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만나서 반가워요!”민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휴게실에 앉아있는 상대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다.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강민아는 민이와 두 눈이 마주쳤다.민이의 들뜬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가만히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강나현과 민이 뒤에는 사람들로 우글거렸고 카메라맨이 강민아와 윤세현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윤세현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강민아와 몸을 바짝 붙였다.“강민아, 네가 왜 루나 휴게실에 있어?”강나현은 너무 놀라서 말투까지 바뀌었고, 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세현을 바라보았다.“그쪽이 루나에요?”말하며 민이는 머리를 긁적였다.윤세현은 헐렁한 그레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키가 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기 때문에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성별을 오해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앳되게 생긴 미소년이라고만 생각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루나가 아니야.”강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아와 붙어있는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러다 강나현은 문득 7년 전에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강민아가 그녀의 언니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직접 미행에 나섰고 여러 번 강민아를 미행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어쩌다 강민아에게 소꿉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는 운 좋게도 루나의 내비게이터가 되었다.윤세현이 유명해진 후 바로 강민아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려 강나현은 오랫동안 행복해했다.이후 반하준으로부터 윤세현을 자신의 레이싱 코치로 영입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된 강나현은 비천한 강민아의 ‘소꿉친구’에게 경멸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강나현은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강민아와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민아 언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긴 루나의 휴게실이야. 멋대로 들어와서 루나의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강민아에게 아픈 가시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가시 돋친 말로 강민아를 자극했다.말을 마친 민이가 승리자처럼 강민아를 주시하며 그녀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길 기다렸다.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딜 찔러야 제일 아픈지 잘 알았다.시골에서 태어나 레이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민아 같은 여자는 반씨 가문 도련님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민아, 만약 내가 시범 경기에서 1등 하면?”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민이의 말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민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고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이는 루나의 이름만 들으면 강나현에게 새엄마가 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었다.구름 목장 비탈길에서 보낸 그날 밤 이후, 민이의 마음속 강하고 무적인 강나현의 이미지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아빠에게 엉덩이를 맞겠나.그조차 아빠에게 고작 손바닥 열 대를 맞았을 뿐인데 말이다.강나현이 엉덩이를 맞고 울부짖으며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민이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게다가 다음 날 아침 강나현은 그대로 기절했다.민이가 본 강나현의 얼굴은 벌레에게 물려 돼지처럼 우락부락했고 눈꺼풀은 퉁퉁 부어오른 채 반하준의 부하들 손에 이끌려 비탈길에서 옮겨졌다.민이는 심지어 어디 가서 그녀와 아는 사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더 대단한 엄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민이는 강나현의 시선을 피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현이 형이 1등 해도 생각해 볼게요.”말할수록 목소리는 더더욱 어눌해졌지만 강나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 빨리 나가. 스태프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루나 휴게실에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쫓겨날 거야. 그러면 망신인데?”강민아의 시선이 강나현의 허벅지로 향했다.“난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역시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다른 가죽도 두껍나 봐.”강민아의 말에 강나현은 허벅지와 엉덩이가 다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강나현은 몇몇 스태프들을 향해 참가증을 번쩍 들어 보였다.그들이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보길 바랐지만 스태프들은 그녀의 참가증을 보고도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었다.강나현의 이름은 이미 대회 시작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당연히 알죠. 레이싱 자격증도 없는 아마추어 선수 강나현 씨, 처음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거니까 제가 제대로 알려드릴게요.”스태프가 이를 악물고 힘을 주며 말했다.“멋대로 다른 선수 휴게실에 쳐들어오지 마세요.”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누가 당신들 들어오라고 했습니까?”조명을 든 사람들과 카메라맨 모두 강나현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오만하게 소리를 질렀다.“제 사람들이에요!”스태프도 화가 잔뜩 나서 윽박질렀다.“대회 곧 시작합니다. 일부러 꿍꿍이가 있어서 이 많은 사람 데리고 루나 방해하러 온 거 아닙니까?”툭!