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이 잠시 떨리더니 곧바로 욕을 퍼부었다. “이 못된 녀석! 내가 지금 당장 전화해서 불러올게.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물어보겠어. 아니, 분명 그때 그 조나연이라는 여자와 아무 일도 없다고 했잖아!” 그러고는 내 손을 놓고 핸드폰을 찾으러 가려 했다. 저릿한 손을 살짝 움직이며 나는 말했다. “아주머니, 저 회사에서 이미 강유형이랑 얘기 다 했어요. 강유형도 이별에 동의했어요. 그리고 또...” 말을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 “그 여자를 회사에까지 끌어들였더라고요.”오늘 내가 하는 말들이 전부 일종의 고자질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길 필요는 없었다. 강유형이 한 일들을 전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뭐라고?” 이번에는 두 분 모두 놀라서 눈이 커졌다. 특히 강유형 아버지의 얼굴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어머니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당신은 회사 일은 다 파악하고 있다더니, 이건 어떻게 몰랐어?”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강유형 아버지는 집에 앉아서도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 한 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같은 소소한 일은 회장이 일일이 챙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강유형 아버지는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를 본 어머니는 다시 말했다. “유형이 불러와서 따져 물어야겠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지!” 나는 그를 부르지 않도록 말렸다. 그가 와봐야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여러분도 받아들이기 힘드실 텐데, 하물며 제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강유형은 조나연 씨랑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저를 무시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 여자를 회사에까지 들이면서 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강유형 어머니는 내 손을 다시 꼭 잡고 말했다. “지원아, 우리가 그 여자를 내쫓게 할게.” “아주머니, 강유형은 혼인 신고하는 전날에
강진혁이 돌아왔다! 그의 귀환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치 그가 내 아버지의 오래된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강유형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두 분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며 그를 바라봤다. 강진혁은 네 해 동안 집을 떠나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왔으니 두 분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듯했다.“왜 그래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오면 반갑지 않으신가요?” 강진혁이 다가오며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는 언제나 따뜻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정말로 믿음직한 큰오빠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강유형의 집에서 보낸 지난 10년 동안, 강진혁은 떠나기 전까지 나에게 가장 많은 따뜻함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기에 강유형처럼 티 나게 나를 돌봐준 건 아니었지만 그가 나에게 베푼 온정은 결코 적지 않았다.“오빠!” 나는 그를 향해 반갑게 불렀다. 그제서야 강유형의 부모님도 정신을 차렸다. 강유형 어머니는 나를 놓고 일어나 강진혁의 앞에 서서 그의 팔을 가볍게 두 번 툭툭 쳤다. “부모 생각은 하긴 했네. 그래도 돌아올 줄은 알았구나.” 강유형 아버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어?” 강진혁은 나를 한번 힐끔 본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깜짝 놀래켜드리고 싶었어요.”강유형 어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강진혁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머니.” 이 한마디에 강유형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그의 팔을 툭 치더니 그를 꽉 껴안았다. “너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오길래, 나랑 네 아빠가 너한테 뭐 잘못한 줄 알았지 뭐야. 그래서 너 우리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줄 알고...”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그냥 해외에서 너무 바빴을 뿐이에요.” 그가 이 말을 하면서 나를 향해 보내는 눈빛은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강렬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뜻밖에도 크게 요동쳤다.
