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성유리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할머니의 괭이가 내려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그러자 방금 병원에서 새로 감싼 상처가 다시 터져버렸다.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아무리 박한빈이라도 그 순간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얼굴은 한순간에 굳어졌다.“엄마!”성유리는 다급하게 뛰어가 할머니를 붙잡았다.그러나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할머니는 성유리를 밀쳐내며 다시 박한빈을 공격하려 했다.그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윤도준이 도착했다.박한빈의 피 묻은 팔을 보자 윤도준은 눈앞이 아찔해졌다.그래서 즉시 사람들을 시켜 할머니를 제지했다.“뭐 하는 거야! 이놈들아, 당장 이거 놔!”할머니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결국 윤도준은 고민 끝에 날뛰는 할머니를 경찰서로 데려가려고 했다.그러나 박한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십시오.”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하지만...”“저분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힐끗 본 뒤, 이런 말을 덧붙였다.“제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시죠.”피해자인 박한빈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윤도준도 더는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게다가 할머니가 연세도 많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박한빈이 직접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오히려 윤도준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요청에 따르기도 결정했다.서둘러 사람들을 시켜 마을 주민들을 해산시킨 후, 그는 박한빈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박한빈과는 달리 할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 들지 않았다.오히려 경찰차가 떠나려 하자 윤도준이 박한빈을 도망시키려는 거라 생각한 듯, 경찰차를 향해 욕설을 몇 마디 쏟아내기도 했다.결국 옆에 있던 성유리가 필사적으로 할머니를 붙잡아야만 했다.겨우 집
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그의 눈 속에 비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박한빈이 가로등 아래 서서 미소 지을 때마다, 그 모든 순간마다 그를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았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눈을 감아도 박한빈의 얼굴이 생각났고 어둠 속에서도 쉽게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아주 예전처럼 수없이 반복해 본 일처럼.비록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은 격하게 뛰었다.이 감정은 낯설었지만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성유리는 이미 박한빈을 좋아하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그날 밤, 박한빈은 결국 병원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미 이 지역에서는 박한빈의 존재가 알려진 상태였다.윤도준의 보고를 받은 서장은 곧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왔다.“차라리 시내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현 서장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이곳 환경은 좀...”“괜찮습니다.”박한빈은 오히려 아주 담담했다.“여기서도 충분합니다.”“그러면 제가 몇 사람을 배치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아닙니다.”현 서장의 말을 박한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아직 한 손은 멀쩡하니 그런 자원 낭비는 필요 없습니다.”“하지만...”박한빈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이번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행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그야 당연한 일입니다!”현 서장은 즉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원 쪽도 이미 단속을 해놨으니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박한빈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몇 마디 더 나눈 뒤, 사람들을 보냈다.그러자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고 그는 천천히 시계를 보
성유리가 들고 온 것은 아침 일찍 정성껏 끓인 죽이었다.새벽부터 장에 나가 사 온 닭고기와 표고버섯을 넣고 쌀과 함께 뚝배기에서 30분 넘게 고아 낸 것이었다.뚜껑을 여는 순간, 은은한 향이 병실 가득 퍼졌다.그 순간, 박한빈은 문득 그날 밤 성유리가 건넸던 그 한 그릇의 면을 떠올렸다.그는 평생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본 적과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별다른 특별한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단출한 면 한 그릇 앞에서 박한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왜냐하면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유리를 찾았으니까.한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영영 사라졌다고 믿었다.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확신했던 순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성유리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사람들이 흔히 말하지 않던가.[한 번 빛을 본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박한빈은 원래 그런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도 박한빈에게 따뜻한 한 끼를 만들어 준 적 없었다.어릴 때부터 박한빈은 그런 인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유리가 나타났었다.그녀는 마치 박한빈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 같았다.성유리가 박한빈을 찾아왔었고 늘 그의 곁에 있었다.그녀야말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그런데, 그 완전함을 또다시 잃으라고?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박한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성유리가 내민 따뜻한 죽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죽만 바라봤다.그러다 성유리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이거... 안 좋아하세요?”성유리의 손이 살짝 움츠러들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가 그랬습니까?”되묻는 박한빈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짝 쉰 듯했다.‘내 착각일까?’성유리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박한빈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래서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저 화장실 가고 싶습니다.”박한빈이 웃으며 말했다.“네?”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빠르게 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웃으며 물었다,“지금 손이 다쳤잖습니까. 밥 먹는 것도 힘든데 제가 혼자 화장실 갈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손을 내밀어 묻는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살짝 거칠었다."도와줘요."성유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안... 안 돼요.”말을 하면서 성유리는 잡힌 손을 빼려고 노력했다.하지만 한 손에 밖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한빈의 힘은 그대로였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손가락이 성유리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손바닥이 완전히 닿게 만들었다.그 뜨겁고 건조한 체온에 성유리의 얼굴은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이 순간, 성유리가 잡고 있는 것이 박한빈의 손이 아닌 것처럼.“박한빈 씨, 이거 놔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눈물이 날 듯한 표정이 되었다.박한빈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방금 저를 돌본다고 했잖습니까. 이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실 겁니까?”“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데요? 언제 제가 한빈 씨를 돌본다고 했죠?”“죽도 가져다주시고 직접 먹여도 주셨는데 이게 돌보는 거 아닙니까?”“전...”성유리는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몸을 갑자기 확 끌어당겼다.그대로 몇 걸음 앞으로 넘어진 성유리는 박한빈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다.다행히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에 있는 붕대를 보고 바로 자신의 손을 침대 난간에 짚어 버티며 겨우 떨어지지 않았다.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더 이상 멀지 않았고 많이 좁혀졌다
