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피난민 행렬이었다.하지만 아까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옷은 불에 탔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눈동자에는 지옥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어르신, 무슨 일입니까?"내가 다가가 묻자, 노인이 나를 붙잡고 오열했다."끝났어... 다 끝났어... 나라가 망했어...""무슨 소립니까? 진정하시고 말씀해 보십시오.""충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패했어... 조선군이 전멸했단 말일세!"탄금대 패배.조선의 최정예 기병대가 몰살당한 그 전투.가슴이 철렁했다.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내가 이치에서 승리하는 동안, 충주에서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그럼... 한양은요?"서백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임금님이... 도망치셨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선조의 몽진.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왕.순간,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와, 왕이 도망갔다고?""그럼 우린 어떡해? 누가 우릴 지켜줘?"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버림받았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거짓말이야! 임금님이 백성을 버릴 리가 없어!""다 죽었어... 이제 왜놈들이 여기까지 올 거야..."아수라장이 되었다. 짐을 싸서 도망치려는 사람,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 익호군 녀석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리 훈련된 병사라 해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이대로 두면 안 된다.'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퍼져서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나는 미숙이를 들고 평상 위로 뛰어올랐다.쾅!방망이로 평상을 내리쳤다. 굉음이 소란을 잠재웠다."조용히 해라!"내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두려움과 원망,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섞인 눈빛들.나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왕이 도망갔다? 그래, 사실이다. 한양이 뚫
전투가 끝난 이치 고개는 거대한 도축장 같았다.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익호군 녀석들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대장님! 이 갑옷 보십시오! 아주 때깔이 죽여줍니다!""이 칼은 어떻고요? 날이 시퍼런 게 썩어도 준치입니다!"녀석들은 시체 파밍에 여념이 없었다. 왜군들이 버리고 간 조총, 갑옷, 식량, 은전... 굴러다니는 게 다 돈이었다."적당히 챙기고 정리해라. 해 지기 전에 내려가야지."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련하게 부러진 방망이 자루를 만지작거렸다.'미숙아.'내 첫 전용 무기이자, 현감의 멘탈을 갈아버린 영혼의 파트너. 참나무 중에서도 제일 단단한 놈으로 골라 깎았는데, 하루를 못 버티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아깝네. 손에 딱 맞았는데."일반 나무로는 내 괴력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 쇠파이프나 주워 쓰자니 손맛이 안 살고. 뭔가 더 단단하고 묵직한 놈이 필요했다.그때, 서백설이 다가왔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부러진 막대기를 보더니 혀를 찼다."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 나무가 남아나질 않네.""어쩔 수 없지. 내 힘을 버티는 나무가 조선 팔도에 흔하겠냐.""기다려 봐요. 쓸만한 게 있을 테니까."서백설이 수레 쪽으로 갔다. 잠시 후, 그녀가 낑낑대며 무언가를 들고 왔다.검붉은 빛이 도는, 묵직해 보이는 나무토막이었다."이거... 흑단목(黑檀木) 아니야?"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알아보네요? 명나라 상인한테서 어렵게 구한 거예요. 물에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고, 쇠처럼 단단해서 가구 만들려고 아껴둔 건데."서백설이 나무토막을 내게 던졌다.탁.묵직했다. 일반 참나무의 두세 배는 되는 밀도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쇠뭉치 같은 질감이지만 나무 특유의 탄성이 느껴졌다."이걸로 깎아 써요. 이것마저 부러뜨리면 그땐 진짜 쇳물 부어서 만들어야 해요.""오... 땡큐. 아니, 고맙다 백설아."나는 즉석에서 단도를 꺼내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사각, 사각.나무가 어찌나
