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장소미가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후, 유건과 시연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누가 됐든,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낼 거야.’유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의 싸늘한 기운에 방 안의 공기조차 무거워졌다.“네, 형님.”지한은 짧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말보다 표정이 먼저 충성심을 증명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유건은 아직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유건은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어때? 아직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 언뜻 보기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모님이 아침부터 생선 머리 탕을 끓여주셨어. 당신 어제 술을 조금 마셨잖아. 속 풀리게 한 그릇 먹어.” 이때 왕성애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에 직접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꼭 속 풀어드리라고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하지만 그 말은 왕성애를 향한 것인지, 유건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뜨는 사이, 유건은 조용히 상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여보.” 그는 다정하게 불렀다. “선물이야.” 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유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입사 축하 선물이야. 시계야.” “필요 없어요.” 짧고 단호했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거야?”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계... 너무 비쌀 것 같아요. 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데,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유건은 낮게 웃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고급스러운 여성용 파텍 필립 시계. 그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
“뭐라고...?” 장미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장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동성!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당신이랑 몇 년을 살았는데... 우린 부부잖아! 집안 돈은 우리 공동재산이라고!” 지동성은 코웃음을 쳤다. “공동재산? 웃기고 있네.”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 나한테 시집올 때 빈손이었잖아. 혼수? 그런 건 하나도 없이 나한테 온 거 아니었나?” 장미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때 난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 근데 그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꺼낸다고?’그녀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난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소미는? 소미는 내 딸이야! 내가 낳은 내 딸이라고!” 지동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미만 아니었으면...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 미쳤네 진짜...” 장미리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그렇게 깔보며 살아온 거야?!” 지동성은 귀찮다는 듯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됐고, 그만 좀 해. 이 나이에 이런 말싸움은 하고 싶지도 않거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장미리는 그를 붙잡았다.“설마... 시연이한테 돈이랑 집을 준 거야? 진짜냐고! 나 몰래 챙겨준 거 맞지?” 지동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몰래라니? 시연이는 내 딸이고, 우주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자식한테 주겠다는데, 누구 눈치를 봐?!” “뭐... 라고...?” 장미리는 무너지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소미 말이 맞았어. 이 인간, 진짜로 지시연한테 다 퍼줬어.’“그 돈은 내 거야! 소미의 미래를 위해 모은 거라고!!” 장미리는 소리쳤다. “당장 가서 시연이한테 준 거 다 받아와! 그 집도, 그 돈도! 다 내놓
“퇴근하면 연락해 줘. 내가 먼저 끝나면, 연락할게.” 유건의 말에 시연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빨리 가.” “네...” 시연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회사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아. 당신, 그 여자가 있는 화상 외과부터 갈 거잖아.’“지시연!!” 이때, 병동 입구가 벌컥 열리며,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복도 위로 하이힐 소리가 쾅쾅 울렸고, 장미리가 눈을 부릅뜬 채, 분노에 찬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로?’“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예의상 물었다. 하지만 장미리는 비웃듯 코를 훌쩍였다. “모르는 척 그만해.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잖아?” 그리고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은 이미 폭주 상태였다. “우리 남편이 너한테 사 준 집! 그리고 그 돈! 그거 다 내 거야! 소미 거라고! 당장 내놔!!” ‘아...’ 시연은 그제야 이해했다. ‘결국... 그 얘기 하러 온 거구나.’바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서요?” 시연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제 겁니다.” “뭐?” 장미리는 눈을 부릅뜨고 유건 쪽을 향했다. “고 대표님! 보셨죠?! 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고 대표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제가 어떻게 참아요?!” 유건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미리는 목소리를 더 높이며 외쳤다. “너, 이제 고씨 가문 사모님이니까, 그깟 돈은 필요 없잖아! 그건 우리 소미 거야! 내놓으라고!!” 하지만 시연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 태도에 분노가 폭발한 장미리는 거칠게 손을 들며 시연에게 다가갔다. “말이 없네?! 입술이 달라붙기라도 한 거야?! 좋아, 내가 직접...” “그만하세요!!” 유건이 한 손으로 장미리의 손목을 낚아챘다.순식간에 장미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장 여사님..
