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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eur: 소광주설
“노부인과 세자 저하를 위해 복을 비는 건 제 영광입니다.”

소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가 고분고분 순응하는 모습에 한씨의 안색도 많이 누그러졌다.

이때 소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제가 이런 세밀한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불경을 더럽힐까 염려되오니, 이 자리에서 몇 줄 써보겠습니다. 소부인께서 한 번 훑어주시고 가르쳐주십시오.”

그녀는 전생에 국공 부인께서 한씨의 마음이 불쾌할까 봐 일부러 허준안을 본청에 보내 점심 식사를 하게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다.

한씨는 소연이 자발적으로 가르침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연이 피로 불경을 베끼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속의 울분이 절반 이상 가라앉았다. 그녀는 최홍에게 분부해서 도구들을 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그럼 여기서 쓰거라.”

한씨는 소연에게 좌석을 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씨의 눈에 통방하녀는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니 좌석을 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연은 붓을 집어 들고, 이를 세워 손끝을 깨물었다. 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에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끝내 붓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배어 나온 피를 붓끝에 묻힌 뒤, 푸른 벽돌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한 글자씩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규율에 따르면 피로 경서를 베낄 땐 피를 작은 도자기에 받아내고, 피가 굳는 것을 방지하는 약을 넣어야 했다. 이는 성의를 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홍은 본래부터 소연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소연을 위해 자기병을 준비해 줄 리 없었다. 최홍은 속으로 소연이 열 손가락을 모두 깨물어 피를 빼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한씨는 높은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최홍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소연 같은 천한 년은 겁을 줘야 고분고분 말을 듣고 주인을 유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줄도 쓰지 못해 소연 손끝의 피는 굳어버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손가락을 깨물었다. 열 손가락은 모두 심장과 이어져 있다 했다. 그 고통에 소연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한씨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부인, 피가 너무 빨리 굳어버려서 그러는데, 피가 굳지 않게 하는 약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한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 정도도 못 참는단 말이냐?’

“내가 보기엔 네 정성이 부족한 듯하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 고생도 견디지 못한단 말이냐!”

소연은 눈물을 글썽였고 온몸은 비를 맞은 연꽃처럼 연약해 보였다. 한씨는 질투심에 손에 든 염주를 돌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바로 그때, 발자국 소리가 났다.

한씨는 이 시각에 누군가 들어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평소의 현모양처 모습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세자 저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허준안의 겉옷을 풀어주려고 했다. 초하루나 보름도 아닌데 세자가 초하원에 오다니, 한씨는 기쁜 마음에 약간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한씨는 집사 어멈에게 눈짓을 하더니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세자가 여기 남아서 식사를 하면 저녁에 자연스럽게 여기서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홍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허준안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찻잔을 건네기도 전에 허준안의 손에 차를 모두 쏟았다.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허준안의 손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전에 집사 어멈에게 밖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문 건너편에서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안은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소연에게로 향했다. 손끝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붉어진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듯했다. 비에 젖어 시든 꽃처럼 처연한 모습이었다.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소연의 모습에, 허준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한씨는 세자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통방에게만 시선을 두는 것을 보고, 속이 답답할 만큼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분노를 눌러 삼키고,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가다듬어 말했다.

“세자 저하, 이제 곧 천불절이라 제가 사람들을 데리고 저하와 노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베끼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말을 마친 후, 한씨는 여전히 허준안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했다.

“그만하거라.”

“부군, 별 일 아니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군과 어머님께서 건강할 수만 있다면 제가 무엇을 하든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한씨는 세자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꽃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허준안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다소 언짢은 어조로 말했다.

“통방과 첩실들은 모두 나이가 어려서 피로 경서를 베끼는 걸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국공부에서는 절대로 하인과 여식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으니 앞으로 이런 일은 피하도록 하게.”

순간 한씨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말했다.

“부군, 그 말씀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재계하며 염불 하는 건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인데 어찌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이 나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좋은 일?”

허준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두 줄을 베끼는데 손가락을 두 개 깨물었어. 한씨, 당신이 피가 굳지 않게 하는 약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우리 국공부가 백 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남자들이 실질적인 전공과 훌륭한 글 덕 분이지, 절대로 여인의 피로 짜낸 미명 때문이 아니오.”

한씨는 처음으로 허준안이 자신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세... 세자 저하, 소연... 아니, 저희는 모두 자발적으로 경문을 베끼는 것입니다.”