그때였다.툭.내 손에 들린 미숙이의 머리 부분이 부러져 나갔다.너무 세게, 너무 많이 때린 탓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참나무라도 내 괴력과 왜군의 갑옷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아, 젠장. 미숙아..."나는 부러진 자루를 보며 혀를 찼다. 미령이가 써준 글씨가 반으로 갈라졌다. AS 맡겨야겠네.내가 무기를 잃자, 왜군들의 눈이 다시 번들거렸다."무기가 부러졌다! 지금이다!""쳐라!"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쇄도했다.나는 부러진 막대기를 던져버리고 빈손을 펴 보였다."무기가 없으면 못 싸울 줄 알았냐?"나는 달려드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렸다."너, 내 무기 해라. 우린 오늘부터 1일이야.""나, 나니...?"나는 놈의 발목과 목덜미를 잡고, 인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붕!"으아아악!"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다른 왜군들을 후려쳤다. 갑옷 입은 성인 남자의 무게 70kg. 거기에 내 회전력이 더해지니 웬만한 철퇴보다 위력이 좋았다.퍼억! 콰당탕!인간 몽둥이에 맞은 놈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내 손에 잡힌 놈은 충격으로 기절해 혀를 빼물고 있었다. 내구도가 다 되었군."남자가 이래서야. 헤어져."나는 놈을 적진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다."자, 다음 무기!"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왜군의 장창을 집어 들었다. 3미터가 넘는 긴 창.나는 창을 잡고 휠윈드를 돌았다.슉! 슈슉!창날이 춤을 추며 놈들의 목을 베고 다리를 잘랐다.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리치."히, 히익...""도망쳐! 저건 사람이 아니야!""오니! 오니가 나타났다!"결국 놈들이 무너졌다.지휘관은 죽었고, 정예병들은 갈려 나갔다. 눈앞에 있는 건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3미터 거인(놈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공포는 전염병보다 빨랐다.나를 에워쌌던 놈들이 무기를 버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튀어라! 살고 싶으면 튀어!"한 명이 등을 보이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붉은 갑옷을 입은 왜군 부장. 그가 쥔 긴 창(야리)의 끝이 내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에 장수의 체중까지 실린, 운동에너지의 결정체. 보통 사람이라면 피하거나 방패 뒤로 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뒤에 있는 현무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 부하들이 다친다. 나는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바닥에 박았다.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다. '와라.' 거리는 10보, 5보, 1보. 놈의 기합 소리와 함께 창끝이 섬광처럼 찔러 들어왔다. "죽어라!" 나는 왼손을 뻗었다. 창날을 잡는 게 아니다. 그건 도박이다. 나는 창대, 정확히는 날 바로 밑의 목 부분을 노렸다. 탁! 잡았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마찰열이 느껴졌다. 엄청난 충격이 어깨를 타고 척추까지 전해졌다. 내 몸이 뒤로 밀려나며 흙바닥에 두 줄기 고랑이 파였다. "크윽...!"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밀려나는 와중에도 버텼다. 금강불괴의 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역발산의 근육은 버텨냈다. 히히힝! 푸르르! 말이 울며 앞발을 쳐들었다. 내가 창을 잡고 버티자, 달 리던 말의 목이 꺾일 듯 멈춰 섰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는 강제 정지. "뭐, 뭐냐!" 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기마 돌격을, 그것도 정면에서 한 손으로 막아내다니. 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내 차례다." 나는 잡은 창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안장 위에 있던 부장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놈은 창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내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내려와서 얘기해." 나는 창을 놓아버리고, 허공에 뜬 놈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앙! "끄악!" 놈의 등짝이 흙바닥과 키스했다. 붉은 갑옷이 찌그러지고 투구가 벗겨져
