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23화

Author: 임공
이달 근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수술을 내가 있는 동안 확실히 마무리해야 해.’

그렇게 결심한 시연은 곧장 양석현 교수에게 부탁했고, 다행히도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기쁜 마음으로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이 소식을 고상훈에게 알렸다.

마침 유건도 집에 있었다.

그는 고상훈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고상훈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손자를 일찍 불러들였다고 했다.

시연의 말을 들은 고상훈이 말했다.

“할아버지, 시연이가 수술 준비 다 해뒀어요. 최대한 이른 날짜로 정하죠.”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고상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호민이 팔에 뭔가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마치 화보 같기도 하고, 잡지 같기도 한 책자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르신,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는 유건과 시연을 한 번씩 쓱 바라봤다.

“두 분이 잘 살펴보세요.”

‘두 분...?’

‘뭐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리둥절했다.

고상훈은 빙긋이 웃으며 설명했다.

“여기 웨딩드레스 스타일이랑 결혼식 장소 후보들이 있으니까 둘이 잘 골라봐.”

그러더니, 손짓하며 덧붙였다.

“특히 시연이가 원하는 걸로 고르면 돼. 유건이, 넌 옆에서 잘 도와주고.”

한 마디 한 마디, 시연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뜻은...’

그녀는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1초, 2초...

“할아버지.”

유건이 눈썹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혹시... 저희 결혼식을 치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하지!”

고상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정해진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물어볼 게 뭐 있어?”

그는 시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 둘, 혼인 신고한 지도 꽤 됐는데, 내 건강 때문에 결혼식을 미뤘잖아. 그동안 시연이 맘고생 많았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4화

    유건이 아침부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은 바로 ‘장소미’였다. 유건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 씨.] 소미의 목소리는 한껏 나긋했다. “우리 엄마가 오늘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고 싶대요. 시간 괜찮으세요?”거절당할까 봐,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사실 오늘이 엄마 생신이에요. 유건 씨가 와주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예요. 응? 와줄 거죠?” 유건은 핸드폰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알겠어. 갈게.” ...저녁, 장소미의 집. “엄마, 진짜 괜찮을까?” 긴장한 소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장미리는 그런 딸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것도 못 참고 이렇게 조바심 내서 어쩌려고? 그렇게 정신없어서야 나중에 고씨 가문의 사모님 소리나 듣겠어?” “알았어요...” 소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향로를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거... 정말 효과 있어?” 그녀가 말한 것은 장미리가 직접 구해온 특제 향이었다. 장미리가 이걸 구하기 위해 돈도 꽤 들였고, 여러 사람을 통해 어렵게 손에 넣었다. 장미리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옛날에 궁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법이야. 몸에 해롭지도 않고, 서양 약보다 훨씬 강력하지.” 그녀는 향을 피운 후, 뚜껑을 덮고 코를 막았다. “자, 이제 우리 나가자. 아주머니들도 다 휴가 줘서 내보냈으니까, 잠시 후엔 이 집에 너랑 고 대표 둘뿐이겠네. 엄마가 장담하는데, 오늘 밤, 고 대표는 널 그냥 두지 않을걸?” “엄마!” 소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끄러워하긴.” 장미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장 지난번 로얄호텔 일만 봐도, 하룻밤 사이에 고 대표가 바로 청혼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네가 잘만 하면, 고 대표도 네 손아귀에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5화

    소미는 유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효과가 있네!’ 여자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물었다. “유건 씨, 덥죠?”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외투라도 벗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소미는 유건 옆으로 다가간 뒤,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이 단단하게 붙잡혔다. 깊은 눈매 속에서 강렬한 열기가 일렁였고, 유건이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다. “뭐 하려고?”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소미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됐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일부러 몸을 가까이 붙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투 벗는 거 도와주려고요.” 여자의 손목이 더욱 세게 조여졌다. “아야...” 소미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남자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소미는 유건의 다리 위에 앉게 되었다. ‘이거야! 완벽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미는 곧바로 두 팔을 남자의 목에 감았다. 부드러운 살갗이 살짝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그러자 목젖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유건 씨...” 눈앞의 여자가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유건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소미의 턱을 받쳤다. 손끝이 여자의 입술에 닿았다. ‘이상하다... 너무 두꺼운데?’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건의 손가락을 떼어, 다시 한번 여자의 지문을 확인했다. ‘진한 립스틱 자국... 이런 거, 정말 싫어.’ 하지만, 소미는 이미 기쁨에 들떠 있었다. 유건의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유건 씨, 키스해 줘요.” 너무나 직설적인 말. 그녀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유건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남자여도, 밥 먹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6화

