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집에서는 계속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성유리는 현관문을 꼭 잠가두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꽤 시끄러웠고, 새로운 입주자는 집을 다시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짐 옮기는 소리와 공사 소리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피곤했던 성하늘도 소음 때문에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성하늘의 곁에 누워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성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성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잠이 안 와.”“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올 거야.”성유리의 말에 성하늘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엄마, 그래도 잠이 안 와.”“그럼 뭘 하고 싶은데?”“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기 싫다는 뜻이네?”그 말에 성하늘은 민망한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싫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성하늘은 바로 성유리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의 팔을 꽉 껴안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아이의 반응에 성유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손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괜찮아, 엄마가 나가서 확인해 볼게.”“안돼, 엄마. 나가지 마.”성하늘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가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한 건장한 남자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린 딸과 단둘이 살다 보니 성유리의 경계심은 자연스레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꼭 잠근 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무슨 일이시죠?”“저희 대표님께서 이삿짐 때문에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다
두 팬덤의 싸움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제작사와 영상 플랫폼 측은 오히려 그런 팬덤 싸움을 반기는 모양이었다.요즘은 다들 그렇듯 차라리 시끄럽게 이슈가 되는 게 조용히 묻히기보다는 수익성이 더 크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던 중, 편집자가 성유리에게 연락해 원고를 요청해왔다.최근 두 달 동안 성유리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낸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곳에서 들어오는 작은 일만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이 틈을 타 성유리를 한껏 밀어줄 계획이었다.“요즘은 시간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난 이 말만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하늘이도 아직 어리고. 그렇다고 이 어린 애가 하루아침에 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알겠어, 신작은 없다 치고, 인터뷰나 하나 잡아줄게. 이 정도는 괜찮지?”“무슨 인터뷰인데?”“웹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인터뷰야. 전에 우리랑 협업한 적 있는 출판사인데,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까 원작자라도 인터뷰해서 판매량 좀 올릴 생각인가 봐.”성유리는 대충 들어주는 척만 하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성유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걱정 마. 언니만의 원칙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언니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인터뷰도 굳이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어.”그 말에 성유리는 뒤늦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오케이, 그럼 답장 보내둔다? 구체적인 시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게.”편집자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성유리도 하늘이의 생체 리듬을 지켜주며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인터뷰 시간은 밤 11시로 정해두고 아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인터뷰를 진행했다.성유리는 진행자가 단순히 드라마의 구상이나 여자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만 할 것이라 예상
하지만 진행자는 여전히 그 화제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성유리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른 억측들까지 차단해 버렸다.처음부터 끝까지 성유리는 단 한 번도 박한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성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인지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는 30분도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인터뷰가 끝난 뒤, 성유리는 송효주에게서 사과의 메시지를 받았다.“나도 저쪽에서 이런 의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저 사람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주인공들 인기가 어느 정도인데, 캐릭터 얘기나 할 것이지 왜 네 사생활까지 다 언급하고 난리래?”송효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송효주의 연락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한참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송효주는 아무 대답 없는 성유리의 반응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혹시... 화 난 거야?”“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화가 나는 것도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기억될 정도도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까먹어 버렸고 뒤늦게 뉴스를 통해 자신이 어제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의 채널이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지된 그 채널은 무려 출판사의 공식 계정이었다.곧 출판사에서도 다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날 진행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무례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과,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진행자와는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성유리는 어젯밤 진행했던 인터뷰 질문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식사를 이어나갔다.잠시 후, 앞집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보다는 훨씬 조용하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