장수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네놈...! 오니냐? 사람이냐?"​"글쎄다. 네놈들한테는 오니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걸."​나는 육모방망이 '미숙이'를 어깨에 툭툭 쳤다.​"자, 1차 코스는 끝났고. 이제 2차 가야지?"​나는
Last Updated: 2026-09-19
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형편없는 쌀이로군. 하지만 정성은 있다." 1936년, 마지막 쌀 한 줌으로 올린 밥이 70년간 잠들어 있던 삼강의 터주신을 깨웠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고, 그녀는 하루하루 늙어간다. "네 눈가에 진 주름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증거인데, 왜 부끄러워하느냐." 불멸의 신과 필멸의 여자, 낡은 주막에서 피어난 시간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 작품은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리에 실존하는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문화재)과,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주모 유옥연 여사(1900년대~2005년)의 삶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세 강이 만나는 나루터 위의 낡은 주막, 외상값을 흙벽에 새기던 풍경, 그리고 한 여인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부뚜막의 온기는 실제 역사에서 빌려왔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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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에필로그: 신령들의 봄날 3 - 완결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장터 끝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강끝 찻집'이라는 간판 아래로 커다란 통유리창이 나 있었다. 창가에서는 봄볕이 든 논과 멀리 흐르는 강줄기가 한눈에 보였다. 휘는 검은 커피를 주문했고, 옥연은 딸기크림이 올라간 우유와 작은 케이크를 골랐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던 옥연이 가격을 보고 휘에게 몸을 기울였다. "국밥보다 비쌉니다." "먹고 싶은 것을 고르거라." "딸기 몇 알에 이 돈이면 국을 몇 그릇이나..." "오늘은 장사하러 나온 것이 아니다." 휘가 카드를 기계에 갖다 댔다. 옥연은 결제가 끝나는 짧은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외상 장부에 빗금 하나 긋지 않고 음식값이 오가는 세상은 여전히 신기했다. 창가에 앉은 휘가 검은 커피를 마셨다. 그의 미간이 즉시 좁아졌다. "어떠십니까?" "탄... 물 같구나." "요즘 사람들은 그 맛으로 마신답니다." "왜 돈을 내고 탄 물을 마시느냐." 옥연은 웃음을 참으며 딸기크림을 한 숟갈 떴다. 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옥연의 잔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제 것입니다." "간을 보았다." "우유에도 간을 봅니까?" "지나치게 맛있... 아니, 달군." 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옥연은 잔을 돌려받지 않고 케이크를 잘라 그의 접시에 놓았다. 휘가 거절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기 몫을 먹었다. 카페 한쪽에는 네 장의 사진이 한 줄로 나오는 작은 촬영 기계가 있었다. 젊은 손님들이 그 안에 들어가 우스운 머리띠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옥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휘는 빈 컵을 내려놓았다. "해보자." "저 안에서 무엇을 하는 겁니까?" "아마도 사진을 찍는 모양이다." 옥연의 걸음이 멈췄다. 휘는 오랫동안 낯선 사람의 눈에도, 사진기에도 제대로 모습을 남기지 못했다. 옥연이 인간으로 살던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지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에필로그: 신령들의 봄날 2
