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이 경멸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는 샤워를 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강나현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미닫이문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복근을 은근히 과시했다.“오빠, 빨리 깼네.”순간 멈칫한 반하준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슬리퍼를 갈아신는 것도 잊은 채 강민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강민아가 방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끼익.옷장을 열어보니 고급 맞춤복이 가득 걸려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나갔다. 그 캐리어 안에는 평소 반우정에게 사 줬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반씨 가문 사람들 모두 지난 7년 동안 강민아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민아에게 이렇게 많은 고급 맞춤복과 명품 가방, 그리고 값비싼 보석들이 있지 않은가.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반씨 가문의 명의로 구매한 것들이었고 반하준과 연진숙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민아가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가 되는 것이었다.심지어 그녀마저도 반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 온 존재였다.반하준의 행동에 강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왜 그래?”옷장 앞에 있던 반하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강민아의 잠옷을 입은 강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젯밤에 민아 방에서 잤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불러?’강나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응. 오빠가 너무 아파해서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 어차피 민아 언니 방이 비어 있으니까 하룻밤 자면서 오빠를 챙겨주려고 그랬지.”그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강나현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마저 떨렸다.“설마 민아 언니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녀가 다급하게 캐물었다.“오빠, 민아 언니랑 이혼한 거 후회해?”“무슨 헛소리야?”
반 친구들 모두 반현민을 부러워했다....찐빵 천국.반우정은 커다란 찐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우유까지 야무지게 마셨다.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반우정이 먹는 모습을 보던 한 초등학생은 저도 모르게 한 입 더 쑤셔 넣었다.반우정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 강민아가 물티슈를 건넸다.“어린이집 가자.”어린이집이라는 소리에 반짝였던 반우정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강민아는 딸의 감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왜 그래?”“엄마, 이젠 어린이집 가는 게 별로 좋지 않아요.”강민아가 물었다.“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반우정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아니에요. 어린이집은 싫지만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친구들이랑 있으면 재미있어요.”딸이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강민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승덕 명문 학교는 귀족 학교라 아이들이 부모 영향을 받아서 반우정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컸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강민아 씨 되십니까?”“네. 그런데요?”“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직원입니다. 예선에서 1등 하신 걸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강민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1등이라고요?”‘조직위원회에서 잘못 안 거 아니겠지?’직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89점을 받았어요.”‘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으려고 했는데 89점이 예선 1등이라고? ALI 수학 경시대회 참가자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강민아 씨, 제출하신 자료를 보니 고연대학교를 졸업하셨지만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셨더군요. 조직위원회에서는 강민아 씨가 어떻게 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무척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JVC 방송국 기자가 민아 씨 성적과 상황을 알고 인터뷰하고 싶다는데 괜찮으
반현민이 굳은 얼굴로 친구들에게 경고했다.“앞으로는 반우정이랑 놀지 마.”아이들이 일렬로 서더니 일제히 반현민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알았어.”강민아는 학교 정문을 본 순간 반우정의 표정이 굳어진 걸 캐치했다.“정이야?”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반우정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잡고 애써 밝은 척했다.“엄마, 어린이집 갈게요. 빠이빠이.”반우정은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갔다.“민설윤.”그런데 민설윤이 반우정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반우정은 민설윤을 따라가서 신난 얼굴로 말했다.“설윤아, 나 이름 바꿨어. 이젠 반우정이 아니고 강윤정이야. 엄마 성을 따르기로 했어.”“나랑 말하지 마.”민설윤이 옆으로 피하면서 반우정과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반우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설윤아, 왜 그래?”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민설윤이 발걸음을 멈췄다.“반현민이 너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어.”반우정은 놀란 나머지 넋이 나갔다.강민아는 떠나지 않고 멀찍이 서서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반우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는 그녀였다.“민아야.”누군가 그녀를 불러 고개를 돌려보니 반진경이 딸 반연주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반진경은 반하준의 사촌 누나다. 남편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왔다.반진경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두 눈을 깜빡였다.“너 진짜 하준이랑 이혼했어?”“네. 이혼했어요.”강민아의 시선이 반연주에게 닿은 순간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연주와 반우정의 나이는 같지만 몸집 차이가 심하게 났다.반진경은 아이를 채식주의자로 키우겠다고 어릴 때부터 채소만 먹였다. 그 바람에 반연주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얼굴도 잿빛처럼 하얬다.그래도 그녀가 반씨 가문에 있을 때 몰래 반연주에게 고기를 챙겨줬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일자리는 구했어?”반진경이 물었다.“아직요.”강민아가 솔직하게 대답
