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가 아직도 화내고 있을까봐 그랬죠.”말하며 한현진은 아침밥을 송민준에게 건넸다. “아빠는요?”“아빤 쉬러 가셨어. 4시가 되어서야 가셔서 아마 조금 이따 오실 거야.”“오빤 새벽 내내 여기 있었던 거예요?”송민준이 포장을 뜯어 전을 베어 물었다. “어쨌든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20여 년을 쌓아온 감정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너무 낸다면 서해금에게 쉽게 들킬 수 있었다. 턱 밑까지 내려온 송민준의 다크서클을 본 한현진은 마음이 아팠다. “내려가면 식당 있어요. 거기서 먹어요. 국이라도 떠줄게요.”송민준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어젯밤 마신 물로 충분히 배가 부르거든.”“...”비꼬는 말투는 어쩌면 유전인 듯 했다. 한현진은 송민준에게서 드디어 까다롭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은 혹시 전부 그 말투에 질려서 떠난 거 아녜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처럼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아무래도 극소수에 불과하니까.”“...”송민준은 결국엔 한현진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송가람이 이번 일로 꽤 크게 다쳤다고 했다. 목과 팔뚝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이마에도 퍼렇게 멍이 들었다. 천식 발병 후 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 이제 막 깨어난 송가람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상태라고 했다. 경찰이 진술을 받으러 다녀왔지만 송가람은 신미정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윤하와 신표에게 사건의 초점을 맞춰 두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한현진은 곧 송가람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송가람은 감히 신미정을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신미정을 고소해 승소한다면 그녀와 강한서 사이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한현진이 당시 신미정을 피해 만남을 거부하며 그녀를 회사로 끌어들였을 땐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신미정을 처리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비록
한현진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랑에 이성을 잃은 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서, 그 멍청이뿐이었다. ‘꽤 불쌍하네.’잠시 생각하던 송민준이 물었다. “만약 그 후로 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넌 어쩔 셈이었어? 네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한현진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절 키워주신 엄마는 저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도리도 가르쳐주셨지만 용서해야 할 땐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만약 정말 그 후의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아직 강한서를 향한 모성애가 남아있다는 얘기고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겠죠. 그저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강한서가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모신다고 해도 전 상관없었어요.”강한서는 신미정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줬었다. 하지만 신미정은 그 마음을 언제나 실망으로 되갚았다.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신미정을 향한 강한서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신미정은 결국 한현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앞으론 계획이 뭐야?”송민준이 물었다. 한현진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뭘 할지는 전부 그 여자에게 달렸어요.”한현진이 화제를 바꾸며 송민준에게 물었다. “오빠, 조예단 씨는 찾았어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병원 근처 작은 아파트에 월세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약을 처방 받고 있어. 지인을 통해 조예단 씨 주치의에게 물어봤더니 난치병이래. 상태도 많이 안 좋은데다 우울증까지 앓고 있어서 장기간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사람도 만나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장을 보는 게 전부야. 나마지 시간엔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아. 게다가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걸 굉장히 꺼려하는 눈치야. 조예단 씨 곁에 붙여놓은 사람 말에 의하면 주말 오후엔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주로 아이들을 보면서 멍 때린대. 오후 내내 말이야.”“두 번이나
“지금은 아들 양육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급하게 돈을 벌고 있어요. 그래서 전 희연 언니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건 별로 바라지 않고요.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아이 때문에 일하는 게 불편했을 텐데 차라리 언니에게 조예단과 접촉하도록 부탁하는데 어떨까 싶어요.”“조예단 씨가 돌아온지도 시간이 꽤 흘렀어요. 고아원에 기부한 걸 제외하면 한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뿐 별다른 행적은 없었어요. 그렇다는 건 그저 젊은 시절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싶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조예단 씨 본인은 당시 일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요. 저 지금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조예단 씨가 당시 겪은 화재는 사고일까요, 아니면 인위적으로 일어난 일일가요?”송민준이 반문했다. “너도 방화라고 생각해?”한현진이 말했다. “전 그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시 마취사를 포함하면 그 일에 개입된 사람은 총 4명이었어요. 그중 2명이 죽었고 한 명은 멀리 해외로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그리고 나머지 한 명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가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사망률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아직 60세가 안 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 같진 않아요.”잠시 침묵하던 송민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죽어서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이라면 그 비밀이라는 건...”송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살인밖엔 없겠네.”한현진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추측이 제일 합리한 설명이었다. 송민준이 생각하며 물었다. “조예단 씨는 당시의 공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는 것 같아요. 오빠가 해외에서 만난 손은혜 씨도 그랬잖아요. 돈을 가진 후엔 혹시 들킬 수도 있으니 서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고요. 어떤 사람은 해외로 떠났고 어떤 사람은 직장은 물론 연락처도 전부 바