두 사람은 먼저 삼강문화단지의 봄 장터로 향했다.주말을 맞아 강문화전시관 앞에는 천막과 작은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잔디밭 한쪽에는 봄 행사 기간에만 운영하는 작은 유원시설이 들어서 있었다.회전목마와 미니 관람차, 어린이용 범퍼카가 알록달록한 불빛을 켜고 손님을 기다렸다.옥연은 입구에 서서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저 말들은 살아 있지도 않은데 계속 같은 자리를 도는군요.""타보고 싶으냐?""아이들이 타는 것 아닙니까?""저기 어른도 타고 있다."휘가 가리킨 곳에는 어린 딸을 안은 아버지가 작은 백마 위에서 더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옥연이 망설이는 사이 휘는 이미 표를 샀다. 막내의 손녀가 준 카드를 기계에 갖다 대자 짧은 소리와 함께 결제가 끝났다."도련님, 방금 돈이 나간 겁니까?""그렇다는군.""장부에도 적지 않았는데요?""이 안에 장부가 들어 있다고 했다."휘가 카드를 들어 보였다.옥연은 얇은 카드 안에 수많은 빗금이 들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느라 잠시 진지해졌다.회전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옥연은 남색 안장이 얹힌 흰 말을 골랐고, 휘는 바로 옆의 검은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자 말들이 음악에 맞춰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처음 한 바퀴 동안 옥연은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두 번째 바퀴에 들어서자 굳었던 어깨가 풀렸고, 세 번째 바퀴에는 휘를 돌아보며 웃었다. 봄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과 풀어 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휘는 말이 위로 올라가도 옥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앞을 보셔야지요.""말이 정해진 길로 가는데 볼 필요가 있느냐.""그럼 왜 타셨습니까?""네 얼굴을 보려고."옥연의 두 뺨이 금세 붉어졌다.회전목마를 세 번 더 태워도 좋을 만큼 만족한 휘와 달리, 옥연은 한 바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주변의 젊은 연인들이 두 사람을 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음에는 저것을 타자."휘가 미니 관람차를 가리켰다.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에필로그: 신령들의 봄날 1
- 2026년 어느 봄날 -삼강주막의 회화나무에 연둣빛 잎이 돋기 시작한 아침이었다.옥연은 대문 밖에 서서 신작로 끝을 바라보았다. 흰 운동화를 신은 발끝이 문화단지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반쯤 나가 있었다."정말 괜찮습니까?""어제도 세 번 확인했다."휘가 옥연의 곁에 섰다.그는 짙은 남색 셔츠에 검은 바지, 무릎까지 내려오는 얇은 봄 외투를 입고 있었다. 모두 신력으로 형상화한 옷이었으나, 천의 주름과 단추까지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옥연도 오늘만큼은 익숙한 저고리와 치마, 흰 앞치마를 벗었다.아이보리색 블라우스 위에 연한 하늘색 카디건을 걸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차분한 붉은색 치마를 입었다. 휘가 골라준 흰 운동화는 고무 밑창이 낯설었지만 짚신보다 훨씬 가벼웠다."도련님은 요즘 젊은이 옷도 남색뿐이군요.""너는 붉은 치마를 골랐군.""남색도 붉은색도 평생 입던 색이라 눈에 익어서요."​"너는 색을 둘씩이나 마음에 두는 모양이지만, 나는 칠백 년 동안 오직 한 가지만 눈에 담아왔다. 옷 색도, 사람도."옥연은 반박하려다가 그 말이 맞아 입을 다물었다.두 사람이 현대의 옷과 물건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몇 해 전부터 막내의 손녀가 주막을 찾아올 때마다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증조할머니를 밖으로 모시고 나갈 날이 분명 올 거라며, 동영상으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틈틈이 보여주었다.처음에는 옥연도 손바닥만 한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광경을 신기해했다. 막내의 손녀는 현대 사람들이 입는 옷부터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법, 신호등을 건너는 법과 카드로 값을 치르는 모습까지 차례로 찾아 보여주었다.휘는 그런 것을 몰라도 사람 사는 세상에 나가면 알아서 할 수 있다며 몇 번이나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막내의 손녀가 일부러 카드를 기계 틈에 거꾸로 꽂는 것이라 떠보자, 방금 동영상에서는 기계에 갖다 댔다며 곧바로 바로잡았다.오늘 두 사람이 형상화한 옷도 막내의 손녀가 보여준 봄나들이 동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제95화: 삼강, 그 등불 아래 6
