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설날에 할머니가 언급했던 그 산부인과 명의라는... 그 사람일까?’하지만 아이를 못 갖는 게, 어찌 민하윤의 문제일 수 있단 말인가.“얌전히 협조해.”하도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뻗어 민하윤의 손끝을 건드리려 했다.딱 그 순간, 민하윤이 움찔하며 손을 확 빼버렸다. 하도진의 말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얌전히 협조하면, 하씨 가문 어른들이 바라던 대로 아이를 낳아 대를 잇게 해 줄 수 있다는 뜻인가?[제가 왜 협조해요? 우리 둘 중 대체 누가 아픈데요?][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민하윤이 고집스레 눈을 치켜들며 수어로 쏘아붙였다.하도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해 못 한 듯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서서히 굳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어둡고 가라앉은 눈빛이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이 무슨 뜻으로 저 수어를 했는지 바로 알아들었다.“민하윤, 난 계속 참고만 있을 만큼 인내심이 크지 않아.”하도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민하윤이 왜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심지어는 은근히 자신에게 그 방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듯 떠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하도진은 이 일을 위해 꽤 많은 걸 감수했다. 유명한 한의사는 몇 년 전에 본가로 내려가 조용히 쉬고 있다는 소문만 떠돌았고, 하도진은 인맥을 거쳐 겨우 주소를 알아냈다. 하도진은 관계를 동원하고, 체면도 내려놓고, 몇 달을 공들여 한의사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그 노인은 설이 지나고 명원시로 올라가 민하윤을 봐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그러면... 더는 참지 말아요. 어서 이혼...]민하윤이 수어로 그렇게 마무리하려던 찰나, 하도진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끊어냈다.하도진이 거칠게 민하윤을 끌어안았다.“내가 말했지. 그 단어, 다시는 네 입... 아니, 네 손에서라도 듣기 싫다고.”하도진의 거친 숨결이 민하윤의 귓가에 닿았다. 방금까지의 다정한 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눈빛은 매섭고 차가웠다.민하윤은 순식간에 하도진의 품에 갇혀 어쩔 줄 몰랐다
[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민하윤이 수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속은 괜히 불안했다.백누리의 매니저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눈앞에서 조용하고 단정한 민하윤이 수어로 대화하는 걸 보자 순간 아쉬움이 스쳤다.‘저렇게 예쁜데 말을 할 수 없다니...’하지만 그 감정은 딱 한순간이었다. 나은지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추슬렀고 얼굴에는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정말 예쁘시네요. 제가 업계에서 본 여자 연예인들 못지않아요. 미인은 다 비슷하게 닮았다더니... 맞는 것 같네요.”“언니 말이 맞아...”백누리는 마지못해 하고 대답하더니 얌전히 나은지를 따라 흰색 밴에 올라탔다.민하윤은 그 자리에 서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걸 느꼈다. 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수록 방금까지 완벽하게 유지하던 표정이 스르르 무너졌다. 요염한 얼굴 위로 비웃음이 떠올랐다.정말 어이없게도 하도진의 몇 마디에 또 흔들릴 뻔했다.민하윤은 다시 표정을 정리한 뒤,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그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조용히 길가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차 안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셔츠에 은테 안경, 깔끔하게 손질한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깊은 시선으로 곧장 민하윤을 꿰뚫어 봤다.날카로운 시선에 민하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왜 답장 안 해?”하도진이 안경을 벗으며 차 문을 열었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도진의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길게 뻗은 다리, 거의 완벽함에 가까운 비율이 맞춤 수트에 더 선명히 드러났다.‘왜 차에서 내리는 거지?’민하윤은 아무 말 없이 하도진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 소매가 살짝 걷혀 있었고, 팔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도진은 왼손으로 차체를 짚고 몸을 숙여, 오른손으로 문을 잡아 주었다. 묘하게 신사적이고, 또 다정한 척했다.“추워. 얼른 타.”하도진은 예전보
백누리는 찔리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난 지금도 나름 만족하거든. 너무 뜬 것도, 인기가 너무 없는 것도 아니니 얼마나 좋아? 가끔 작품 하나 하고, 일 없을 땐 집에 박혀 있고, 가끔 가족들이랑 여행도 가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나은지는 코웃음을 쳤다.“백누리, 너도 이 업계에서 오래 일 했잖아. 신인으로 들어온 고은율 좀 봐. 성장 속도가 로켓이야! 너도 걔처럼 하 대표님의 기분만 잘 맞춰 줬어도 난 네가 뭘 먹든, 뭘 하든 눈감아 줬을 거야.”나은지는 민하윤을 처음 보는 얼굴이라, 백누리의 일반인 친구쯤으로 단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도 가리지 않았다.백누리는 종이봉투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꼬치를 힐끗거리며, 속을 긁듯 툭 내뱉었다.“흥! 난 하 대표님의 7년이나 사귄 전 여친도 아닌데. 나도 하 대표님의 빽을 좀 잡고 싶지. 근데 그게 잡히겠어?”나은지가 단호하게 받아쳤다.“네가 진짜 잡을 수 있었으면 지금 이 꼴이겠냐? 고은율은 회사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는데 설날 특집 무대까지 올라가잖아. 집안일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는 네가 갔을 것 같아? 꿈 깨. 하 대표님이 고은율의 앞길이 트이게 하려고 돈을 얼마나 쏟아붓는지 알아? 여주 자리까지 박아 넣어 줬어.”나은지는 숨도 안 쉬고 이어갔다.“지금 이 예능도 회사가 가장 힘주는 프로젝트야. 홍보를 시작하자마자 화제성이랑 조회수 벌써 플랫폼 1위 찍었잖아. 넌 진짜 돈 벌려고 이걸 하는 줄 알아? 다 고은율의 인기를 올리려고 판 깔아 준 거야.”백누리는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백누리의 얼굴이 확 굳었다.“언니... 그럼 올해 설날 특집 무대는 내가 고은율의 자리를 뺏은 거야? 아니면... 고은율이 안 한다고 해서 내가 들어간 거야?”나은지는 결국 이를 악물고 못을 박았다.“맞아. 그래서 다른 연예인들은 몇 달 전부터 리허설 돌리는데, 네가 통보받을 때는 설 직전이었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민하윤은 조용히 그