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레이싱 헬멧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조명 담당자 하나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둘러 헬멧을 주워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강민아는 그의 손에 미세한 바늘이 들려있는 것을 포착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으면 평소 일할 때 쓰는 도구인 줄 알 거다.그는 이내 바늘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정말 촬영 때 쓰는 도구라면 왜 갑자기 치우는 걸까.강나현이 데려온 조명 담당자가 헬멧을 떨어뜨리자 스태프는 더더욱 화가 났다.“이건 루나 헬멧이에요. 가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쫓아낼 거예요!”몇몇 스태프가 새처럼 손을 펄럭이며 강나현 일행을 쫓아냈다.“난 여기서 루나 기다릴 거예요!”민이가 말을 듣지 않자 스태프는 곧장 아이의 팔을 잡아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민이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스태프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다.“난 부신 그룹 도련님이야!”씩씩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민이의 살진 얼굴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부신 그룹 대표라도 멋대로 루나 휴게실에 들어와 대회 준비 방해하는 건 안 돼.”“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스태
미간을 찌푸린 강민아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5년 동안 민이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반씨 가문 모두가 아이의 행동이 맞다고 말했다. 단지 반씨 가문의 장손이고 장차 부신 그룹의 후계자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가 무슨 짓을 하든 옳다고 했다.아이가 엄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순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생겨버렸다.강민아는 캐비닛으로 걸어가 헬멧을 집어 들고 윤세현에게 말했다.“휴대폰으로 플래시 좀 켜줘.”윤세현이 자기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다가갔다.“왜 그래?”강민아가 윤세현에게 휴대폰을 맡긴 채 헬멧 안을 비춰보니 곧바로 모래보다 더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그 벌레들은 환한 플래시 불빛이 있어야만 똑똑히 보였다.윤세현은 경악했다.“헬멧에 왜 벌레가 있어?”이론적으로 서경의 건조하고 추운 날씨에서는 날벌레가 잘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헬멧은 불과 반시간 전에 막 꺼내서 올려둔 새것이었다.그런데 어쩌다 날벌레가 들어갔을까.“헬멧 손을 댄 건 조명 담당자였어.”강민아의 말에 윤세현이 충격을 받고 소리를 질렀다.“그 사람이 헬멧에 손을 댄 거야?”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강나현이 시킨 짓이야!”확신에 찬 그녀의 말에 강민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은호 씨, 이번 시범 경기 참가자들의 헬멧에 누가 손을 쓰진 않았는지 빨리 가서 알아봐 주세요.”그러면서 당부했다.“아직 밖에서는 소란 일으키지 말고요.”이번 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심은호였다.비록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은 이미 해체됐지만 심은호는 여전히 국제 레이싱 대회 주최 측의 큰 손이었다.강민아의 귓가에 남자의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네, 바로 사람 보내서 알아볼게요.”강민아에게 왜 그러는지 묻지도 않았다.그녀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으니까.“부탁드려요.”강민아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심은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마침 저도 흥
반하준은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레이싱 슈트를 입은 여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눈 부신 햇살이 반하준의 뒤에서 쏟아져 내리며 빛이 그의 어깨 위를 비추었다.그는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헬멧을 알아보았다. 루나의 전용 헬멧으로, 짙은 남색에 황금빛 달이 별에 둘러싸여 있었다.여자의 상반신은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그녀가 어둠에서 나올 때 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루나가 헬멧을 쓰지 않았다는 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강민아도 제법 놀랐다. ‘반하준이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는 건가?’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한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과 넓은 어깨를 가졌으며, 맞춤 정장으로 감싼 몸의 모든 선이 정교하게 조각된 듯했다.“루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당신이 정해진 시간에 차를 가지러 내 차고에 오지 않아 원하던 스포츠카는 이미 새 주인에게 갔어요.”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반하준은 자신이 루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일부러 놀리고 수치심을 선사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랐다.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매섭고 날카로웠다.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루나를 가리고 있는 그림자를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운 화살처럼 쏘아보았다.“마지막 기회를 주죠. 연봉 20억 받고 강나현의 코치가 되어줘요. 평범한 실력인 건 잘 알고 정상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어요. 내 요구는 간단해요. 3년 안에 전국에서 유명한 레이서로 만들어주는 것.”이건 반유하의 이루지 못한 소원이라 강나현이 반유하 대신 이루길 바라는 반하준의 의도였다.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은퇴 5년 만에 갑자기 시범경기 무대 복귀를 선택한 건 결국 돈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고 과거 문라이트처럼 떠받들
