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조시언은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다.안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시언 앞에서 안리영은 순종적인 아이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나이는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응. 그만 움직여.”안리영이 팔을 빼려고 했지만, 조시언은 놓아주지 않았다.“가서 MRI 한번 찍어 봐.”안리영은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근육 통증일 뿐인데 MRI를 찍으라니.안리영은 속으로 조시언이 정말 상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괜찮으면 안 아파야지. 아프면 괜찮지 않은 거야.”맞는 말이긴 했다.나는 문 앞에 서서 아무런 반박도 못 하는 안리영의 모습에 몰래 웃었다. 전에는 구안석과 안리영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는데, 지금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츤데레 대표 남친과 순진한 토끼 같은 여친의 모습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삼촌.”기어코 MRI를 찍으라는 조시언의 말에 안리영은 부드럽게 말했다.“약간 주먹에 스쳤다고 MRI 찍으러 가는 게 어딨어? 거기 과실 의사들도 다 직장 동료인데 분명 날 비웃을 거야.”안리영은 그냥 사실대로 말했지만, 말투가 부드러워 애교처럼 들렸다.조시언의 눈빛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안리영의 다정한 눈빛에 조시언은 결국 타협했다.“정말 괜찮아?”“그럼. 못 믿겠으면 한번 봐봐.”안리영은 팔을 돌리며 괜찮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다가 통증에 잠깐 숨을 멈추었다.“그만 움직여.”조시언은 낮은 소리로 화를 냈다.안리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조시언도 말이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면서,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삼촌, 난 괜찮으니까 가서 일 봐.”안리영은 이유를 찾으면서 조시언을 쫓았다.조시언은 알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고 한마디 더 당부했다.“의료 사고가 나면 환자 가족들은 다 이성을 잃어.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나서지 마. 그리고 둘 다 동의해서 교대한 거니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네 잘못은 없어.”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였지만, 출산 중 일을 들려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고에 관한 일이라 들으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안리영이 지금까지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환자 가족도 동시에 두 목숨을 잃었으니,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건 의사의 책임도 아니다. 안리영과는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그녀가 생명을 얼마나 경외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가닥의 희망이 있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까 집도의 선생님도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이지?”“응. 하지만 환자가 사망했으니까 가족들도 저러는 거야. 들어올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우리가 죽였다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답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이었다.의료 사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의사에게는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도 선생님은 이미 정직당하고 조사를 받고 있어. 이 일이 도 선생님과 무관하더라도 큰 타격이 있을 거야.”안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안리영이 왜 자책하는지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근무를 교대하지 않았다면, 도 선생님이 이 수술을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내가 위로하자 안리영은 한숨을 쉬었다.“방법이 없지 뭐.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이소희 상황은 괜찮아. 아마 곧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심리 상태도 좋은 것 같아. 전에 상처를 입었던 여자애들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든.”이소희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진정우는? 아직도 혼수 상태인 척하고 있어?”안리영이 물었다.“깼어.”나는 안리영이 다른 일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안리영은 수심에 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 사고 때문에 걱정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일은 그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난 괜찮아. 그냥 널 보러 온
‘지나가는 길이었다고?’조시언이 떠난 후에도 안리영은 그의 대답을 계속 되새겼다.이곳은 산부인과인데, 조시언이 여기를 지나간다는 게 말이 안 됐다.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조시언의 여자친구가 이곳에 진료받으러 왔다는 것이다.말이 되는 추측이다. 조시언은 학교 다닐 때부터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고, 안리영이 대신 연애편지를 받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젠 성숙한 남자의 느낌까지 더해졌으니, 조시언처럼 잘생기고 분위기 있는 남자가 여자친구가 없을 리 없다.이번 의료 사고는 영향이 컸다. 산모 가족들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기에, 안리영의 부모님까지 알게 되었다.“리영아, 너희 과실에 사고가 생겼다며? 영상을 봤는데 너도 연루되어 있는 건 아니지?”“엄마, 아빠. 난 괜찮아.”안리영은 부모님을 진정시켰다.“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우리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자.”“정말 괜찮아.”안리영은 다시 한번 부정하며 말을 돌렸다.“엄마, 삼촌한테 여자친구 생겼어?”조민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했다.“몰라.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가 우리랑 나이 차이가 커서 너처럼 속에 있는 말을 잘 안 해.”한바탕 잔소리를 한 후, 조민영이 되물었다.“그건 왜 물어? 만나봤어? 어떤 여자였어? 안 그래도 외할머니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야.”안리영은 난처한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직접 본 건 아니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내가 널 몰라? 분명 뭔가 본 게 있겠지. 안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애가 아니야. 얼른 엄마한테 말해봐.”조민영의 질문에 안리영은 조시언이 산부인과에 왔던 일을 말했다.조민영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여친 있는 게 맞네. 안 그러면 남자가 산부인과에 갈 일이 뭐 있어?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조민영 말처럼 만약 조시언한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기뻐할 사람은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기뻐하면 조민영도 기쁠 것이고, 조민영이 기뻐하면 안리영네 가족들도 기분이
