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75화

Author: 임공
옆에서 빠르게 한쪽 팔이 뻗어 나와 우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너무 급한 탓에 숯불 화로가 그대로 넘어가면서 뜨거운 숯이 쏟아졌다.

그중 일부가 그 팔 위로 떨어졌다.

“쓰읍!”

유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을 벌린 시연은 약 2초가량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건 씨!”

이어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빨리 보여줘요.”

그녀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더 볼 것도 없었다. 고온의 숯이 직접 닿았으니 당연히 화상이었다.

“빨리 와요!”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연은 유건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선 세면대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화상 부위를 식혔다.

“잠깐만 있어요.”

여자는 곧바로 욕실로 뛰어가 대야를 찾아 들고, 냉장고의 얼음 칸에서 얼음을 퍼 담았다.

그런 다음, 단호하게 지시했다.

“팔 넣어요.”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왜 멍하니 있어요?”

시연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간 거예요?”

그리고 답답해서 남자의 손을 직접 잡고 강제로 얼음물에 담갔다.

유건은 당연히 정신을 놓은 게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시연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

시연은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유건을 신경 써 주고, 다급하게 챙기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게 유건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겠지?'

유건은 시연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단순히 할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멀쩡한 팔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여자를 품에 끌어당겼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여보, 날 좋아하지?”

질문을 뱉어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실, 유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가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또한 묻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76화

    우주에게 차근차근 가르치듯 말하길 십 분.“누나가 말한 거, 기억했어?”“응!” 우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 누나, 화내지 마.”동생이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니 시연의 마음이 또 약해졌다.그녀는 우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누나는 화난 게 아니야. 우주가 걱정돼서 그래.”바로 그 순간, 우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아이고!”기다렸다는 듯이 진아가 우주의 팔을 잡았다.“우리 우주 배고프다! 나랑 같이 가서 뭐 좀 먹자!”그녀는 우주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아이고 참, 우리 우주를 배고프게 했네!”방 안에는 다시 부부 둘만 남았다.시연은 유건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약상자를 꺼냈다.이곳의 약상자는 꽤 잘 갖춰져 있었다. 화상 연고까지 있었다.“얼음찜질은 이 정도면 됐어요.”그녀는 유건의 팔을 살며시 잡아 닦아주었다.“물기부터 닦고, 연고 바를게요.”이어서 깨끗한 거즈를 꺼내 물기를 조심스럽게 흡수한 후, 면봉으로 연고를 정성껏 발랐다.그리고 한층 신중해진 얼굴로 말했다.“아마 물집이 잡힐 거예요. 더 아플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터뜨려 줄게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앙다물고 조용히 말했다.“미안해요.”시연은 자기 동생이 유건을 다치게 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그런 말은 하지 마.”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아내가 남편한테 이런 식으로 사과해야 하나?’어쩐지 유건의 속이 상했다.“지시연, 지금 너는 내 아내고, 우주는 내 처남이야. 그런 사과는 필요 없으니까 취소해.”시연은 순간 당황했다.‘말한 걸 어떻게 취소하라는 거지?’하지만 유건은 진심으로 기분 나빠했다.시연은 살짝 남자의 손을 잡고 나긋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취소할게요.”그녀는 때로는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오늘 유건이 아니었으면, 다친 건 우주였을 것이다.그런 남편에게 사과하는 것은 이상한 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77화

    “여보, 나 다 했어.”욕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어, 알았어요.”그리고 허둥지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손을 떼기 전, 무심코 한 번 더 장소미의 생일을 빠르게 입력해 보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비밀번호 오류’였다.순간, 가슴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고, 시연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유건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가자. 나 배고파.”“나도요.”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걸어 나가면서도 틈틈이 유건을 힐끔거렸다.‘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자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까?’ ‘내가... 착각한 건 아니겠지?'...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시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출발 전, 시연은 고상훈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건의 팔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화상 부위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소독한 바늘을 들고 하나씩 터뜨린 후, 그녀는 유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여긴 경구약이 없어서... 돌아가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 게 좋겠어요. 감염되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요.”말하면서도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흉이 질 수도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긴 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그런 시연을 보며 유건은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 난 여자도 아닌데, 흉 남으면 남는 대로 두지 뭐.”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그건 그렇고.”유건이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꺼냈다.“뭐예요?”시연이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자, 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기환을 당신 곁에 붙이려고.”“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나를 보호하려고 기환 씨를 붙이겠다는 거예요?”“똑똑하네.”유건은 시연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사실 이는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 유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78화