강진혁은 멈춰 서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가 새로 인테리어 하셨대요.” 말을 끝내고 그의 가방을 건네주며 덧붙였다. “오빠 먼저 짐 정리하고 좀 쉬세요. 저도 좀 챙길 게 있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은 여전히 나와 강유형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떠난 이후로 이 방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강유형도 이곳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그렇다면 그는 그동안 어디서 지냈을까? 혹시 조나연이 머물고 있는 봉화타운하우스에서였을까?그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음속에서 강유형을 떼어내긴 했지만 그가 남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던 터라 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옷과 생활용품을 하나의 여행가방에 다 넣을 수 있었다.거의 다 정리할 즈음 방 문이 두드려졌다. 문을 열어보니 강진혁이 서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었고, 그의 시선은 방 안의 짐이 가득 든 내 여행가방으로 향했다. 이내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너, 집에서 나가려는 거야?” “네. 여기 더 이상 있으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짐을 정리했다.강진혁은 방 안으로 들어와 열려 있는 옷장을 보았다. 옷장 안에는 여전히 강유형의 옷이 걸려 있었다. 그의 손이 잠시 움켜쥐듯이 떨렸다. “너와 유형이는 오랫동안 함께 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떠나는 거... 아쉽지 않아?” 그의 말은 느리지만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쉽냐고?' 나는 잠시 멈춰서 생각했다. “오빠도 알잖아요.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단호하게 정리하는 거라는 걸.” 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은 짐을 마저 챙기고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가방을 침대에서 내리려는 순간, 그의 손이 가방 위에
“꼬맹아, 너한텐 아직 내가 있잖아.” 강진혁이 말하며 커다란 손으로 내 뒷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후, 나를 놓아주었다. 울지 않으려던 나는 그 순간 눈물이 갑자기 눈가에 차올랐고 뚝뚝 떨어졌다. 내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눈물은 절대 흘려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을 들켜버릴 테니까.나는 눈물을 삼키려 애썼지만 억누를수록 더 많이 흘러내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내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때 강진혁의 손이 다시 내 머리 위에 얹혔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내 앞에서 우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너 잊었어?” 이건 그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또다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마지막 자존심을 찢어내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급히 돌아서서 그의 눈을 피하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아마 내 속내를 읽었는지, 그는 내 여행가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가방 차에 먼저 실어둘게.” 그가 방을 나가고 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에서 강유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온 기쁨이 결국 나를 잃는 불안감을 덮어버린 듯했다. 나는 그들과 더 이상 인사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울고 붉어진 눈을 보지 않길 원했고 그들이 나를 붙잡을까 두려웠다.강진혁은 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데려다줄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4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이 도시도 많이 변했을 텐데, 길 잃을지도 몰라요.” 강진혁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봤다.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 부은 눈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뇨. 우리 둘이 머물러야죠. 조명 조정 효과를 보려면 밤이 가장 적합하니까, 통근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여기서 밤새거나 자정까지 일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에요.” 내가 설명하자 이소희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언니는 정말 섬세해요!” “혹시 남자 친구가 있다면 미리 얘기해둬요. 요즘 좀 바빠서 데이트 시간 뺏길 테니까.”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이소희도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달콤한 행복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이번 기회에 그 사람을 좀 시험해보려고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일하러 가요. 시간을 절약하려면 문제의 원인을 빨리 파악해서, 상대방이 도착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해요.”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면을 꺼냈다. “제가 A구역, D구역, F구역을 맡을게요.” “나머지는 내가 맡죠.” 나는 비록 팀장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소희와 똑같이 발로 뛰며 일을 해야 한다.다음 날, 우리는 먼저 시공사에서 파견한 두 명과 만났다. 한 사람은 한남석이었고, 다른 사람은 오돌쇠였다. 오후에는 조명 공급업체에서 온 두 명과 만났다. 한 사람은 성이 장, 다른 사람은 성이 김이었다. 우리는 함께 찾아낸 문제를 바탕으로 먼저 토론을 한 후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모두가 동의한 결론은, 사용된 조명 자체나 시공에는 문제가 없고 조명 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었다.계약서에 따르면 조명 조정은 조명을 공급한 업체의 책임이었다. 김 기사님은 즉시 회사에 연락했고 나에게 답변을 주었다. “조명 조정 기사 두 분이 내일 오후에 도착할 겁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좀 더 빨리 오게 할 수는 없나요?” 비록 한 달의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명 조정은 세심한 작업이었다. 한 군데의 조명만 해도 여러 번 조정해야 할 수 있고, 이 놀이공원의 조명은 수만 개에 달하니까, 속도를 내지 않으면 절대 기한 내에 끝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최소한 강
