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훈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데 정말 뛰어났다. 특히, 속마음을 읽어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시연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상훈은 알아차렸다. ‘저 아이, 뭔가 일이 있었구나.’ 시연은 애써 감추려 했지만, 아직 너무 어려웠다.연륜이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했으니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속일 수 있었겠지만, 고상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말해보렴. 무슨 일이니?” 고상훈은 다정하게 물었다. “아가, 너와 유건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는 네 할아버지야. 그렇지 않니?” 순간, 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마치 그녀 안에 꼭꼭 눌러 담아둔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버린 듯. 그녀는 목이 메어 간신히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울지 마라.” 고상훈은 몸을 숙여 테이블 위의 휴지 상자에서 티슈를 뽑아 건넸다. “이 할아버지한테 말해봐. 넌 혼자가 아니야. 할아버지가 곁에 있잖니.” 시연은 티슈를 받아 들고, 눈을 가렸다. ‘말해야 할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주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런데, 나 혼자 버티는 것도 너무 힘들어...’ 그녀는 손에 쥔 티슈를 꼬깃꼬깃 구기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 저한테 돈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저... 꼭 갚을게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자,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고.’ ‘그런데도 결국, 난 여기까지 와버렸어...’ ‘가난... 그게 결국 내 죄야.’ “울지 마라, 울지 마.” 고상훈은 놀란 듯했지만, 동시에 가슴 아파했다. “괜찮으니까 울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봐. 무슨 일이야?” “할아버지...” 시연은 흐느끼며, 우주와 ‘웰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주는 겨우 열네 살이에요. ‘웰스’는 우주의
“할아버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벗어난 그 결혼생활로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 ‘그 지옥 같은 관계를 다시 시작하라는 거냐고.’ 시연의 망설임과 거부감이 너무도 분명해서일까. 고상훈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런 중요한 문제는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틀을 줄게. 이틀 후에 대답해도 괜찮아. 다만, 그전까지 네가 필요한 돈은 주도록 하마. 많은 돈도 아니니, 돌려줄 필요도 없어.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주는 용돈이야. 그걸 갚으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니?” 그러면서도,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네가 반드시 내 뜻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야. 네가 어떻게 결정하든 너는 내 손녀이고, 난 널 강요할 생각이 없으니까.” 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부담을 덜어주려는 말이었는데, 그녀에게는 더욱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병원 복도. 시연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정면에서 다가오던 유건과 맞닥뜨렸다. 둘 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유건은 시연보다 한발 늦게 도착했다. G시에 막 도착한 그는, 공항에서 곧바로 병원으로 온 참이었다. “할아버지 뵈러 온 거야?” “네.” 시연은 고개를 살짝 숙였고, 창백한 목선이 드러났다. “그럼, 이만 가봐.” 유건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요.”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끝내 ‘데려다줄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연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건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려 병실로 들어갔다. ...병원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서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돈이 입금되었다는 메시지였다.
고상훈이 웃으며 이호민을 바라봤다. “이 집사, 여전하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거칠구나.”이호민도 겸손해질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이 정도면 아주 약한 겁니다.”“집사님,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경호원이 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상훈 앞에 섰다.이호민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안대를 벗겨.”“예.”경호원이 나서서 지동성 일가 세 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냈다.세 사람은 원래 집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입을 막고 눈을 가린 채 끌고 온 것이다.그리고 오는 길 내내 겁에 질려 벌벌 떨었고, 안대가 벗겨지는 순간, 셋은 다리에 힘이 풀려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아이고.”이호민이 눈을 반쯤 내리깔고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이 가족, 참 공손하네요.”“흥.”고상훈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생충 같은 것들. 우리 고씨 가문에서 그렇게 많은 걸 받아먹었으니, 이 정도 인사받을 자격은 있지.”“당연하죠.”주종 간의 대화는 마치 가벼운 잡담 같았다.그러나 지동성 일가 세 사람은 온몸을 떨고 있었으며, 입이 막혀 있어 말도 하지 못했다.지동성과 장소미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장미리는 계속해서 웅얼거렸다.“말하고 싶어?”고상훈이 장미리를 힐끗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경호원이 즉시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떼며 경고했다.“소란 피우지 마! 우리 어르신께서는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 떠들면 혀를 잘라버릴 거야!”장미리는 눈을 크게 뜨고 벌벌 떨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경호원이 테이프를 떼었다.“너, 너희들...”장미리는 숨을 헐떡이며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용기를 짜내어 물었다.“대체 누구야? 감히 우리를 납치하다니! 우리 사위가 누군지 알기나 해?”고상훈이 마치 개를 보듯 그녀를 내려다봤다. “좋아, 네 사위가 누구지?”“흥!”장미리는 우쭐해진 듯 턱을 세우며 호기롭게 말했다.“잘 들어! GP그룹 대표, 고유건이야!