    고상훈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내 선택이 옳았어. 시연이가 있어야 유건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됐어.”모든 게 정리된 걸 확인하자, 고상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 나도 좀 자야겠다.”“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래, 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시연은 곧장 쉴 수 있었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중요한 회사 업무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떠나기 전, 그는 시연에게 당부했다.“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푹 쉬어. 저녁엔 일찍 들어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자.”“네, 알았어요.”유건이 나가고 나서, 시연은 정말로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시연이 눈을 뜨니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걸려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시연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시연이 다니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였다.그 개인병원은 비용이 많이 든 만큼 서비스도 철저했다.간호사는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사모님, 모레가 정기 검진일인데 일정 괜찮으신가요? 시간 맞춰 오실 수 있죠?]“아, 네.”시연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갈 수 있어요. 잊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유건이 들어왔다.“일어났어?”“방금...”시연은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을 털어내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급한 일만 처리하고 왔어.”유건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배 안 고파?”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같이 해 줄게.”“바람 좀 쐬고 싶어요.”그녀는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좀 띵해서요.”“좋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그리고 거기 놓인 라탄 소파에 앉아 시연을 품에 안았다.이 집에 산 지도 시간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79화

    유건은 그렇게 쉽게 인정해 버렸다.시연은 적잖이 놀랐다.유건은 쉽게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도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다니...‘그 여자, 보통 사람이 아니네.’시연의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누구예요?”그리고 질문이 이어졌다.“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만난 적 있어요?”‘이상하네. 우리가 결혼하고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장소미 말고는 고유건 주변에서 다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는데...’“여보.”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난감한 듯 미소 지었다.“그만 물어봐.”“왜요? 말하기 싫어서 그래요?”시연은 손가락으로 남자의 가슴을 툭툭 찔렀다.“너무 아끼는 거 아니에요? 좀 알려 줘봐요.”“착하지.”유건은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멈추게 했다.“그 애는 좀 달라. 당신, 분명히 화낼 거야.” “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그리고 일부러 소리 높여 말했다.“와! 첫사랑인가 보네요?”“응.”다시 한번, 유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시연의 심장이 묘하게 움츠러들었다.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심지어 장소미가 유건의 마음속에서 그녀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자가 고유건의 ‘진짜 사랑’이었다고?’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긴 속눈썹을 살짝 떨었다.“그럼, 왜 함께하지 못했어요? 혹시... 할아버지께서 반대하신 거예요?” ‘장소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시, 두 사람도 강제로 갈라진 걸까?’“아니.”유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눈동자에는 희미한 아련함이 스쳐 갔다.“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어.”“헤어진 거예요?”“그것도 아니야.”유건은 깊은숨을 쉬었다.“그땐 우리 둘 다 너무 어렸어.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어.”“아... 그렇구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80화

    씻고 나서 시연은 아침과 점심을 한 끼로 때운 후,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집을 나서는 순간, 정기환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형수님, 좋은 아침이에요.”“형님께서 앞으로 형수님이 외출하실 때마다 따라다니라고 하셨어요.”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방해는 안 할게요. 저를 그냥 기사라고 생각하세요. 웬만하면 앞에 안 나타날 테니까요.”이 이야기는 이미 유건에게 들었기에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자, 형수님, 타세요.”“네.”...병원에 도착한 시연은 곧바로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양석현 교수의 대리 진료였다.자리에 앉자마자 끊임없이 환자들이 들어왔고, 두 시간 내내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었다.한 환자의 진료를 마친 뒤, 시연은 프린트된 진료 기록을 건넸다.“이 날짜에 맞춰서 다시 오세요.”“감사합니다, 선생님.”“다음 분...”문이 열리자마자 여러 명이 몰려 들어왔다.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어떻게 된 거죠? 환자는 한 분만 들어오시고, 보호자는 한 분만 동반해 주세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중년 남성이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며 다가왔다.“당신이 양석현 교수야?”시연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석현 교수가 아니었다.“무슨 일이시죠?”“흥!”남자는 시연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더욱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이깟 게 무슨 의사야? 내 아이가 수술받기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차례를 넘겨줬다며?!” “의사라면, 모든 생명이 똑같이 여겨야 하는 거 아니야? 돈 있는 집안 애들이 더 소중한 거야?!”점점 더 격양된 목소리.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시연을 때리려 했다.“뭐 하시는 겁니까?!”시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도망쳐 봤자야! 난 오늘 내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찾으러 왔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81화