"아무도 안 계세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닫히지 않은 대문을 밀었다. 눈 묻은 운동화 한 켤레가 1936년 늦가을 옥연의 젖은 짚신이 그랬던 것처럼 삼강주막의 문턱을 넘었다. 부엌 안은 어두웠다. 그 순간 아궁이 깊은 곳에서 푸른 불씨와 금빛 불씨가 함께 피어났다. 마른 장작에 저절로 불이 붙었고 무쇠솥의 뚜껑 사이로 하얀 김이 올랐다. 아이의 얼어붙은 손가락이 조금씩 녹았다. 솥 안에서는 시래기와 무가 든 국이 끓고 있었다. 빈 상 위에는 보리밥 한 그릇과 김치가 놓였고, 젖은 신발을 말릴 짚과 수건도 가지런히 나타났다. 등불 아래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남색 도포를 입은 젊은 사내와 남색 치마에 흰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인이었다. 여인의 검은 머리에는 은빛 불씨로 된 비녀가 꽂혀 있었고, 국자를 든 손바닥에는 오래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이는 무서워 달아나지 않았다. 따뜻한 밥 냄새가 먼저 배를 울렸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대청 끝에 무릎을 굽혔다. "길을 잃었니?" "엄마를 놓쳤어요." "이름과 버스를 기억하느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는 대문 밖 눈길을 바라보았다. "큰길에서 사람들이 찾고 있다. 먹는 동안 길을 밝혀두면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흘러나가 눈 쌓인 신작로에 낮은 길을 만들었다. 불빛은 멀리서 아이를 찾는 어른들의 발 앞까지 이어졌다. 옥연은 국자를 내려놓고 아이 앞으로 다가앉았다. 마른 짚을 엮어 만든 작고 포근한 짚신 한 켤레를 아이의 발치에 가만히 내려놓으며, 그녀는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얼어붙은 발로 더 걷다간 발가락이 다 상하겠구나. 이 짚신으로 신고 툇마루 위로 올라앉으렴." ​아이의 젖은 운동화 끈을 조심스레 풀어낸 옥연이 아이의 어깨에 둘러진 가방끈으로 손을 뻗었다. ​"젖은 신발과 무거운 가방은 밥을 다 비우는 동안 아궁이 곁에 두어 뽀송하게 말려줄 터이니. 자, 어서 뜨신 국물부터 한술 뜨고 있거라." ​옥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제94화: 삼강, 그 등불 아래 5
- 2005년 10월 1일 새벽 -영희가 가장 먼저 대청으로 나왔다.어머니의 숨을 확인하러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다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새벽까지 참았다. 밖이 희미하게 밝아지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맨발로 문턱을 넘었다."어머니..."대답은 없었다.옥연은 이부자리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이 없었고 두 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흰머리의 은비녀도 평소처럼 단정했다.영희는 무릎을 꿇고 손목을 잡았다.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오래 손을 놓지 못했다. 철수와 막내가 뒤따라 나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어머니가... 가셨습니다."영희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렸다.철수는 어머니 곁에 엎드려 절했고 막내는 문설주를 붙들고 소리를 삼켰다. 후손들은 대청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서로의 어깨를 붙잡았다.등불 안에서 푸른 불꽃과 금빛 불꽃이 함께 흔들렸다.물이끼 섞인 강물 향과 갓 지은 밥 냄새가 식은 부엌에 퍼졌다.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솥도 차가웠으나, 가족들은 그 냄새가 어디에서 오는지 묻지 않았다.막내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아버지는 이제... 혼자 계시지 않습니다."철수가 등불을 바라보았다.두 불꽃은 한쪽이 다른 쪽을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푸른빛이 먼저 움직이면 잠시 뒤 금빛이 응답했고, 금빛이 솥 쪽으로 기울면 푸른빛이 그 곁을 지켰다."어머니도... 혼자 가신 게 아니구나."철수가 낮게 말했다.가족들은 옥연의 죽음을 없던 일로 여기지 않았다.영희는 어머니의 몸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혔다. 철수는 장례 절차를 맡았으며 막내는 어머니가 평생 지킨 문턱에 흰 천을 걸었다.사흘 동안 주막에는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외상 빗금에 이름을 남긴 사람과 그 자손들이 향을 올렸고, 돈 대신 쌀과 장작을 놓고 간 이들도 있었다. 누구도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가족들은 찾아온 사람에게 따뜻한 밥부터 내주었다.옥연의 육신은 인간의 예에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제93화: 삼강, 그 등불 아래 4
