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드레스는 비서에게 부탁한 것이고 비서는 강민아의 치수에 맞춰 맞춤 제작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언제 잰 사이즈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민아는 그에게 아내의 자리에 놓인 장식품 같은 존재였다.함께 밤을 보낸 지도 너무 오래됐고 반하준은 그녀의 몸에 아무런 흥미가 없으니 그녀가 뚱뚱하든 말랐든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신경 쓰지 않았다.“드레스가 안 맞으면 만족할 때까지 수정하면 돼.”반하준은 충분히 강민아를 배려해 줬다고 생각했다.강민아가 드레스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부신 그룹에서 날 기술팀에 데려가려는 거야?”“널 비서팀에 들여서 내 개인 비서로 쓸 생각이야.”강민아는 반하준의 말에 2초간 얼어붙었다가 웃으며 말했다.“7년 동안 공짜로 보모 노릇을 했는데 이제 와서 월급을 주고 계속 보모 노릇을 하라고?”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넌 서경에서 제일 비싼 가정부가 되겠지.”강민아가 웃었다.“딱 한 마디만 할게.”반하준이 물었다.“동의? 아니면 돈을 더 달라고?”“멍청해.”반하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호수처럼 차분하던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강민아, 넌 고작 학사 학위잖아.”그가 살벌한 어투로 경고했다.“넌 그저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뿐이야. 대회에 출전하는 것과 팀 전체를 이끌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전혀 달라.”부신 그룹 주주들은 강민아에게 CTO 자리를 주고 싶어 했다.하지만 그는 강민아와 결혼한 지 7년이 되었기에 그녀의 능력을 잘 알았다.스무 살의 나이에 주부가 된 여자가 어떻게 부신 그룹의 CTO가 될 수 있겠나.강나현이 반하준의 편을 들었다.“언니, 왜 하준 씨한테 욕해.”강민아가 웃었다.“사실을 말한 거야.”그녀는 선물 상자를 들어 반하준에게 던졌다.“가져가. 창피하게 굴지 말고.”도민영은 강민아가 선물 상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손을 뻗어 상자에서 드레스를 꺼냈다.그러고는 신이 나서 옆에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성진 씨
남자는 황제처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강민아는 분명히 그와 동등한 위치에 앉아 있었지만 상위 포식자의 경멸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반하준이 말을 잇기도 전에 강성진은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버릇없는 놈. 무슨 여자가 남자에게 굽신거리지 않겠다는 말을 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강성진은 의자를 걷어차고 식탁을 한 바퀴 돌더니 강민아에게 달려들었다.강나현은 웃음이 터질까 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정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강성진이 움직이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했다.강성진이 손을 뻗어 강민아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뭐 하는 거야!”갑자기 반용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할아버지!”의자 위에 올라선 정이가 강민아를 향해 뻗은 강성진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칼을 겨눈 듯 팽팽한 분위기가 룸 안에 감돌며 당장이라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특수부대 은퇴 군인 비서가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휠체어에 앉은 반용화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풍기며 가는 곳마다 주위 모든 것을 압도했다.반용화는 검은색 터틀넥 니트와 긴 다리를 감싸는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강나현은 반용화의 얼굴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반용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인데 반하준보다 2살 많은 그는 10년 전에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들이 어려서 아직 레고를 가지고 놀던 시절부터 반용화는 천체의 운행 원리를 연구하고 있었다.강나현은 아직도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유하와 함께 반씨 가문 본가에 가니 반하준이 그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가서 작은 물고기와 새우를 잡았다.반씨 가문으로 돌아와 1층의 한 방을 지나는데 반용화가 공식으로 가득 찬 칠판 앞에 서 있었고, 십여 명의 어르신들이 산수 종이와 커다란 노트북을 들고 반용화와 토론하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어린 강나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물었다. 반용화가 너무 잘생겨서 본능적으로 가까이 다
강한 기운이 무겁게 강성진을 짓누르고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반용화 앞에서 그는 마치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고 감히 발을 뻗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들개 같았다.“하지만...”어쩐지 자신보다 반용화가 더 강민아의 아버지 같아 강성진이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알아들었는지 대답만 하세요.”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덤덤했지만 강성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에 입을 벌리고 반용화가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반용화가 강성진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비서는 그의 휠체어를 밀고 상석으로 향했다.반용화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선물 상자와 부신 그룹이라고 적힌 종이봉투가 밖에 떨어진 걸 보았다.“이건 뭐지?”반하준이 대답했다.“제가 강민아에게 준 부신 그룹 오퍼입니다.”반용화가 턱을 까딱하자 비서가 종이봉투에 손을 뻗어 그것을 열고 안에 든 계약서를 꺼내 반용화에게 보여주었다.계약서를 받아 든 반용화가 내용을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들어 꿰뚫을 듯한 눈빛을 보내자 반하준은 목뒤로 한기를 느꼈다.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감히 숨을 쉴 엄두도 내지 못했다.정이와 민이도 반용화를 처음 본 순간 그가 들어올 때부터 보이지 않는 아우라에 압도당했다.“생활 비서 고용 계약서?”룸 안에는 날카로운 칼이 허공을 가로질러 차가운 섬광을 내뿜으며 반하준의 얼굴을 할퀴는 것 같았다. 생경한 고통이 느껴졌다.“반하준.”반용화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자 반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휠체어에 탄 남자가 반하준에게 계약서를 건네자 반하준은 정중하게 손을 뻗어 계약서를 받았다.“민아가 날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감히 이런 계약서로 모욕해? 네가 3살짜리 어린애야?”그림자가 반하준의 동공에 드리우고 그는 반용화 앞에서 차마 반박할 재간이 없었다.그는 부신 그룹의 강대한 버팀목이다.반씨 가문의 가장은 아니지만 반하준의 아버지조차 서른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존경을 표했다.반하준도 그 앞에서는 숨 쉬는