넷째: [예쁜 아가씨, 정말 유형이랑 헤어졌어?]일곱째: [형수님 화내지 마세요. 저희가 대신해서 그 녀석 혼내줄게요.] 둘째: [지원 씨, 언제 시간되면 유형이랑 같이 밥 한 끼 합시다.] 다섯째: [나도 참가할래. 형수님이랑 유형이 형이 잘 풀리도록 꼭 내가 도와줄게.] 첫째: [너희들 그만 떠들어.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왜 다들 같이 난리야?]나는 이 메시지들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 그룹에는 총 여덟 명이 있었다. 말한 사람들 외에도 강유형, 나, 그리고 신지태가 있었다. 신지태는 유일하게 말이 없었지만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대체 다들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이 그룹에서 강유형은 셋째, 신지태는 여섯째였다. 원래라면 강유형처럼 그도 나를 형수라 불러야 했지만, 내가 그와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아직 강유형과 명확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때 이미 강유형과 의형제를 맺었고, 나는 그때부터 그를 오빠라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를 오빠, 또는 지태 오빠라 부른다.신지태는 즉각 답장을 보냈다.[유형이가 인스타에 글 올렸어, 못 봤어?]그가 단톡방 메시지를 봤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랑 강유형 사이의 일을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 뿐이다.그의 답장을 보고 나는 곧바로 인스타를 열었다. 강유형이 올린 사진은 갓 꺾은 붉은 장미 한 송이였다. 문구는 이랬다.[역시 붉은 게 예쁘네.]내가 흰 장미를 좋아한다는 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글을 올린 건,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더 이상 그가 원하는 ‘장미’가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의도였다. 그가 전화로 남긴 그 차가운 말들을 떠올리며, 나는 그가 조나연과 함께하려는 의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다.단톡방 사람들은 여전히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대답해야 했으니, 곧장 강유형의 인스타
신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른 그를 따라갔다.“단톡방은 왜 나간 거야?”그가 걸으면서 내게 물었다.“네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잖아. 내가 거기 남아서 뭐해. 오히려 내가 거기 남아 있으면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있을 텐데.”게다가 강유형도 단톡방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다들 말조심해. 내 여보가 여기 있으니까.]여보라는 호칭에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빤히 보았다. 너무 행복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으니까.“그런 걸 다 신경 쓰고 있었어?”신지태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지태는 킥보드 앞에 멈춰 섰다.“탈 줄 알아?”“응, 알아!”내가 대답하자마자 신지태는 킥보드를 당기더니 타면서 빙빙 돌았다.“어라? 정말 재밌잖아?”지금 신지태의 모습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 같았다.그가 신나게 킥보드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두어 바퀴 돌고 온 신지태가 나에게 말했다.“정말로 강유형이랑 헤어지려고?”나는 옆에 있던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나 결벽증 있는 거 기억 안 나?”신지태는 또 한 바퀴 돌고 왔다.“이렇게 쉽게 놓아주는 게 오히려 너무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난 늘 자비로웠어!”내 말에 신지태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킥보드를 멈추었다.“어제 네가 단톡방을 나가고 나서 다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알고 싶지 않아.”난 직설적으로 답했다.그러나 신지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다들 네가 너무 쉽게 강유형 포기했다고 했어. 네가 강유형을 뼛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 쉽게 포기한 거라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뭐 어쩌면 그럴지도.”“유형이가 단톡방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아?”신지태는 느긋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나는 2초간 생각해 보았다.“단톡방을 나갔겠지.”신지태는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와, 정말이지 이런 부분에선 둘이 아주 잘 맞는다니까.”“아니, 지금 강유형에게
‘진정우?!'‘택시 운전기사가 아니었나? 언제부터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조명 기사가 되었지?!'그 순간 나는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진 기사님, 이분은 윤 팀장님이세요!”김석민이 간단히 소개했다.진정우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윤 팀장님.”그는 마치 나를 처음 만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였기에 나의 각도에선 날렵한 그의 턱선이 보였다. 그리고...나도 모르게 자꾸만 생각났던 그 섹시한 목울대로 보였다.이소희는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그의 손과 나의 손이 겹쳐지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윤 팀장님께선 식사 마저 하세요. 전 현장으로 먼저 가 있을게요.”“아니요. 괜찮아요. 같이 현장으로 가요.”나는 바로 걸음을 뗄 생각이었지만 진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김석민을 보았다.“석민 씨, 점심은 드셨어요? 전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이 근처에 맛집이 있을까요?”김석민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전 먹었어요.”이내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여긴 음식 배달도 가능해요.”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지라 이소희에게 말했다.“소희 씨, 진정우 씨에게도 주문해주세요.”“아, 네.”이소희는 간단히 대답한 후 얼른 핸드폰을 들며 물었다.“진정우 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쌀밥, 면, 고기 중에서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진정우는 손을 들더니 내가 절반 먹다 남긴 음식을 가리켰다.“이거랑 같은 거로 주문해주시면 돼요.”내가 먹고 있던 것은 매운 소고기 칼국수였고 이소희가 주문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우는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던지라 매운 소고기 칼국수는 그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것을 주문해달라고 하다니.“네, 이 칼국수는 여기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이에요. 진정우 씨 입맛이 저희 윤 팀장님이랑 같은 줄은 몰랐네요.”이소희는 중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