장미리는 병동 입구를 등진 채 고함치고 있었다. 뒤에서 지동성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유건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면죄부라도 받은 듯 기세등등한 얼굴로 시연을 몰아붙였다. “들었지? 고 대표님도 돌려주라고 하시잖아?”“네 남편도 네 편을 안 들잖아! 창피한 줄 알아야지!” 말끝을 높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분, 다 알고 계시죠? 우리 소미랑 고 대표님, G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커플이었다고요!” “근데, 이 지시연이란 여자가 끼어들어서 둘을 갈라놨어요! 남의 사랑 뺏고, 이제 와선 우리 재산까지...” 장미리는 소리를 지르다 시연을 향해 돌았고,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망가뜨려?” ‘세상을 거꾸로 산다고 해도, 이 정도로 뻔뻔할 수 있을까?’ 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손바닥엔 이미 손톱자국이 파였다. 심지어 숨이 턱턱 막혔다. “여보?” 유건이 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 숨 가빠 보여.” “아니요...” 시연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유건의 저음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지 사장님.” 그리고 시선이 지동성에게로 향했다. “사람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십니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하아...” 지동성은 숨을 내쉬며 다가와 장미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만 가자.” “어머? 당신 여기 왜 있어요?” 장미리는 인제야 남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동성은 비웃듯 말했다. “내가 안 왔으면, 당신 병원 하나 날려 먹을 뻔했잖아.” “안 가요! 난 오늘 끝까지 말할 거예요!” 장미리는 버티며 외쳤다. “뭐가 창피해서 그래요? 창피한 건 저 여자죠! 남의 남자를 뺏고, 집을 뺏고, 돈까지 가져갔으니까요...!!” 병동 복도엔 다시 수군거림이 피어올랐다. “헐... 진짜야?” “지 선생님이 지 사장님이랑 그런 사이였나 봐...” “이런
막 돌아서려던 그 순간, 지동성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시연아!” 간절하고, 죄책감 어린, 오래 묻어둔 무게가 얹힌 외침.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전부 다 아빠 잘못이야.” ‘아빠...?’ 그 한마디에 시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몸이 굳어버린 듯 얼어붙었고,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그 단어를... 지금 당신이 꺼낼 자격이나 있어?’눈물이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지동성!!” 장미리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남편을 붙잡았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얼른 나가자니까!!” “놔.” 지동성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아까 가자고 할 때 내 말 듣지 그랬어? 지금 와서 수습하는 건 너무 늦었어, 장미리.’ 그는 돌아서서 유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고 대표님.” 그러고는 또렷하고 무겁게 말했다. “지시연은 제 딸입니다. 제 아내, 그러니까 제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 친딸입니다.” 정적-그 순간, 복도 전체가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잠시 후, 속삭이는 듯하지만 멈추지 않는 가십이 퍼지기 시작했다. “딸이라고?”“그럼... 불륜이 아니고...”“진짜 가족이었어?”“헐... 그럼 저 여자, 지 선생님의 새어머니였던 거야?” “그럼 딸한테 재산 준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새어머니가 와서 따질 일은 아니잖아.” “아니, 진짜 드라마야? 세상에...” 순식간에 여론은 반전되었다. 그제야 장미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당신... 우리 약속했잖아요. 고 대표님한테는 말 안 하기로...” “지금... 왜...? 왜 고 대표님 앞에서...?”‘이제... 우리 소미는... 어떡하지?!’장미리는 유건을 힐끔거리며 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지동성의 눈은 더 이상 장미리를 보지 않았다. 유건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눈빛이 흔
“엄마!” 화상 외과 병동의 한 병실 안, 소미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엄마, 내가 뭐라고 했어요?”“제발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지시연한테 가서 그런 식으로 굴었어요?” 장미리는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떨궜다. “고유건이 거기 있는 줄은 몰랐지... 네 아빠도... 그렇게 나올 줄은...”“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냐 이제... 어떡하냐고?” 소미는 아찔한 기분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나는 지금도 충분히 무너졌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터지다니...’‘전신에 화상도 입었는데, 이젠 유건 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그녀는 유건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설마, 나도 우리 엄마랑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시연을 괴롭히는 데 나도 한몫한 거라고... 그렇게 보겠지...’ ‘기왕 피할 수는 없다면...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한편, 산부인과 교수는 양석현의 요청으로 직접 병실에 들렀다. 시연의 산소포화도 수치를 확인한 뒤, 유건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감정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과호흡 증상까지 왔네요.” 그러고는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임신 중기 여성이 이런 상태가 되도록 두다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뭐 한 겁니까?” 유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어. 모든 게, 내 책임이니까.’ “산소마스크 착용하고, 황체호르몬 주사 맞히세요. 조금만 안정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단,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아이도 위험해요.” “네... 죄송합니다.” 유건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산부인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고, 간호사가 들어와 조심스레 주사를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산소를 마시며,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그 곁엔 유건이 조용히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눈 떴네. 어때, 좀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놓아달라고?” 