“은혜도 모르면서. 이거 놔.”반우정이 무섭게 화를 냈다.“방금 뭐라고 했어?”반현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할머니가 그랬어. 은혜도 모르는 애를 키웠다고. 너랑 나 이젠 남매 아니야. 그 가식적인 여자랑 넌 썩은 하수구의 쥐새끼들이야. 우린 쥐새끼랑 같이 수업 안 해.”반현민의 뒤에 있던 아이들이 코를 막았다.“반우정, 빨리 도련님을 내려놓지 못해?”“반우정 몸에서 냄새나. 더러워.”“엄마가 우정이랑 말도 섞지 말랬어. 쟤는 우리랑 같이 수업 들을 자격 없어.”반우정이 이를 악물고 다른 손을 들었다. 반현민은 반우정이 때리려는 걸 눈치채고 뒤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나 좀 도와줘.”하지만 아무도 감히 반현민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강나현은 오토바이에 기대서서 휴대폰으로 반우정이 반현민을 들어 올리는 과정을 전부 찍었다.반우정이 다른 손을 들어 반현민의 뺨을 때리려 하자 입꼬리를 씩 올렸다.‘때려. 계속 때려.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영상을 하준 오빠랑 어머님한테 보내야겠어.’잠시 후 옷깃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면서 반현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음을 터트렸다.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에 서 있는 반우정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주 기세등등했다.반우정의 그림자가 반현민을 완전히 뒤덮었고 반현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반현민의 친구들도 그런 반우정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반우정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으앙.”반현민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약한 애를 괴롭히지 않아.”반우정이 주먹을 내렸다. 아무 저항도 못 하는 약골을 때려봤자 재미도 없었다.“우정아, 무슨 일이야?”강민아가 다가오자 반현민이 반우정을 가리키면서 고자질했다.“쟤가 날 때렸어요.”반우정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반현민이 다른 애들한테 나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나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대요.”강민아의 차가운
반우정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충동적인 행동으로 엄마에게 문제를 가져다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의 어깨에 손을 얹어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주었다.“제 딸은 친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때렸어요.”반현민이 팔을 흔들면서 반우정을 가리켰다.“우정이가 나 때렸어요. 나쁜 여자, 우정이만 편애하고. 눈이 멀어서 내가 맞는 걸 못 봤겠죠.”강민아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학교 정문의 CCTV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헐뜯는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합니다.”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듯 반현민을 쳐다보았다. 유영호가 강민아에게 손을 내저었다.“CCTV가 고장 났어요. 반현민 어린이는 3년 연속 교내 유망주라는 칭호를 받았고 승덕 명문 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에요. 전 현민 어린이의 말을 믿습니다.”유영호는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에게도 물었다.“여러분, 조금 전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유영호의 시선을 피했다.“봤어요.”반진경이 나섰다.“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봤어요.”“반진경 씨.”강민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제정신입니까?”그러자 반진경이 강민아를 흘겨봤다.“넌 더 이상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너랑 같은 성을 가진 애는 승덕 명문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어.”반씨 가문 사람이 강민아를 배척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들도 목소리를 높였다.“우정이 어머님과 우정이는 이미 반씨 가문에서 쫓겨났는데 아직도 딸을 귀족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게 말이 돼요?”“우정이가 엄마를 닮아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우니까 버린 거겠죠.”“딸을 저렇게 덩치 큰 아이로 키우는 건 처음 봐요. 우리 아들이 쟤한테 맞을까 봐 걱정된다니까요.”강민아는 반우정의 퇴학을 원하는 학부모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역겨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그녀가 반씨 가문을 떠난 후 그들은 그제야 점잖던 가면을 벗
비서가 서류 봉투를 안고 잽싸게 달려왔다.“반우정 어린이의 학적 기록입니다.”유영호는 비서에게서 학적 기록을 받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고는 뒷짐을 진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반우정을 승덕 명문 학교에서 내쫓는 것도 사실은 연진숙의 뜻이었다.어젯밤 연진숙이 특별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우정이 강민아의 성을 따르기로 했으니 더 이상 남의 집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연진숙은 하루빨리 반우정을 내쫓고 싶어 했다. 귀한 손주가 반우정에게 영향을 받아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강민아는 몸을 굽혀 딸의 학적 기록을 주웠다. 그 모습을 본 반우정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녀는 학적 기록 봉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딸을 보면서 부드럽고 굳건하게 웃었다.“정아, 무서워하지 마. 넌 이미 반우정이라는 이 기록과 상관없어. 바닥에 떨어진 건 반우정이지만 가슴을 펴고 일어선 건 강윤정이야.”강민아는 일어나서 반우정에게 손을 내밀었다.“네 인생은 한 번의 퇴학으로 끝나지 않아.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줄게.”구경하던 학부모들은 양쪽으로 물러서서 강민아와 반우정에게 길을 터주었다. 학교 대문이 겹겹이 막혀있어 두 모녀에게 남은 건 승덕 명문 학교를 떠나는 길뿐이었다.반우정이 울음을 그쳤지만 앳된 얼굴에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우정은 강민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엄마의 손에서 전해지는 굳건한 힘을 느꼈다.엄마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반우정은 전에 몇 번이고 강민아를 따라 떠났었다. 반현민만의 생일 파티를, 그들을 가두었던 반씨 가문을, 피를 빨아먹던 강씨 가문을 떠났었다.그때의 하늘은 오늘보다 더 어두웠지만 강민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나아갔고 반우정은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했다.아이는 강민아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강민아가 자신을 빛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갑자기 베이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뛰쳐나왔다.
