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최가와 익호군 녀석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저 양반 놈은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굶주림과 공포에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지.내가 나서려는데, 서백설이 내 앞을 막아섰다."제가 처리할게요."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쌀가마니 모양으로.서백설이 사내 앞으로 걸어갔다."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그녀가 굽신거리며 인사를 했다. 사내는 서백설의 미모를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오호, 시골 구석에 이런 꽃이 있었구먼. 그래, 네가 여기 주인이냐?""예. 주식회사 익호의 행수 서백설이라 합니다. 방을 찾으신다고요?""그렇다. 아주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내 짐이 많으니 잘 지켜야 할 것이다."사내가 뒤에 있는 수레를 가리켰다. 쌀가마니와 비단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서백설의 눈이 가늘어졌다.저거다. 우리를 구원할 식량과 자금."물론입니다. 귀빈용 특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다만?""요즘 전쟁통이라 물가가 좀 올라서요. 숙박비가 비쌉니다.""허, 돈이야 썩어나게 많다. 얼마면 되느냐? 한 냥? 두 냥?"서백설이 방긋 웃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오십 냥이냐? 비싸군. 그래도 내지.""아니오. 쌀 50석입니다. 하루에.""......뭐?"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쌀 50석이면 기와집 한 채 값이다. 그걸 하루 숙박비로 내라고?"이, 이년이 미쳤느냐! 감히 양반을 능멸해? 네년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사내가 부채를 접어 서백설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탁.내 손이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어딜."내가 손목을 비틀자,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아악! 내 손! 이거 안 놔!"하인들이 달려들려 했지만, 최가와 익호군 30명이 몽둥이를 들고 에워싸자 꼼짝도 못 했다."당신,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여기는 한양이 아니야. 계급장? 그딴 거 여
전쟁은 칼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밥으로 하는 거였다."살려줍쇼! 제발 한 입만 주십쇼!""내 새끼가 굶어 죽게 생겼소! 밥 좀 주소!"담양 객주 앞은 아수라장이었다.이치 대첩의 승전보와 함께, 김덕령이 있는 곳은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 고을은 물론이고 경상도, 충청도에서까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그 수가 족히 수천 명.담양 읍내가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나는 미숙이를 들고 마당에 섰다. 하지만 내 무력도 배고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호랑이를 때려잡는 힘으로 쌀을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대장님! 쌀독이 바닥났습니다!"최가가 울상을 지으며 달려왔다."어제 털어온 산적 식량도 다 동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폭동이 일어날 판입니다!""젠장. 입이 너무 많아."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사람을 모으는 건 좋았다. 하지만 먹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1592년의 보급 시스템으로 수천 명의 난민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굶주린 사람들의 눈빛이 변해가고 있었다. 애원하던 눈빛이 점차 탐욕과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저들은 곧 좀비 떼처럼 변해 객주를 덮칠지도 모른다.그때였다."길 비켜요! 다들 줄 안 서?"앙칼진 목소리가 군중의 소음을 갈랐다.서백설이었다. 그녀는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확성기(나대용이 놋쇠로 만들어준 깔때기)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지금부터 여기는 '주식회사 익호'의 관할 구역이다! 내 허락 없이는 쌀 한 톨도 못 가져간다!"그녀의 당당한 기세에 사람들이 주춤했다."누구요? 댁이 뭔데 밥을 주네 마네 하는 거요?"피난민 중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따지고 들었다."나? 여기 안주인이다. 꼬우면 딴 데 가서 얻어먹든가."서백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잘 들어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밥을 먹고 싶으면 값을 치러라.""돈? 우린 돈 없소! 다 털리고 몸만 왔는데 무슨 돈이오!""누가 돈 내래?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란 말이야!"서백설이 지
피난민 행렬이었다.하지만 아까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옷은 불에 탔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눈동자에는 지옥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어르신, 무슨 일입니까?"내가 다가가 묻자, 노인이 나를 붙잡고 오열했다."끝났어... 다 끝났어... 나라가 망했어...""무슨 소립니까? 진정하시고 말씀해 보십시오.""충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패했어... 조선군이 전멸했단 말일세!"탄금대 패배.조선의 최정예 기병대가 몰살당한 그 전투.가슴이 철렁했다.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내가 이치에서 승리하는 동안, 충주에서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그럼... 한양은요?"서백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임금님이... 도망치셨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선조의 몽진.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왕.순간,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와, 왕이 도망갔다고?""그럼 우린 어떡해? 누가 우릴 지켜줘?"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버림받았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거짓말이야! 임금님이 백성을 버릴 리가 없어!""다 죽었어... 이제 왜놈들이 여기까지 올 거야..."아수라장이 되었다. 짐을 싸서 도망치려는 사람,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 익호군 녀석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리 훈련된 병사라 해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이대로 두면 안 된다.'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퍼져서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나는 미숙이를 들고 평상 위로 뛰어올랐다.쾅!방망이로 평상을 내리쳤다. 굉음이 소란을 잠재웠다."조용히 해라!"내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두려움과 원망,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섞인 눈빛들.나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왕이 도망갔다? 그래, 사실이다. 한양이 뚫