"도련님.""...잠시만 말하지 말거라."휘의 손이 옥연의 손목을 지나 팔과 어깨를 감쌌다.다음 순간, 그가 옥연을 가슴 안으로 끌어안았다.조심스럽게 받쳐주던 포옹이 아니었다. 옥연의 몸이 그의 가슴에 빈틈없이 닿았고, 등과 허리를 감싼 두 팔에는 더는 힘을 아끼려는 기색이 없었다.옥연은 휘의 어깨에 뺨을 대었다.단단한 몸이 아주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떨고 계십니까?"휘는 대답하지 않았다."제가 숨을 멈출 때에도 이러셨습니까?""그때는... 참았다.""왜요?""네가 마지막 순간에 두려워할까 봐..."휘의 목소리가 옥연의 머리 위에서 처음으로 갈라졌다."붙잡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네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놓아주어야 했다."옥연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편안히 눈을 감는 동안 휘는 소리 내어 부르지도, 붙잡아달라고 청하지도 못한 채 혼자 이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그녀의 두 팔이 휘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이제는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휘의 팔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저 돌아왔습니다.""알고 있다.""유옥연이라는 이름도, 도련님과 함께한 기억도 모두 가지고 돌아왔습니다."휘는 눈을 감은 채 옥연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한 번만... 한 번만 더 말하거라."옥연은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돌아왔습니다. 도련님 곁으로."휘의 손이 옥연의 뺨을 감쌌다.그는 손바닥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오래 확인했다.옥연이 먼저 그의 도포 깃을 잡아당겼다.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처음에는 서로가 사라지지 않는지 확인하듯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옥연의 손이 휘의 목덜미를 감싸자, 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시 깊이 입을 맞췄다.죽음 앞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두려움과 그리움을 더는 말로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옥연은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열아홉에 처음 품었던 마음과 여든아홉 해를 살아낸 사랑이 같은 입맞춤 안에 온전히 이어졌다.얼마 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Last Updated: 2026-09-05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2025년, 겨울. 나사(NASA)도 포기한 심해의 괴물들이 부산 앞바다를 덮쳤다. ​3면이 바다인 나라. 누군가는 방벽 위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방벽 뒤에서 빨래를 널고 커피를 마신다. ​나는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군인이다. ​가진 거라곤 굳어버린 EX급 얼음 구슬 하나. 그리고 아무도 타지 못하는 저주받은 기체 '레비아탄'. ​하지만 이 둘이 만난 순간, 나는 인류 유일의 '무한동력'이 되었다. ​"하태수 상병, 출격합니다. 싹 다 얼리고, 지져버리고 칼퇴하겠습니다." ​압도적인 메카닉 액션과 사람 냄새 나는 부산 하숙집 이야기. 지금,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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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2화: 양복쟁이들의 은밀한 거래 2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방의 구석.​검게 타들어 가는 융단 위로, 시뻘건 불씨를 품은 기괴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버러지 같은 필멸자들의 요란한 투정 소리가, 심연의 밑바닥까지 진동하는구나.]​고막을 거치지 않고 뇌수를 직접 태워버릴 듯한, 지독하게 오만하고 끔찍한 사념의 목소리.​아지랑이가 뭉쳐지며 만들어진 것은 거대한 불기둥의 형상이었다.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이목구비 대신 맹렬하게 타오르는 흑적색의 화염만이 일렁이는 기괴한 악마의 그림자.​판탈라사 제국 제2 군단장, 염마(炎魔).그의 아주 작은 파편이 대리인으로서 이 견고한 빌딩의 심장부로 스며들어 온 것이다.​"헉, 허억... 심, 심해의 괴물이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최무진이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뒷걸음질 치다 소파 위로 나자빠졌다.윤대호 역시 다리가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S급 헌터 수십 명을 부리며 영웅 행세를 하던 길드의 수장들이었지만, 진짜 재앙의 파편 앞에서는 그저 도축장에 끌려온 가축처럼 비참하게 떨 뿐이었다.​[떨지 마라. 