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도 처음부터 사민혁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니었다.심지어 의사들도 말했듯이 그의 사망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인이 이미 살고 싶은 욕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의사들이 아무리 살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하지만 사민혁의 죽음이 박한빈과 전혀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연정우가 그들의 곁에 있던 것 자체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박한빈이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의 자산이 연정우에게 다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박한빈이 지금 그 속도를 더 빨리 만든 장본인임이 분명했다.그는 자신이 사씨 가문이 모든 것을 잃게 된 속도를 가속시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긴 시간이 지나도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았다.“내가... 상황을 더 빠르게 진행되게 했다는 건 인정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평화롭게 늙어가던 상황이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야.”“연정우가 사씨 가문의 자산을 몰래 빼내기 시작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사씨 가문에 붙어 모든 걸 빨아먹고 있던 흡혈귀야. 나는 연정우 씨가 빼앗아 간 걸 다시 돌려놓았을 뿐이고.”박한빈은 행여나 말을 잘 못 뱉을까 봐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하고 골랐다.물론, 이 과정이 박한빈이 말한 것처럼 간단하고 깔끔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인과 관계는 결국 그렇게 맞아떨어졌다.박한빈은 사실 사씨 가문을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사씨 가문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있었고 연정우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면서 재산을 지킬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사씨 가문이 하늘이를 양손녀로 삼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원한다면 박한빈은 그들이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박한빈은 사실 어떤
“그래서 전 연정우 씨가 지금 다른 재단들과 협력하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성유리는 자신이 맞게 추측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필경 이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뿐이었으니까,연정우는 국내에서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그가 빼앗은 자산은 적지 않았다.그 자산으로 해외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따라서 연정우가 이렇게 잠잠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성유리는 그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연정우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 그가 평범한 삶에 만족할 리 없었다.복수의 기회를 엿보며 박한빈이 모든 것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연정우의 선택일 것이다.성유리가 말을 마친 후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침묵에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이 틀린 건가요?”박한빈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 난...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성유리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러니까... 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그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뭘 원망해야 하는데요?”박한빈은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와 방금 나눈 대화는 성유리에게 이미 충분한 답을 주었다.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을 꺼냈다.“방금 말했잖아요.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연정우 씨는 사씨 가문을 무조건 집어삼켰을 거라고.”“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은 연정우 씨지, 당신이 아니에요.”성유리는 진지하게 말하며 박한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순간, 성유리가 말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사실 그동안 박한빈은 마음속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특히 그날, 크루즈에서 일어난 일 이후로는 자신이 버려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그렇기에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그러나 성유리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박한빈은 감동해
성유리는 차를 멈추자마자 눈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 이름부터 확인했다.새누리 아파트.이 아파트는 금성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슈퍼마켓과 병원이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이었다.성유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몇 명의 노인들이 운동하거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꽤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성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은 그들 중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한빈이 미리 아파트 단지의 배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유리는 금세 찾던 사람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그 집의 큰 문은 꽉 닫혀 있었고 입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우산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성유리는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물건은 문 앞에 두고 가면 됩니다.”그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집안에서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문을 열어줬는데 성유리를 보고 나서는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그녀는 무심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빠르게 손으로 문을 막았다.“금미라 씨? 왜 이렇게 급해하세요?”금미라는 손으로 문을 계속 누르다가 실패하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말했다.“뭐 하려는 거야? 내가 여기 사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성유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당신이 여기 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알아내기 어려운 일인가요?”그 말에 금미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도대체 뭘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말해두는데 나 돈 없어. 그리고 모든 일은 연정우 혼자 한 거니까 찾으려면 걔를 찾아가.”그러자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맞아요. 원래는 연정우를 찾으려고 했어요.”“근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성유리의 물음에 금미라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방금
“박한빈 씨 성격이 어떤지 금미라 씨도 잘 아시잖아요. 사씨 가문이 저희에게 베푼 은혜도 있고... 이젠 죽을 사람은 죽고 미쳐버린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 사람이 더더욱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도 사실 오늘 이 대화에서 큰 성과를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등을 돌리자 금미라가 갑자기 소리쳤다.“잠깐!”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미라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 보였고 깊이 주름진 이마는 금미라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성유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조용히 서서 금미라가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잠시 후, 금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너한테 말해 준다면... 정말 날 가만히 놔둘 거니?”성유리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으실 거예요.”“하지만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딱 하나. 지금 이 평온한 삶을 더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이틀 뒤,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모풍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사실 박한빈은 혼자 가려고 했었지만 성유리는 단호했고 예상보다 강한 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의아함을 느꼈다.그래서 비행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너 혹시 뭐가 떠오른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묻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한빈 또한 가만히 성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뭐가요?”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은 확신이 들었으나 이내 초조해졌다.“그러니까... 네가 기억해 낸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떠오른 건 없지만... 어젯밤 꿈을 꿨어요.”“꿈
