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마워.”진아는 거절하지 않고 커피를 받아 들었다.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당신 돈 없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럼 나도 사양 안 할게... 잘 가!”진아는 커피 봉투를 들고 돌아섰다.지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진아는 그가 아직 거기 서 있다는 걸 아는 듯, 뒤돌아보지 않은 채 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나 간다!”“하...”지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리고 불현듯 떠올랐다.그해, 바로 이 자리에서 그가 처음으로 진아를 봤던 날이.커피숍 앞에 서서 무슨 맛을 고를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던 얼굴.이제는... 같은 장소에서 작별하고 있다.지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햇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지며 따끔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그날 밤, 지하는 곧바로 제남도를 떠나 G시로 돌아왔다.“이렇게... 끝난 거야?”강석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유건과 정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지하를 바라보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그럼 어쩌겠어?”지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쓴웃음이 스쳤다.“그 사람이 친구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난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아니면... 또 억지로 붙잡을까?”그는 강제로 붙잡는 일을, 이미 한 번 해봤다. 두 번은... 감히 할 수 없었다.더구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유건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하와 잔을 부딪쳤다....같은 시각, 시연도 소식을 들었다.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지난 1년 동안의 일을 다 알게 됐는데도... 결국 헤어진 거야?]“응.”진아는 침대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고, 고맙기도 해. 근데...”잠시 말을 고른 뒤, 조용히 덧붙였다.“나랑 그 사람은 시작이 너무 불순했어.” [그 말은...]시연은 곧바로 이해했다. 지하가 진아에게 관심을 가졌던 첫 이유가... 오설아와 닮은 얼굴이었으니까.하
지하의 긴장한 얼굴을 보며 진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괜히 한두 마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스쳤지만, 말이 입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용서할게.”지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토록 기다렸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수없이 되뇌던 대답이...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너무 쉽게 나와 버렸다.지하는 현실감이 없었다. 꿈보다도 더 비현실적이었다.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지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진아야... 그 말, 진짜야?”“응.”진아는 손에 든 커피잔을 천천히 돌리며 웃었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용서 안 할 거였으면 그냥 당신이랑 또 싸웠겠지. 우리... 싸워 본 적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그 말은 섬에서의 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 진아는 마음과 말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했고, 단순했고, 감정에 정직했다.하지만 지하는 바보가 아니었다.그는 진아의 표정에서 그녀 마음의 일부를 읽어 냈다.결국 지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갔다가 마치 한숨처럼 말이 흘러나왔다.“나를 용서하기만 한 거지... 다시 나랑 엮일 생각은 없는 거지?”진아는 잠시 멈칫했다.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고개 끄덕임 하나에 지하의 가슴이 찌르듯 아팠다.“진아야, 나...”“다 지난 일이야.”진아는 강하지도, 차갑지도 않게 그를 끊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빛도 온화했다.그런데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단단해 보였다.“나도 알아. 다 지난 일이야.”지하는 알고 있었다.오설아와의 일도, 그 후의 모든 것도... 이미 완전히 과거가 되었다는 걸.진아는 밝게 웃었다.“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과거로 보내 줘.”지하는 말을 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진아의 흔들림 없는 눈을 마주하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자...”진아는 이미 비어
이혜영은 진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네가 기분 상할까 봐 숨기고 싶진 않았어. 네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던 그 시간 동안, 아무도 네가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거든. 나도... 엄마로서 내 아들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은 있어.”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그런데도 우리 지하가 그러더라. 너를 아직 놓지 못하겠대.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다른 인연을 시작할 수도 없대.”이혜영은 진아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는 솔직하게 말했다.“진아야,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거... 엄마로서 이기심인 거, 나도 알아.”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목소리가 떨렸다.“염치없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한 번만 더 부탁할게. 지하는 정말 많이 변했어. 지금은 너밖에 없어. 마음도, 시선도 전부 너한테만 가 있어.”이혜영은 몇 번이나 말을 삼켰다. 눈물이 떨어지며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진아야... 우리 아들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겠니?”...이혜영과 헤어진 뒤, 진아는 호텔로 돌아왔다.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고 샤워기를 어깨 위에 얹었다.온기가 몸을 감싸자 진아는 눈을 감았다.그러자 머릿속에 장면들이 연달아 스쳐 갔다.지하와 처음 만났던 순간.서서히 가까워졌던 시간들.사랑하고, 결혼하고... 그리고 결국 이혼하고, 멀어졌던 날들까지.‘이렇게... 다 이어져 있었구나.’...다음 날 아침.진아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러닝화를 신었다.호텔 앞길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부지하?’진아는 단번에 알아봤다.“지하 씨!”앞에서 달리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지하는 진아를 확인하자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천천히 발을 풀며 기다렸다.진아는 속도를 조금 높여 그에게 다가갔다.“좋은 아침.”지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좋은 아침.”이 만남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건지 진아는 알 수 없었다.다만 어제도, 그제도... 지하는 원래 아침 러닝을 해