허준안은 더 이상 그녀의 억지 변명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한씨의 손에서 자신의 겉옷을 빼내더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소연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얼굴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억누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한씨가 여전히 옆에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자, 허준안은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연아, 날 따라 나오너라.”

그는 한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소연은 허준안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한씨를 보더니 순간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한씨를 향해 인사를 한 후, 허준안을 쫓아갔다.

소연이 따라 나온 것을 보고 허준안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었다.

소연은 앞으로 다가가 허준안의 겉옷을 받아 그의 몸에 걸쳐주었고,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 금심각으로 갔다.

그녀가 떠난 후, 한씨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바닥에 던졌고, 집사 어멈은 서둘러 주으며 한씨를 위로했다.

“아씨, 소연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할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제가 보기엔 어쩌면 그녀가 총애를 받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서 회임 소식이 들리면, 소부인께서 밖에 나가실 때도 더는 남들의 수군거림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집사 어멈의 말을 듣고 한씨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자녀 문제는 이미 그녀 마음의 병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귀부인들의 모임에도 감히 참석하지 못했다.

“난 그저 세자 저하께서 저 여우 같은 년에게 마음을 빼앗길까 봐 걱정이 돼서......”

한씨는 집사 어멈에게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러자 집사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

“소부인, 세자 전하와 혼인하신 지 벌써 삼 년입니다. 아직도 전하의 성정을 모르시겠습니까? 세자 전하께서 가장 중히 여기시는 것이 바로 법도와 규율이 아닙니까. 이 저택 안에서 전하의 침상에 오르려던 시녀들이 어디 한둘이었습니까? 하지만 그중 뜻을 이룬 자가 있었습니까?”

허준안은 평소 행동이 단정했고, 여자들에게 항상 냉담했는데, 이를 생각하자 한씨는 드디어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웃자 집사 어멈은 옆에서 부추겼다.

“소부인, 이따가 통방에게 내릴 상은 제대로 내려 주시고, 국공 부인께도 찾아가 효심을 보이며 듣기 좋은 말씀을 몇 마디 올리십시오. 그렇게 해 두셔야 훗날 그 통방이 회임했을 때, 아이를 데려와 소부인의 자식으로 기를 명분이 서지 않겠습니까?”

한씨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어멈이 생각이 깊구려.”

한편, 금심각으로 돌아온 소연은 국공 부인에게 문안을 드리러 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이토록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국공 부인이 자신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터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국공 부인의 눈에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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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자 저하, 한 번 더 해주세요   제30화

    하지만 기뻐서 폴짝폴짝 뛰는 소연을 보니 허준안의 입가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옆에서 보고 있던 장풍은 깜짝 놀랐다.‘세자 저하께서 이렇게 웃는 것이 얼마 만인가? 소 아씨는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줄을 잘 섰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세자 저하의 첩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허준안은 생각하더니 말했다.“장풍아, 가서 내 바둑 판을 가져오거라.”장풍은 오랫동안 그를 모셔, 당연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더욱 놀랐다.‘세자께서 옥기 바둑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심지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데 소 아씨에게 내주다니. 세자께서 정말로 소 아씨를 마음에 품으셨나보군.’그는 빠른 걸음으로 창고로 바둑을 가지러 갔다. 허준안은 소연에게로 돌아서서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인생은 바둑과 같아. 넌 성격이 너무 소심해 오늘부터 나랑 바둑 한 시진씩 하면서 담력을 길러보자꾸나.”소연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세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세자께서 그녀를 이렇게 추켜세워줄 줄은 몰랐다.세자가 매일 그녀에게 바둑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외부로 퍼지기라도 하면 아무도 그녀를 일반 통방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큰 주방에 식재를 가지러 갈 때도 하인들이 다시는 그녀에게 눈치를 주지 못할 것이었다.이에 소연은 기뻐하며 무릎을 꿇고 허준안에게 절을 올렸다.“세자 저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풍은 바둑을 들고 돌아왔다.허준안이 두껑을 열자 안에는 흑백 바둑알이 가득 차 있었고, 등불 아래에서 따뜻한 옥기 특유의 광택이 감돌았다.그는 눈을 들어 소연을 바라보았다.“바둑을 배운 적이 있느냐?” 소연은 솔직히 고개를 저었다. 소씨 가문에 있을 때, 왕씨는 그녀에게 일만 강요할 뿐, 이런 아씨들만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배우게 할 리가 없었다. 허준안은 자신의 예상과 어긋나지 않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보거라.” 소연은 백돌를

