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우면.이 시각, 영광병원은 이미 한바탕 혼란 속에 휩싸였다. 겉으로 보기엔 혼잡해 보이지만, 모두가 산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의료봉사는 원래 병원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연은 산사태가 일어난 그 산속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연은 산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아와 김현진도 함께였다.“시연아, 준비 다 했어? 얼른 차에 타!”“응, 다 했어!”시연은 약상자를 메고, 양팔에는 산화에틸렌 소독 팩을 안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갔다.“시연아, 그거 내가 들어줄게.”진아가 시연의 짐을 받아 들고, 현진과 함께 시연을 트럭에 올려주었다.차는 산 입구까지 달려가서 멈췄다.“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해.”남자인 현진은 가장 무겁고 많은 짐을 들고 있었다.진아는 조용히 시연에게 속삭였다. “현진이 진짜 괜찮지 않아? 한 번 사귀어 볼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일이나 하자.”시연 그 질문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내 배 속에 있는 아기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제 곧 3개월이 다 되어간다!’‘아기를 지울 거라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더 늦어지면 내 몸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산사태 현장에는 소방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의료팀을 위해 텐트를 쳐서 비워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시연과 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오후 두 시가 다 되어 모두 교대로 급하게 도시락을 몇 입씩 먹었다.“시연아!”시연이 힘겹게 밥을 넘기고 있을 때, 뒤에서 이번 팀의 리더인 장성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교수님.”시연 서둘러 일어났다. 양석현 때문에 장성산은 늘 시연을 좋게 보지 않았다.역시나, 이번에도 장성산은 입을 열면 시연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짐 챙겨. 곧 산사태 현장으로 들어가서 응급처치해!”“알겠습니다, 교수님.”이미 그쪽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시연은 절반만 먹은 도시락을 내려놓고 집
“고, 고...” 진아는 놀라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유건은 이런 상황에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묻잖아, 누가 지시연에게 어떻게 했다고?” “그게 말이죠...” 눈앞의 남자는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현진은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고, 좀 더 덧붙였다. “지금 시연이와 연락이 안 돼요.” 이야기를 다 들은 유건의 얇은 입술은 일직선으로 굳어졌고, 그의 깊은 눈동자는 마치 짙은 먹물을 뿌린 듯 어둡고 무서웠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건가.” 그리고 이어서 그도 지시를 내렸다. “지한아, 민환, 기환, 나랑 같이 가자!” “네, 형님.” 유건 일행은 산사태 지역으로 들어갔다. 현진의 말대로 아무도 시연이를 본 적이 없었다. 지한과 민환 형제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유건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유건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그의 이마에서는 미세하게 뛰고 있는 혈관이 보였다. 그는 무겁게 말했다. “지한아, 헬기를 준비해. 더 깊이 들어간다. 산 전체를 뒤엎어서라도 지시연을 찾아내야 해.” “네, 형님!” 지한의 목소리마저 긴장에 차 있었다.... 밤은 점점 짙어갔다. 산 위로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고, 하늘에서 강한 빛줄기가 아래로 내려와 산을 훑었다. ... 이때 시연은 여덟,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무너진 동굴에서 시연이 간신히 구해낸 아이였다. 그래서 그녀의 두 손은 상처투성이에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손톱도 두 개나 부러져 있었다. 남자아이는 다리가 부러져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고, 시연은 아이를 업고 길을 나섰다. 그녀는 이 산길에 익숙하지 않아 길을 잃었고, 아직 산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엉엉...” 등 위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누나, 너무 아파요.” 시연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생인 우주를 떠올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좋아해?” 유건은 손가락으로 시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너에게 키스하는 거, 좋아하냐고?” 시연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오직 유건의 심장 고동 소리만, 쉴 새 없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붙잡았다. 시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상큼한 향기, 마치 신선한 귤처럼 코끝을 감싸며 그를 매료시켰다. “고 대표님!” 갑작스러운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이 로맨틱한 순간을 깨뜨렸다. 시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유건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품이 비어 있자, 유건은 굳어진 얼굴로 남자를 향해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뭐야?” “그게, 말이죠...” 남자는 그들과 함께 온 현지 주민으로,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아직 실종된 분들이 있어서, 혹시 헬기를 잠깐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유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도 돼.”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물러나자, 유건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사이 시연은 이미 멀리 가서 남자아이 곁에 있었고, 아이를 들것에 옮기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귀환하는 헬기 안에서, 유건과 시연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유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시연은 눈을 감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 또... 키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헬기 안에서, 침묵이 이어졌다....병원에 도착하자, 현진과 진아가 서둘러 달려왔다. “시연아, 괜찮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 “괜찮아.”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보고 와.” “어? 아, 그래.” 시연은 왜 그런지 몰랐지만, 순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본 순간
