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선생, 이렇게 좋은 날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맞아요! 우리 지 선생님, 명색이 사모님이신데 한턱내셔야죠!”“한턱이 뭐예요! 파티해요, 파티!” “좋아! 좋아!”“...”사무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축하의 의미를 담은 장난 섞인 말들이 오가며 분위기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양석현 교수가 슬쩍 시연을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자자, 후배인 시연이가 정식으로 입사했으니, 선생님이자 선배인 우리가 환영회를 열어줘야 하지 않겠어?” “아... 과 모임이라는 게 다 그렇지.”“예산은 정해져 있고, 장소도 늘 그 나물에 그 밥...”“교수님 말씀대로면 또 그 식당이겠지...” “병원 근처에 있는 몇 군데서 맴돌 뿐인데...”“차라리 그냥 내가 쏠걸 그랬나...”“그래도 이번엔 사모님 덕 좀 보나 했는데...”“...”묘하게 아쉬운 눈빛들이 여기저기서 오갔다.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이 오가던 가운데, 누군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슬쩍 시연에게 다가왔다.“지 선생님, 혹시 따로 생각해 두신 데 있으세요?”“저요...?”시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정말 돈도 없는데... 차라리 과에서 하는 게 나을 거야.’“그럼... 제가 따로 커피라도...”그때, 문이 열리며, 날렵하고 단정한 실루엣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정장에 단정한 머리, 은은한 미소까지.“분위기 좋은데요?”모든 시선이 일제히 유건을 향했다. 사무실 안은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다.‘저 사람이... 왜... 왔지?’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 앞을 막아섰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나 곧 끝나니까, 나가 있어요.”“이미 들어왔는데, 나가긴 좀 그렇잖아, 응?” 그는 미소를 지으며 시연이 손을 가볍게 잡았고, 곧장 열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깍지 꼈다. ‘제발,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러지 마.’시연은 당황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유건
외과 사무실을 나와 병원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시연의 얼굴엔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세웠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터였다. 시연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는 내가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왜 아무 상의도 없이 당신이 정했어요?”“어...?” 유건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내가 예약한 데가 마음에 안들어? 당신 셀레스트 음식 좋아하잖아.”“좋아하긴 하는데...” 시연의 눈썹이 확 짧아졌다. “당신, 우리 과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의사 간호사 포함하면 30명은 넘는다고요!”“그래서?” 유건은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라니...’ 시연은 숨을 꾹 참았다.‘대충 계산해도 거의 몇천만 원이야. 그걸 아무 말 없이 덜컥?’“비싸잖아요,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요?”“그게 비싸?” 유건은 미간을 찌푸렸고,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우리가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그녀도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그게 싫은 거야.’그녀가 진심으로 표정을 굳히자, 유건은 눈치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당신한테 먼저 물어볼게. 미안해, 응?”‘다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긴 한 걸까?’시연은 속으로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졌다. 당일, 당직 간호사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전원 참석 예정.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하지만 시연만큼은 평소처럼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래도... 다들 내가 임신 중인 걸 챙겨주는 덕에, 차트 정리는 내 몫이 된 거야.’ “지 선생, 그만하고 옷 갈아입
사무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여자의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이를 악물고 소미의 팔을 잡았다.“고유건 씨는 지금 여기 없어.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직접 전화해.”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싫어! 난 안 가!” 소미는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유건 씨! 난 유건 씨 봐야 해!!”“없다니까!!!”시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미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유건 씨!!!”복도 끝. 병동 입구.막 들어서던 유건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소미의 등장에 당황한 그는, 곧장 시연을 찾았다.시연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 상황, 최악이야.’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두의 시선은 전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숨죽인 채,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사람 중 몇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진짜 소문대로였네. 고유건 대표님과 장소미 씨...”“둘 사이, 예전부터 돌던 스캔들...”“끝나지 않은 거였어... 지금도...”“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고 대표님의 아내인... 지 선생님도 있는데...?”“...”소미는 유건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시연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 장면을 보는데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시연에게 말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었다.“여보...” 그는 한 발 내디뎠지만, 소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건 씨, 왜 이틀째 병실에 안 온 거예요? 나 치료도 안 받고 있었어요.”“소미 씨.” 