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식중독에 걸렸대요...” 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유건은 동생 우주를 모를 테니 설명하듯 덧붙였다. “우주는 제 남동생이에요!” 유건은 순간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시연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지시연에게도 가족이 있었구나.’ “내가 같이 갈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시연이 거절하려던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서 차를 잡는 건 불가능해! 같이 가!” 유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 동생이 걱정되지 않아?” “아, 네!” 다급한 상황에서 결국 시연은 유건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차에 탔다.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요.” 유건은 그녀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데, 이럴 때 내가 널 안 도우면 나는 사람도 아니게?” “감사해요.” 시연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 우주는 요양병원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시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은 사람이 많아 혼잡한 상태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지우주 환자 보호자예요!” 의사는 시연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빨리 위세척해야 하는데 환자가 자폐증이 있어서 소통이 어려워 협조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마취 후 삽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서명하세요!” 시연은 그 말을 듣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록 그녀도 의사였지만, 막상 우주의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로서의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시연!” 유건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부축했다. 그는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그녀를 반쯤 안은 채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건은 이미 의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 서명하면 되죠?” 의사는 유건을 보며 물었다
입술 위의 부드러운 감촉에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유건은 서둘러 시연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이 여자를 볼 때마다 자꾸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게 이번이 몇 번째지? 아이고, 모르겠다!!’ “흠.” 그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어색함을 감추려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안 피곤해도,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피곤하지 않겠어?” “네...”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유건의 시선을 피했다. 유건은 그녀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자라.” “그래요.” 하지만 시연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두 번째였어!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한 게!!’ ‘지난번엔 술에 취해서 한 실수였다지만, 이번에는 왜?!’ 시연은 손으로 입술을 만지며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장소미의 남자 친구에게 키스를 받을 수 있지?!’ ‘고유건의 입술이 얼마나 많이 장소미와 닿았을지 모를 일인데!!’ 결국 시연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잠깐만, 근처 식당에서 아침 먹고 가.” 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장소미였다. 소미는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로 유건과 시연 두 사람을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미의 원망은 시연을 향했고, 슬픔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유건 씨... 지 선생님과 둘이서...?”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쳤다. “저 먼저 갈게요.” 시연이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유건이 시연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미는 참지 못하고 감정을 시연에게 폭발시켰다. 시연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 선생님!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가요! 설명도 없이 어디로 가려는 거
‘헤어지자고?’유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장소미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도 없는데...’하지만 자신이 한때 소미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만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순간, 소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안 돼요!! 유건 씨, 저는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소미 씨, 대답할 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유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덮었다. “사실은, 소미 씨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은 지치기 마련이다. 유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미의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충분히 하고 대답해. 만약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약속했던 지원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는 결국 소미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일종의 보상이라도 하기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유건은 자리를 떠났다. 소미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갑자기 손을 들어 탁자를 뒤엎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외쳤다. “지시연! 내가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것 같아?!!” ... 유건은 회의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 두 개에 서명하고 그것을 주지한에게 건넸다. “지한아, Four Hours에 연락 좀 해줘.” 지한은 잠시 멈칫했다가, 유건이 미소 지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연에게 줄 거야.” 유건과 시연이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한 일은 지한도 알고 있었다. Four Hours는 고급 맞춤 의류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건이 입는 모든 옷은 이곳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이제 시연의 옷도 함께 맞추려는 것이었다. 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시연 씨에게 느끼는 형님의 감정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네.’ “알겠어요, 형님.” ... 병원에서 시연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자꾸만 유건과 나눴던 그 키
유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상훈은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손자를 응시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유건은 순간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세요? 별 말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어디 갔는지 아세요?” “나한테 묻냐?” 고상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내가 어디 갔는지 네가 몰라? 그럼 너 스스로 반성해야지.” “저더러 반성하라고요?”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모를 리가 없죠.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저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제가 그때 바빠서 못 받았을 뿐이거든요.” 고상훈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유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건은 왠지 불편해졌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고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널 보면 딱 한 가지 생각만 나. 말만 앞서는 녀석.” 유건은 그 순간 고상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상훈에게 완전히 말로 당한 유건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전화 안 받으면 두고 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시연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야?”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나요?]시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집에 들렀을 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요.]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물어봤는데 왜 자꾸 대답은 안 하고 나한테 다시 물어봐?”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평소 기분 변화가 심한 남자였다. 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창우면에 있어요.] “창우면? 그게 어디야?” 유건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창우면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거기서 뭐 하러 가 있냐?” [일하러요.] 시연은 웃