  • 세자 저하, 한 번 더 해주세요   제29화

    금심각에 있을 때에야 소연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허준안은 일에 몰두할 때면, 저도 모르게 달콤한 주전부리를 하나씩 입에 넣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연꽃과자를 준비했다.소연이 서재에 들어서자 도시락 안의 유혹적인 향기는 그녀보다 먼저 풍겨 나왔다. 허준안은 여전히 손에 든 서첩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붓을 쥔 손은 어느새 내려놓은 뒤였다.소연은 식합을 조심스레 서안 위에 내려놓고,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세자 저하께서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께서 제때에 오지 않았더라면 전 정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오지 않더라도 소연은 소씨 가문을 상대할 방법이 있었지만, 세자가 나타난 덕분에, 확실히 그녀는 훨씬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허준안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제법 분수를 아는군.’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을 도시락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연은 바로 일어나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마치 방금 연못에서 따온 연꽃과 같은 과자가 들어있었다. 허준안이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자, 얇고 바삭한 겉결이 겹겹이 부서졌다. 곧이어 잣의 고소한 향이 혀끝에 은은하게 퍼졌고, 식감은 더없이 부드러웠다.그는 만족스럽게 삼키고 눈을 들어 소연에게 말했다. “장 수재의 일은 내가 이미 분부했으니 앞으로 절대로 너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소연은 조금 의외였다. 그녀는 매일 많은 일을 처리하는 세자께서 그런 사소한 일까지 기억해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소연은 촉촉한 눈빛으로 허준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세자의 통방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감싸주고 있는 느낌이 혼자 버티던 날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의 맑고 준수한 얼굴을 보며 소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반응하지 않은 틈을 타서

  • 세자 저하, 한 번 더 해주세요   제28화

    “왕씨, 이게 당신이 말한 증거인가? 친딸을 그렇게 모함하다니.”허준안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장풍, 내 영패를 가지고 소씨 가문 사람들 모두 관직으로 보내거라.”그 말에 소씨 가문은 놀라서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왕씨는 창백한 얼굴로 소연에게 달려들어 울먹이며 간청했다.“나는 정말로 너와 장서환이 그런 관계인 줄 알고 널 도와주려고 그랬던 것이다. 넌 이 어미의 마음도 몰라주느냐?”소하도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언니, 나도 말을 잘 못 들었어. 아무리 그래도 우린 가족인데 정말로 날 탓하는 건 아니겠지?”장서환은 온몸을 떨면서도 억지로 버티고 서서 단언했다.“소인은 소연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 그녀가 떠날까 봐 두려워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절대 고의로 모함한 것이 아닙니다.”사람들은 소씨 가족과 장서환을 바라보는 눈빛에 약간의 동정이 담겨 있었다. 소연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효도를 제일순위로 여기는 대웅에서, 내가 정말로 그들을 관직에 보낸다면 아마도 불효자식이라고 소문이 나겠지. 난 이제 세자의 사람이라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국공부의 체면과 관련이 있어. 국공부는 겉으로 보기엔 끝없이 번성해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불 위에 기름을 끓이는 형국과 다름없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많은 눈들이 이 집안을 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만약 나 때문에 국공부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닌가?’소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허준안에게 몸을 굽히고 말했다.“세자 저하,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어머니께서도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랬을 것입니다. 다만 저와 장 수재 사이가 결백하다는 것만 믿어주십시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소연이 이 사람들을 놓아준 것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힐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시간은 많으니 그녀는 천천히 그들이 진 빚을 다 받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국공부로 돌아가면 이자부터 받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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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원래 여인들에게 가혹했다. 설령 장서환이 선 넘는 행위를 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소연에게 염치없다고 할 것이다. 방금 장서환의 말을 들은 몇몇 하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장서환은 그 말들을 들으며 마음속으로는 소연에 대한 경멸로 가득했다.‘이미 세자의 침대에 기어오른 년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시집온단 말인가?’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씁쓸했다.오랫동안 사모해 온 남자가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이렇게 거리낌 없이 모욕하다니.만약 국공부에서 정말로 그녀가 부도를 지키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어떤 운명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소연의 시선은 다시 허준안에게로 향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허준안은 장서환의 말을 듣고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소연에게로 돌아서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연아, 너와 함께 할 때 이미 처녀의 몸인 것을 확인했으니 나는 널 믿는다.”그의 말에 소연의 가족들은 모두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소연이 이렇게 쉽게 세자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녀를 믿다니.하지만 그들에겐 마지막 계획이 남아있었다.왕씨는 황공한 목소리로 연신 절을 하며 말했다.“세자 저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저는 더 이상 이 악녀를 방임할 수 없습니다. 그건 노부인의 은덕에 너무 죄송한 일이니까요. 이것 좀 보십시오.”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품속에서 매미 날개처럼 얇은 물건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허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예전에 제가 기이한 재주를 지닌 사람을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이미 처자의 몸을 잃은 여인이라도 초야를 치르는 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속일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왕씨는 말을 하며 손톱으로 그 얇은 막을 뚫자 바로 피 한 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졌다.국공부의 하인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 세자 저하, 한 번 더 해주세요   제26화