    오후 여섯 시, 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진료실을 정리했다.양석현 교수의 진료는 정해진 수량이 있었고,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도 한정되어 있었다.시연이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환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생 많았어요. 이제 가면 될까요?” 기환이 말했다.“형수님, 서두를 필요 없어요. 형님이 금방 온다고 하셨거든요.”“네?”시연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유건 씨가 온다고요?”말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목소리는 부드럽고 가벼웠다.“그럼 좀 기다려야겠네요.”20분 뒤, 유건이 도착했다.“형님.”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시연에게 다가왔다.시연은 책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왔어요?”“어디 다쳤어?”유건은 시연 앞에 반쯤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물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여자의 다리를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어느 쪽이지?”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려 했다.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의 손을 막았다.“유건 씨!”“응?”유건은 태연하게 눈썹을 올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밖에 없어.”이미 기환과 다른 직원들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오른쪽 다리예요.”시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손을 풀었다.“별거 아니에요. 살짝 긁힌 정도예요. 내가 부주의해서 그런 거고요.”유건은 꼼꼼하게 살펴본 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이제 곧 엄마가 될 사람이니까, 더 조심해야 해.”“그래요...”시연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유건 씨가 또 아이에 대한 이야기했어.’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다음 출산 검사 일정에 대해 말해도 될까?’시연이 고민하는 사이, 유건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오늘은 특별히 집 말고 밖에서 먹자.”시연은 유건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웃었다.“좋아요. 당신이 결정해요.”차를 몰아 향한 곳은 ‘영복루’였다.시연의 취향을 고려한 유건은 꼼꼼하게 메뉴를 주문했다.“음식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82화

    순간, 유건은 기쁨과 놀라움에 휩싸였다.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진짜?”시연은 오히려 긴장이 풀린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진짜예요.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잘못된 일이에요? 아니면, 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맞는 말이었지만, 유건은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는 조용히 물었다.“그럼... 노은범보다도?”유건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술에 취했던 밤. 시연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했던 말을.그녀는 노은범을 사랑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 걸까?’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유건과 은범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고 대표님, 사모님. 음식을 준비해도 될까요?”그 순간, 시연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답했다.“네, 들어오세요. 배가 고프네요.”“네, 사모님.”직원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유건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 그는 시연이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굳이 들추진 않았다.‘노은범은 과거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더 깊이 묻혀 사라질 거야.’...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자기 전, 시연은 유건의 품속에서 나지막이 물었다.“혹시... 내일 바빠요?”“응?”유건은 생각하다가 답했다.“그렇게 바쁘진 않을 거야.”그는 결혼 준비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으니, 최근 일부러 여유를 두고 있었다.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았다.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럼 내일 날 데리러 올 수 있어요?”그녀는 퇴근 후 산부인과 검진을 예약해 두었다. 만약 유건이 데리러 온다면, 자연스럽게 검진을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좋지.”유건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내가 데리러 갈게.”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여자의 사소한 기쁨이 유건에게도 전해진 것 같아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83화

    [소미야, 이건 양호천 감독님이 직접 부탁하신 거야. 넌 아직도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신경 써야 한다고!]조애린은 소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유건도 다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고 대표님, 처음에 소미를 양호천 감독님의 작품에 넣어주신 것도 대표님이셨잖아요. 이 바닥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 잘 아시죠? 언제나 강자에게 붙고, 약자를 밀려나는 곳이라는 걸요...][지금 대표님이 결혼한 이후로 소미가 기댈 곳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오늘 양호천 감독님의 영화가 개봉하는 자리에, 감독님이 대표님을 초대한 것도 그걸 확인하려는 의도인 거라고요. 만약 대표님이 안 오시면...]조애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럼 소미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거예요.][그만해!]소미가 조애린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조애린은 개의치 않았다.[고 대표님, 소미는 더 이상 대표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런데... 대표님은요? 이 정도 배려도 못 해주시는 건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아마도, 소미가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유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한참을 고민한 후, 다시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 그는 병원에 있는 시연을 데리러 가기로 했지만, 이제는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여보세요.]시연이 전화를 받았다.[벌써 도착한 거예요? 생각보다 빠르네요.]유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여보, 갑자기 일이 생겼어. 오늘은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을 것 같아.”잠시 정적이 흘렀다.시연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조금 가라앉았다.[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일도 중요하니까... 난 퇴근하면 혼자 갈게요.]기환이 함께 있으니, 유건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최대한 일찍 돌아갈게.”그는 영화 시사회에 잠깐 얼굴만 비추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끊을게요.]전화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4화

