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소미를 응시하며 말없이 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야.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미 역시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어젯밤, 소미도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는데, 그때 곧바로 병원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지한은 상황이 여의찮다며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소미는 밤새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부터 그녀 홀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유건이 아닌 지시연을 먼저 만나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소미는 크게 겁을 먹었다.그녀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실 입구의 환자 명패를 훑어보았다.‘유건 씨의 병실이 맞잖아!’ ‘그런데 지시연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소미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시연은 잠이 부족해 나른해 보였다. “의사가 병원에 있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앓고 있는 정신병을 진찰받으러 온 거야?” “지시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눈살을 찌푸린 소미는 눈 밑의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미는 어려서부터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그 도도함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이랑 아버지까지 모두 나한테 빼앗긴 주제에, 뭐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야?’ 그러나 오히려 지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바로 소미였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온 거야.”“아.”시연이 문득 뒤를 가리켰다.“고유건 대표님? 저 사람이 네 남자 친구구나.”시연이 길을 터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 봐.”이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소미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지시연이 이미 유건 씨를 만난 거 같지? 하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하지만... 두 사람
지금 유건은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는 상태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말 아찔한 장면이었다.다만, 유건의 신분 때문에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시연은 특히 침착하게, 교대할 의사에게 유건의 상태를 설명했다.“칼에 찔려 부상을 당한 환자입니다. 복부 3.2센티미터 깊이로 칼이 들어갔지만, 장기 손상은 없습니다...”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유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소미를 부축하면서 그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고, 심지어 약간의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비록 그가 처음부터 결혼 상대가 있다고 말했지만, 시연에게 소미를 들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기분이 뭔가 묘했다.마치 바람피우다 아내에게 딱 걸린 찌질한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고유건 님, 푹 쉬세요.”교대가 끝나자 의료진은 하나둘씩 바뀌었다.유건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연이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유건 씨.”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구를 주시하는 것을 보고 소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디 불편해요? 다친 데가 많이 아파요? 의사 부를까요?”유건의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안색이 변했다.“아니, 괜찮아요.”유건은 단지 스스로에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양심에 찔리지?’‘허울뿐인 부부 사이인데, 누구를 만나든 외도는 아니지.’소미는 오전에 촬영 일정이 있었다. 어렵게 캐스팅된 유명한 감독 양호천의 영화라 빠질 수 없었다.주지한이 오고 나서야 소미는 아쉬워하며 떠났다.“그럼 푹 쉬어요, 시간 날 때 다시 올게요.”“그래요, 가봐요.”이와 동시에 지한을 따라온 두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둘은 매우 닮았고,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형님.”지한이 설명했다.“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민환과 기환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시연은 치료에만 집중하고 유건을 전혀 보지 않았다.유건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한테 화났어?”“예?”시연은 치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화났느냐고요? 제가요? 고유건 씨에게? 그럴 게 있나요?”유건은 목소리가 담담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면 다행이고.”“아.”시연은 여전히 유건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상처에 삽입한 튜브를 짰다.유건이 물었다.“이 튜브는 언제 빼나? 매우 불편한데.”“그렇게 금방은 안돼요.”“쉽게 말하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배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이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여자가 왜 이렇게 조용해?’유건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나에게 할 말 없나?”“네?”시연이 당황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치료 이야기는 그만 해.”유건의 말에 지시연은 깜짝 놀라서, 긴 속눈썹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한마디 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건은 지시연을 조롱했다.“위선적이네.”“그래요.”시연은 손을 들며 유건의 말을 인정했다.“진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더 예쁘잖아요.”유건은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참 뻔뻔한 사람이네,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법도 있나?”이 말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제가 뻔뻔스러운 거,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시연의 답답한 태도에 유건은 화낼 기분도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약을 갈아주면서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우리 결혼이 계약 결혼인 거 나도 알아요. 고유건 씨가 누구와 만나는지 간섭할 권리도 없고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계속 사랑하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계속 만나세요.”그녀는 원래 고유건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하던 장소미를 혼내주고 싶었을 뿐,
점심시간에 시연은 구내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유건이 정기철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나쁘지 않네요.”시연은 환자를 격려하듯 유건을 칭찬하며 말했다.“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다니. 이렇게 잘 움직이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예, 선생님.” 정기철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시연이 막 가려고 하는데 유건이 불러세웠다.“잠깐만.”“무슨 일 있어요?” 지시연이 몸을 돌렸다.“너...” 유건은 뜻밖에도 좀 쑥스러워했다.“뭐 좋아해?”“네?”밑도 끝도 없는 고유건의 질문에 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큰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살랑거렸다.“갑자기 못 알아듣는 척은.”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못 들었다며? 한 회장님 일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너에게 감사표시 할게.”시연은 이제야 고유건의 말을 이해했다.“감사 표시요?”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특별할 것 없어요. 나도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네. 이미 번역은 다 마쳤어요. 점심시간이니까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네.”전화를 끊었는데 유건이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뭐가 그렇게 바빠?” 유건은 대답 대신 도리어 다른 질문을 했다.시연이 대답했다.“통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말할 시간 없어요. 빨리 보내야 해요.”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혼자 남겨진 유건은 상처를 가볍게 누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웠다‘아르바이트?’‘BLUE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방해하니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는데, 정말 찾은 건가?’‘번역?’‘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야?’‘도대체 왜?’‘돈 많은 남자를 찾는 거 아니었나?’‘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시연아! 흑흑.]“무슨 일이야?”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너 요즘 울음 연기 성의가 점점 부족하네.”성빈은 즉시 가짜 울음을 거두었다.[나 지금 너무 급해. 