볼링핀? 아니, 그보다 더 처참했다. 전면부 충각에 받힌 병사들은 뼈가 으스러지며 허공으로 솟구쳤고, 바퀴에 깔린 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짓이겨졌다.우지끈! 뿌직!끔찍한 파열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현무 2호기와 3호기도 뒤따라 적진을 유린했다."으아악! 다리가! 내 다리!""괴물이다! 괴물이 내려왔다!"왜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열은 무너졌고, 지휘 체계는 마비되었다.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발사!"현무 2호기 안에서 나대용의 목소리가 들렸다.펑! 펑! 펑!현무의 옆구리와 전면부에 뚫린 총안(총구멍)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승자총통과 조총을 거치해 둔 것이다.이동 요새.움직이는 토치카.가까이 붙으려던 왜군 창병들이 산탄을 맞고 쓰러졌다."이때다! 돌격!"나는 바위 뒤에서 튀어 나갔다."와아아아!"익호군 본대가 내 뒤를 따랐다.현무가 길을 터주고, 혼란에 빠진 적들을 우리가 쓸어 담는 그림. 완벽한 전술이었다.나는 몽둥이 '미숙이'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비켜! 길 막지 마!"내 앞을 막아선 사무라이 하나가 칼을 휘둘렀다.챙!칼이 내 어깨를 때렸지만, 찢어진 건 옷뿐이었다."아프지도 않다."나는 미숙이로 놈의 뚝배기를 깼다.퍼억!투구가 찌그러지며 놈이 고꾸라졌다."대장님! 뒤쪽!"최가가 소리쳤다.돌아보니 왜군 창병 셋이 나를 에워싸고 찌르려 하고 있었다."합!"나는 쇠스랑을 던져 한 놈의 가슴을 뚫고, 나머지 두 놈의 창을 겨드랑이에 끼웠다."어딜 쑤셔!"힘을 주어 창대를 뚝 부러뜨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놈들의 머리채를 잡았다.꽝!박치기.두 놈의 이마가 부딪치며 쌍으로 기절했다."괴, 괴물...!"주변에 있던 왜군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앞에는 무적의 전차, 뒤에는 칼이 안 통하는 거인. 그들에게 이곳은 지옥도였다.하지만 왜군은 많았다. 1,000명이 넘는 병력이다. 선두가 무너졌어도 뒤
전투가 끝난 고갯길은 고요했다.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익호군 녀석들의 표정은 밝았다."대장님! 이 총이란 거, 생각보다 물건입니다!"최가가 노획한 조총을 들고 벙글거렸다. 녀석은 어깨에 걸친 끈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조심해서 다뤄. 심지에 불붙어 있으면 오발 난다."나는 녀석들에게 조총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전생에 군대에서 배운 사격술과는 다르지만, 원리는 간단했다. 화약 넣고, 총알 넣고, 쑤시고, 불 붙이고, 빵.다행히 익호군 중에는 산에서 멧돼지 좀 잡아본 포수 출신들이 꽤 있었다. 그들에게 조총을 쥐여주니 금세 적응했다."활보다 사거리는 짧아도 위력은 죽여줍니다요. 멧돼지 가죽도 한 방에 뚫겠습니다.""그래. 이제 우린 칼 들고 설치는 원시인이 아니다. 화력전이다."나는 노획한 조총 50정을 포수들에게 지급했다. 나머지 병력은 창과 방패(전투 중에 주운 왜군의 갑옷 등)로 무장시켰다.승리의 기쁨도 잠시, 척후를 나갔던 춘식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대,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왜. 똥이라도 마렵냐?""저, 저기 아래! 산 아래를 보십쇼! 새까맣습니다!"춘식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이치 고개 아래, 굽이치는 산길.그곳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 사이로 수천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선봉대와는 차원이 달랐다.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족히 천 명, 아니 그 이상은 되어 보였다.왜군 본대(本隊).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제6군 주력 병력이었다."워메... 저게 다 사람이여? 개미 떼여?"최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방금 승리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공포가 엄습하는 듯했다. 100명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뒤에 1,000명이 넘게 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쫄지 마라."나는 녀석의 등짝을 후려쳤다."어차피 이 좁은 고갯길엔 한 번에 많이 못 올라와. 병목 현상 알지? 놈들은 줄 서서 죽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