계약서를 쥐고 있던 반하준의 손가락이 힘껏 조여지며 종이에 불규칙한 주름이 새겨졌다.반용화의 목소리는 차갑고 차분했지만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네 아버지가 널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그 한마디가 돌풍처럼 휩쓸며 반하준의 오랜 자부심과 자만심을 산산조각 냈다.반씨 가문의 수장이자 부신 그룹을 수년간 이끌어온 그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였다.반하준은 자신이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신이 지금 벌을 내리고 있었다.순간 반하준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작은아버지, 저희는 쓸데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절 잊으셨어요? 저랑 유하가 반씨 가문 저택에서 뵌 적이 있는데...”강나현은 반용화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반용화는 그렇게까지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뛰어난 외모에 2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도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강나현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강나현이 말을 마치자 강성진도 서둘러 거들었다.“도련님, 저희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 민아 아빠이고 저희는 얘 가족인데 쓸모없는 사람일 리가 있나요.”반용화의 어두운 시선이 강성진에게 향했다.철저히 거리를 두는 듯한 그의 시선에 강성진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집에서 내쫓고도 가족이라고 할 수 있나?”그 순간 강민아의 마음도 흠칫 떨렸다.반용화는 어떻게 그녀와 정이가 강씨 가문 사람들에게 내쫓긴 사실을 아는 걸까.강성진의 말문이 막히며 어떻게든 변명하려 애썼다.“그게 아니라...”“입 다물어.”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보이지 않은 재갈이 강성진의 입을 막았다.반용화가 턱을 까딱하며 반하준에게 말했다.“데리고 나가.”강성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이 바닥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다.식사 도중에 온 가족이 쫓겨나다니.강나현은 다급한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았지만 반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대할 뿐이었다.“나가죠.”반용화가 일곱 살에 천재적인
반하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목에 날카롭게 툭 튀어나온 울대가 꿈틀거렸다.반용화는 평온한 목소리로 다그쳤다.“알겠으면 대답만 해.”반하준은 머리털이 쭈뼛 서며 반용화를 향해 평소 높이 들고 있던 고개를 숙였다.“네...”그의 표정은 좌절에 빠진 장군 같았고 넓은 어깨에는 우울함이 가득했다.반하준의 대답을 들은 반용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강민아가 반용화 옆으로 걸어갔다.“연구원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정이가 강민아의 뒤를 따르며 칭찬했다.“연구원님 대단해요!”아이의 조그만 머리에는 여전히 충격이 가득했다. 반하준의 기세가 꺾이는 건 태어나서 처음 본다.정이는 반용화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에게 반용화는 반하준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였다.“예전처럼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반용화는 강민아가 연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꼭 모르는 사람 같았으니까.분명 그는 한때 강민아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사람인데...강민아는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예전엔 오빠라고 불렀잖아요.”왜 지금은 오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 걸까.반용화는 하늘에 있는 신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휠체어에 앉은 반용화의 검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럼 전 뭐라고 불러요? 엄마의 선생님?”강민아는 손을 뻗어 정이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그냥 아저씨라고 불러.”반용화는 가느다란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 호칭도 나쁘지 않았다.“하준이를 거절했으니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에 갈 기회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야.”서밋 포럼은 주로 재계 인사를 초대하는데 강민아가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도 재계 사람은 아니었다.만약 그녀가 학교 측의 초청을 받아 서밋 포럼에 참여하면 몇몇 대학에만 얽매이게 된다.반용화의 손끝이 휠체어 팔걸이를 살며시 문질렀다.“마침 내게...”“저 서밋 포럼 초대장 있어요. 주최 측에서 직접 초대한 거예요.”강민아가 기쁜 소식을
