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도인국에서 사하나를 처음 만났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혼자 도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그리고 사하나는 그곳에서 유학 중이었고 둘은 온라인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하는 기꺼이 성유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었고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함께 다녀주었다.그 당시 성유리는 끝없는 자기혐오와 우울 속에 빠져있는 상태였다.하지만 사하나는 그런 성유리의 곁에서 충실히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고 굳이 그녀의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부질없는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초반에는 성유리 역시 사하나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유학생인 줄 알았다.그런 사하나가 대기업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분명 온갖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을 테지만 사하나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부잣집 딸 특유의 거만함이라거나 불량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의리 있고 열정적이었으며 착한 사람이었다.성하늘이 태어나던 때,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딸이 어떤 사람처럼 자랐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사하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사하나 같은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그 대답을 들은 사하나는 꽤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그때 성유리의 답변은 진심이었다.성유리는 성하늘이 사하나처럼 사랑받으며 자라 세상을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끔은 거침없이 행동해도 미움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길 원했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아끼지 않았으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어렸을 적부터 가장 바라왔던 성격의 소유자였다.성유리는 이미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딸 만큼은 사하나처럼 자라나길 바랐다.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아이가... 왜 죽어야 했을까?사하나의 어머니인 류수미가 성유리에게 물었었다. 사하나가 구출되었던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 알긴 하냐고.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그
“그럼 아줌마도 그런 거야? 그치만 아줌마는 아직 젊잖아!”“맞아... 아줌마 정말 젊지.”그 말을 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성하늘은 그런 성유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물었다.“그럼 난 이제 다시는 아줌마 못 보는 거야?”“맞아...”“그럼 엄마는 오늘 어디 가?”“엄마는...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배웅해주러 가는 거야.”“나도 같이 가고 싶어.”성하늘이 말했다.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다.사하나의 부모님이 모녀의 참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사하나 부모의 원망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성하늘에게 굳이 그런 상황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성하늘에게 ‘사하나를 죽였다’라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사하나는 성하늘의 친한 아줌마였다.그녀는 성하늘의 모든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왔다.때때로 성하늘은 성유리보다 사하나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그런 성하늘을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다.만약 죽은 후에도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사하나 역시 성하늘이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주길 원하지 않을까?“같이 가자.”생각 정리를 마친 성유리가 성하늘에게 말했다.“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약속해. 할 수 있지?”성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아줌마가 하늘이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알지?”“응, 알아.”“그러니까 아줌마도 하늘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알겠지?”“응.”성하늘이 아주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사하나의 가족들이 그들 모녀에게 품은 원한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그들은 성유리와 성하늘이 장례식장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성유리와 성하늘이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사하나의 가족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성유리는 언제 박한빈이 나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언제 자신을 데리고 떠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류수미의 그 절망적인 모습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흔히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 이 세상에 진정한 공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는 같은 어머니로서, 딸을 세상 전부로 여기는 처지에서 그녀가 느끼는 절망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류수미가 성하늘을 바라보며 왜 죽은 사람이 성하늘이 아니냐고 따졌을 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던 성유리는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다행히도... 성하늘이 살아남았다고 말이다.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사라졌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내려치고 싶었다.사하나는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그녀가 가장 힘들 때, 제일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 역시 사하나였다.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걸까?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매정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사하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달려와 뺨 두 대를 때려줬을 것이다.그리고 언니와 친구가 된 게 후회된다고, 언니랑 친구가 되는 게 아니었다고 하소연할 것이다.그 말이 맞다. 만약 처음부터 성유리와 사하나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 역시 이 일에 연관되지는 않았을 텐데...성유리는 어쩌면 자신이 류수미의 말대로 정말 재수 없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 때문에 힘들어지고, 피해를 보았다.그녀에게 잘해줄수록 더 큰 불행을 겪었다.양어머니가 그랬고, 사하나도 그랬다.그러니, 이 모든 것은 성유리 탓이었다.성유리가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이런 생각들이 성유리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그러다가 성유리는 지금 자신
박한빈은 말을 꺼내며 반대쪽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라내더니 체온계를 건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것을 받지도 않고 물었다.“하늘이는 어디 있어?”“우리 엄마한테 맡겼어.”그 말에 성유리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런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너 지금 아프잖아.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애 못 돌봐. 우리 엄마가 돌봐 주고 있다니까? 설마 못 믿는 거야?”“나 지금 괜찮아.”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열도 다 내렸고, 하늘이도 내가 돌볼 거야.”“거울이라도 한 번 보고 얘기하지 그래?”“내가 어떤 모습이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유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다.그때, 박한빈이 물었다.“방금 하나 씨 꿈꾼 거지?”그 이름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오자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역시 성유리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장례식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무슨... 무슨 장례식?”성유리가 되물었다.“누구 장례식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알잖아, 하나 씨 장례식 말이야.”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조금도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거야?”“안 잊었어!”성유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서하나 엄마나 우릴 쫓아냈던 거? 그분이 나한테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한 거?”“나도 알아! 나 재수 없는 년이야! 나한테 오는 사람들, 날 아껴주는 사람들은 다 불행해져, 더 하면 죽기까지 해! 그 와중에도 난 살아남은 게 우리 딸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이제 만족해?”성유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크게 떠진 두 눈의 핏줄은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듯 한껏 솟아 있었다.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말했다.“그게 끝이 아니야. 더 생