“이 집사.”“예!”이호민이 눈빛을 보냈지만, 장미리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짝!가장 가까이 있던 경호원이 망설임 없이 장미리의 뺨을 후려쳤다.“읍...”순식간에 장미리는 입을 틀어막으며, 이가 흔들리는 듯한 고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아이고...”고상훈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나이도 꽤 먹었으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구나.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다니.”곧이어 지동성을 바라보았다.“넌 집안의 가장이니, 똑똑히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소미를 가리키며 말했다.“네 딸, 우리 유건이한테서 떨어지게 해. 그렇게 하면 지금의 편한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너희 가족이 파산해서 길거리에 나앉는 건 순식간일 줄 알아!” 지동성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읍, 읍...”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쏟아냈는데,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고상훈은 그녀를 한 번 흘겨보았을 뿐, 기회를 주지 않았다.“아가씨, 넌 아직 나와 대화할 자격이 없어. 네가 하려는 말이 뭔지 맞혀볼까? 네가 유건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려는 거겠지?”소미는 경악했다. 정확히 그 수를 두고 말할 생각이었다.“흥.”고상훈은 냉소를 지으며 눈빛을 차갑게 내리깔았다.“겨우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하나로 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나?”그보다는 이미 성장한 유건이 훨씬 더 중요했다.게다가, 시연 역시 이미 아이를 가졌으니.고상훈은 이호민을 바라보며 담담히 미소 지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나를 전혀 모르네. 내가 너무 늙은 건가?”“그럴 리가요? 단지 저들이 무지해서 그렇습니다.”이호민이 다가와 다시 차 한 잔을 내밀었다.“음.”고상훈은 차를 두 모금 마신 뒤, 냉정하게 말했다.“아가씨, 배 속의 아이는 없애도록 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을 거야.”그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고 냉정하게 명령했다.“이 집
하룻밤 동안, 시연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오전 내내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점심시간, 그녀는 짬을 내어 태산요양병원에 들렀다.이번에 CA국에 다녀오면서 우주를 위한 선물을 몇 가지 준비해 두었기에, 그것을 전해주려고 했다.아울러, ‘웰스’의 자료도 함께 보여 줄 생각이었다.태산요양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시연을 맞이했다.“시연 씨, 우주가 오전에 병실을 옮겼어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시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시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병실을 옮겼다고요?”“아, 모르셨나요?” 간호사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혀 몰랐어요.” 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이상하네요. ‘이호민 씨’라는 분이 오셔서 처리하셨는데, 시연 씨가 부탁했다고 하셨거든요.”‘이호민 씨?’시연은 단번에 깨달았다. 고상훈이 한 일이었다.“일단 병실로 안내해 드릴게요.”“네.”원래 우주는 네 명이 함께 쓰는 큰 병실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1인실로 옮겨져 있었다.이제 우주는 훨씬 넓은 공간에서, 독립된 거실, 침실, 욕실, 주방까지 갖춘 VIP 병실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이런 시설을 사용하려면 비용이 엄청날 터였다.시연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혹시 원래 병실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비용이...”자신은 분명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우주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지동성은 아들을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조차 아까워했다.그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우주가 열한 살이 되기 전까지는, 시연이 직접 돌봐야만 했다.하지만 그녀가 열여덟이 되어 대학에 가야 하자, 지동성은 더 이상 우주를 집에서 돌볼 수 없었고, 결국 요양병원에 보내게 되었다.그러나 그것조차도 최소한의 비용만 부담한 상태였다.우주의 치료 역시, 최근 시연이 지동성과 싸워서 얻어 낸 결과였다.하지만 결국, 그것조차 그녀를 위협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얼마 전, 시연은 유건에게서 4,000만원을 받아 우주의 치료비로 사용하기로 했었다.그런데 우주가
유건은 곧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말씀하셨던 거야!’ 그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래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미 씨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며, 분노 속에 비난이 섞여 있었다.“흥.”고상훈이 냉소하며 말했다. “유건아, 그새 너무 커버렸구나. 장소미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날 계속 화나게 하더니, 내가 몇 번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했어. 그런데 이젠 날 잡아먹을 기세구나!” 노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가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키웠으니, 내 팔자려니 해야겠지.”유건은 침묵했다.고상훈의 말은 너무나 가혹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장소미를 만난 후로 모든 것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할아버지.”유건은 미간을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소미 씨는 아이를 가졌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전 어릴 때 부모 없이 자랐어요. 