소개팅 중이야,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시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이번에는 진아 차례 아니야?”[진아가 지금 통화가 안 돼. 이 오빠한테는 지금 너밖에 없다! 제발 나 좀 살려줘, 기다릴게!]“여보세요?”상대편은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성빈의 집안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아직 어린 성빈에게 1년 내내 맞선을 주선해 왔다.그러나 성빈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매번 시연이나 진아에게 자기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해서 소개팅을 망치곤 했다.시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핸드폰이 울렸다. 성빈이 보낸 현재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였다.‘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바로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시연의 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핸드폰에서 성빈이 재촉하는 메시지가 내내 멈추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가방에서 안약을 꺼내 두 눈에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성빈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시연은 곧장 성빈에게 달려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느 곳을 보든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시연은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집어들고 성빈에게 확 부어버렸다.“젠장, 누구야?”머리와 얼굴이 흠뻑 젖은 성빈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감히 누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으흑흑...”시연의 연기는 서툴렀지만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안약의 도움으로 눈물을 흘렸다.그 여자를 가리키며 울먹이며 말했다.“진성빈! 똑똑히 설명해봐, 이 여자는 누구야?”“아이고.”성빈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연은 성빈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성빈아, 저 여자 진짜 사납잖아, 너무 무서워!”“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성빈은 시연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남자나 꼬시는 여우 같은 X! 이 쓰레기 같은 X아!”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연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찰싹'하고 뺨을 한 대 때렸는데, 성빈의 얼굴에 대신 맞았다. 여자는 성빈의 행동에 경악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싸주는 거예요?”성빈은 시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어두워진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내 여자니까 당연히 보호해야지! 누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당장 꺼져!”“좋아! 진성빈, 너 정말 잘났네!”여자는 울면서 레스토랑 밖으로 뛰쳐나갔다.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울음을 멈추며 성빈을 노려보았다.“이 정도면 됐어?”시연이 얼마나 양심에 찔려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헤헤.” 성빈은 히죽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화 안 났지? 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나한테 맨날 이런 못된 짓만 시키다니! 나 랍스터 회 먹을 거야!”“사 줄게!”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유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생각해보면 지시연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진성빈이겠지’.‘허.’ 유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여자, 도대체 안목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저 여자 눈에 보이는 건 돈뿐이군!’‘오늘 이 상황에서는 지시연이 완전히 승리한 꼴이네. 그래서, 이제 결혼까지 성사시키려는 건가?’‘진성빈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워낙 많은데… 과연 지시연에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오늘 그 여자의 결말이 바로 지시연의 미래일 텐데.’“형님.”한참 동안 유건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자 지한이 조용히 일깨웠다.유건은 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냉담하게 말했다.“가자.”‘왜 이렇게 저 여자
소미의 등장에 유건의 상처를 보던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여자가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다 보다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장소미도 젊은 여자인데,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유건의 상처도 다시 터졌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네.'‘이 두 사람, 어젯밤이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에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선생님은 회진을 돌고 있네요.” 소미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시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요.” 시연은 침착하게 유건의 상처가 벌어진 부분을 확인한 후 다시 몇 바늘 꿰매면서 유건과 소미의 모습에 의사로서 직설적인 충고를 했다. “두 분, 환자분의 현재 상태로는 부부 생활이 적합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 “여자분 쪽이 먼저 다가왔다 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아요.” “상처가 다시 터지면 상황이 악화할 겁니다. 복강에 농양이 생기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잠깐의 즐거움이와 생명,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장갑을 벗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저, 저 선생님...” 소미는 충격에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유건은 입술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소미 씨, 촬영장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늦었으니 옷 갈아입고 빨리 가요.” “네, 알았어요.” 소미는 탈의실로 들어가고, 유건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선물로 준비한 작은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유건은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화가 불타올랐다.‘지시연이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장소미와 무언가 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허, 본인이 남녀 관계에 대하여 그렇게 무분별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본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정말 미쳤
“아...” 성빈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놀라고 억울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건의 권력과 지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어쨌든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고유건, 너 미쳤어? 나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야?” 성빈도 말하면서 일어나서는 금방이라도 유건에게 덤빌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민환과 기환이 재빠르게 유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성빈 도련님, 우리를 먼저 이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딱 봐도 군인 출신, 게다가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성빈은 애당초 자신이 싸움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젠장!” 성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 불러!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억울해?”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건이 차갑게 웃으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가지고 노는 여자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에 성빈은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은 여러 여자와 교제해 왔고, 늘 세상과 가볍게 게임을 하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는 여자를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억울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말해봐! 내가 네 여자를 가지고 놀았냐?” 그 순간 유건은 거의 이렇게 말할 뻔했다. ‘너는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어제 지시연은 이놈을 위해 다른 여자와 싸웠는데, 오늘 이 자식은 다른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다행히도 유건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지, 시, 연!” ‘뭐?’ 성빈과 진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시연? 내가 시연이를 가지고 놀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진아가 나서서 말했다. “이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