    말로 해도 안 듣는다면, 힘으로라도 떼어내는 수밖에. 유건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남자의 움직임에 소미는 중심을 잃었고, ‘턱’ 소리와 함께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날 떼어냈다고?' 유건은 억눌린 듯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젖이 한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가지고 노는 건 절대 용서 못 해.”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유건 씨!” 소미는 황급히 일어나 뒤따르려 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유건 씨, 유건 씨!!” 그녀는 바닥을 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방금 분명... 반응했잖아? 그런데도 끝까지 버틴다고?' ...시연은 BLUE 앞에서 핸드폰을 쥐고 서 있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통화 상대는 장미리였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부명주의 유품이 필요하지 않아?]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필요하면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들어와.” 뚝- 전화가 끊겼다.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장미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의 유품이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어. 가져갈래?] 만약 그냥 자신의 물건이었다면, 시연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은 다르다.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남겨진 물건들은 시연이 가진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자 유품이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물건만 받으면 돼. 설마 장미리가 날 어쩌기야 하겠어?’ 결국, 시연은 클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속한 VIP 룸 앞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살짝 불안해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7화

    유건은 화가 나면 날수록, 겉으로는 더욱 차분해졌다. 그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낮게 말했다. “지한아, 속도 올려.” “네, 형님.” 지한이 즉시 액셀을 밟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차창 넘어, 유건은 시연이 진광수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네 밥을 굶겼어? 아니면 돈이 부족했어?’ ‘왜 또 남자를 끌어들이는 거지?’ ‘설마 돈이 필요해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남자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 맞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벌써 없앴겠지.’ ‘지시연은 자기 몸속에 있는 생명을 그렇게까지 없애고 싶어 했던 사람이잖아.’ ‘그러면ㅎ, 이다음은...?’ 유건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진광수 같은 늙고 더러운 놈이, 지시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단순히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운전석에서 지한이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도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유건의 얼굴.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뭐?” 유건은 싸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지시연 편드는 거야?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봐. 뭐가 이상한데?” 지한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진광수 나이가 몇인데요?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돈? 형님보다 많을 리도 없잖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더 화가 났다. ‘결혼식은 거부하면서, 고작 그런 놈한테 안기는 건가?’ 순간...‘아니, 뭔가 이상해.’ 유건의 머릿속이 다시 맑아졌다. 남자는 질투 때문에 흐려진 시야가,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지한 말이 맞네. 지시연이 지금 저럴 이유가 없는데?’ ‘나를 싫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노은범도 있는데, 왜?’ “지한, 차 돌려. 당장 따라가!” “네, 형님!” 그러나, 차를 돌려 돌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8화

    진광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숙여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연의 체취를 맡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음... 좋군. 아주 좋아.” 늙은 남자의 시선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반짝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진광수는 손가락 끝으로 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고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하면 돼. 어차피 넌 결국 내 것이 될 테니까... 후후, 제대로 맛보게 해주지.” 듣기만 해도 역겨워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음담패설. 시연은 속으로 외쳤다. ‘어떡하지? 오늘 밤... 정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거야?’ “시연아, 한 번만 맛보자. 응?” 불쾌한 입김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굴곡진 주름투성이 얼굴이 시연의 눈앞으로 바짝 붙었다. 순간, 그녀에게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싫어! 살려주세요! 제발,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 오지 마! 안 돼!” 여자는 죽어라 소리쳤다. “닥쳐!” 진광수는 화들짝 놀라며 시연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시연의 비명이 너무 컸다. 비록 이곳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 해도, 이 정도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녀는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저항하며 고개를 흔들자, 진광수는 조급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시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으으...!” 여자의 비명이 단번에 막혔다. 진광수는 헐떡이며 땀을 훔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장미리가 준 약... 효과가 좋다더니, 왜 가만히 있질 않지?” ‘...뭐?’ 시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모든 게... 장미리 짓이라고?’ ‘그렇다면 애초에 나에게 줄‘우리 엄마의 유품' 같은 건 없었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 오려고 쓰는 미끼에 불과했어!’ ‘나는... 나는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을까...’ 시연에게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29화