제 아이만큼은 저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고상훈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그는 미리 짐작했어야 했다. 불행한 유년 시절은 결국 손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럼 시연이는? 시연이의 아이는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야?”“시연이는...”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도 시연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고상훈이 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만약 할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그러나 그 순간, 고상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내가 단순히 아이 때문에 이러는 줄 아니?” 그는 여유롭게 국을 한 모금 마시며 덤덤하게 덧붙였다.“내가 단순히 핏줄만 따지는 사람이었으면, 네가 GP그룹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냐는 말이야.”한 마디가 유건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유건아.”고상훈이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보는 건 사람이야. 예전에 널 지킨 이유와, 지금 시연이를 받아들이려
하룻밤 내내, 소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상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손을 쓰진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가혹하게 나오다니?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아버지 지동성의 병.그 문제로 인해, 자신은 시연을 협박했다.‘혹시...’순간적으로 소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지시연 때문이야! 우리 지시연에게 간 기증을 요구한 것 때문이라고!’그때 소미는 시연에게 선택지가 없다고 확신했고, 결국 간을 기증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이 선택이 오히려 시연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소미가 아는 한, 고상훈은 언제나 시연을 감싸고 있었다!‘음모야! 지시연의 계략이라고! 분명 지시연이 고상훈의 사랑을 이용해, 고상훈을 부추긴 게 틀림없어!’‘나한테 복수하기 위해서!’‘그래, 틀림없어!’“하!”소미는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지시연, 절대 너한테 질 순 없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고. 나 자신도, 고유건도 내가 지킬 거야.”생각이 정리되자, 그녀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시연의 번호를 눌렀다....한편, 시연은 강울대에서 후배들에게 실험 수업을 진행 중이었다.수업이 끝난 후,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전부 장소미였다.‘또 무슨 일이야?’의아해하던 찰나, 다시 전화가 울렸다.여전히 장소미였다.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시연.]소미는 서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리 만나자. 시간과 장소를 보내줄 테니까...]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시연이 전화를 끊었다.소미는 놀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지시연, 네가 감히 내 전화를 끊어?”반면 시연은 가볍게 비웃었다.‘나를 만나고 싶다고? 내가 소환하면 바로 달려오는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도대체 지동성과 장미리는 어떻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소미가 이렇게 낮은 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유건을 사랑하고 있었다.시연의 눈매가 반짝이며 장난기 어린 빛이 스쳤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시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나 지금 태산요양병원 가는 중이야.”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소미가 만나고 싶어 한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터였다.시연은 가늘게 눈을 뜨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렸다. ‘재미있겠는걸.’그리고 강울대를 나와 태산요양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시연이 병원에 도착해 병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지동성이 있었다.지동성도 막 도착한 듯했다. 시연이와 몇 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도 아직 내려놓지 못한 상태였다.시연을 보자, 지동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안경을 고쳐 쓰며 시선을 피했다.“시연아, 너도 왔구나.”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반응했다.지동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반응이었다. 아예 무시당할 줄 알았으니까.하지만 정작 우주는 보이지 않았다.“우주는?”지동성이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가 우주 병실을 바꿨다더구나. 여기 꽤 좋구나...”“우주는 수업 중이에요.”시연은 짧게 대답한 뒤, 손을 뻗어 쇼핑백을 확인했다.“어?”시연은 웃음을 머금고 지동성을 바라보았다.“이번엔 봉투가 없네요? 늘 돈을 채워서 건네던 습관이 있었는데, 이번엔 왜 안 챙기셨어요?”지동성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엔 정말로 준비하지 못했다.“후훗.”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제가 간 이식을 거절했으니, 돈을 더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아, 아니야!”지동성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변명하며 말했다. “네가 받을지 말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아까워서가 아니라...”“하하...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농담인데요.”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니,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어요?”지동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