유건은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많았어.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소미 씨 상태는 계속 보고 있었어.”“정말요?” 소미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지금은 시간 있잖아요?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시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주를 생각하면 유건의 의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얇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교수님, 그럼 어서 다 함께 내려가시죠.” “그... 그래.” “좋다!”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나도. 저녁 먹으려고 하루 종일 굶었단 말이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물 앞에는 차가 여섯 대쯤 대기 중이었고, 일행은 그 차들을 나눠 타고 ‘셀레스트’로 향했다. ...일반 뷔페의 북적임과는 달리, ‘셀레스트’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손님들은 각자 음식을 고른 후, 식사 중에도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지한이 예약해 둔 자리는 창가 쪽 세 테이블을 붙여놓은 넓은 자리였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산물, 육류, 디저트...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플레이팅은 보기만 해도 식욕을 자극했다. “와... 이래서 비싼 거구나.” 주하은이 시연과 함께 음식 코너를 돌며 감탄했다. “여기 음료는 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네.” 그리고 시연을 슬쩍 보며 웃는다. “고 대표님, 여전히 너한테는 돈 아끼는 법이 없네?” ‘돈을 아끼지 않는다...’시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예전에 시연은, 바로 그 ‘아낌없이 주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자리로 돌아오자, 양석현이 컵을 들었다. “오늘은 지 선생이 쏜다니까... 우리 과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면서, 다 같이 건배하자! 지 선생, 고마워!” “지 선생, 축하해!” “지 선생님, 환영합니다!” “건배!” “...”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었다. 그 컵은 아까 하은이 가져다준 거였다. 시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뗐다. “선생님들, 저는 이제
하은이 새우 완자를 시연의 그릇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시연은 한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평소의 시연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시연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봤다. 멍한 눈, 어딘가 초점 없는 시선. “왜?” “너, 설마 취한 거야?”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뭐야, 딱 취한 모습이잖아.’ 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떨리는 손끝이 컵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연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없어. 헤헤.” “배는?” 하은은 조심스레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시연이 배에는 고씨 가문의 후계자가 계시니까...’“배 아프진 않아?” “배?” 시연은 곧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술 끝엔 미소까지 걸렸다. “여기 내 아기가 있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하은과 현진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룸 안이 웅성거리며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고 대표님, 어서 오세요!” 양석현 교수가 일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내랑 함께하는 자리이니, 꼭 오려고 했습니다. 양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시연이는 저기 있습니다.” 유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바로 시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은과 현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앞의 접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멍하고, 또 순진했다. “무슨 일 있어?” 유건의 목소
샤부샤부와 시연이 좋아하는 채소들까지. 유건은 직접 음식 코너를 몇 번이나 오가며 이것저것 챙겼다. 직원들이 다가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내 아내가 부탁한 거니까.” 남의 손을 빌릴 수 없었다.시연이 원한 것이니, 유건이 직접 해야만 했다. 가스 불을 켜고,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유건은 채소며 고기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넣기 시작했다. 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저 고기... 다 익은 거 같은데... 언제 주려나?’ ‘고기야 오래 익힐 필요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유건은 웃음을 지으며, 익은 고기를 시연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녀 취향에 맞춰 소스까지 만들어주고 나서야 말했다. “됐어. 이제 먹어봐.”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고,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가리켰다. “더.” “알겠어.” “그리고... 소고기 완자도!” “그래, 그것도.” 주변 동료들은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 대표가 시연에게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다. 아까 하은에게 냉정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먹다 말고, 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왜 일어나? 뭐 필요한 거 있어?”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화장실.” 시연은 천진하게 웃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려 했다.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유건은 그녀를 반쯤 안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같이 가자.” “고 대표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화장실 안쪽은 남자분이 들어가기 힘들 테
“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