창우면.이 시각, 영광병원은 이미 한바탕 혼란 속에 휩싸였다. 겉으로 보기엔 혼잡해 보이지만, 모두가 산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의료봉사는 원래 병원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연은 산사태가 일어난 그 산속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연은 산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아와 김현진도 함께였다.“시연아, 준비 다 했어? 얼른 차에 타!”“응, 다 했어!”시연은 약상자를 메고, 양팔에는 산화에틸렌 소독 팩을 안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갔다.“시연아, 그거 내가 들어줄게.”진아가 시연의 짐을 받아 들고, 현진과 함께 시연을 트럭에 올려주었다.차는 산 입구까지 달려가서 멈췄다.“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해.”남자인 현진은 가장 무겁고 많은 짐을 들고 있었다.진아는 조용히 시연에게 속삭였다. “현진이 진짜 괜찮지 않아? 한 번 사귀어 볼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일이나 하자.”시연 그 질문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내 배 속에 있는 아기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제 곧 3개월이 다 되어간다!’‘아기를 지울 거라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더 늦어지면 내 몸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산사태 현장에는 소방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의료팀을 위해 텐트를 쳐서 비워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시연과 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오후 두 시가 다 되어 모두 교대로 급하게 도시락을 몇 입씩 먹었다.“시연아!”시연이 힘겹게 밥을 넘기고 있을 때, 뒤에서 이번 팀의 리더인 장성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교수님.”시연 서둘러 일어났다. 양석현 때문에 장성산은 늘 시연을 좋게 보지 않았다.역시나, 이번에도 장성산은 입을 열면 시연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짐 챙겨. 곧 산사태 현장으로 들어가서 응급처치해!”“알겠습니다, 교수님.”이미 그쪽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시연은 절반만 먹은 도시락을 내려놓고 집
“고, 고...” 진아는 놀라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유건은 이런 상황에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묻잖아, 누가 지시연에게 어떻게 했다고?” “그게 말이죠...” 눈앞의 남자는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현진은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고, 좀 더 덧붙였다. “지금 시연이와 연락이 안 돼요.” 이야기를 다 들은 유건의 얇은 입술은 일직선으로 굳어졌고, 그의 깊은 눈동자는 마치 짙은 먹물을 뿌린 듯 어둡고 무서웠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건가.” 그리고 이어서 그도 지시를 내렸다. “지한아, 민환, 기환, 나랑 같이 가자!” “네, 형님.” 유건 일행은 산사태 지역으로 들어갔다. 현진의 말대로 아무도 시연이를 본 적이 없었다. 지한과 민환 형제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유건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유건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그의 이마에서는 미세하게 뛰고 있는 혈관이 보였다. 그는 무겁게 말했다. “지한아, 헬기를 준비해. 더 깊이 들어간다. 산 전체를 뒤엎어서라도 지시연을 찾아내야 해.” “네, 형님!” 지한의 목소리마저 긴장에 차 있었다.... 밤은 점점 짙어갔다. 산 위로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고, 하늘에서 강한 빛줄기가 아래로 내려와 산을 훑었다. ... 이때 시연은 여덟,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무너진 동굴에서 시연이 간신히 구해낸 아이였다. 그래서 그녀의 두 손은 상처투성이에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손톱도 두 개나 부러져 있었다. 남자아이는 다리가 부러져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고, 시연은 아이를 업고 길을 나섰다. 그녀는 이 산길에 익숙하지 않아 길을 잃었고, 아직 산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엉엉...” 등 위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누나, 너무 아파요.” 시연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생인 우주를 떠올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좋아해?” 유건은 손가락으로 시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너에게 키스하는 거, 좋아하냐고?” 시연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오직 유건의 심장 고동 소리만, 쉴 새 없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붙잡았다. 시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상큼한 향기, 마치 신선한 귤처럼 코끝을 감싸며 그를 매료시켰다. “고 대표님!” 갑작스러운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이 로맨틱한 순간을 깨뜨렸다. 시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유건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품이 비어 있자, 유건은 굳어진 얼굴로 남자를 향해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뭐야?” “그게, 말이죠...” 남자는 그들과 함께 온 현지 주민으로,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아직 실종된 분들이 있어서, 혹시 헬기를 잠깐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유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도 돼.”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물러나자, 유건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사이 시연은 이미 멀리 가서 남자아이 곁에 있었고, 아이를 들것에 옮기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귀환하는 헬기 안에서, 유건과 시연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유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시연은 눈을 감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 또... 키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헬기 안에서, 침묵이 이어졌다....병원에 도착하자, 현진과 진아가 서둘러 달려왔다. “시연아, 괜찮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 “괜찮아.”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보고 와.” “어? 아, 그래.” 시연은 왜 그런지 몰랐지만, 순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본 순간
“그게 말이죠...” 진아는 유건의 연속되는 질문 공격에 잠시 멍해졌다. 시연의 사생활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유건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 대표님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네.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 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남자가 바로 시연의 아이의 아버지겠군.’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누굽니까? 이름이 뭐죠?” 진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고 대표님은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네요. 노은범이요, 노씨 가문의 막내아들인데, 들어보셨나요?” ‘노, 은, 범.’ ‘바로 그 사람이구나.’ 유건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되었고, 손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속에서는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왜 헤어졌죠?” 진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답했다. “은범이 어머니가 반대해서요. 결국 헤어지게 됐어요.” “그렇군.”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시연이에게 내가 이걸 물어본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진아는 그의 빈틈없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진아가 돌아서자, 유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노은범이라니!’ ‘노은범이 나와 두 번 마주쳤을 때, 내가 느꼈던 그 설명할 수 없었던 적대감...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네... 후...’ ‘그놈은 어떻게 지시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미 지시연을 버린 사람 아니었나?’ 유건은 남자였기에, 은범이 아직도 시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나, 유건 자신도 지금 시연에게 끌리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지한 일행이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건은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성산 처리해.” 지한은 잠시 당황했지만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