너희 같은 구더기들의 고기에는 흥미가 없으니.]​불꽃의 형상이 일렁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그 발걸음이 닿은 바닥의 대리석이 순식간에 시뻘건 용암처럼 녹아내렸다.​[내 목적은 단 하나. 남쪽 바다에서 우리의 수확을 방해하는 그 오만한 쇳덩어리. 그 애송이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그림자가 내뱉은 쇳덩어리라는 단어.최무진과 윤대호의 떨리던 동공에 일순간 이채가 돌았다.공포에 짓눌려 있던 그들의 탐욕스러운 뇌 회로가,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의 이해득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그, 그 미친 흑기사를... 죽여버리겠다고?"​최무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더듬거렸다.​[그렇다. 하지만 그 애송이는 군벌들의 두꺼운 방벽 뒤에 웅크리고 있지. 내가 직접 남쪽 바다를 휩쓸기 위해서는, 그 거추장스러운 인간들의 성벽을 먼저 허물어야 한다.]​화염의 그림자가 두 양복쟁이를 향해 시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51화: 양복쟁이들의 은밀한 거래 1
[금요일 새벽. 서울 화이트 타이거 길드 본사 최상층 밀실]​쨍그랑-!​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크리스탈 글라스가 두꺼운 마호가니 벽면에 처박혀 산산조각 났다.호박색 위스키가 핏자국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값비싼 페르시안 융단을 축축하게 적셨다.​"개새끼가 감히 나를! 우리를 상대로 그딴 미친 깡패 짓을 벌여?!"​화이트 타이거의 실질적 지배자, 최무진 이사가 핏발 선 눈으로 씩씩거렸다.명품 슈트의 넥타이는 진작에 쥐어뜯겨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포마드 머리칼은 땀에 젖어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다.​밀실의 가죽 소파 맞은편에는 또 다른 중년 사내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낙동강 방어선을 독점하고 있는 영남권 최대 군벌, 해운대 길드의 윤대호 회장이었다.​대한민국의 한강과 낙동강, 내륙의 가장 거대한 꿀단지를 빨아먹으며 국가 예산과 여론을 쥐락펴락하던 두 거두.하지만 지금 이 최고층 밀실에 감도는 공기는 참담한 패배감과 숨 막히는 분노뿐이었다.​"진정하십시오, 최 이사."​윤대호가 테이블 위의 시가에 불을 붙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빈 깡통이 요란한 법입니다. 우연히 고대 유물 하나 주워서 무력이 조금 비대해졌을 뿐, 근본 없는 부산 뒷골목 양아치입니다."​"그 근본 없는 양아치 새끼한테 한강 제방이 뚫렸을 때 무릎을 꿇고 수백억을 뜯긴 게 바로 접니다!"​최무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악을 썼다.​단순히 돈을 뜯긴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그날 이후, 언론과 여론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혀버렸다.​시민들의 찬사와 천문학적인 방위비 예산은 모조리 부산의 해안 방위사령부, 그 미친 흑기사가 소속된 '아크 부대'로 쏠려 들어가고 있었다.안전한 내륙 강줄기에서 잔챙이들이나 주워 먹으며 영웅 행세를 하던 대형 길드들의 입지는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드는 중이었다.​"삼천 그룹의 늙은 너구리 회장이 그놈의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최무진이 새 잔에 위스키를 거칠게 따라 부으며 이를 갈았다.​"거기다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150화: 수육 파티와 성녀의 야습 2
나는 시원한 보리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마당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별이 총총하게 박힌 맑은 초여름의 밤하늘.​심연의 괴물들이 설치든 말든, 이 좁고 허름한 하숙집 마당의 밥상머리만큼은 그 어떤 재앙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나의 성역이었다.​고기 굽는 냄새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그 따뜻한 소음에 기대어, 나는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시간이 훌쩍 지났다.거실 벽시계의 바늘이 새벽 2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시끌벅적했던 잔치는 진작에 끝이 났고, 마당 평상은 여사님의 손길로 깨끗하게 치워졌다.손님방을 차지한 외국인 랭커들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얇은 목조 벽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육체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지만, 심해에서 극한까지 쥐어짰던 플렉소 코어의 여운이 아직 핏속을 맴돌며 수면을 방해하고 있었다.