“박한빈 씨? 약 바꿀 시간이에요.”의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어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입만 뻥끗거렸다.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잔뜩 당황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하지만 의사는 방금 본 장면이 꽤 흥미로웠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네요.”할 일을 마친 의사는 바로 방을 떠나버렸고 성유리는 그 모습에 얼굴이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의사를 쫓아가려고 발을 내딛는 찰나, 박한빈이 또다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놔요... 당장.”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을 꾸짖으려 했다. 왜냐하면 아까 전까지 긴장된 상태로 키스를 니눴기에 목소리가 잠겨버려 힘들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스스로도 왜 지금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얼어붙었고 얼굴과 귀까지 빨개졌다.성유리의 두 귀는 담방이라도 피가 흐를 듯 붉어졌고 그 모습은 박한빈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싫습니다.”그는 일부러 성유리를 놀리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기요!”성유리는 화가 나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앙다문 채 박한빈을 가만히 주시했다.“아프십니까?”그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네?”“그렇게 물고 계시면 안 아프시냐고요.”박한빈은 손을 쭉 뻗어 성유리의 입술을 살짝 어루만졌다.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의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하지만 아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혓바닥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사라진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하고 나서야 성유리는 손을 들어 입술에 맺힌 피를 닦아내려고 했다.그러나 박한빈이 먼저 막아섰다.“제가 하겠습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목소리가 잠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피를 닦아주고
성유리의 옷 속으로 파고든 박한빈의 손은 그녀의 허리선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이런 동작은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반복했던 익숙한 일이었다.박한빈은 그녀의 몸에 대해서는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그러나 정작 깊은 감정이 차오른 순간, 박한빈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말았다.성유리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그녀가 그에게 특별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일 뿐이었다.일종의 습관, 무의식적인 반응 같은 것이었다.하지만 그 습관 속에 지금과 같은 친밀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박한빈의 손길이 특정한 곳을 스쳤을 때 성유리는 마치 털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경직되었다.그리고 박한빈을 세차게 밀어냈고 심지어 있는 힘껏 따귀까지 때렸다.그것이야말로 기억을 잃은 성유리의 진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조용한 병실 안에서 유독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그러나 박한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오히려 어딘가 미련이 남은 듯한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반면,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옷깃을 단단히 쥐었다.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찾아냈다.“박한빈 씨, 왜 그런 거예요?”목소리는 분명하게 떨렸고 눈가도 붉어지고 있었다.성유리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격하다는 걸 깨달은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그러나 곧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마치 겁에 질린 토끼처럼.박한빈은 잠시 멈춰 서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더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그를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진짜예요.”결국 박한빈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방금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습관이었습니다.”그 순간, 성유리의 표
박한빈의 퇴원 신청은 결국 반려되었다.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심지어 현 서장까지 직접 병원을 찾아와 박한빈을 철저히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했을 정도였다.그렇다면 병원 측에서 조금이라도 허술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에 머무르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무엇보다 이곳의 인터넷 신호가 확연히 더 좋았다.마을에서는 신호가 불안정해 연결이 자주 끊겼지만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통신이 가능했다.물론, 금성 쪽의 일은 이미 에릭에게 맡긴 상태였다.그러나 에릭은 가끔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직접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무엇보다 성유리에게 자신이 사씨 가문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날 밤, 그녀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그러나 사씨 가문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최근 사씨 가문이 연정우를 대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박한빈은 마치 연정우가 그들에게 어떤 주술이라도 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니,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린 것일지도.아무리 생각해도 수십 년간 상업 전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자신의 가문을 타인에게 넘길 수 있는가?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씨 가문의 문제일 뿐이었다.박한빈에게 세상의 이치는 간단했다.자신의 편이 아니면, 곧 적일 뿐.그리고 적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다만, 이 모든 일을 성유리만은 모르게 해야 했다.어차피 사씨 가문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현재 박한빈의 ‘사망 소식’은 이미 금성 전역에 퍼진 상태였다.핸드폰을 꺼내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지화 그룹의 주가가 폭락한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온라인 뉴스들.박한빈은 그것들을 가볍게 훑어본 후 망설이다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에서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