    지한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유건의 앞을 막아섰다. “형님! 이러다 진짜 사고 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지금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맞아요, 형님! 이런 쓰레기한테 이 정도까지 손을 더럽힐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유건의 얼굴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그러자 정기환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형님! 시연 씨가 좀 이상해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던데...” 시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발을 거두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걷어찼다. “으악!”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 씨가 제일 효과적이네.’ “시연아.” 유건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시연을 덮고 있던 재킷 한쪽을 젖혀 손발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괜찮아?” 기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시연은 확실히 이상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말라... 너무 목이 말라...” 그러면서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유건의 품에 몸을 기댔다.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 순간, 유건도 깨달았다. 자기 몸에 남아 있던 약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저 시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잊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 여자의 열기와 향기에 자극받아 유건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건의 혈관 속 피가 미친 듯이 돌고, 근육이 달궈졌다. 마치 불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시연을 담요째 안아 들고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한아, 방 잡아.” “네, 형님.” 상황을 본 세 사람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곧 방이 준비되었고,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30화

    유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늘게 떨리는 시연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시연아, 일어나.”“음...”시연은 마치 이제 막 그의 부름에 깬 듯 천천히 눈을 떴다. 흔들리는 눈빛, 정면으로 유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깼으면 세수하고 준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우리 기다리고 계셔.”“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재촉했다.“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요.”그 짧은 말 두 마디에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나를 부끄러워하는 걸까? 어젯밤 일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봤을 뿐만이 아니라...’‘응, 입술도 포개었고... 그리고 또...’그러나 그는 순순히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 “알았어, 나간다.”유건은 문을 닫으면서 틈 사이로 시연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해?’‘그런데 이 여자, 예전에 다른 남자와도 이랬을까?’그는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쯧,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유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지시연에게 마지막 남자는 나야!’‘이제부터 시연이 내 곁에 있는 한, 다른 남자는 감히 시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니까.’‘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여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 사람이니까.’‘나도 그런 사소한 걸 따지는 시시한 남자가 아니니까.’...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연은 자신의 몸이 개운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로 씻을 필요도 없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분명했다. 즉, 어젯밤에 끝난 후 유건이 시연을 욕실로 안아가 직접 씻겨줬다는 것.시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고유건은 틀림없이 세심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이 남자는 내...’옷을 다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유건이 보온병을 시연에게 건넸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31화

    차 안은 숨 막힐 듯 고요했다.유건은 감정을 지운 얼굴로 시연을 바라봤다.‘이 여자, 내 속을 긁어놓으려고 태어난 거야?’‘예전엔 결혼하기 싫다고 하니 화를 내고, 이제는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 또 화를 낸다?’남자의 냉랭한 태도에 시연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내가 더 이상 신경 안 쓰기로 했으면 됐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지시연.”유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고상훈이었고, 유건과 시연에게 서둘러 돌아오라는 전화였다.[어디쯤이냐? 밥 먹으러 온다며?]“할아버지, 거의 도착했어요.”유건이 전화를 끊을 때쯤, 차는 이미 본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유건의 눈빛이 깊어졌고, 목소리는 한층 차가웠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네, 알겠어요.”...오늘 고상훈의 기력은 제법 좋아 보였다. 최근에는 식욕도 돌아온 듯했다.유건과 시연은 고상훈과 함께 식사를 마쳤고, 식사 후 시연은 고상훈이 약을 챙겨 먹는 것까지 확인했다.이후 유건과 고상훈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연은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시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졌다.시연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벌써 일곱 시가 넘은 것을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그 순간, 방 문이 열렸다. 시연이 고개를 들자, 유건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깼어?”“네.”유건은 불을 켰고, 방 안이 환해졌다.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알람 맞추는 걸 깜빡했네요. 할아버지 배고프시겠어요.”“움직이지 마.”유건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 식사도 하셨고, 약도 드셨어.”“아, 다행이에요.”시연은 안도하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배 안 고파?”유건의 질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4화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3화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2화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1화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00화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9화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8화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7화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96화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