​그때였다.​스으윽-.​오래된 복도의 나무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눌리는 소리.일반인의 귀라면 바깥의 풀벌레 소리에 묻혀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지극히 은밀하고 기척 없는 발걸음이었다.​나는 감았던 눈을 조용히 반쯤 떴다.방문 밖 복도에 누군가 서 있었다.​달칵, 찰칵.​내 방 문고리 안쪽에서 기계적인 마찰음이 들렸다.열쇠가 없는데도 쇳조각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자물쇠의 핀이 정밀하게 돌아가는 소리.​기운을 읽어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순백색의 신성한 마력이 자물쇠 구멍 안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 아주 섬세하게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있는 것이다.​신의 권능과 기적을 행한다는 바티칸의 숭고한 힘을, 남의 집 방문을 따는 야밤의 빈집털이에 쓰고 있는 미친 인간.​끼이익-.​잠금이 풀리고 낡은 방문이 아주 천천히, 손가락 두 마디쯤 열렸다.열린 문틈 사이로 짙고 유혹적인 서양 백합 향수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소피아였다.낮에 입고 있던 두껍고 경건한 수녀복은 온데간데없고, 달빛에 실루엣이 훤히 비치는 아주 얇고 하늘하늘한 실크 슬립 차림.자칭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149화: 수육 파티와 성녀의 야습 1
[2026년 5월 하순. 목요일 저녁. 부산 남포동 하숙집]​아크 부대 지하 격납고에 기체를 세워두고 남포동으로 돌아온 시간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초저녁 무렵이었다.​익숙하고 비좁은 골목길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강렬하게 찌르는 냄새가 있었다.된장과 통후추, 그리고 굵은 대파를 아낌없이 썰어 넣고 무쇠솥에서 푹 끓여내는 진한 돼지 육수의 향기.그 사이로 알싸한 마늘과 까나리액젓으로 갓 버무린 매콤한 고춧가루의 냄새가 폭력적으로 섞여 들고 있었다.​"아이고! 우리 식구들 인자 오나!"​낡은 철제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최 여사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마당 한가운데 펼쳐진 널찍한 평상 위에는 이미 거대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큼직한 도자기 접시 위로, 껍질까지 쫀득하게 삶아진 두툼한 돼지고기 수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그 옆으로는 숨이 채 죽지도 않은 싱싱한 배추 겉절이가 새빨간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짭짤한 새우젓과 쌈장이 가득 담긴 종지들이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심연의 군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지독하게 평화롭고 구수한 일상의 풍경.​"아지매! 냄새가 쥑이네! 내 오늘 고기 썰기 전에 막걸리부터 한 사발 주이소!"​1층 세탁소의 성배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평상 구석에 주저앉으며 찌그러진 양은 사발을 내밀었다.​"퍼뜩 수돗가 가서 손들 씻고 와서 앉으라! 고기는 뜨실 때 무야 제맛이데이!"​여사님이 커다란 식칼로 도마 위에 남은 수육 덩어리를 숭텅숭텅 썰어내며 호통을 쳤다.​나와 식구들, 그리고 내 등 뒤를 어색하게 졸졸 따라온 이방인들까지 모두 마당 수돗가에 일렬로 서서 비누로 대충 손을 씻었다.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와 삐걱거리는 간이 의자가 총동원되어 평상 주위로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오 마이 갓."​내 옆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주저앉은 스티브가, 산처럼 쌓인 수육과 겉절이를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이 냄새는 대체... 고기를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148화: 바다에 띄운 하얀 국화꽃 2
