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식권을 살짝 흔들었다. ‘우리가 지금은 연인이 아니긴 하지만, 매번 은범이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이상해.’은범은 시연의 성격을 잘 알기에,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내 학생 식당으로 이동했다. ...은범이 음식을 받아오는 동안, 시연은 자리를 잡았다. “자.” 트레이를 내려놓은 그는, 자기 갈비찜을 시연 앞에 밀어 놓았다. “너 다 먹어. 혹시라도 남으면 내가 먹을게.” “고마워.” 시연은 밥을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범아, 네 집안 사정을 떠나서라도, 내 상황 잘 알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그만.” 은범은 말을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성인이고, 내가 뭘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나를 보기 싫다면, 볼 때마다 한 대씩 치는 건 어때? 아니면, 신고해, 스토커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난 절대 그럴 수 없어!’ “밥이나 먹어.” 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귀여웠다. 은범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그나저나, 그렇게 말라도 되는 거야? 애까지 있는데, 배가 전혀 안 나왔잖아.” 그 말에, 시연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눈물이 차오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점심을 마친 후, 은범은 시연을 임진아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마침 은범의 차도 강울대학교병원 후문 쪽에 세워져 있었다. 그 시각, 유건은 고상훈을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오후 일정이 있어 바로 회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시연과 은범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유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주지한, 정민환과 정기환은 눈을 마주쳤다. ‘이거 말려야 하나?’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건은 말없이,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시연을 바라봤다. “은범아, 잠깐만.” 시연이
“시연이와 관련된 일?”유건은 짧은 침묵 후 담담하게 물었다. 재호는 피식 웃었다. ‘혹시 고 대표님은 알고 계실까? ‘전부인’ 얘기만 나오면, 자기 말투가 부드러워진다는 걸?’[네, 대표님. 지시연 씨가 먼저 가정법원에 가서 서명하고 싶다고 전해달랍니다. 다른 일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유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 때문에 전화했던 거야?’ ‘그 여자, 이렇게까지 빨리 나랑 이혼하고 싶었던 거냐고.’ 유건의 속은 마치 쓴 약을 삼킨 듯 쓰리고 견디기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하나뿐일 거야. 바로 노은범.’ ‘이제 공식적으로 정리하려는 거겠지.” ‘노은범 같은 사람이 내 가족관계증명서에 지시연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걸 용납할 리 없으니까.’남자는 손에 쥔 핸드폰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로 진행해. 시연이가 원하는 대로...”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연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뿐이야.’[알겠습니다, 고 대표님.] ...밤 10시, 은범은 임진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는 한 손에 야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사람은 임진아였다. 은범은 본능적으로 안쪽을 살폈다. “시연이는?” 진아는 눈을 굴리더니, 팔짱을 꼈다. “노 사장님, 그렇게 티 나게 실망하시면, 저도 기분이 좀 나쁘네요.” 그러면서 집 안을 가리켰다. “시연이는 씻고 있어. 방금 들어갔으니까, 기다리려면 꽤 걸릴걸?” “그럼 됐어.” ‘시연이가 씻을 동안 기다리는 건 좀 웃긴 일이니,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어.’ 은범은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야식 좀 샀어. 같이 나눠 먹어.” “오, 굿!” 진아는 신나게 받아 들었다. “노 사장님, 고마워요!” 그리곤,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 순간,
강수희는 겨우 마흔을 넘긴 나이에, 늘 여유롭고 건강한 삶을 살아왔다. 은범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한순간 쓰러진 게 뇌종양일 가능성이 있다니, 그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양성인지 아닌지는 확인됐나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아직 확실하지 않대.” 노수철이 고개를 저었다. “수술해야 조직 검사를 정확히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말에, 은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해야만 알 수 있다니...’부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서로 같은 심정이었다. 노수철이 조용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어가서 네 엄마 좀 봐 드려라.” 잠시 숨을 고른 은범이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강수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은범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이 밝아올 무렵, 눈을 뜬 강수희의 컨디션은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아들을 보자, 강수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은범아, 와 있었구나.” 강수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머니, 천천히...” 은범이 급히 손을 뻗어 어머니를 부축하고, 베개를 받쳐 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갑자기 움직이며 안 된다고 하셨어요. 천천히 움직이셔야 해요.”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어. 우리 아들 말 들을게.” 곧이어, 노수철도 병실에 들어왔다. 어젯밤, 아들이 병원에 남겠다고 해서 노수철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새벽부터 불안해 일찍 나온 것이었다. “여보, 좀 어때?” “네, 괜찮아요.” 노수철은 집에서 직접 가져온 아침 식사를 건넸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 “곧 담당 의사랑 면담할 예정인데, 너도 같이 가자꾸나.” “네.” 은범은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강수희의 수술 일정은 미룰 수 없어서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 했다. 노수철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 은범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어딘가 낯이 익긴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바라봤다. “하하.” 여자애는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하진주야. 어릴 때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뚱뚱한 애, 기억 안 나?” 그제야, 은범의 기억이 스쳤다. 하씨 집안과 노씨 집안은 오래된 인연이었고, 하진주의 어머니와 강수희는 소꿉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애는 기억 속의 ‘통통한 꼬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씬하고 세련된 분위기였기에, 전혀 그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아, 너구나!” 은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진주는 밝게 웃었다. “맞아, 우리 가족이 해외로 나가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봤지.” 반가운 재회였지만, 은범에게 지금은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강수희를 바라봤다. “어머니, 저 이제 회사에 가봐야 해요. 아버지가 곧 오실 테니까,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그래, 알겠어.”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있는 진주를 슬쩍 바라봤다. “근데, 진주도 출근해야 한다더라. 너 회사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순 없겠니?” 진주는 어머니를 보러 온 것이었기에, 은범도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고마워.”“이모, 그럼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조심히 가.” 그렇게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고, 은범은 그녀를 직장까지 태워다 준 후, 바로 회사로 향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처리한 후, 저녁 7시에 은범은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연아,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못 보러 갔어. 아마 다음 주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시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도 바쁘니까 네 할 일 먼저 해. 굳이 시간 내서 올
