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이 새우 완자를 시연의 그릇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시연은 한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평소의 시연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시연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봤다. 멍한 눈, 어딘가 초점 없는 시선. “왜?” “너, 설마 취한 거야?”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뭐야, 딱 취한 모습이잖아.’ 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떨리는 손끝이 컵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연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없어. 헤헤.” “배는?” 하은은 조심스레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시연이 배에는 고씨 가문의 후계자가 계시니까...’“배 아프진 않아?” “배?” 시연은 곧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술 끝엔 미소까지 걸렸다. “여기 내 아기가 있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하은과 현진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룸 안이 웅성거리며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고 대표님, 어서 오세요!” 양석현 교수가 일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내랑 함께하는 자리이니, 꼭 오려고 했습니다. 양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시연이는 저기 있습니다.” 유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바로 시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은과 현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앞의 접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멍하고, 또 순진했다. “무슨 일 있어?” 유건의 목소
샤부샤부와 시연이 좋아하는 채소들까지. 유건은 직접 음식 코너를 몇 번이나 오가며 이것저것 챙겼다. 직원들이 다가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내 아내가 부탁한 거니까.” 남의 손을 빌릴 수 없었다.시연이 원한 것이니, 유건이 직접 해야만 했다. 가스 불을 켜고,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유건은 채소며 고기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넣기 시작했다. 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저 고기... 다 익은 거 같은데... 언제 주려나?’ ‘고기야 오래 익힐 필요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유건은 웃음을 지으며, 익은 고기를 시연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녀 취향에 맞춰 소스까지 만들어주고 나서야 말했다. “됐어. 이제 먹어봐.”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고,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가리켰다. “더.” “알겠어.” “그리고... 소고기 완자도!” “그래, 그것도.” 주변 동료들은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 대표가 시연에게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다. 아까 하은에게 냉정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먹다 말고, 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왜 일어나? 뭐 필요한 거 있어?”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화장실.” 시연은 천진하게 웃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려 했다.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유건은 그녀를 반쯤 안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같이 가자.” “고 대표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화장실 안쪽은 남자분이 들어가기 힘들 테
“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장소미가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후, 유건과 시연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누가 됐든,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낼 거야.’유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의 싸늘한 기운에 방 안의 공기조차 무거워졌다.“네, 형님.”지한은 짧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말보다 표정이 먼저 충성심을 증명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유건은 아직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유건은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어때? 아직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 언뜻 보기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모님이 아침부터 생선 머리 탕을 끓여주셨어. 당신 어제 술을 조금 마셨잖아. 속 풀리게 한 그릇 먹어.” 이때 왕성애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에 직접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꼭 속 풀어드리라고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하지만 그 말은 왕성애를 향한 것인지, 유건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뜨는 사이, 유건은 조용히 상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여보.” 그는 다정하게 불렀다. “선물이야.” 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유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입사 축하 선물이야. 시계야.” “필요 없어요.” 짧고 단호했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거야?”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계... 너무 비쌀 것 같아요. 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데,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유건은 낮게 웃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고급스러운 여성용 파텍 필립 시계. 그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
