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서 고상훈은 활짝 펴진 얼굴로, 가끔 시연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흘끗 보며 크게 웃었다. “시연아, 더 먹어라.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유건에게 당부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연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유건과 시연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씨 저택을 나섰다.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요, 출근해야 해요.”시연은 가방을 메며 대답했다.“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병원에 안 가요.” 강울대학교 기숙사 건물을 힐끔 본 유건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정말 허름하고 낡았다.” 이건 그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래요, 좀 낡긴 했죠. 고유건 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 최근 유건은 은수 프로젝트로 바빠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정리되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유건이 한강우를 은수 프로젝트를 정식적으로 시작하는 축하 연회에 초대했을 때, 한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명의 은인인 지시연 씨도 올 거지?” 유건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연이와 함께 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유건이 시연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유건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 은수 프로젝트 시작 연회가 있는데, 한 회장님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올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시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갈 수 있어요.] “좋아.” 유건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적당히 입을
노은범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그래, 나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연회장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이 연회에 참석하려고 온 거야?” 은범의 말투에는 어딘가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연이가 왜 이런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할까?’ “응.”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애매하게 두 마디 정도로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이 곳의 주인을 구한 적이 있어.” “한강우, 한 회장님 말이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한 회장님은 내 환자라고 볼 수도 있지.” “그렇구나.”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연은 받지 않고 은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계속 날 재촉하네. 먼저 가볼게!” “천천히 가!” 은범이 말하기도 전에, 시연은 재빨리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범은 어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시연아, 나중에 보자.” ... 남쪽 문까지 달려가자 시연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겨우 주지한을 만났다. “미안해요, 늦었죠!” 지한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님은 손님들을 맞이하러 먼저 갔어요. 저는 시연 씨 옷 갈아입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시연과 지한은 휴게실에 도착했다. 장소미는 유건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 있었다. 주지한은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형님이 시연 씨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예요.”“예? 그렇군요.” 선물 상자를 열자 시연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엄청 화려한 드레스네요.” “당연하죠.” 지한은 유건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이 특별히 해외에서 주문했어요. 다 디자이너와 보조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한 드레스예요. 전 세계에서도 단 한 벌밖에 없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유건이 이렇게까지
장소미가 여기에 있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였으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그러나 이것조차 소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소미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시연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는 분명 내가 조금 전 고유건의 휴게실에서 본 그 드레스인데!’ 시연은 이 모든 것을 알 리 없었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어떤 법에 내가 여기 있지 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시연은 배가 고파 더 이상 소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지나가는 순간 소미가 시연을 힘껏 잡아당겼다. “지시연, 너 지금 못 가!!” 시연은 당황해서 말했다. “장소미, 너 제정신이야? 당장 이 손 놓으라고!” 하지만 소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시연을 놓지 않고 더욱 악착같이 붙잡았다. “내가 말했잖아, 넌 아무 데도 못 가!” “정말 어이없네!” 시연은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미는 강하게 손아귀에 힘을 줘 시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야...” 팔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소미의 손톱이 시연의 피부를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소미는 시연에게 마치 원수라도 된 듯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너 입은 이 드레스, 어디서 난 거야?”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장소미가 이 일 때문에 이렇게 발광을 한 건가?’ “왜 내가 너한테 그걸 말해야 하지?” “너, 유건 씨와 무슨 관계야?” 소미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올랐다. “이건 유건 씨가 나를 위해 산 건데, 왜 네가 입고 있는 거야?” “하!” 시연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칼처럼. “맞아, 고유건 씨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입고 있는지, 네 남자 친구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시연
유건과 은범 둘 다 뛰어난 수영 실력의 소유자라 금방 시연과 소미를 물에서 건져 올렸다. 유건은 소미를 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소미 씨, 소미 씨, 괜찮아?” “푸!” 소미는 물을 한가득 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유건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유건 씨! 나 정말 무서웠어! 흐흐흑...” 그러나 시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시연, 시연아?” 은범이 시연을 안고 있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시연을 땅에 평평하게 눕혔다. 바닥에 누워있는 시연을 보고 있는 은범의 심장은 초조하기 이를데 없이 마치 빠르게 두드리는 북소리 같았다. “시연아, 내가 너에게 무례를 범하려는 건 아니야, 미안해...” 그는 먼저 누워있는 시연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은범은 누군가가 어깨를 잡는 강한 힘을 느꼈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유건이었다. “고 대표님?” “비켜!” 유건의 말은 간결했지만, 그의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은범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시연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슴압박을 30회 시행한 후 시연의 코와 입을 막고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입을 그녀에게 맞대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은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소미는 충격으로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이 두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은범은 멍해진 채,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유건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심폐소생술을 반복해서 실시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다짐하고 있었다. ‘지시연! 당장 깨어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당장 이혼이다!! 무슨 이유가 됐든 상관없어!!!’ “콜록, 콜록...” 마치 그의 경고를 들은 듯, 시연은 의식이 돌아오면서 삼켰던 물을 토하며 기침을 했고,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떴