한현진은 송민준과 함께 송가람이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그녀는 슈퍼에서 19800원 짜리 과일 바구니까지 샀다. 병실을 문을 열고 송가람을 본 한현진을 깜짝 놀랐다. 송가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의 양 옆과 목엔 크고 작은 빨간 손톱자국으로 가득했고 이마엔 멍자국이 선명했다. 메이크업을 지운 송가람의 얼굴엔 초췌한 기색이 역력해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송민준을 보자마자 송가람은 미소를 지었다. 송민준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송민준 뒤에 서 있는 한현진을 발견하고는 꿀꺽,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송가람이 하려던 말은 곧 날카로운 소리로 변해 흘러나왔다. “현진 씨는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예요?”‘쯧. 굳이 몰라도 되는 순간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다니.’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람아, 현진이는 네가 다쳤다는 말에 어젯밤에도 왔었어. 오늘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과일까지 사서 너 보러 온 건데 왜 말을 그렇게 해?”“쟨 그냥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하러 온 거야!”송가람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쟤가 아줌마를 회사로 끌어들인 거야. 그래서 내가 아줌마에게 속은 거라고.”송민준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돈도 현진이가 빌려주라고 해서 아주머니께 빌려준 거야? 네가 무슨 목적으로 아주머니께 돈을 빌려줬는지, 굳이 내가 얘기해야 해?”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송가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현진 씨는 이미 한서 오빠와 이혼했어. 난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현진 씨가 오빠 친동생이면, 20여 년을 함께한 우리는 전부 거짓이 되는 거야? 어떻게 이정도로 편애할 수가 있어?”송민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송민준은 어쩌면 송가람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흔들렸을 수도 있었다. 아이를 바꾼 건 서해금이었다. 비록 송가람은 오만방자한 성격이긴 했지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가 상황을 설명하면 될 거예요. 차용증이 없어도 계좌 이체한 내역이 있잖아요. 가족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증여로 보긴 어려울 거예요. 언니가 고소해요. 그 여자는 한성 그룹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주식을 처분한다면 40억 정도는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을 거예요.”송가람이 한현진의 손을 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네가 날 보러 온 진짜 목적인 거지? 내가 아줌마를 고소해 한서 오빠가 날 미워하게 되면 네가 오빠와 재혼이라도 하려고? 이제야 네가 왜 나와 아줌마를 마주치게 했는지 이해가 되네.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잖아.”송가람의 반응을 진작 예상하고 있던 한현진은 송가람이 자신의 손을 내치는 순간 한라봉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덕에 한라봉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현진은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쯧, 혀를 차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들켰네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언니가 고소 안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쳤으니 아주머니는 가만히 계시려고 하진 않으시겠죠.”송가람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한현진이 씩 웃으며 한라봉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과즙의 달달함이 마음을 녹였다. “아주머니께서 어젯밤 그 여자와 크게 싸우셨어요. 보아하니 치를 떠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그 쪽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살짝 언질만 준 한현진이 손에 들고 있던 한라봉을 다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료 잘 받아요. 쾌차하길 바라요.”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한현진이 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송가람은 경계의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송가람의 걱정과는 달리 한현진은 그저 책상 곁으로 걸어가 자신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한라봉 두개를 꺼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한라봉 두 개를 흔들며 말했다. “꽤 맛있더라고요. 두 개만 가져갈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한라봉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화가 치민 송가람은 책상 위에