교장은 무척 혼란스러웠다.‘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기자가 학교 앞에 나타난 거지?’그들은 모두 강민아를 둘러싸고 있는데 혹시 강민아가 부른 사람들은 아닐까.하지만 반씨 가문에서 쫓겨난 낙오자가 어떻게 기자들을 동원할 능력이 있겠나.교장은 의아했다.“난 인터뷰 요청을 못 받았는데? 아이고, 방금 그건 다 연기였어요. 카메라에 찍힌 건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요.”교장이 키 작은 여성 기자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아가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직접 학교를 둘러볼 수 있게 안내하면서 승덕 학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키 작은 여성 기자는 교장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저희는 인터뷰하러 온 게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행동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찾아온 거예요!”교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학교 정문 앞으로 찾아와서 뭘 하려고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키 작은 여성 기자가 강민아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반진경이 소리를 질렀다.“무슨 일이야? 강민아가 기자를 부른 거야?”강나현은 이미 정이가 한 손으로 민이를 들어 올리는 영상을 자신과 반하준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들고 강민아와 기자들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고는 2초 남짓한 영상을 단톡방에 올리면서 특별히 반하준을 태그했다.[큰일 났어! 민아 언니가 기자들을 불러서 학교 앞에서 마구 소란을 피우고 있어.]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단톡방에서 말했다.[이건 너무하잖아. 시골 여자라 그 망할 버릇을 못 고쳤네.][우리 언니가 이혼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어. 딸한테도 아들을 때리라고 시켰어!]단톡방의 재벌가 도련님들은 저마다 강민아를 욕하기 바빴고 강나현은 휴대폰을 들고 다시 강민아를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파란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 직원이 강민아 앞에 서더니 카메라 앞에서 정중하게 붉은 봉투를 건넸다.“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대표로 왔습니다. 강민아 씨, 예선 1위로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 것을 축하드립니다!”강민아
“혹시 따님이신가요?”“네, 제 딸 강윤정입니다.”기자들은 의아했다.“따님께서 강민아 씨 성을 따랐네요.”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면 남편분은...”강민아가 환하게 웃었다.“이혼했어요. 전남편은 언급할 가치도 없죠.”한 기자가 정이에게 물었다.“강윤정 어린이, 저희와 인터뷰해 주실 수 있나요?”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조금 전 체구가 작은 여성 기자가 정이에게 물었다.“조금 전 왜 저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겼어요?”“쟤가 다른 애들한테 저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저랑 말도 못 하게 하니까 화가 났어요.”정이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저도 그렇게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민이는 너무 가벼워요.”조금 전 정이가 민이를 한 손에 들어 올리는 걸 목격한 카메라맨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강윤정 어린이, 제가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들어 올릴 수 있어요?”전문적인 카메라 장비는 최소 20kg이 넘었다.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자 강윤정이 한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아령보다 훨씬 가볍네요.”카메라맨의 입이 떡 벌어졌다.“강윤정 어린이, ALI 수학 경시대회 예선전에서 1등을 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요?”정이는 카메라를 든 채 팔운동을 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우리 엄마는 원래도 훌륭한 사람이에요. 저는 엄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강민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따뜻한 기류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다른 아이들은 옆에 서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정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우와, 반우정이 방송에 나온다.”민이는 팔짱을 낀 채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발로 흙탕물을 걷어찼다.“우리도 다 방송에 나왔어. 그게 뭐가 신기하다고!”그를 따라다니는 한 아이가 말했다.“우리는 서경 어린이 채널에만 나가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반우정과 너희 엄마를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