“뭐라고...?” 장미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장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동성!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당신이랑 몇 년을 살았는데... 우린 부부잖아! 집안 돈은 우리 공동재산이라고!” 지동성은 코웃음을 쳤다. “공동재산? 웃기고 있네.”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 나한테 시집올 때 빈손이었잖아. 혼수? 그런 건 하나도 없이 나한테 온 거 아니었나?” 장미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때 난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 근데 그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꺼낸다고?’그녀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난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소미는? 소미는 내 딸이야! 내가 낳은 내 딸이라고!” 지동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미만 아니었으면...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 미쳤네 진짜...” 장미리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그렇게 깔보며 살아온 거야?!” 지동성은 귀찮다는 듯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됐고, 그만 좀 해. 이 나이에 이런 말싸움은 하고 싶지도 않거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장미리는 그를 붙잡았다.“설마... 시연이한테 돈이랑 집을 준 거야? 진짜냐고! 나 몰래 챙겨준 거 맞지?” 지동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몰래라니? 시연이는 내 딸이고, 우주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자식한테 주겠다는데, 누구 눈치를 봐?!” “뭐... 라고...?” 장미리는 무너지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소미 말이 맞았어. 이 인간, 진짜로 지시연한테 다 퍼줬어.’“그 돈은 내 거야! 소미의 미래를 위해 모은 거라고!!” 장미리는 소리쳤다. “당장 가서 시연이한테 준 거 다 받아와! 그 집도, 그 돈도! 다 내놓
“퇴근하면 연락해 줘. 내가 먼저 끝나면, 연락할게.” 유건의 말에 시연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빨리 가.” “네...” 시연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회사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아. 당신, 그 여자가 있는 화상 외과부터 갈 거잖아.’“지시연!!” 이때, 병동 입구가 벌컥 열리며,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복도 위로 하이힐 소리가 쾅쾅 울렸고, 장미리가 눈을 부릅뜬 채, 분노에 찬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로?’“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예의상 물었다. 하지만 장미리는 비웃듯 코를 훌쩍였다. “모르는 척 그만해.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잖아?” 그리고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은 이미 폭주 상태였다. “우리 남편이 너한테 사 준 집! 그리고 그 돈! 그거 다 내 거야! 소미 거라고! 당장 내놔!!” ‘아...’ 시연은 그제야 이해했다. ‘결국... 그 얘기 하러 온 거구나.’바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서요?” 시연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제 겁니다.” “뭐?” 장미리는 눈을 부릅뜨고 유건 쪽을 향했다. “고 대표님! 보셨죠?! 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고 대표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제가 어떻게 참아요?!” 유건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미리는 목소리를 더 높이며 외쳤다. “너, 이제 고씨 가문 사모님이니까, 그깟 돈은 필요 없잖아! 그건 우리 소미 거야! 내놓으라고!!” 하지만 시연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 태도에 분노가 폭발한 장미리는 거칠게 손을 들며 시연에게 다가갔다. “말이 없네?!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거야?! 좋아, 내가 직접...” “그만하세요!!” 유건이 한 손으로 장미리의 손목을 낚아챘다.순식간에 장미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장 여사님..
장미리는 병동 입구를 등진 채 고함치고 있었다. 뒤에서 지동성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유건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면죄부라도 받은 듯 기세등등한 얼굴로 시연을 몰아붙였다. “들었지? 고 대표님도 돌려주라고 하시잖아?”“네 남편도 네 편을 안 들잖아! 창피한 줄 알아야지!” 말끝을 높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분, 다 알고 계시죠? 우리 소미랑 고 대표님, G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커플이었다고요!” “근데, 이 지시연이란 여자가 끼어들어서 둘을 갈라놨어요! 남의 사랑 뺏고, 이제 와선 우리 재산까지...” 장미리는 소리를 지르다 시연을 향해 돌았고,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망가뜨려?” ‘세상을 거꾸로 산다고 해도, 이 정도로 뻔뻔할 수 있을까?’ 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손바닥엔 이미 손톱자국이 파였다. 심지어 숨이 턱턱 막혔다. “여보?” 유건이 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 숨 가빠 보여.” “아니요...” 시연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유건의 저음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지 사장님.” 그리고 시선이 지동성에게로 향했다. “사람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십니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하아...” 지동성은 숨을 내쉬며 다가와 장미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만 가자.” “어머? 당신 여기 왜 있어요?” 장미리는 인제야 남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동성은 비웃듯 말했다. “내가 안 왔으면, 당신 병원 하나 날려 먹을 뻔했잖아.” “안 가요! 난 오늘 끝까지 말할 거예요!” 장미리는 버티며 외쳤다. “뭐가 창피해서 그래요? 창피한 건 저 여자죠! 남의 남자를 뺏고, 집을 뺏고, 돈까지 가져갔으니까요...!!” 병동 복도엔 다시 수군거림이 피어올랐다. “헐... 진짜야?” “지 선생님이 지 사장님이랑 그런 사이였나 봐...” “이런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