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붉은 불기둥이 치솟고,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일본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변에 있던 놈들은 충격파에 휩쓸려 낙엽처럼 날아갔다."끄아아악!""화산이 터졌다!"아비규환.정돈되었던 일본군 진형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조총수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고, 승병들은 염불을 욀 새도 없이 불타올랐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보셨습니까, 영감님."나는 넋이 나간 조헌을 내려다보았다."저게 제가 싸우는 방식입니다. 내 피는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놈들의 피로 강을 만드는 거.""......""의(義)요? 좋습니다. 훌륭하죠. 근데 죽어서 지키는 의가 무슨 소용입니까? 살아서 놈들 목 하나라도 더 베는 게 진짜 의 아닙니까?"조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불타오르는 적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평생 믿어왔던 '죽음의 미학'이,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그때, 옆에서 "으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영규 대사가 깨어났다.그는 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산 아래의 불바다를 보고 눈을 비볐다."허... 내가 지옥에 온 것인가? 염라대왕이 불놀이를 하는구먼.""아직 이승입니다, 스님."내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그리고 저 불놀이는 제가 한 겁니다."영규 대사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허허허! 대단하군. 자네가 우리를 살렸어."그는 조헌의 어깨를 짚었다."중봉(조헌의 호). 고집 그만 피우시게. 부처님도 개죽음은 원치 않으실 걸세. 저 젊은이 말이 맞아. 이기는 게 중요해."조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서 독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차고 있었다. 인정. 그리고 전율."네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김덕령입니다.""덕령이라..."조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이 무식한 놈! 상놈! 도적놈!"등 뒤에서 찰진 욕설이 랩처럼 쏟아졌다.조헌 영감님.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폐활량 하나는 기가 막혔다. 산을 오르는 내내 쉬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영감님. 혀 깨무십니다. 좀 조용히 가시죠."나는 짐짝처럼 둘러멘 조헌을 추스르며 산길을 올랐다.내 왼쪽 겨드랑이에는 기절한 영규 대사가 끼여 있었다. 덩치 큰 스님이 축 늘어져 있으니 무게가 꽤 나갔지만, 내게는 솜이불 정도였다."네놈이 감히 의병장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내 당장 내려가서 왜적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게 선비의 도리거늘!"조헌이 내 등짝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안마받는 기분이었다."도리 좋아하시네. 개죽음 당하는 게 도리입니까?"나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뒤를 돌아보니 가관이었다.700명의 의병들이 쭈뼛거리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이 납치되어 가니 구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납치범(나)이 너무 강력해 보여서 덤비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자니 의리가 없고.그야말로 오리 떼가 어미 오리 따라오듯 줄줄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빨리 가자! 밥 줄 테니까!"최가가 맨 뒤에서 양치기 개처럼 의병들을 몰았다.우리가 도착한 곳은 금산성 맞은편, 험준한 산봉우리였다.아래로는 조헌이 원래 진을 쳤던 연곤평(눈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였다."도착했습니다."나는 조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규 대사도 옆에 뉘었다. 스님은 아직도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급소를 너무 정확하게 쳤나 보다."쿨럭! 이, 이 괘씸한..."조헌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지팡이를 찾았다. 없으니까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나를 겨눴다."네놈이 나를 욕보였어! 내 오늘 너를 죽이고 저승에 가겠다!"독기 어린 눈빛.진짜로 찌를 기세였다.나는 피하지 않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죽이려면 죽이쇼. 근데 그전에 구경이나 좀
전쟁에서 이기는 게 장땡이지, 방식이 뭐가 중요한가. 이 양반은 전쟁을 무슨 예법 대결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영감님. 전쟁은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죽이는 게 군인의 본분 아닙니까?""말버릇 보게!"조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군인에게 중요한 건 기개와 명분이다! 오랑캐 놈들처럼 비열한 술수를 쓰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낫다!"전형적인 꼰대 논리.죽어서 이름을 남기면 뭐 하나. 내 가족, 내 백성은 다 죽어나가는데."그래서, 저 수많은 백성을 데리고 죽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나는 밖을 가리켰다."저기 있는 700명.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입니다. 영감님 명예 챙기자고 다 죽이실 겁니까?""이, 이 무식한 놈이!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의(義)를 보이러 가는 것이다!"조헌이 지팡이를 바닥에 쾅 찍었다."우리가 여기서 피를 뿌려야, 잠자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이 깨어날 것이다! 조정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우리는 불쏘시개가 되러 온 것이다!"말이 안 통한다.이 사람은 군사적 승리가 목적이 아니었다. '순국(殉國)'이라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숭고하다. 인정한다.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본다.살아서 싸울 수 있는 700명의 병력을, 고작 불쏘시개로 태워버리는 건 낭비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영감님."나는 목소리를 깔았다."저는 장사꾼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저 아까운 인력을 잿더미로 만드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네놈이 못 보면 어쩔 텐가? 썩 물러가라!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리는 진격한다!"조헌은 완고했다.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옆에 있던 영규 대사가 나직하게 거들었다."젊은이. 뜻은 고마우나, 우리 대장의 고집은 황소도 못 꺾네. 그냥 돌아가게."황소?황소라.내가 제일 잘 다루는 게 황소인데.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
