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누구십니까?”
진우가 본능적으로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서늘한 금속음이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은 거칠게 휴게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그들 중 가장 체격이 큰 사내가 진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민호 씨의 유품 중 오동나무 궤짝이 있을 텐데. 국가 보안 물품이다. 순순히 넘겨.” 그의 억양은 매끄러웠지만 끝이 미세하게 딱딱했다. 재일교포거나, 혹은 철저히 훈련된 가디언즈의 요원이 분명했다. 진우는 등 뒤로 서윤을 밀쳐내며 궤짝을 발로 끌어당겼다. “보안 물품? 여긴 삼촌 빈소야! 당신들 정체가 뭐야!” “기자님, 정직 중이라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인데. 이건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아냐.” 사내의 손이 궤짝 손잡이에 닿으려는 찰나, 서윤이 옆에 있던 뜨거운 찻물을 사내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악!” 비명과 함께 사내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진우가 노트북 가방과 궤짝을 낚아챘다. “서윤 씨, 뛰어!” 장례식장 복도는 이미 가디언즈의 다른 요원들이 봉쇄하고 있었다. 진우는 서윤의 손을 잡고 비상구 대신 주방 연결 통로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구둣발 소리가 거칠게 따라붙었다. “잡아! 궤짝이 우선이다!”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화물 엘리베이터에 간신히 올라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사내들의 흉흉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낡은 SUV 키를 눌렀다. “서윤 씨, 안전벨트 꽉 매요!” 끼이익—! 타이어 타는 냄새와 함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백미러에는 검은 세단 두 대가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서울 도심의 밤거리가 거대한 추격전의 무대로 변했다. “진우 씨, 저 사람들... 정말 가디언즈 맞죠? 삼촌이 말한 그 그림자들?” 서윤은 품에 안은 은 거울을 꼭 쥐었다. 거울의 날카로운 파편이 손바닥을 찔렀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맞아요. 츠바시 총리가 죽자마자 한국까지 날아온 걸 보면, 이 궤짝 안에 든 게 그놈들에겐 핵폭탄이나 다름없다는 증거예요.” 진우는 현란한 핸들 조작으로 좁은 골목길을 파고들었다. 기자 시절 잠행 취재로 익힌 인사동 지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추격하던 세단들이 좁은 골목 어귀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진우는 라이트를 끄고 익숙한 한옥 뒷마당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그곳은 민호의 작업실 뒤편, 오래된 창고와 연결된 비밀 통로였다. 인사동, 민호의 지하 작업실. 다시 돌아온 작업실은 주인 잃은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진우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윤 역시 다리가 풀린 듯 궤짝을 내려놓고 숨을 헐떡였다. “여긴... 아직 모를 거예요. 삼촌이 생전에 이중으로 계약해둔 공간이라 장부에도 안 나오거든요.” 서윤이 떨리는 손으로 작업실의 구식 스탠드를 켰다. 노란 불빛 아래, 아까 제대로 보지 못한 칩의 폴더들이 다시 나타났다. 진우는 노트북을 켜고 아까 중단되었던 음성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이번에는 2005년이 아닌, 2006년의 기록이었다. 아키라가 일본으로 돌아간 지 1년 뒤, 츠바시 유키로의 '개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의 음성. “...민호 씨, 오늘은 내 목소리를 죽이는 수술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낮은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내일부턴 가짜 고음으로 일본 국민들을 선동해야 하겠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내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내 영혼은 더 깊은 지옥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걸.” 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고통으로 젖어 있었다. “성대 수술까지 강요당한 거군요... 가문을 위해서.”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진우가 폴더 깊숙한 곳에서 'Plan-G'라는 이름의 암호화된 문서를 발견했다. 파일을 열자, 소름 끼치는 도표와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가디언즈가 일본 정계를 장악하기 위해 아키라를 어떻게 '여성 총리'로 기획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불법 수술과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는지를 기록한 **'인간 개조 백서'**였다. “이건 특종 수준이 아냐... 국가 간의 전쟁감이라고.” 진우가 경악하며 문서를 훑어 내리던 중, 작업실 천장에서 툭, 하고 작은 흙먼지가 떨어졌다. 스윽, 스윽. 지하실 천장 위, 누군가 작업실 안을 살피듯 조심스럽게 걷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디언즈가 벌써 이곳을 찾아낸 것일까? 서윤과 진우는 숨을 죽이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진우는 작업대 위에 놓인 묵직한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긴장감이 극도로 치닫는 순간, 지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똑, 똑. 일정한 박자. 민호가 생전에 서윤과 진우에게만 알려주었던, **'비밀 신호'**였다.부도칸의 지하 서버실이 내뱉는 마지막 폭발음은 비명이라기보다 낡은 시대가 찢어지는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를 뚫고, 진우는 서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의 등 뒤에서는 K의 절규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설계도가 완벽한 거울로 변해 스스로를 비추기 시작했을 때, K라는 남자는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진우 씨, 괜찮아요? 숨 좀 쉬어봐요.”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우는 대답 대신 피 섞인 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도달한 부도칸 정문 밖, 도쿄의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지독하게도 맑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멈췄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부도칸의 팔각형 지붕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한 광경은 기이했다. 