할 말을 다 하고 나서 은범은 묵묵히 침묵했다. 노수철은 아내를 거들며 말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거잖아.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두 집안 사이를 생각하면 너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아.”오랜 침묵 끝에, 은범은 망설였다. “정말 얼굴만 봐도 된다는 겁니까?” “아이고...” 노수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너한테 강제적으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범은 잠시 갈등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얼굴만 볼게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 강수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다 알아. 아들아, 고맙다.” 은범과 하진주와의 만남은 다음 날로 정해졌다. 마침 주말 밤 8시이니, 두 사람은 함께 연극을 보기로 했다. ...주말 밤. 유건은 소미를 태우고 G시에 제일 큰 극장인 ‘시네마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유명한 연출가의 대표작이 공연되는 날이었다.그야말로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유건은 연극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소미를 위해 함께 왔다. 주말이라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미는 유건과 나란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부딪혀 휘청거렸다. 유건이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고,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괜찮아?” 소미는 황급히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발로 향했다. 은회색 하이힐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네 옷차림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임신 3개월째잖아. 하이힐은 좀 위험하지 않아?” “너한테도, 배 속의 아이에게도.”“임신은 고되고도 위험한 과정이라 사소한 실수 하나로 두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단 말이야.” 소미는 순간 굳어졌고,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그리고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다
‘고유건이 나한테 전화를?’ ‘고유건도 이 극장에 있다고?’‘날 불러낸 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서인가?’ ‘그렇다면, 대체 왜? 전화로만 들으면, 꽤 화가 난 것 같은데...?’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을 안고, 은범은 하진주에게 짧게 말한 뒤 극장을 나섰다. “고 대표님...” 은범이 막 입을 떼며 인사하려는 순간, 유건의 주먹이 그대로 날아왔다. 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은범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다행히 빠르게 중심을 잡아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가가 터졌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은범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황당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흥!” 유건은 냉소를 흘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시연이는 알고 있어요?” 그 순간, 은범의 눈빛이 번뜩 흔들렸다. 짧지만 분명한 동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유건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은범의 옷깃을 단단히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노 사장, 시연이한테 진심이에요? 아니면, 그냥 장난치는 거예요?” “고 대표!” 은범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감정을 의심받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웃기지 마요. 저는 고 대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연이를 아끼니까, 고 대표보다 덜할 리는 없을 거예요.”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입을 닦으며, 낮고 단호하게 덧붙였다.“고 대표도 시연이를 걱정해서 이러는 걸 테니, 오늘은 넘어가 줄게요.” “은범아!!”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가녀린 실루엣이 성급히 다가왔다. 하진주였다. 은범이 갑자기 나간 게 신경 쓰여서 몰래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자마자, 은범이 맞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 진주는 화가 나서 유건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람을 때리다니! 우리, 신고할 수도 있다고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까는 미안했어.” “하하!” 진주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연극은 끝까지 보고 가자?” “응, 그래.” 은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비로소 풀어졌다. ...주말, 시네마극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시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시연은 일찍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시연이 유건과 가정법원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다른 서류들에 서명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약속된 일이었기에, 시간을 맞춰 나가려고 하는데, 주재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님?” 시연은 급히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늦지 않게 도착할 것 같아요.”[지시연 씨.] 전화기 너머에서 재호가 다소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침 일찍 고 대표님이 전화하셔서, 오늘 가정법원에 못 간다고 하셨어요.]“뭐라고요?” 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연락만 받았거든요.] ‘이게 뭐야?’ 시연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무래도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재호는 이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변호사님?!” 시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녀는 주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몇 번 울리자, 지한이 전화를 받았다.그런데 첫마디부터 어딘가 어색했다. [예, 형수님.] “지한 씨.” 시연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건 씨,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저랑 가정법원에 가기로 했는데,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왜죠?” 잠깐의 정적. 그 순간, 지한은 곁에 앉아 있는 유건을 힐끔 쳐다봤고, 결국 조용히 핸드폰을 유건에게 건넸다. 유건은 전화를
아침 시간이 한산할 거라고 생각해서, 시연은 고상훈을 뵈러 갔다. 왜냐하면 이 시간이라면 유건이 회사에 있을 확률이 높으니, 두 사람이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병실 안은 고요했다. 시연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고상훈은 수액을 맞은 채 침대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노인을 깨울까 봐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시연은, 옆에 놓인 모니터를 흘깃 보았다. 수치들은 안정적이었다. ‘다행이야.’ 그녀는 안심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희미하게 감겨 있던 고상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할아버지?” 그때, 깊고 주름진 노인의 눈동자에 반가움이 스쳤다. 고상훈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시연아.” “할아버지.” 시연은 환하게 웃으며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고맙구나, 시연아.” 고상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도록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착한 시연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유건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탓이야.” 그 순간, 욕실 문이 불쑥 열렸다. 척!긴 다리를 뻗으며 유건이 걸어 나왔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시연은 멍하니 서 있다가, 거의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있었어요?” “하.”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영영 할아버지를 안 뵈러 올 생각이었어?” “이놈아!” 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상훈이 먼저 버럭 소리쳤다. “그게 할 소리야? 감히 또 시연이를 괴롭히려고?” 그는 힘겹게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시연아, 오늘 내가 확실히 저놈을 혼내 주마!” “할아버지!” 시연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원만하게 정리했어요. 유건 씨가 절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요.”그 말에, 병실 안은 순간 정적에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