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정과 원유진은 화장실에서 딱 마주쳤다. 진무열과 성유정이 약혼을 한 뒤로 두 사람의 왕래는 점점 더 잦아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니기에 오다가다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었다. “진무열 씨 다쳤다면서요? 요즘은 어때요?” 원유진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보충하는 성유정을 힐끔 보더니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이미 퇴원도 마친 상태라.” 성유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대답을 했지만 원유진은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옛날이랑은 뭐가 좀 달라졌는데?’ 원유진이 더 말을 걸기도 전, 성유정은 이미 화장실에서 나가버렸다. 그 시각, 방 안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성유정이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인파에 성유정은 피할 틈도 없었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뒤에서 오던 원유진이 그녀를 붙잡아줬다. “다들 테라스로 나가려는 모양이에요.” 원유진이 많이 놀란 성유정을 달래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새해맞이 카운트가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금성에 오늘 밤 폭죽 쇼가 열린대요.” “네.” 정신을 차린 성유정은 그제야 원유진에게 짧은 대답을 해줬다. “가요. 같이 올라가서 구경이나 하자고요.” 원유진은 성유정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서 테라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원유진의 뒤에 서서 그녀에게 잡혀있는 것이 싫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테라스로 도착했을 무렵,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람들이 다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정의 시선은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혀있었지만 원유진은 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보았다. “박한빈 씨? 저분이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원유진은 이내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향에 박한빈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데 옆에 있는 여성분은 누구지?
“미친! 진짜 성유리 맞는데?” “성유정 씨, 언니분이랑 박 대표님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예요?” “아니 도대체 박한빈 씨는 성유리 씨 어디가 마음에 든 거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끊기지 않았고 그 바람에 성유정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성유정은 아무 말도, 행동도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테라스에 있던 박한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한 인파에 당황해 미간을 찌푸리던 박한빈은 이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를 품에 꼭 안아 그녀를 가려줬다. “박 대표님, 여기서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네요.” 사람들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자 친구이신가 봐요? 저희는 왜 몰랐지?” 오늘 밤 이곳에서 파티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기에 박한빈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넘지 말아야 하는 선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 성유리는 등을 돌린 상태로 있었고 지금은 박한빈에 의해 품에 안겨버렸으니 사람들은 다 누구인지 몰라 헷갈려했다. 하지만 원유진의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자가 성유리일 줄은 몰랐다면서 뜨겁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오늘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는데 저희한테 여자 친구분을 소개해 줄 생각은 없나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박한빈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박한빈은 몰려있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성유리를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유리 씨입니다.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는데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눈썹으로 사람들은 다 박한빈이 지금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입술에 묻어있는 붉은 무언가의 자국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옆에 있는 성유리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당하게 성유리와의 만남을 공개해 버린 박한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박한빈과 성유리는 그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폭죽이 터지는 것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고 바로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 박한빈은 질 세라 더 세게 힘을 주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고 그로 인해 성유리는 팔이 부러질 듯 아팠다. “아! 저 진짜 확 물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성유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박한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어디를 물 건데?” 그의 대답에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입을 꾹 닫았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집에 갈래요.” 성유리가 이빨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응. 같이 가자.” 박한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좁아터진 제 집에서 지내는 게 박 대표님은 불편하지도 않으세요?” “그럼 네가 나랑 같이 시월파크가서 살래? 아니면 도연제?” “안 가요.” 성유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묵묵히 차에 올라탔다. 성유리는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휙 돌려 창밖만 주시했고 박한빈은 운전석에서 그런 그녀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 말이야.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저는 박 대표님이 하도 카리스마 있는 분이셔서 저를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성유리는 박한빈을 비꼬듯 대답했다. “오호라, 이런 방법도 있었단 말이지.” “한번 해보시던가요.” 성유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운탕 먹으러 갈래?” 박한빈은 이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안 가요.” “직접 가서 먹고 싶지 않다면 집으로 배달시키자.” “그럼 온 집안에 다 냄새 나잖아요. 그리고 또 그 집이 누구 집인데.” 박한빈은 또다시 실실 웃음을 지었고 성유리는 전에는 못 보던 그의 웃음에 잠시 멍
두 사람의 영혼은 마치 한데 엉겨 붙은 듯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춰주었다. 옆집 사람은 이미 이사를 간 상태지만 성유리는 큰 소리를 차마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참을 수가 없을 때는 박한빈의 목을 세게 물었다. 박한빈은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성유리에 의해 물리고는 그녀의 턱을 살짝 움켜쥐더니 미친 듯이 키스를 했다. 집안은 조명 하나도 켜지지 않아 어두웠고 창밖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그때, 누군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성유리도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박한빈을 밀어냈지만 박한빈은 멈추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끈질기게 계속 걸었고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불러서야 그는 짜증 나 하며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잠긴 목소리에는 화가 서려 있었다. 수화기 너머 발신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물었다. “그래서요?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얼마 뒤, 박한빈은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지. 구체적인 상황은 가서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아니요. 안 가요.” 성유리는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땅에 떨어뜨린 옷가지들을 주우며 말했다. “먼저 가볼게. 아마 다시 못 돌아올 거야. 문단속 잘하고.” “네.” “갈게.” 박한빈은 얼른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박한빈은 갑자기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성유리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몸이 굳어갔고 박한빈은 씩 미소를 짓더니 문을 닫