유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긴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눈빛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게, 널 못 놔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또 그 말이지. 좋아한다, 좋아해.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시연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해.’ 머리는 온통 유건이 감아준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겉으로는 따뜻해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약간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 당신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응, 알아.” 유건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아직 기억해.” “그럼 지금 이건 다 뭐예요?” 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요?”두 사람은 명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동안의 긴 냉전은 이미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로 말은 안 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던 거지.’ ‘이젠 할아버지조차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나도 알아.” 시연은 말끝을 질끈 씹듯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의미 없다고. 세상에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요...” 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정확히 그렇게 했었다. ‘참 잘 기억하네. 근데 내가 했던 행동들은 왜 기억 안 하지...?’ 유건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뭐라고요...?” 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말 바꾸는 거야?’ ‘이 인간, 진짜 뻔뻔하네.’ “우린 말 안 통해요. 난 당신처럼 무책임한 사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주는 과일 접시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누나, 이 귤, 진짜 달아.” “그래?”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우주는 먹어봤어?” “응.”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웃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저씨...’ 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아저씨’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동성이었다. “그 사람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널 보러 왔었어?” “응.” 우주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왔어.” ‘어제...’ ‘퇴원한 바로 다음 날?’ ‘그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주를 보러 온 거야...?’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또 쇼일까?’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누나.” “응?” 시연이 정신을 가다듬고 우주를 바라보자, 우주는 조금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진 거야?” ‘뭐...?’ 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우주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저씨가 그랬어.” 우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날 보러 못 온 건, 아팠기 때문이라고.” ‘왜 그런 말을 우주한테 했지...?’ 시연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저씨가 또 뭐라고 했는데? 무슨 병이라고 했어?” “아... 뭐라고 했냐면...” 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말한 거야? 설마...’ “뭐라고 했는데?” 우주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감기래.” “감기...?” 그 말에 시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그 정도로만 말했구나...’ ‘정말... 그 사람, 아직도 이중적인 사람이네.’ “누나.” 우주가 다시 입을 열었
해가 채 뜨기도 전, 시연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겨우 떠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시연은 진아의 통통한 볼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 우주랑 아침 먹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 너는 더 자.” “응...” 진아는 듣자마자 바로 순하게 눈을 감았다. 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별산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문을 연 건 최예민이었다. “우주 도련님은 지금 세수 중이에요.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누나 온다고 혼자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더라고요.” 최예민은 환하게 웃으며 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아침은 다 준비됐고,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아이고,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조금 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이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나!” 우주가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조심해!”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만둣국 한 그릇을 우주 앞에 놓아줬다. 조금 전 살짝 식혀둔 국이었다. 그래도 시연은 당부했다. “천천히 먹어. 국물 뜨거우니까.” “응! 누나 걱정하지 마. 나 조심할게!” 우주는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나도 같이 먹자!” “그럴까?” 시연도 조심히 젓가락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 시각, 시연의 아파트. 띠링- 초인종 소리에 진아는 부스스 일어나 문으로 갔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문을 열었는데, 눈이 순간 커졌다. “고, 고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진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머리도 제대로 못 가다듬은 상태였다.유건은 짧게 진아를 본 후, 바로 시선을 돌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시연이는 일어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