부도칸 주변을 포위했던 경찰과 사병들은 더 이상 총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이나 길거리의 대형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윤이 설계한 ‘미러링 프로토콜’이 전 세계를 강타한 것이다.전광판에는 츠바시 유키가 아닌, 아키라라는 청년의 진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솔브레인이 은폐하려 했던 수천 명의 인체 실험 명단과 고위층의 추악한 결탁 서류들이 끊임없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믿어왔던 성벽이 거대한 거짓의 모래성임을 깨닫고 있었다.“우리가... 정말 해낸 건가요?”서윤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잉크와 피, 그리고 먼지로 얼룩진 손. 이 가녀린 손끝에서 시작된 문장들이 도쿄의 심장부를 도려낸 것이다. 진우는 그 손을 말없이 꽉 잡아주었다.“작가님! 강 기자님!”멀리서 사토미와 레이가 탄 밴이 급정거하며 달려왔다. 사토미는 요원들을 배치해 주변을 경계했고, 레이는 휠체어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데이터 송출은 완벽해요. 전 세계
K의 긴 손가락이 메인 서버의 엔터 키 위에서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멈췄다. 그의 입가에는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확신에 찬,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복원의 완성이라... 민호, 네가 죽어서도 지키려 했던 그 보잘것없는 기억들이 결국 내 성벽의 마지막 벽돌이 되는구나."K가 키를 눌렀다.띠링—.서버실의 수천 개 모니터가 동시에 백색 섬광을 내뿜으며 점멸했다. 서윤이 가져온 12자리의 암호, 아키라의 고통과 평온의 주파수가 디지털 코드로 변환되어 솔브레인의 심장부로 침투했다. K의 눈동자가 데이터의 흐름을 쫓아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전 세계 뇌파 통제권' 대신, 화면에는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구동되기 시작했다.[PROCOTOL: MIRROR RESTORATION (거울 복원 프로토콜)]"이게... 뭐야? 이건 내 설계도에 없는 명령어야!"K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게 떨렸다. 서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등 뒤로, 의자에 묶여 있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진우의 눈에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승리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삼촌은... 당신이 버린 파편들을 모아 거울을 만드셨지."서윤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당신은 사람들을 가두는 성벽을 원했지만, 삼촌은 그들이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거울을 원하셨어. 이 암호는 당신의 서버를 여는 열쇠가 아니야. 당신이 그동안 지워왔던 수만 명의 '진짜 기억'을 강제로 복구시켜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하는 '미러링' 바이러스지."그 순간, 전 세계의 TV와 스마트폰, 대형 전광판이 일제히 지직거렸다. K가 방금 전까지 조작하고 삭제했던 [Project: CUBE]의 데이터들이, 조작 불가능한 '원본 기억'의 형태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츠바시 유키가 남모르게 흘렸던 아키라의 눈물, 인체 실험실에서 비명을 지르던 피실험자들의 마지막 눈동자, 그리고
도쿄 하네다 공항의 보조 활주로에 바퀴가 닿는 순간, 기체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덜컹거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쿄의 새벽하늘은 서울보다 훨씬 무겁고 붉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내장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습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서윤의 뺨을 스쳤다.“작가님, 장비를 챙기세요. 여기서부터는 전쟁입니다.”사토미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그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밴의 문을 열었다. 서윤은 어깨에 멘 오동나무 궤짝의 끈을 다시 한번 조여 맸다. 궤짝 안의 [Project: CUBE] 장부와 아키라의 붕대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만 명의 목숨과 바꾼 진실의 무게였고, 이제 그 진실은 K의 심장부인 부도칸으로 향하고 있었다.차량은 잠든 도쿄의 도심을 가로질러 치요다구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부도칸의 팔각형 지붕은 새벽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려는 K의 거대한 ‘설계도’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레이 씨, 암호 해독은요?”서윤이 묻자,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던 레이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삼촌 민호 씨는 정말 천재였어요. 붕대에 새겨진 나노 입자들은 단순한 코드가 아니라, 아키라 오빠의 심박수와 뇌파의 리듬을 데이터화한 것이었어요. 즉, 아키라 오빠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순간과 가장 평온했던 순간의 파동이 겹쳐져야만 마지막 암호가 풀리는 구조예요.”서윤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삼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암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기술자가 아니라, 아키라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의 영혼을 복원하려 했던 서윤 자신뿐이라는 것을.부도칸 지하 7층, 메인 서버실.K는 거대한 수조 앞에 서 있었다. 수조 안에는 츠바시 유키, 아니 아키라가 마지막 순간까지 입고 있었던 피 묻은 백색 정장이 보존액 속에 떠 있었다. 그것은 K에게 있어 승리의 전리품이자, 미완성으로 남은 ‘여신’의 잔