성유리 역시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사하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계속해서 사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때로는 평소처럼 성유리와 대화를 나누고 최근 도는 소문들을 들려주며 재잘거렸다.그러다가 또 때로는 울면서 왜 자신을 구하지 않았냐며 따졌다.또 가끔은 다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니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도 했다.그러다가도 성유리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왜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왜 하필 자신이 죽어야 했냐며 원망했다.사하나의 모습과 목소리는 끊임없이 성유리의 눈앞에 나타났다.그것은 환각도 아니었다.성유리가 손만 뻗으면 사하나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사하나는 분명 죽었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심리상담사에게 데려갔다.하지만 성유리는 심리상담사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하나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계속해서 박한빈에게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그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차라리 사하나의 부모에게 원망 섞인 욕설을 들어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다.“며칠만 기다려. 날씨가 좋아지면 그때 데려다줄게.”박한빈이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이잖아요.”“아니야.”“저 안 데려다줄 거잖아요. 맞죠?”“난 약속한 건 꼭 지키는 사람이야.”박한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이곳은 박한빈이 새로 구한 집이었고 성유리도 이 사실을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원에는 푸른 나무들이 서 있었다.한겨울인데 왜 나뭇잎들이 붙어있는 거지?설마... 벌써 새해가 된 건가?그럼 사하나가 세상을 뜬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걸까?성유리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우리 엄마 어디로 데려갔어요?”하늘이가 물었다.“엄마 보고 싶어?”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하늘이는 침묵할 뿐이었다.“아니면 화난 거야?”그러자 박한빈이 다시 말했다.“그날 엄마가 한 일 때문에?”“아니거든요!”이번에 하늘이 금세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저는 절대 엄마한테 화내지 않아요.”“그냥... 엄마가 이젠 나를 싫어하나 봐요.”아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하지만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명, 사하나의 장례식 날 벌어진 일이 하늘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하늘이가 알던 엄마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이었고 무슨 잘못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던 엄마였다.그러나 그날 보인 엄마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기에 하늘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왜 믿었던 엄마마저 그렇게 생각했는지.“엄마가 지금 좀 아파서 그런 거야.”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그래서 지금 병이 난 거고.”그 말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그러니까 엄마를 너무 탓하지 마.”박한빈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지금까지는 네가 엄마의 보호를 받았잖아. 이번에는 네가 엄마를 보호해 주면 안 될까?”“어떻게... 보호해요?”“엄마를 도와줘.”박한빈이 말했다.“엄마가 병을 이겨낼 수 있게 돕고 깊은 어둠속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줘. 그러면 되는 거야.”하늘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는데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면 돼.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지?”하늘은 아무
다음 날, 날씨는 너무도 화장했다.박한빈은 다른 사람더러 성유리를 정원으로 데려가 햇볕을 쬐도록 했다.성유리는 이 제안에 별다른 이의 없이 따랐지만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그러던 중, 하늘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그 목소리를 듣자 성유리는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하늘이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채 흥분한 얼굴로 성유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그 행동은 마치 무언가 무서운 존재를 본 것처럼 다급했다.하늘이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더니 점차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때 박한빈이 빠르게 하늘이 곁으로 다가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하늘이의 눈가는 여전히 빨갰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다.그리고 다시 성유리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성유리는 계속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하늘이가 상처받을까 봐 애써 자신의 정신을 붙들었다.그러던 중, 하늘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불렀다.“엄마...”그 목소리에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하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엄마, 나 좀 안아줘. 응?”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하늘이는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았다.아직 하늘이의 손은 작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 성유리를 감싸안았다.그러자 성유리의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하늘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엄마, 나 버리지 마. 응?”“나 이제 까불지도 않고 말도 잘 들을게. 이모랑 스키 타러 가지도 않을게. 나...”하늘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의 표정이
아마 그것 때문인지,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 오늘 사씨 가문에 가고 싶어요. 가도 괜찮을까요?”박한빈은 처음에 성유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성유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거짓말한 적 없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사씨 가문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꼭 사과일까?”박한빈은 최근 그녀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어떠한 돌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더구나 지금의 사씨 가문은 분명 성유리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마치 박한빈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성유리가 말을 덧붙였다.“물론 그분들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 싶어요.”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리다 천천히 대답했다.“생각해 볼게.”그러자 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오늘 꼭 가야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바로 이곳에서 나갈래요. 원래...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까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협박하는 건가?”“그렇게 느끼신다면 협박 맞아요.”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좋아.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돼. 적어도 사씨 가문에 미리 연락은 해야 하니까.”“전 오늘 꼭 가야겠어요.”성유리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자신이 동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유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더 이상 말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