    만약 검사 결과에 문제가 없다면, 시연은 우주에게 간 이식 얘기를 꺼낼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오늘, 시연은 건강검진 중간 예약 때문에 병원에 왔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자, 지동성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미리와 장소미까지 같이 와 있었다.‘놀랍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시연아.”시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동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장미리도 덩달아 일어났다. 장소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에 예외였지만, 모두의 시선은 똑같았다.간절하고, 어딘가 초조한 눈빛.‘나를 향한 게 아니야. 우주의 간을 향한 거지.’“시연아.”장미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정말... 고마워.”“아니에요.”시연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차갑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소미도 연이어 말했다.“고마워...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돼?”“나랑 한 약속을 기억하면 돼요. 우주 앞에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시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아예 당신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제일 좋고요.” 과거, 장미리가 우주를 납치하고 다치게 했던 기억이 스쳤다.“알겠어, 알겠어!”장미리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잘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럼 됐어요.”시연은 안쪽 진료실을 가리켰다.“그럼 장 여사님, 저는 서류 작성하러 들어갈게요. 그쪽 식구들,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그냥 먼저 가보세요.”말을 끝내고, 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진료실로 향했다.“시연아, 나도 같이 갈게!”지동성이 급히 따라붙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시연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유건이었다.‘또 이 사람이야.’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용히 무음으로 돌려버렸고, 받지도, 답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말이다.“어떻게 됐어요?”나오자마자, 장미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3화

    유건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눈빛에는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너, 꽃... 안 좋아해?”“참...” 시연은 두어 번 짧게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그러다 불쑥 말했다. “오늘, 아버지를 만났어요.”유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묵직한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그리고 그분한테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간 이식 얘기를 전하겠다고.”시연은 문득 웃었다. 쓸쓸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그날 당신이 했던 말들, 솔직히 듣기 끔찍했지만... 맞는 부분도 있었어요.”“시연아, 나...” 유건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끝까지 들어줘요.” 시연은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웃었다.“하지만 그분, 나랑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요.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당신도 입조심해요.”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마치 ‘이제 나가라’는 듯한 자세였다.“자, 이제 내가 할 말은 끝났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요. 이제 당신의 목적도 이뤘으니 이만 가봐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밖에서 내리는 눈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끝이야. 나도, 당신도.’그때, 유건이 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얇은 입술에, 가볍고도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내 목적이 뭔데?”“됐어요, 그만해요.” 시연은 피곤한 듯 웃음을 거두었다.“더는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빨리 가서 장소미한테 좋은 소식 전해요. 기뻐하겠죠.”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시연에게 성큼 다가섰다.“내 목적이 뭐냐고 묻잖아. 대답해.”‘뭐야, 아직 부족해?’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내가 못 알아듣게 말했나?’“그...” “입 다물어.”유건은 거칠게 시연의 턱을 움켜잡았다. 남자의 숨결이 거칠고 짙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2화

    “고마워요.”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좀 볼게.” 지동성이 메뉴를 받아 들고, 시연의 취향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많이도 골랐다.“이 정도면 될까?” “충분해요.” “그래, 부족하면 더 시키자.”딸이 먼저 식사를 제안한 건 너무 뜻밖이라, 지동성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이런저런 질문이 이어졌다.“요즘 어때? 아이는 괜찮고?”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대충 답했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 시작이야...’ 지동성의 끊임없는 질문에 시연은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간 이식 문제는, 우주한테 말해볼게요.”지동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시연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알아들었을 거야. 그것도 충분히.’ 그리고 이어갔다. “하지만, 저한테 약속 하나를 해줬으면 좋겠어요.”“시연아...” 지동성은 다급히 불렀지만,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눈으로 지동성을 바라봤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가족들도, 입 다물었으면 좋겠어요.”“우주는 자기 아빠도, 엄마처럼 이미 세상에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요.”말하는 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하지만, 그녀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그냥 자주 찾아오는 아저씨라고만 말할 거예요.”“시연아, 난...” 지동성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시연이 단호히 끊었다.“제발...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앞으로 절대, 우주를 아버지로서 대하려 하지 마세요.”“우주는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불러본 적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우리 우주... 이제 와서 무너뜨릴 수 없어. 절대.’시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약속할 수 있어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1화