웨이터의 말을 들은 반하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작은 아버지와 강민아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가?’전에 반하준은 반용화와 강민아가 서로 대화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반하준은 이내 작은 아버지가 재능을 눈여겨보고 강민아를 챙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게다가 작은 아버지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인데 그와 강민아는 이혼했지만 정이에겐 반씨 가문의 피가 흐르지 않나.작은 아버지는 반씨 가문의 가까이 모친을 챙겨주는 것뿐이다.반하준이 부하직원에게 연락했다.“작은아버지 차를 따라가. 작은 아버지가 강민아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야겠어.”“반 대표.”이미 자리를 떠난 줄 알았던 강성진은 식당 앞에서 제네시스 차량이 떠나는 것을 보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강성진은 룸 안에 반하준만 남은 것을 보고 호기심에 물었다.“반 연구원님은 왜 왔다가 그냥 갔어? 민아는? 설마 두 사람 같이 갔어?”강나현이 이상한 어투로 말했다.“강민아랑 작은 아버지 아는 사이야? 왜 하준 씨 작은 아버지가 계속 강민아 편을 드는 건데!”의자에 앉은 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그는 불쾌한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검은 동공은 차가운 웅덩이 같았다.“왜 아직도 안 갔죠?”반하준의 질책을 받은 강성진은 벌벌 떨었다.“반 대표, 난 서밋 포럼 입장권이 꼭 필요해. 옴 테크가 우리 우강 그룹을 인수할 생각이 있어 보여도 서밋 포럼에서 출구를 찾고 싶어.”반하준도 강성진의 속셈을 잘 알았다. 그의 강승 테크 공장은 해마다 매출이 감소하며 올해 윗선에서 새롭게 제정한 수출입 무역 규제로 인해 매출이 더더욱 직격탄을 맞았다.해외 기업 옴 테크가 강승 테크를 헐값에 인수하려는 상황에서 강성진은 인수 가격을 올려줄 수 있는 기업을 찾기 위해 유명인이 모이는 서밋 포럼에 참가하고 싶어 했다.“다음 주 서밋 포럼 파티에 강나현과 강기성도 데리고 갈게요.”반하준의 말에 강성진이 눈을 크게 떴고 강나현은 기쁨을 참지 못했다.“
비서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으로 누군가 자신의 차를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스카이넷 시스템을 이용해 그 차의 출처를 조회했다.강민아는 순간 땀이 삐질 났다.‘미친 전남편.’반용화의 검은 눈동자에 묘한 미소가 숨겨져 있었다.“네 전남편이 너한테 관심이 많네.”그는 반하준이 조카가 아니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낯선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그냥 미친 사람 같아요.” 반용화 앞에서 더 거칠게 반하준을 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애썼다.반용화는 비서에게 말했다.“따라오게 놔둬.”검은색 제네시스 차량이 반용화의 거처로 진입했다.차량이 저택 반경 5km 이내에 접근하면 하늘에 있는 위성이 동향을 감시하고 곳곳에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저택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10미터 하나씩 초소가 있었다.강민아는 차에 앉아서 창밖으로 순찰차 행렬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제네시스 차량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지하 차고로 들어갔다.반용화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민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기대감에 가득 차 반짝였다.“선생님,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건 제가 용성에 들어가는 걸 동의하신다는 건가요?”강민아는 이미 반용화의 주택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영원히 배신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니.”반용화는 곧바로 부정했고, 강민아의 환상은 단 1초 만에 깨졌다.“저 금상 받았잖아요!”강민아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작 대회 하나로 용성에 들어올 수 없어.”강민아의 온몸이 서리 맞은 가지처럼 시들시들해졌다.그녀는 윗입술을 깨물고 입김을 불어 콧등에 드리운 머리카락 한 가닥을 날려 보냈다.희미한 불빛 속에서 반용화는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본인조차 강민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퍽 너그러워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앞으로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자료 살펴봐.”자료라는 말에 강민아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당장이라도 반용화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었다.반용화의
하지만 강민아 앞으로 다가가자 이내 자제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분홍빛 뺨을 들어 올려 강민아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석현아, 오랜만이야. 안아봐도 될까?”정이가 반석현을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반석현은 다소 긴장한 듯 작은 손가락으로 소매를 움켜잡았다.“응!”그가 정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이가 반석현을 안더니 이윽고 아이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정이는 반석현을 들고 몸무게를 가늠해 보았다.“석현아, 전보다 무거워졌네. 밥 잘 먹었구나?”반석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그리고 두 줄로 서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선생님, 강민아 씨, 윤정 아가씨,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정이는 반석현을 내려놓고 미처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지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교양 덕분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강민아도 인사에 답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반용화의 저택에 이렇게 많은 여자 도우미가 있다니, 미녀가 셀 수 없이 많았다.“강민아 씨, 저희는 발렌시아 VIP 서비스 팀입니다. 이쪽은 수석 디자이너 이자벨 씨인데 선생님의 요청을 받아 드레스를 제작하러 왔어요.”세련되고 심플한 금발의 디자이너가 미소를 지으며 줄자를 꺼냈다.“민아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면 바로 시작할까요?”14살 나이에 반용화의 손에 이끌려 서경에 도착한 그녀는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을 입은 채 호기심과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차창 밖 고층 빌딩들을 둘러보았다.반용화는 그녀를 발렌시아의 최고 VIP를 전담하는 부서로 데려갔는데 그때 강민아의 옷을 맞춤 제작해 준 사람도 이자벨이었다.당시 강민아는 반용화에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여기 옷 비싸지 않아요? 고연대 가려면 이렇게 비싼 옷을 입어야 해요?”영재반에 가는 것도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면 차라리 가지 않을 거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렇게 비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반용화가 말했다.“난 네가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대학은 단순히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