소미는 눈짓으로 장미리에게 신호를 보냈고, 장미리는 잠시 화를 참으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떠나기 전, 유건은 은범을 한번 쓱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은?”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은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노은범입니다. 시연이 친구예요.” 유건은 은범을 잠시 응시하더니, 문득 그를 기억해 냈다. ‘이 사람,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 ‘SYD호텔에서 그날 밤, 호텔 주방에서 우리 둘이 스치듯 지나간 것 같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날 밤, 만둣국을 하려고 호텔 주방을 빌렸던 남자가 바로 이 노은범이었네.’ ‘그리고 그 만둣국도 아마 지시연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지.’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어?’ 유건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시연이 지금 자고 있어요. 노은범 씨도 안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아니요.” 은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연이 자고 있다면, 전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네요.” 유건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노은범 씨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유건은 소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 옥상 테라스에서, 유건은 모든 상황을 낱낱이 소미에게 설명했다. “상황이 이래. 지시연은 내 아내야.” 소미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그럼, 지... 지 선생님이 유건 씨의 아내였단 말이에요?!” 소미의 내면은 슬픔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시연이 고유건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지시연이 갑자기 돈이 생겨 지우주의 치료비를 낸 것도, 지시연이 고유건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도...’‘어쩐지, 내가 계속해서 지시연과 고유건 사이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도... 이제서야 이유가 분명해졌네!’유건은 휴지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왜 저에게 말하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주지한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시연 씨 깨어났어요.]“그래, 알았다.” 유건이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깨어났으니, 가서 봐야겠어.” “잠깐만요!!” 소미가 유건의 팔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지금 소미는 유건과 시연이 단둘이 있는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유건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유건 씨, 걱정하지 마요.” 소미는 서둘러 말했다. “저 지 선생님과 싸우지 않을게요. 저도 지 선생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자로서 더 쉽게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 휴게실. 은범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시연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종이로 만든 인형도 아닌데, 물에 좀 담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런 말 하지 마.” 은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 “시연아, 그때 내가 얼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과 소미가 들어왔다. 시연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즉시 사라졌다. “은범아, 난 괜찮으니까. 먼저 나가 있어.” 은범은 내키지 않았지만, 유건과 시연 사이에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을 알았기에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잘 쉬어.” “응.” “고 대표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고유건과 스치듯 지나칠 때, 그는 유건에게서 강한 적대감을 느꼈다. 문이 다시 닫히자, 시연이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꽤 시끌벅적하네요.” 소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해요.” 시연은 놀랍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러나 유건이 먼저 나서
시연은 문 앞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콜택시를 불렀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지금 와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장미리와 장소미가 시연을 찾아온 것이다. 장미리는 몇 걸음에 달려와 시연에게 소리쳤다. “지시연! 네가 바로 고유건을 협박해서 결혼한 그 저질 여자였구나!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니? 고 대표는 우리 소미가 사귀는 남자 친구야!”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장 여사.” 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럽다’는 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 말은 장 여사가 할 말은 아니지. 장 여사가 제일 ‘부끄러운’사람이니까. 장 여사가 ‘부끄럽지 않아서’딸이 생긴 거잖아.” “...”장미리는 순간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붉어졌다. “너랑 나랑 같니? 난 네 아빠와 진심으로 사랑했어! 넌 그럴 자격도 없어! 고 대표는 너를 원해서 결혼한 게 아니야!” 시연은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정말 남녀가 하는 더러운 짓을 말로 포장하긴 하네.” 소미는 치를 떨며 말했다. “지시연, 너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야?”시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히려 너희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 너희가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난 고유건의 집안을 찾지도 않았을 테니까.” 시연의 눈빛이 흥분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네가 그 사람 여자 친구라는 걸 알았을 때, 난 솔직히 기뻤어.” “...”소미는 충격을 받아 몸이 굳어버렸다. “너 일부러 그랬구나.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였어!” “그래.” 시연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이 안 통해!” 소미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소용없어! 유건 씨가 날 좋아해!” “상관없어.” 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진심으로 무관심한
[그리고...] 지한이 말을 이었다. “민환이가 그러는데, 아까 장소미 씨가 휴게실에 들렀다고 합니다. 장소미 씨가 거기서 잠시 기다리다가 형님을 만나지 못하고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장소미가 거기서 미리 그 드레스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바로 그 때문에 수영장 옆에서 시연을 붙잡고 함께 물에 빠진 것이다! 유건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에는 차가운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연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소미가 유건을 향해 마주 걸어왔다. 소미는 다급히 유건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유건 씨, 방금 어디 있었어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이 유건에게 꽉 잡혔다. 소미는 그제야 유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아무 감정도 없었다. 자신의 손목은 유건의 손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유건 씨, 무슨 일이에요?” 유건의 표정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네가 지시연을 수영장 물에 빠뜨린 거 맞아?” “어...?” 소미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네, 지 선생님도 인정했잖아요!” 그때, 유건의 입에서 조용히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긴 눈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그래? 그럼 이 영상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소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 영상에는 소미가 시연을 붙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소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건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이미 사실이 드러났으니, 소미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전 너무 당황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그냥 지 선생님과 다투다가 물에 빠진 것만 생각났어요...” 유건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면 물에 빠진 후에, 네가 지시연을 붙잡고 놓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