그 시각, 박씨 저택 안. 김난희의 생활 루틴은 늘 똑같기에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시간에 자고 있었야 했다. 그리고 박씨 가문 사람들은 다 김난희의 루틴을 알기에 그녀를 도와주고 시간이 되면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는 시간이지만 박씨 저택에는 환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집사는 이미 오랫동안 밖에서 박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 저택 안에 들어서자 다급하게 달려오며 말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박한빈은 집사를 흘깃 쳐다보고는 물었다. “지금 안에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르신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도 돌아오셨고요. 두 사람이 서로 말이 잘 안 통하시는 것 같은데... 도련님께서 들어가셔서 잘 좀 해결해 보십시오.”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은 얼른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말한 대로 집 안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김난희는 한껏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는데 두 손은 소파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김서영이 가만히 서 있었다. 비록 머리는 숙이고 있었지만 등은 곧게 펴고 있어 잘못을 반성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래! 한빈이 마침 잘 왔다.” “너! 아까는 말만 잘하지 않았니? 이제 네 아들 앞에서 한번 똑같이 말해 보거라.”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쳐다보았다. 김서영은 김난희의 말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김난희는 그녀의 태도에 불같이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보아하니 이제야 창피한 줄 아는 모양이구나! 네 스스로 말하기가 부끄러우면 내가 대신 말해주마!” “한빈아, 네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우리 박씨 가문의 밥을 먹고 우리 가문의 자원을 써가며 다른 남자랑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정말 박씨 가문의
김난희가 던진 무거운 찻잔은 그대로 박한빈의 뒤통수에 날아가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머리를 맞은 박한빈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피는 머리카락을 따라 줄 줄 흘러 내려왔다. 찻잔을 던진 김난희가 놀라 멍해 있을 때, 집사가 급히 박한빈에게 달려가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의 손을 치워버리더니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김서영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김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김서영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박한빈이 지금 마치 진실 된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김서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김서영이 어찌 친아들인 박한빈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박한빈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김서영은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박한빈을 막았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알아봐야죠.” 김서영의 물음에 박한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알아내면? 그 다음엔?” 김서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이건 내 일이야!” “그렇습니까?”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대답을 이어갔다. “박씨 가문에 사모님이라는 분이 지금 다른 남자랑 연애를 하고 있다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십니까? 할머니를 속상하게 해서 좋으십니까?” 박한빈은 마치 김난희를 매우 신경 쓰고 있고 사랑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그러나 김서영의 눈에 박한빈은 김난희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있는 지분들을 탐내는 것 같아 보였다. 김서영이 김난희의 기분을 망쳤다면 자연스럽게 박한빈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
그날 밤 내내 성유리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계속 뒤척거렸지만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너무 피곤해 스르르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아 눈을 열심히 뜨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잘 안됐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을 때 성유리는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악!” 깜짝 놀란 성유리가 비명을 지르자 이윽고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힘없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서서히 정신이 들었고 다리를 들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리려 했다.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깨버렸으니 사람이라면 다 화가 날 만한 상황 아닌가! 성유리가 다리를 치켜들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꽉 잡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밑에 누워있던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리를 잡히는 순간, 너무 추워졌다. “이거 놔요! 손이 너무 차잖아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다리를 더 꽉 잡더니 바로 성유리에게 쓰러지듯 안겨버렸다. “저기...” 성유리가 뭐라 하려고 입을 떼려고 하니 박한빈은 머리를 한껏 숙인 채로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성유리는 자신의 이불을 잡고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강한 박한빈의 힘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박한빈의 머리를 잡으려는 그때, 성유리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렇게 축축하지?’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불빛으로 박한빈의 머리를 자세히 본 성유리는 빨간색 피를 발견했다. 너무도 놀라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성유리는 박한빈을 마구 흔들며 물었다. “다쳤어요? 머리에 왜 피가 나는 거예요? 박한빈 씨, 일어나 봐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박한빈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
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밤에 할머니랑 어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어. 왜 싸운 줄 알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몸이 잔뜩 굳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물었다. “네? 왜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연애를 해서.” 비록 성유리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 전,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알고 있었던 거네?” “네?” “성유리, 나한테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처럼 싸늘했다. 입술을 꽉 물고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이 또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말하라고.” “그게 지금 중요해요?” 그 순간, 성유리가 되물었다. “사실 제 생각에 이 일은요...” “당연히 중요하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속인 거네? 너는 네 선택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 알아?” “네가 미리 알려줬으면 난 준비라도 해뒀을 거야. 이렇게 오늘처럼 갑자기 어머니가 할머니께 들킬 일은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우리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사생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했던 말. 우리 엄마가 여태까지 나를 박씨 가문에 남겨둔 이유가 바로 지화그룹과 지분들 때문이라고.” “오늘 같이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게 하다니. 너 진짜 우리 할머니가 밖에 있는 새끼들한테 지분을 넘기는 꼴을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랬어?” 박한빈이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어쩌면 성유리는 조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자기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일들은 하지 않던 박한빈이 지금 이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