“이것 좀 봐.”이혜영이 핸드폰 화면을 켜며 말했다.“그때 내가... 그냥 무심코 찍어 둔 영상이야.”진아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화면을 바라봤다.영상이었다.영상 속에서 지하는 혼수상태에 빠진 진아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손놀림은 익숙했고,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조금이라도 불편할까 봐... 힘이 들어갈까 봐... 그는 끝까지 조심스러웠다.진아의 기억이 문득 이어졌다.며칠 전,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들었던 말들.지하가 자주 병원에 왔다는 이야기.그때의 진아는 ‘그냥 문병을 왔겠지’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이건... 이건 그런 수준의 ‘문병’이 아니었다.‘이렇게까지...?’진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가슴 한가운데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차올랐다.젖은 듯한, 끈적한 감정이 천천히 번졌다.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지하에 대한 진아가 가진 마지막 장면...지하는 진아의 가족 몰래, 그녀를 섬으로 데려갔다.그 섬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진아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고, 지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붙잡았다.그 뒤로, 진아는 일방적으로 지하와의 연락을 끊었고,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었다.그렇다면... 진아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이걸 허락했지?’지하가 고생한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 가까웠다. 너무 사적인 돌봄이었다.진아는 줄곧 자신이 부모님에게 발견돼 G시로 돌아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 사이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사모님...”진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혜영을 바라봤다.숨이 조금 가빠졌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진아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이혜영은 단번에 알아들었다.“지하가 왜 그렇게까지 널 돌봤는지... 그리고 네 부모가 왜 그걸 허락했는지, 그게 궁금한 거지
“역시 지하가 제일 효자야.”이혜영이 웃으며 말했다.“이른 아침에 나랑 같이 나온 사람은 얘밖에 없잖아.”“네.”진아는 가볍게 웃었지만, 딱히 덧붙일 말은 없었다.고개를 숙이다가 문득 옆을 보니, 지하는 말없이 진아 곁에 앉아 빵 접시를 당겨 놓고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나이프를 들어, 진아의 크루아상 위에 달걀 마요네즈를 바르고 있었다.진아는 순간 멈칫했다.이미 다 바른 뒤였다.지하는 빵을 그녀 쪽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여기. 얇게 발랐어. 많이 안 발랐어.”“고마워.”그건 진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마요네즈를 아주 조금만 바르는 것.그걸... 지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진아는 빵을 받아 들며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아직 한 입도 떼지 않았는데, 지하는 이미 냅킨을 펼쳐 그녀 앞에 조심스럽게 깔아 주고 있었다.“갓 나온 크루아상이라 바삭해.”“부스러기 많이 떨어져.”진아는 다시 한번 말했다.“고마워.”“별거 아니야.”너무도 익숙한 손놀림이었다.마치 수없이 반복해 온 일처럼.진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사실... 예전에도 지하는 이런 걸 자주 진아에게 해 주었다.생활적인 면에서 보자면 지하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신사였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혜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막내는... 참.’‘다 좋은데, 감정 쪽으로는 너무 한 길이야.’오설아처럼 지하를 배신한 여자도 몇 년이나 마음에 담아 두던 사람이었다.하물며 진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아마 10년, 20년이 지나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10년, 20년... 그게 결국 평생과 뭐가 다른가?좋아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을 품은 채 혼자만 끙끙대는 지하.‘내가 엄마로서... 좀 나서야겠네.’이혜영은 속으로 뭔가를 결정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진아는 이혜영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사모님,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더 방해 안 할게요.”“잠깐만.”이혜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지하
시연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 대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진아가 깨어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먼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정말로 더 이상 아무 후속도 없을 생각인 건가?’당사자인 지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서지도 않으니, 주변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괜히 말 얹기도 조심스러웠다.“그래, 그 사람 얘긴 그만하자.”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진성빈을 가리켰다.“그럼 성빈 얘기나 해 보자.”“성빈?”진아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성빈이가 왜?”“쯧.”시연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를 흘겨봤다.“설마 네가 못 느꼈다고 말하진 않겠지? 성빈이, 아직 너한테 마음 남아 있잖아.”진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 느꼈어.”“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지난 1년 동안을 돌아보면, 지하에 비해 성빈이 해 준 게 더 적어 보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건 그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진아가 쓰러진 뒤, 그녀는 오직 지하만 알아봤다.그래서 진아 부모님도 지하가 돌보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성빈은 지난 1년간 병원을 수없이 드나들었다.그리고 사생활도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처럼 여자친구를 자주 바꾸는 일도 없었고, 줄곧 혼자였다.사람이라는 게 본래 고집스러운 존재다.끝까지 가 보기 전엔 포기하지 않고, 벽에 부딪혀 보기 전엔 돌아서지 않는다.시연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진아는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난 딱히 계획 없어. 이제 막 깨어났잖아. 지금은 그냥 몸 제대로 회복하는 게 제일이야. 그리고... 전공도 다시 잡아야 하고.”진아는 시선을 들어 가볍게 웃었다.“죽을 고비 넘기고 나니까 말이야,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게, 인생에서 꼭 필요한 건 아니더라고. 굳이 거기에 매달릴 이유도 없고.”“그건 맞지.”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난 네가 좀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