임형섭의 낮고 자석 같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왔다. 임형섭은 부정하지 않았다.백누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가방 안에 넣어 둔 계약서를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일부러 놀렸다.“하, 그럼 소문이 그냥 소문만은 아니었네요?”임형섭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다. 숙취에 절어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임형섭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가 화면에 뜬 발신 표시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백누리 씨, 하윤이는요? 옆에 있어요?”백누리는 전화를 민하윤에게 툭 넘기며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수화기 쪽으로 말했다.“옆에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세요.”“하윤아...”임형섭은 말이 목에 걸린 듯 머뭇거렸다.“별일은 아니고. 나... 당분간 휴가 들어가. 그 예능 찍어야 해서.”임형섭은 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 신용대출 부서를 맡았잖아. 예전처럼... 처리 안 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임형섭은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덧붙였다.“난 네 능력은 믿는데...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 네가...”민하윤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답 대신 짧게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임형섭은 더는 못 이어가겠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래.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끊을게.”임형섭은 통화를 끊고, 켜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똑같은 숫자 두 줄이 나란히 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던 시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새벽 한 시.어젯밤 임형섭은 민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1분 30초였다.‘저 1분 30초 동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찬물로 샤워를 한 임형섭은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당장이라도 민하윤을 보러 가고 싶어 차 키를 집었다가 문 앞에 멈춰 섰다.휴대폰을 들어 문자 대화 창에 몇 글자를 쓰고, 지우고, 또 썼다.결국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흰색 승합차가 길가에 멈췄다.
남자 반지는 당당하게도 하도진의 방 책상, 펜꽂이 옆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도진은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끝내 여자 반지는 찾지 못했다.원래 하도진은 연말 행사 때,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민하윤의 손에 직접 끼워 주려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하필 하도진은 민하윤이 다른 남자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봐 버렸고,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도진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보석함도 사라진 채였다.약기운이 서서히 몸을 잠식하자, 하도진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반대편의 텅 빈 자리를 바라보는 순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그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속이 휑한 공허함이었다....임형섭은 주방 아일랜드에 걸터앉아 거슬리는 넥타이를 툭 잡아당겨 풀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셔츠 단추 몇 개가 튕겨 나갔다. 임형섭은 용기를 쥐어짜 휴대폰 잠금을 풀고 저장도 안 된 번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몇 초를 망설인 끝에, 임형섭은 결국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잔을 들어 술부터 들이켰다.사실 임형섭은 그 질문을 하는 게 두려웠다.관계가 완전히 남처럼 되어 버릴까 봐,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곁에 남아 있을 자격을 잃을까 봐, 무엇보다 답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봐 두려웠다.임형섭은 혼자 술을 들이붓다 말고, 텅 빈 브랜디 병을 흔들며 툴툴거렸다. 그러고는 술장으로 비틀거리며 가 더 독한 술을 하나 꺼냈다.테이블 위에는 계약서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빽빽한 활자들이 새까맣게 박혀 있었지만 시야가 흐려져 글자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임형섭은 빈 술병 두 개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아일랜드 위에 놓인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임형섭은 시끄러워서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진동은 상판을 타고 계속 윙윙 울렸다.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그 순간,
[도진 씨, 저는 누가 저를 협박하는 게 제일 싫어요.]민하윤이 손을 들어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수어로 내뱉었다.하도진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민하윤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촉촉하게 젖어 도톰한 입술을 오래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하윤아, 난 널 협박하는 거 아니야. 네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거지.”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긋했다.“판을 뒤엎을 힘도 없으면서 머리 뜨거워졌다고 밥그릇부터 깨면 안 돼.”하도진은 말을 이어 갔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끝처럼 정교했다.“네가 이번에 승진한 건, 너도 이유를 알잖아? 아무도 못 따라오는 실적인데, 너만 가볍게 따냈지. 왜 그런지는... 너도 알잖아.”“네 양아버지 치료도 그래. 신경내과랑 정형외과 쪽 최고 교수들이 모여서 계속 회진 돌았고, 효과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것도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민하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하도진이 직접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이 얻어 온 것들이 하나씩 대가로 환산되는 느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민하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렇다.사람들이 민하윤이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애써 잊어 주는 척하는 건, 그녀가 정말 압도적인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었다.하도진의 아내라는 호칭이 주는 편의와 혜택을 민하윤이 분명히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태유 은행은 매년 공개 채용 자리 자체가 손에 꼽았다. 대부분은 헤드헌팅으로 고액 연봉을 주고 데려오는 수준이었다.명문대 출신 신입도 들어오면 지점 말단부터 기어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민하윤은 명문 대학을 나온 평범한 졸업생이면서도 졸업하자마자 본점으로 들어왔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임형섭 선배의 추천 덕이었다.민하윤은 은행에서 몇 년을 성실히 버텼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약점 때문에 업무는 줄곧 신용대출 부서에서 자료 서류 심사하는 것에만 머물렀다. 영업도, 외부 프로젝트도, 직접 맡을 권한이 없었다.그런데 에스티 그룹 협력 프로젝트가 공개 입찰로 풀렸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