작고 동그란 턱에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이었다.여자의 입술은 새콤달콤한 체리를 닮았고 코는 오뚝했으며 눈매는 부드러웠다.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귓가에 몇 가닥 잔머리가 흘러내렸다.반하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뜬 채 강민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의 머릿속도 정지 버튼이 눌렸다.‘루나 얼굴이 왜 강민아로 보일까.’말도 안 된다.아직도 그 우스꽝스러운 꿈속에 있는 건가.객석에서 수만 명의 압도적인 함성이 거대한 파도처럼 반하준을 향해 밀려들자 그는 온몸이 흔들리며 번뜩 정신을 차렸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쳐가는데, 반하준이 돌아서서 달려가더니 강민아의 손을 낚아챘다.“네가 왜 여기 있어?”남자는 의심과 불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런 옷을 입고 있어?”고개를 숙여 강민아의 손에 들려 있는 헬멧을 내려다보니 그건 루나의 것이 맞았다.입을 벙긋하던 그는 종이 뭉텅이가 목구멍에 꽉 막힌 느낌이었다.“루나를 위해 자원봉사 하러 온 거야?”그의 목구멍에선 본인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야만 했다.그는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생각을 굳혔다.루나가 시범경기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레이싱 대회 자원봉사자 모집 이벤트에는 수천 명의 레이싱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많은 사람들은 월급이 깎일지라도 당장 하던 일을 내려놓고 레이스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다.루나의 레이스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리고 여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영광을 위해서였다.강민아는 반하준의 질문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얼마나 멍청하면 그런 질문을 하지?”레이싱 슈트를 입고 헬멧을 쓴 채 반하준 앞에 나타났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그녀와 루나를 연관 짓지 못했다.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뼛속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순수하고 어렸던 시절에 진심으로 반하준을 사랑하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는데, 이 남자는 ‘진짜
반하준이 다가가 드림의 문을 당기며 강민아를 차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몇몇 스태프들이 즉시 다가와 그를 떼어놓았다.“반 대표님, 곧 경기 시작해요!”“반 대표님, 루나 경기 준비하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그러자 반하준이 말했다.“드림에 탄 사람은 강민아예요. 그 여자가 어떻게 루나인가요!”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문이 닫히고 강민아가 드림을 몰고 트랙으로 향했다.“비켜!”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반하준은 자신을 막고 있던 스태프들을 밀어내고 트랙 가장자리로 달려갔다.강민아는 드림을 예열한 후에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드림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루나! 루나!”수만 명의 레이싱 팬들은 트랙의 시작점을 향해 달리는 드림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강민아는 왜 드림에서 내리지 않을까.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레이스가 곧 시작되는데 왜 루나는 아직 안 나타나는 거지?’차에 앉아 있던 강나현은 트랙 가장자리에 나타난 반하준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내리고 반하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VIP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경기장까지 찾아왔다는 건 그녀에게 관심이 지대하다는 뜻이었기에 강나현은 내심 뿌듯했다.차창이 내려가고 강나현은 반하준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하준 씨!”그녀의 목소리는 헬멧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반하준은 강나현이 운전하는 레이스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강나현 씨, 창문 열어놓고 뭐 하는 겁니까? 곧 경기 시작하는데!”콘솔에 있던 빈센트는 갑자기 창문을 여는 강나현을 보고 순간 혈압이 최고조로 치솟아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연이어 욕설을 내뱉었다.빈센트가 외국어로 얘기하니 알아듣지 못하는 강나현은 제 쪽에서 되레 불쾌한 듯 소리를 질렀다.“왜 소리를 질러요!”통역사는 서둘러 무전기를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강나현을 재촉했다.“빨리 창문 닫고 레이스 준비하세요!”강나현의 통역을 담당한 청년 역시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
“쓸모없는 건 어딜 가나 똑같지.”“강나현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에도 못 미쳐요. 우리가 최고급 레이스카를 개조해 줬는데 액셀을 끝까지 밟지도 못하네요.”“난 먼저 짐 싸서 돌아갈 거예요. 강나현과 같이 망신당하고 싶지 않네요.”트랙에서 강나현과 다른 차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강나현의 기대와 다르게 앞쪽에서 실수가 일어나진 않았다.왜 그들이 전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까.어느 레이서도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강나현은 조금 당황했다. 다른 차들이 실수하지 않으면 꼴찌는 그녀의 몫이었다.그녀의 두 눈에 점점 더 사나운 기운이 퍼져갔다. 절대 이대로 꼴찌를 할 수는 없다.아직 남아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루나 파이팅! 루나 파이팅!”VIP 룸에서 민이는 드림의 레이싱카 모형을 손에 들고 유리창 앞에 서서 신나게 방방 뛰었다.자리에 앉은 연진숙은 레이싱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귀한 손자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루나를 보려고 왔다.하지만 연진숙은 루나가 반씨 가문 저택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알기로 루나는 5년 전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은퇴했다.루나가 5년 만에 복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집안에서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경력을 쌓는 것에 동의했거나, 남편과 문제가 생겨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 아닌지 추측했다.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연진숙의 눈에 여자가 밖에서 돈을 번다는 건 남편이 쓰레기라는 의미였다.연진숙은 어떻게 하면 귀한 손자가 루나를 새엄마로 삼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민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루나 같은 여자가 부신 그룹 도련님의 눈에 들어 민이의 새엄마가 될 기회가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반하준을 꼬드길 거라고 생각했다.경기가 끝나면 루나를 찾아가 제대로 얘기해 볼 생각이다.“민아, 물 좀 마셔.”“민아, 포도 먹을래? 이리 와, 내가 먹여줄게.”“민아, 딸기 좀 먹어. 딸기 맛있네.”세 명의 재벌가 아가씨들은 물컵과 과일 접시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