거대한 흑기사가, 자신의 오른쪽 기계 팔을 뻗어 이지스함의 갑판 위에 거대한 손바닥을 평평하게 내려놓았다.​"타시죠. 꽃 던지기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외부 스피커를 통해 내 목소리가 흘러나가자, 헬기 패드에 서 있던 하루와 히나가 그제야 굳어 있던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자매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레비아탄의 차가운 강철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두 사람이 완전히 올라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조종간을 아주 미세하게 당겼다.​위잉-.레비아탄이 손바닥을 수평으로 유지한 채 천천히 들어 올렸다.​나는 기체의 방향을 돌려 이지스함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단전의 빙정 코어를 아주 약하게 개방하여, 기체의 발바닥을 통해 바닷물로 한기를 흘려보냈다.​파스스슥-.​레비아탄의 거대한 발이 닿는 수면이 얇고 단단한 얼음판으로 변했다.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저거노트가, 마법처럼 바다 위를 얼리며 그 위를 사뿐히 걸어 나가는 기적 같은 광경.​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자매가 멀미를 하거나 겁을 먹지 않도록, 가장 안정적이고 평탄한 길을 만들어주는 나만의 배려였다.​이지스함에서 수백 미터쯤 떨어진, 가라앉은 도쿄의 중심부가 내려다보이는 바다 한가운데.나는 레비아탄의 걸음을 멈추고 기체를 굳건하게 세웠다.​바람은 부드러웠고, 햇살은 눈부시게 맑았다.발밑의 수심 3,000미터 아래에는 끔찍한 괴물도, 붉은 독기를 뿜어내던 테라포밍 기둥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오직 고요하게 수장된 과거의 묘지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레비아탄의 거대한 손바닥 한가운데 선 자매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갔다.​"엄마. 아빠."​히나의 작은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레비아탄의 강철 장갑 위로 번졌다.​"......"​하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입술을 꽉 깨문 채,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하얀 국화꽃 다발을 조심스럽게 허공으로 흩뿌렸다.
Last Updated: 2026-09-19
Chapter: 147화: 바다에 띄운 하얀 국화꽃 1
끝이 없을 것 같던 칠흑의 장막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계기판의 고도계 숫자가 빠르게 상승하며 해수면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수심 500미터. 300미터. 100미터.짓누르던 300기압의 무게가 점차 가벼워지며, 레비아탄의 삐걱거리던 관절부에서도 안도의 한숨 같은 미세한 구동음이 새어 나왔다.​파노라마 모니터 너머로 짙은 군청색이었던 바닷물이 투명한 에메랄드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그리고 마침내.​쏴아아아아-!!!!​거대한 물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으며, 20미터짜리 강철의 흑기사가 대한해협의 수면 위로 웅장하게 부상했다.​"후우."​나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콕핏 내부의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며, 심해의 매캐한 오존 냄새를 밀어내고 짭짤하고도 시원한 바다 내음을 밀어 넣었다.​쿠아아앙-! 쏴아아-!​내 양옆으로 거친 물보라가 연달아 터지며, 최유라의 발뭉과 두 기의 블랙맘바 편대가 차례대로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극한의 수압을 버텨낸 윙맨들의 기체 장갑판에서 허연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하 준위님.]​통신망을 타고 최유라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언제나 군대식 다나까를 고집하며 각을 잡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완전히 탈진하여 잔뜩 잠겨 있었다.​[덕분에 살아서 햇빛을 봅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랙맘바 편대, 무사히 생환했습니다.]​파일럿들의 목소리에는 압도적인 재앙을 극복해 낸 자들 특유의 먹먹한 안도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어설프게 칼자루를 쥐는 대신 내 등 뒤에 바짝 엎드려 있었던 그들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고철 덩어리가 되는 일 없이 무사히 바다 밖으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은혜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나는 피식 웃으며 통신망 너머의 전우들에게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중에 아크 부대 복귀하면 다 같이 시원한 캔맥주나 한잔 사십쇼. 그걸로 퉁치겠습니다."​[하하, 알겠습니다.
Last Updated: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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