잠시 멍해졌던 주혁이 곧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한현진과 송민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전 병문안 왔어요.”말하며 주혁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꽃을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도 병문안 오셨어요?”주혁이 대답했다. “네. 친구가 수술을 해서 보러 왔어요.”송민준은 눈앞에 서 있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을 보며 한현지에게 물었다.“현진아, 이분은 누구야?”“오빠, 이분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주혁 기사님이세요.”한현진은 곧바로 주혁에게 시선을 돌려 송민준을 소개했다. “기사님, 여긴 제 오빠인 송민준 씨예요.”주혁이 조심스럽게 송민준을 향해 목례했다. “송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주혁은 등을 살짝 구부렸다. 그 탓에 수척한 몸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송민준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주혁을 훑었다. 그리곤 그는 주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뵐게요, 주 기사님.”허리를 숙여 송민준과 악수를 나눈 주혁이 곧 손을 놓았다. 송민준이 미소 지으며 한현진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무섭게 생겼어? 기사님이 날 보지도 않으시네.”움찔한 주혁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그게 아니라...”“기사님이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래요. 기사님 그만 놀려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 좀 한 거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기는.”말을 마친 송민준이 주혁에게 말했다. “주 기사님, 안전 운전 부탁드릴게요. 저에겐 하나뿐인 동생이에요. 현진이가 안전하기만 하다면 보너스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한현진이 송민준을 툭 쳤다. 갑질하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넣어두라는 의미였다. 한현진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기사님, 엘리베이터 안 타세요?”시선을 돌린 주혁이 대답했다.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요. 조금 헷갈리네요.”한주병원의 종합 병동엔 엘리베이터만 6개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어느 과로 가세요? 제가 봐드릴
한현진은 말했다. “오빠가 강한서 눈치만 안 주면 돼요. 오빠는 한서의 처남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어젯밤 오빠가 날린 주먹 때문에 한서는 속상해서 밤새 잠도 못 잤어요. 오늘 아침에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로 출근했다고요.”송병천 쪽은 한현진이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송민준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걔한테 그 정도라고?”“그러니까 말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니 안 속상하겠어요?”송민준이 잠시 침묵했다. 한현진이 이젠 그가 속아 넘어갔을 것이라 생각할 때쯤, 송민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속상하라고 해. 날 속이고 싶으면 몇 년은 더 갈고 닦아야 할 거야.”“...”‘어쩐지 강한서가 계속 오빠를 여우같은 놈이라고 하더라니.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서해금이 통화를 한 짧은 사이에 송가람은 신미정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마음을 바꿨다. 그런 송가람의 말에 서해금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모녀는 병실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서해금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넌 네가 신미정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강한서가 너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꿈도 야무지지. 네가 쓰러지고 지금까지 그 자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걔 마음을 아직도 몰라?”송가람은 멍청할 정도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서 오빠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게다가 이건 모두 한현진이 꾸민 계략이에요. 제가 아줌마를 고소하게 하려는 수작이라고요. 한현진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예요.”“그게 한현진 계략이라고 해도 그렇지.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돈을 빌리러 간건데 왜 네가 나서서 돈을 줘? 이 일에서 넌 빠져.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서해금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문을 연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이 고개를 내밀자 그녀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멍해졌다. 화가 났지만 불쌍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삐졌을 뿐이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웃음소리에 욱, 화가 치밀었다. 그건 분명 조롱이 섞인 비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먹겠다는 이유가 웃겨? 웃긴 뭘 웃어.’한현진은 그저 삐진 강한서의 모습이 귀여웠을 뿐이었다. 예전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어떤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절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뭐든 마음속으로 꾹 참으며 한현진이 추측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당연히 그의 마음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그런 문제점을 대놓고 얘기한 후, 그는 바뀌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쁠 땐 전처럼 입을 꾹 닫고 혼자 삭히지 않았다. 그러니 화가 죽을 것 같은데 한현진은 그가 화가 난 줄도 모르는 일도 더는 없었다. 지금의 강한서는 화가 나면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곤 “얼른 와서 달래줘”라는 표정으로 한현진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웃긴 뭘 웃어. 좋은 건 네 오빠에게 주고나서야 날 생각했잖아. 내 순위가 아버님보다, 아이보다 심지어 돈보다 뒤여도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내 순위가 왜 송민준에게도 밀려야 하는 거야? 걘 심지어 날 때리기까지 했는데 넌 더 좋은 걸 주면서 그 녀석 마음을 달래준 거야?”한현진은 그제야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질투심만 큰게 아니라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강했다. 일일이 따져가며 한현진 마음속 순위를 하나하나 매겼다. 3위 안에 들지 않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4위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웃기만 하던 한현진이 곧 뭔가를 떠올리고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내가 오빠에게 큰 걸 준 건 어떻게 안 거야?”그 일을 떠올리니 강한서의 마음은 더 아파왔다. 10여 분 전, 송민준은 차단을 풀고 강한서에게 사진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