전투가 끝난 이치 고개는 거대한 도축장 같았다.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익호군 녀석들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대장님! 이 갑옷 보십시오! 아주 때깔이 죽여줍니다!""이 칼은 어떻고요? 날이 시퍼런 게 썩어도 준치입니다!"녀석들은 시체 파밍에 여념이 없었다. 왜군들이 버리고 간 조총, 갑옷, 식량, 은전... 굴러다니는 게 다 돈이었다."적당히 챙기고 정리해라. 해 지기 전에 내려가야지."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련하게 부러진 방망이 자루를 만지작거렸다.'미숙아.'내 첫 전용 무기이자, 현감의 멘탈을 갈아버린 영혼의 파트너. 참나무 중에서도 제일 단단한 놈으로 골라 깎았는데, 하루를 못 버티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아깝네. 손에 딱 맞았는데."일반 나무로는 내 괴력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 쇠파이프나 주워 쓰자니 손맛이 안 살고. 뭔가 더 단단하고 묵직한 놈이 필요했다.그때, 서백설이 다가왔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부러진 막대기를 보더니 혀를 찼다."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 나무가 남아나질 않네.""어쩔 수 없지. 내 힘을 버티는 나무가 조선 팔도에 흔하겠냐.""기다려 봐요. 쓸만한 게 있을 테니까."서백설이 수레 쪽으로 갔다. 잠시 후, 그녀가 낑낑대며 무언가를 들고 왔다.검붉은 빛이 도는, 묵직해 보이는 나무토막이었다."이거... 흑단목(黑檀木) 아니야?"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알아보네요? 명나라 상인한테서 어렵게 구한 거예요. 물에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고, 쇠처럼 단단해서 가구 만들려고 아껴둔 건데."서백설이 나무토막을 내게 던졌다.탁.묵직했다. 일반 참나무의 두세 배는 되는 밀도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쇠뭉치 같은 질감이지만 나무 특유의 탄성이 느껴졌다."이걸로 깎아 써요. 이것마저 부러뜨리면 그땐 진짜 쇳물 부어서 만들어야 해요.""오... 땡큐. 아니, 고맙다 백설아."나는 즉석에서 단도를 꺼내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사각, 사각.나무가 어찌나
그때였다.툭.내 손에 들린 미숙이의 머리 부분이 부러져 나갔다.너무 세게, 너무 많이 때린 탓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참나무라도 내 괴력과 왜군의 갑옷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아, 젠장. 미숙아..."나는 부러진 자루를 보며 혀를 찼다. 미령이가 써준 글씨가 반으로 갈라졌다. AS 맡겨야겠네.내가 무기를 잃자, 왜군들의 눈이 다시 번들거렸다."무기가 부러졌다! 지금이다!""쳐라!"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쇄도했다.나는 부러진 막대기를 던져버리고 빈손을 펴 보였다."무기가 없으면 못 싸울 줄 알았냐?"나는 달려드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렸다."너, 내 무기 해라. 우린 오늘부터 1일이야.""나, 나니...?"나는 놈의 발목과 목덜미를 잡고, 인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붕!"으아아악!"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다른 왜군들을 후려쳤다. 갑옷 입은 성인 남자의 무게 70kg. 거기에 내 회전력이 더해지니 웬만한 철퇴보다 위력이 좋았다.퍼억! 콰당탕!인간 몽둥이에 맞은 놈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내 손에 잡힌 놈은 충격으로 기절해 혀를 빼물고 있었다. 내구도가 다 되었군."남자가 이래서야. 헤어져."나는 놈을 적진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다."자, 다음 무기!"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왜군의 장창을 집어 들었다. 3미터가 넘는 긴 창.나는 창을 잡고 휠윈드를 돌았다.슉! 슈슉!창날이 춤을 추며 놈들의 목을 베고 다리를 잘랐다.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리치."히, 히익...""도망쳐! 저건 사람이 아니야!""오니! 오니가 나타났다!"결국 놈들이 무너졌다.지휘관은 죽었고, 정예병들은 갈려 나갔다. 눈앞에 있는 건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3미터 거인(놈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공포는 전염병보다 빨랐다.나를 에워쌌던 놈들이 무기를 버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튀어라! 살고 싶으면 튀어!"한 명이 등을 보이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붉은 갑옷을 입은 왜군 부장. 그가 쥔 긴 창(야리)의 끝이 내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에 장수의 체중까지 실린, 운동에너지의 결정체. 보통 사람이라면 피하거나 방패 뒤로 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뒤에 있는 현무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 부하들이 다친다. 나는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바닥에 박았다.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다. '와라.' 거리는 10보, 5보, 1보. 놈의 기합 소리와 함께 창끝이 섬광처럼 찔러 들어왔다. "죽어라!" 나는 왼손을 뻗었다. 창날을 잡는 게 아니다. 그건 도박이다. 나는 창대, 정확히는 날 바로 밑의 목 부분을 노렸다. 탁! 잡았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마찰열이 느껴졌다. 엄청난 충격이 어깨를 타고 척추까지 전해졌다. 내 몸이 뒤로 밀려나며 흙바닥에 두 줄기 고랑이 파였다. "크윽...!"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밀려나는 와중에도 버텼다. 금강불괴의 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역발산의 근육은 버텨냈다. 히히힝! 푸르르! 말이 울며 앞발을 쳐들었다. 내가 창을 잡고 버티자, 달 리던 말의 목이 꺾일 듯 멈춰 섰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는 강제 정지. "뭐, 뭐냐!" 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기마 돌격을, 그것도 정면에서 한 손으로 막아내다니. 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내 차례다." 나는 잡은 창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안장 위에 있던 부장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놈은 창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내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내려와서 얘기해." 나는 창을 놓아버리고, 허공에 뜬 놈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앙! "끄악!" 놈의 등짝이 흙바닥과 키스했다. 붉은 갑옷이 찌그러지고 투구가 벗겨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