"밀어! 바퀴 빠졌다!"진흙탕에 빠진 현무 2호기를 꺼내느라 익호군 녀석들이 끙끙거렸다.이치 고개에서 금산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강행군. 전투 직후라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나대용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바퀴 축을 살폈다."대장, 무리요. 현무들이 한계에 다다랐소. 바퀴 살이 휘고 축이 틀어져서, 이 속도로는 금산까지 하루 꼬박 걸릴 거요.""하루면 늦습니다. 그 영감님 성격에 벌써 들이받았을지도 모릅니다."나는 초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조헌(趙憲).호는 중봉(重峯).임진왜란 의병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조선 최고의 '꼰대'로도 유명했다.그는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던(지부상소) 강성 인물이었다. 타협이란 걸 모르는 불같은 성격. 그런 양반이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성에 틀어박힌 왜군을 치러 갔다.역사대로라면, 그는 내일 아침 전멸한다.함께 간 승병장 영규 대사도, 이름 없는 의병들도 모조리.그 아까운 목숨들을 역사책의 한 줄로 남게 할 순 없었다."최가야.""예, 대장님. 헉헉."최가가 혀를 빼물고 달려왔다."현무는 천천히 오라고 해. 나대용 형씨한테 맡기고, 우린 정예 요원만 추려서 먼저 뛴다.""뛰어서 말입니까? 여기서 금산까지요?""그래. 다리 튼튼하잖아. PT 체조로 단련된 허벅지를 믿어라."나는 미숙이를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늦으면 다 죽는다. 살리고 싶으면 뛰어."우리는 산길을 달렸다.전생의 나는 5분만 뛰어도 숨이 찼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였다. 산을 타고 계곡을 넘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금산성 인근, 눈벌(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허억... 허억... 대장님... 도착했습니다..."최가와 병사들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금산성.성벽
거리는 10보.노장은 칼을 뽑아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그리고 전율이 섞인 눈빛이었다."네놈이냐. 내 보급대를 털고 벼락을 내린다는 자가.""그래. 담양의 김덕령이다. 기억해 둬라.""훌륭하군. 조선에 이런 무인이 있을 줄이야."고바야카와가 말 배를 걷어찼다.정면 승부. 피하지 않겠다는 기백이었다.하지만 나는 놈과 칼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시간이 아까우니까.나는 품에서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하나를 꺼냈다."선물이다. 가져가라."심지에 불을 붙여 놈의 말발굽 아래로 던졌다."뭐, 뭐냐?"고바야카와가 바닥을 보는 순간.꽝!말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고바야카와가 말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굴렀다."크윽!"노장이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내 그림자가 그를 덮고 있었다.나는 미숙이를 들어 올렸다."항복해라. 노인 공격하긴 싫으니까."고바야카와는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헛웃음을 지었다."항복? 사무라이에게 항복은 없다. 목을 쳐라."그는 눈을 감고 목을 내밀었다.기개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목을 칠 생각이 없었다. 죽은 적장보다는 산 포로가 더 비싼 법이니까."목은 됐고, 잠이나 자쇼."퍼억!나는 놈의 턱주가리를 날렸다. 고바야카와가 기절하며 널브러졌다."적장을 잡았...!"내가 소리치며 놈을 묶으려는 찰나였다."주군을 지켜라! 막아라!!"어디선가 시뻘건 눈을 한 무사 수십 명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고바야카와의 친위대였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맨몸으로 나에게 몸을 던졌다."이거 안 놔?!"한 놈을 쳐내면 두 놈이 달라붙고, 두 놈을 떼어내면 세 놈이 내 팔다리를 잡고 늘어졌다."어서! 주군을 모셔라! 빨리!"친위대장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그 사이 부관들이 기절한 고바야카와를 말에 태우고 엉덩이를 찔러대며 도망쳤다."이 독한 놈들이!"나는 몸을 털어 녀석들을 떼
적장의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신호탄이었다.잠시 멈칫했던 왜군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지휘관을 잃은 분노보다는, 눈앞의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는 공포가 그들을 움직였다."죽여라! 다구리쳐!"일본어가 아닌 조선말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놈들은 사방에서 칼과 창을 들이밀었다.나는 미숙이를 고쳐 잡았다.흑단목의 묵직한 중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오냐. 다 덤벼라."나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원심력을 극대화한, 인간 팽이 그 자체였다.부웅-!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퍼억! 우지끈!내 주변을 에워쌌던 왜군 넷이 동시에 날아갔다. 갑옷이 구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화음처럼 울렸다."뭐, 뭐야! 저거!"뒤에 있던 놈들이 기겁하며 멈춰 섰다.이전의 참나무 방망이였다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백설이 구해준 흑단목은 달랐다. 쇠보다 단단하면서도 특유의 탄성이 있어 충격을 고스란히 적에게 되돌려 주었다."역시 흑미숙이. 타격감이 다르네."나는 피 묻은 미숙이를 어깨에 걸치고 씨익 웃었다."자, 다음 타자."하지만 놈들은 나에게 덤비는 대신,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더 거대한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다.쿠르릉- 쿵! 쿵!육지 거북선, 현무(玄武) 세 대가 내리막길을 타고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막아! 저 수레를 막아!"왜군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타타타탕!수백 발의 납탄이 빗발쳤다. 하지만 현무는 멈추지 않았다. 두꺼운 정철 장갑에 맞은 탄환들은 힘없이 찌그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팅! 채앵!"안 통해! 쇠가죽이야!"공포에 질린 왜군들이 창을 들고 현무 앞으로 달려들었다. 바퀴 틈에 창을 꽂아 멈추려는 심산이었다.하지만 현무는 단순한 수레가 아니었다.나대용이 설계하고, 내가 감수한 '살상 병기'였다."고슴도치 전개!"현무 2호기 안에서 최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철컥.현무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