라온시, 밤.이곳은 모풍국,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다.여기선 자본만 쥐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던지 다 옳은 일이 되기도 한다.누구도 막을 수 없고 어떤 제약도 없었기에 이곳은 자유의 도시라는 별명도 소유하고 있다.귀청을 때리는 음악 속, 에이미는 비키니 차림으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가느다란 허리는 손끝만 대도 부러질 듯했고 몸을 비틀 때마다 곁에 앉은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단출하게 흰색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목과 소매의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친 채,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고르는 포식자 같았다.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시선에 익숙했으니 불쾌함 따위 느낄 이유도 없었다.왜냐하면 그녀가 여기 온 목적 자체가 바로 ‘사냥감’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이곳은 넥스트 펀드의 고위 파트너들이 주최한 파티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엄청난 조건이 필요했다.그리고 선택받는 건 오직 최고급의 존재들뿐.에이미는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에릭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오늘 밤, 그녀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바로 이 남자에게 달려 있었다.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에이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몸을 한 바퀴 휙 돌리더니 자연스럽게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애초에 입은 옷이 거의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남자는 곧바로 에이미의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손을 뺐다.“춤 배운 적 있나?”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에이미를 보던 남자가 물었다.그러자 에이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잠깐 배웠던 적 있어요.”“좋군.”그 말을 남기며 남자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에이미는 이미 그 시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최소 수천만 원은 족히 될 법한 시계였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남자는 차고 있던 시계를 앞으로 보이는 수영장에 던졌다.“너한테
에릭은 그 말에 가늘게 눈을 뜨고 박한빈을 쓱 바라보았다.“들어오라고 해.”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걸 에릭이 놓칠 리 없었다.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그는 사람들을 모아 간단한 내기를 열었다.내기의 주제는 바로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였다.에릭은 박한빈을 오래 봐온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장담했다.박한빈은 절대 버티지 못할 거라고.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에이, 박한빈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걸로 무너지겠어?”“난 2000원 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그럼 난 4000원.”내기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에릭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이 진짜 박한빈을 모른다고 몰래 혀를 끌끌 찼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그를 비웃었다.“야, 박한빈이 그렇게 감정적일 거라고 생각해?”“너야말로 걔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그렇게 말들이 오가는 사이 드디어 웨이터가 성유리를 데리고 파티 장소로 들어왔다.성유리는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곳에 있던 여자들이 몸매를 과시하는 비키니를 걸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그렇기에 오히려 그 단아한 차림새가 이곳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조용히 걸어와 박한빈 앞에 멈춰 섰다.사실, 박한빈이 에릭보다 먼저 그녀를 봤어야 맞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마주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같이 가요.”그녀의 태도는 한없이 공손했다.그 모습에 에릭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남자 앞에서 자존심을 버리는 모습을 봐왔다.그리고 한때는 박한빈에게도 말했었다.“여자를 너무 애지중지하지 마라.”하지만 막상 이렇게 성유리가 박한빈 앞에서 몸을 낮추는 걸 직접 보니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런데도 정작 박한빈은 여전히 술만 마실 뿐,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성유리
성유리는 멀리 가지 않았다.에릭이 내려왔을 때, 그녀는 호텔 정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여기는 라온시.이곳은 그녀가 사는 금성이 아니었다.아무리 도심의 조명이 밝다고 해도 한밤중에 동양인 여성 혼자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위험했다.더군다나 성유리는 작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처럼 보였다.그런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로 인식되기 쉬웠다.박한빈도 그걸 알았다.그래서 예전에 그녀를 라온시에 데려왔을 때는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되는 듯 늘 가까이에서 성유리를 지켜보며 보호했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은 그녀를 혼자 남겨두었다.에릭은 이 상황이 꽤 복잡하게 느껴졌다.솔직히 말해 그가 일하면서 수백 개의 금융 데이터를 한꺼번에 분석하는 것보다도 이 상황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에릭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그저 ‘호스트’로서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제가 사람 불러서 호텔까지 바래다주라고 할게요.”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에릭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고마워요.”성유리는 나직이 말했다.그런데 그녀의 눈가가 방금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솔직히 에릭 정도 되는 사람이 몇 방울의 눈물에 흔들릴 리 없었다.얼마 전, 그가 어느 채무자의 집에 돈을 받으러 갔을 때 그 집의 10대 소녀가 에릭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그러나 그때조차 에릭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성유리의 눈가에 맺힌 그 몇 방울의 눈물은 왠지 모르게 에릭을 짜증 나게 했다.에릭은 자기도 모르게 귀찮은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대체 두 사람... 무슨 일로 싸운 겁니까?”성유리는 고개를 뚝 떨구고 자신의 발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류수미 씨가 미쳐버렸어요. 알고 계세요?”“알고 있습니다.”에릭은 별 감흥 없이 답했다.미쳤다 한들 어쩌겠는가?그들의 세계에서
에릭은 심지어 박한빈이 진짜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되려 에릭에게 되물었다.“너는 예전부터 나한테 이런 삶 살라고 하지 않았어?”“근데 왜 이제 와서 막상 내가 즐기니까 갑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지?”에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한빈은 그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에릭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앞쪽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저 여자 봐봐, 어때?”...성유리는 호텔에서 혼자 3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그동안 박한빈은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호텔 로비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결국 귀국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휴대폰으로 항공권을 검색하며 예약하려던 순간, 누군가 성유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호텔 로비는 여전히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성유리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남자가 앉는 순간, 마치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서서히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짧은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맞은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 씨 맞으십니까?”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남자는 어두운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콧날 위에는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무겁게 얹힌 한국어 발음에서는 외국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그리고 이내 성유리는 남자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실망한 표정이 살짝 드러났다.남자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희 보스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누구요?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무언가 기대하는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