“그게 말이죠...” 진아는 유건의 연속되는 질문 공격에 잠시 멍해졌다. 시연의 사생활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유건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 대표님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네.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 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남자가 바로 시연의 아이의 아버지겠군.’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누굽니까? 이름이 뭐죠?” 진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고 대표님은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네요. 노은범이요, 노씨 가문의 막내아들인데, 들어보셨나요?” ‘노, 은, 범.’ ‘바로 그 사람이구나.’ 유건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되었고, 손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속에서는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왜 헤어졌죠?” 진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답했다. “은범이 어머니가 반대해서요. 결국 헤어지게 됐어요.” “그렇군.”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시연이에게 내가 이걸 물어본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진아는 그의 빈틈없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진아가 돌아서자, 유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노은범이라니!’ ‘노은범이 나와 두 번 마주쳤을 때, 내가 느꼈던 그 설명할 수 없었던 적대감...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네... 후...’ ‘그놈은 어떻게 지시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미 지시연을 버린 사람 아니었나?’ 유건은 남자였기에, 은범이 아직도 시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나, 유건 자신도 지금 시연에게 끌리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지한 일행이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건은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성산 처리해.” 지한은 잠시 당황했지만
강울대학교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시연아.”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불안함이 비쳤다. “나, 할 말이 있어.” “지시연!” 앞쪽에서 이미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은 일하러 가야 하니까, 일 끝나면 그때 얘기 들어줄게요.” 잠시 멈추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고유건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유건의 깊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좋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시연은 차에서 내려 동료들과 함께 부상자의 등록과 이송을 돕기 시작했다.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유건은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시연이도 나와 같은 말을 하려는 걸까?’ ... 모든 부상자들의 입원 절차가 끝난 후, 시연은 비로소 잠시 쉴 수 있었다. “지 선생님,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오늘 도시락이 정말 맛있어요!” ‘정말?’ 시연은 웃으며 도시락을 받으러 갔고, 확인해 보니 정말 맛있어 보였다.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이었다. ‘G시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인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을 외부로 배달하다니, 오늘 병원에서 엄청난 투자를 한 모양이네.’ 밥, 반찬, 그리고 국까지, 모두 개별 포장되어 있었으며 과일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시연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에헴!” 첫 번째로 보인 것은 유건이 보낸 메시지였다. [도시락 맛있어?] ‘뭐?’시연은 곧바로 이해했다. 이 도시락은 모두 유건이 시연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지, 병원이 이렇게까지 신경 썼을 리가 없지.’ ‘하지만 고 대표님은 돈이 많으니 어렵지 않겠지.’ [왜 답장 안 해? 아직도 못 쉬고 있나? 바쁜 거야?] [지시연, 네 몸을 항상 먼저 생각해. 너무 무리하지 마!] ‘이 남자는 이미 살짝 화가 난 것
장소미가 고유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유건 씨, 이 며칠 동안,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도저히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짙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력하게 말했다. “소미 씨...” 그 두 글자를 들은 시연은 갑자기 뒤돌아서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기환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특히 그녀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연 씨, 무슨 일이에요?” 시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닿지 않았다. “제가 온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고 대표님이 아주 바쁘신 것 같으니,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다녀간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시연은 이곳에서 한순간도 더 머무를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만에 현실은 그녀에게 잔인하게 알려주었다. 병원에서 서둘러 온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저 유건과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고, 진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가 잊었지... 고유건에게는 이미 장소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지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품고 있는 몸인데, 고유건이 무슨 이유로 이런 나를 좋아하겠어?’ 시연은 유건의 회사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야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유건은 소미를 밀어내며 말했다. “소미 씨, 미안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당신에게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어.” 소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감정이 폭발한 듯 소리를 높였다. “저 정말 기다릴 수 있어요! 유건 씨,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예요?” “소미 씨...” “그만 말해요!” 소미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