    남자는 키가 크고,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유건과 체격이 비슷했던 덕분에, 시연은 그가 꾸준히 운동해 온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남자는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깊었고, 특히 크고 선명한 유럽풍 눈매가 눈길을 끌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푸른빛이 인상적이었다.피부도 매끈했다. 아마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덕분일까, 눈에 띄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남자가 중년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시연이 잠시 귀를 기울이니,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불어였다. ‘불어...? 여기서?’ 시연은 살짝 긴장했지만, 곧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봉주르.” 시연은 조심스럽게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아.” 남자는 잠깐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불어 할 줄 아세요?”“조금이요.” 시연은 겸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걸로 먹고 살았던 적도 있지만...’“정말 다행이네요.” 남자는 위쪽 메뉴판을 가리키며 서툴게 손짓했다. “저기... 저걸로...”“네.” 시연은 금세 알아차리고, 미소를 띤 채 직원에게 돌아섰다.“이분은 레모네이드, 얼음은 조금만요.”“네, 알겠습니다.” 직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라면 간신히 알아듣겠지만, 불어는 아예 포기 상태였으니까.“고객님, 여기 카드로 결제하시면 됩니다.”‘카드...? 어쩌지?’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제가 도와드릴게요.”‘좋은 일은 끝까지 해야지.’시연은 자기 카드로 대신 결제를 진행했다.‘다행이다. 그냥 레모네이드 하나라서. 비쌌으면... 내 지갑부터 걱정했을지도 몰라.’“저는 밀크티 하나요. 같이 결제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0화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19화

    “놓아달라고?” 유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긴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눈빛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게, 널 못 놔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또 그 말이지. 좋아한다, 좋아해.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시연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해.’ 머리는 온통 유건이 감아준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겉으로는 따뜻해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약간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 당신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응, 알아.” 유건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아직 기억해.” “그럼 지금 이건 다 뭐예요?” 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요?”두 사람은 명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동안의 긴 냉전은 이미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로 말은 안 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던 거지.’ ‘이젠 할아버지조차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나도 알아.” 시연은 말끝을 질끈 씹듯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의미 없다고. 세상에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요...” 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정확히 그렇게 했었다. ‘참 잘 기억하네. 근데 내가 했던 행동들은 왜 기억 안 하지...?’ 유건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뭐라고요...?” 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말 바꾸는 거야?’ ‘이 인간, 진짜 뻔뻔하네.’ “우린 말 안 통해요. 난 당신처럼 무책임한 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18화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주는 과일 접시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누나, 이 귤, 진짜 달아.” “그래?”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우주는 먹어봤어?” “응.”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웃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저씨...’ 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아저씨’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동성이었다. “그 사람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널 보러 왔었어?” “응.” 우주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왔어.” ‘어제...’ ‘퇴원한 바로 다음 날?’ ‘그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주를 보러 온 거야...?’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또 쇼일까?’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누나.” “응?” 시연이 정신을 가다듬고 우주를 바라보자, 우주는 조금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진 거야?” ‘뭐...?’ 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우주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저씨가 그랬어.” 우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날 보러 못 온 건, 아팠기 때문이라고.” ‘왜 그런 말을 우주한테 했지...?’ 시연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저씨가 또 뭐라고 했는데? 무슨 병이라고 했어?” “아... 뭐라고 했냐면...” 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말한 거야? 설마...’ “뭐라고 했는데?” 우주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감기래.” “감기...?” 그 말에 시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그 정도로만 말했구나...’ ‘정말... 그 사람, 아직도 이중적인 사람이네.’ “누나.” 우주가 다시 입을 열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17화

    해가 채 뜨기도 전, 시연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겨우 떠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시연은 진아의 통통한 볼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 우주랑 아침 먹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 너는 더 자.” “응...” 진아는 듣자마자 바로 순하게 눈을 감았다. 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별산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문을 연 건 최예민이었다. “우주 도련님은 지금 세수 중이에요.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누나 온다고 혼자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더라고요.” 최예민은 환하게 웃으며 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아침은 다 준비됐고,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아이고,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조금 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이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나!” 우주가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조심해!”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만둣국 한 그릇을 우주 앞에 놓아줬다. 조금 전 살짝 식혀둔 국이었다. 그래도 시연은 당부했다. “천천히 먹어. 국물 뜨거우니까.” “응! 누나 걱정하지 마. 나 조심할게!” 우주는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나도 같이 먹자!” “그럴까?” 시연도 조심히 젓가락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 시각, 시연의 아파트. 띠링- 초인종 소리에 진아는 부스스 일어나 문으로 갔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문을 열었는데, 눈이 순간 커졌다. “고, 고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진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머리도 제대로 못 가다듬은 상태였다.유건은 짧게 진아를 본 후, 바로 시선을 돌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시연이는 일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16화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