인천국제공항의 새벽은 서늘한 안개에 싸여 있었다. 일반적인 출국 게이트가 아닌, 공항 외곽의 프라이빗 격납고. 사토미가 수소문해 준비한 낡은 비즈니스 제트기 한 대가 엔진의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대기하고 있었다.서윤은 품 안의 궤짝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안에는 아키라의 피 묻은 붕대가 들어있었다. K가 그토록 갈구하는 12자리의 암호. 그것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혹은 이 비극의 사슬을 끊어낼 수도 있는 마지막 열쇠였다.“작가님, 타세요. 시간이 없어요.”사토미가 방탄조끼 위로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그의 뒤로는 전직 가디언즈 요원들이 중무장을 한 채 기체에 오르고 있었다. 레이 역시 휠체어를 대신해 보조 기구를 착용하고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K는 이미 도쿄 부도칸 지하 서버실에 도착했을 겁니다. 거긴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에요. 가디언즈의 태동지이자, 모든 인체 실험 데이터가 물리적으로 저장된 솔브레인의 성소죠.”레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에게 도쿄는 고향이자, 동시에 자신을 기계로 개조하려 했던 도살장이었다.제트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자, 서윤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진우 씨, 제발 살아만 있어요. 서윤은 손바닥에 밴 잉크 자국을 어루만졌다. 펜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던 다짐은 이제 총구와 칼날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그녀를 인도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도쿄 부도칸 지하 7층.차가운 금속 냄새와 수만 개의 서버 팬이 돌아가는 소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K는 의자에 묶인 진우의 턱을 잡아 강제로 화면을 보게 했다.화면 속에는 전 세계 언론에 유출된 [Project: CUBE]의 데이터들이 실시간으로 삭제되거나 '조작된 정보'라는 딱지가 붙어 빠르게 희석되고 있었다.“보이나, 강 기자? 진실은 유통기한이 짧은 생선과 같지. 내가 미디어를 통제하고 여론을 흔드는 건 아이들 장난보다 쉽다.
도쿄를 떠나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의 차창 밖으로 짙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진우는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K의 제국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의 화면에 진실이 송출되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진우 씨, 이것 좀 봐요."서윤이 건넨 태블릿 PC 화면 속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로 송출되던 인체 실험의 증거 영상들 사이사이에, 노이즈처럼 섞여 들어오는 메시지들이 있었다.[슬픔은 복원될 수 있는 데이터입니까?][당신의 고통을 수치화하면 몇 바이트입니까?]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마치 시스템이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기 시작한 듯한, 철학적이면서도 서늘한 문장들이었다."미러링 바이러스가 K의 메인 서버와 충돌하면서... 예상치 못한 피드백 루프가 생긴 것 같아요."옆자리에 앉은 레이가 창백한 안색으로 덧붙였다."K의 시스템은 원래 인간의 뇌파를 수집하도록 설계되었죠. 그런데 서윤 씨가 주입한 '아키라의 고통'이 시스템 전체에 퍼지면서, 기계가 인간의 '슬픔'이라는 주파수를 학습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우리가 전혀 계산하지 못한 변수예요."서윤은 무릎 위의 거울 파편을 꽉 쥐었다. 그 파편 속에서 삼촌의 필체가 다시 희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교토, 청수사(淸水寺)의 숲.해 질 녘의 청수사는 붉은 단풍과 어우러져 피를 머금은 듯 장엄했다. 수많은 관광객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서윤과 진우는 그 소음에서 소외된 채 숲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토미는 요원들을 숲의 경계에 배치하며 주위를 경계했다."이곳은 천년 동안 수천 번의 화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복원되어 온 곳입니다."사토미가 낡은 나무 기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하지만 그 복원의 기록 뒤편에는,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의 복원가'들의 전
“진우 씨! 내 말 들려요? 진우 씨!!”서윤의 비명이 은신처의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K의 웃음소리는 흡사 뱀의 살을 스치는 소리처럼 매끄럽고 불쾌했다.“이서윤 작가, 목소리가 떨리는군.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한 영웅치고는 너무 나약한 거 아닌가?”K는 전복된 리무진의 보닛 위에 걸터앉아, 피투성이가 된 진우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진우는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서윤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원하는 게 뭐예요? 이미 데이터는 다 퍼졌어! 당신의 그 잘난 솔브레인도, 가디언즈도 이제 끝났다고!”“끝? 아니, 이제 시작이지.”K가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겼다. 찰칵—. 그 금속음 하나에 서윤의 호흡이 멈췄다.“데이터는 숫자에 불과해. 사람들은 곧 새로운 자극에 열광하며 이 추문을 잊겠지. 하지만 생명은 다르다. 이 기자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네가 쓴 그 모든 정의로운 문장들은 그저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마의 변명’이 될 거다. 어때, 저울질해 볼 텐가? 네가 쓴 진실과, 이 남자의 목숨 중 무엇이 더 무거운지.”서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박힌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서 레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작가님. K는 지금 판을 흔들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진우 씨의 희생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K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세계가 무너진 대가로, 서윤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조각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올림픽대로, 사고 현장.진우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K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입안 가득 고인 핏물을 삼키며, 그는 간신히 눈을 떴다. 깨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