    장풍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소연의 사람 됨됨이를 믿었지만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이미 평생을 약속했다’는 말을 꺼낸 이상 명성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었다. ‘이를 어쩌지? 만약 소 아씨가 이로 인해 세자 저하의 신임을 잃는다면 앞으로 국공부에 설 자리나 있겠는가?’ 장풍은 몇 년 동안 세자 곁을 따랐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에 끼어들지 말아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일은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일은 소연 스스로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소연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고, 심지어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장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소 아씨께서 이미 이 상황을 만회할 방법이 준비되었단 말인가?’ 주변 사람들도 모두 소연의 반응을 주목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사사로운 정분이 들통났다면 진작에 무릎을 꿇고 세자의 선처를 빌었을 터였다. 그런데 소연은 어찌 저리도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어쩌면 소연이 정말 억울함을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니, 이제 그만 세자 저하께 잘못을 인정해. 이미 장씨 오라버니에게 몸을 바친 이상 국공부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지. 세자께서 인자하시니 어쩌면 목숨은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소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더니 말했다. “난 장씨 오라버니와 사적인 감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어. 단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일 뿐이야. 그런데 넌 왜 계속 더러운 누명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명성이 여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진정 모르는 것이야?” 소하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나는 언니를 위해서, 차마 언니가 계속 실수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건데.”소명은 소연이 감히 소하를 꾸짖는 것을 보자,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소연을 때리려 했지만,

  • 세자 저하, 한 번 더 해주세요   제25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담담하게 장서환을 힐끗 보았다. 왕씨는 그제야 방금 전에 계획했던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시기가 엇갈렸다고 생각했다.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소하가 다가와 걱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 언니와 장씨 오라버니의 일이 알려지면 분명 국공부에서 처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언니에게 폐 끼치지 마십시오.” 소하는 말을 하며 왕씨를 향해 눈짓을 하자 왕씨는 순간 깨달았다. ‘소연 그 천한 년만 처치하면 세자 부인의 환심을 살 수 있고, 세자 부인의 도움을 받으면 소명의 다리를 치료하는 건 일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소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친딸이야. 일이 닥쳐도 침착하고 계산이 있는 걸 보면. 저 천한 년은 일이 생기면 숨기만 하고.’ 왕씨는 능청스럽게 눈물을 닦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이런 추악한 짓을 하고도 내가 널 보호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그녀의 말이 끝나자 국공부의 몇몇 하인들이 밧줄을 들고 소연의 몸을 묶으려고 했다. 이때 밖에서 한 목소리가 뒷골목으로 들려왔다. “세자 저하 납시오.” 소연이 고개를 돌리자 허준안이 장풍을 데리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검은 눈동자는 그녀에게 고정되어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었다. 왕씨는 세자가 직접 오실 줄은 몰라 약간 당황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자께서 직접 소연과 외간 남자가 사적에서 만나는 것을 목격한다면 더 좋은 일 아니겠는가?’ “세자 저하, 제가 딸을 잘못 가르쳐 국공부를 망신시켰습니다. 소연을 세자 저하께 맡길 테니 저하께서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왕씨는 무릎을 꿇고 허준안을 향해 연신 절을 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이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장서환은 원래 세자 앞에서 문인의 기개를 뽐내어 세자의 주목을 끌려고 했지만, 세자의 위압이 너무 강해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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