함소은 울면서 용은서 없어진 과정을 말했다.“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에 백화점에 데리고 갔어요. 물건을 고를 때까지 제 옆에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보니까 없어졌더라고요.”그 말을 들으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백화점 CCTV를 확인해 봤어요?”“확인해 봤는데 누군가를 쫓아가더라고요. 어딘가 지원 씨와 많이 닮아 보였어요.”함소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저는 최근에 계속 병원에 있었고, 백화점에 간 적도 없어요.”“지원 씨가 아닌 걸 알아요. 그냥 CCTV를 봤는데 지원 씨와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은서도 지원 씨인 줄 알고 쫓아갔을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말문이 막혔다. 집에서 가만히 있어도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함소은의 말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 은서가 쫓아간 사람이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그런 걸까?’“지원 씨, 혹시 친척이나 친구 중에 지원 씨랑 비슷한 사람 없어요? 한번 잘 생각해 봐요.”함소은은 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나는 고아인데 가족이 있을 리 없다.유희연의 부모님이 삼촌과 외숙모인 것도 얼마 전에 금방 알았고, 유일하게 조금 닮은 자매도 하늘나라로 가서 아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없었다.“소은 씨,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현상금도 걸었고 경찰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고 있고, 그리고 네티즌들도 다들 관심하고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나는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어떻게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은서는 제 딸이에요. 제 친딸.”함소은은 나한테 소리쳤다.딸 걱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그냥 전화를 귓가에서 조금 멀리 떼고 있다가 함소은의 다 말하자 전화를 끊었다.“지금 널 의심하는 거야?”바로 옆에 있던 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모든 통화 내용을 다 들었다.함소은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날 의심하
경찰보다 용준호가 먼저 찾아왔다.지금 용씨 가문 일은 모두 용준호가 나서서 처리하고, 용진표는 뒤에서 안일하게 모든 걸 누리고만 있다.“은서는 어디 있어?”용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소은은 단지 나와 비슷한 모습이라고만 했지만, 용준호는 내 짓이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다.내 모습을 못 알아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나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몰라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나도 직설적으로 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내가 널 찾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돈을 원하면 말해. 사람만 돌려주면 원하는 걸 줄게.”용준호는 이번에는 내가 돈을 밝히는 여자인 것처럼 말했다.하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이 외부인들 눈에는 강유형과 헤어지면서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 내가 사람 감정으로 거래한다고 비난하는 악플러들도 수두룩했다.“준호 씨는 왜 은서를 원하세요?”나는 더 이상 내가 은서의 실종과 무관하다고 부인하지 않고, 용준호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었다.“지원 씨가 알 바 아니야.”용준호는 진짜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나는 입을 실룩거리며 계속 물었다.“내가 맞혀볼까요? 용은서를 손에 넣고 함소은을 짓누르려는 거예요? 아니면 용은서를 계속 찾지 못하면 그 여론이 드래곤킹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봐 그래요? 그것도 아니면...”“지원 씨, 그건 우리 집안일이니 신경 꺼.”용준호는 내 말을 끊었다.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용준호 입에서 뭔가는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궁금했던 것들을 다 털어냈다.“아니면 준호 씨 어머님이 시켰어요?”용준호의 얼굴에 드디어 표정 변화가 약간 생겼다. 조금 의외였다. 용은서를 찾는 게 용준호 어머니의 뜻이었다니.“우리 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네.”용준호는 조롱하는 말투로 나를 비웃었다.나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은서 일은 저와 전혀 상관없어요. 준호 씨도 제가 요즘 어디 있었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은서를 납치해서 뭐 하겠
용준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그거야 지원 씨가 잘 알겠지.”내가 한 짓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지, 아직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강진혁과 한배를 타긴 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편은 아니었다.진정우의 교통사고도 용준호의 소행이지만, 사람들이 강진혁으로 오해하게끔 처리한 것이다. 다른 사람 손을 빌려서 사람을 죽이는 참 음흉한 놈이다.“제가 못마땅해서 놀리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봐요.”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나한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건 안 용준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럼 원한 관계가 있거나, 의심 가는 사람이 생각나면 나한테 말해. 남은 건 지원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어.”“네.”나는 흔쾌히 대답했다.용준호는 몸을 일으키더니 떠나기 전에 한마디 했다.“은서는 단 한 번도 고생한 적 없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용은서의 신분을 생각하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여동생으로 인정하는 거예요?”“그럼. 귀엽잖아.”용준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애정 담긴 표정을 지었다.연기인 것 같지 않은 용준호의 반응에 나는 조금 놀랐다.사람은 누구나 착한 면이 있고, 아마 이게 소위 말하는 혈육의 정인 것 같다.용은서의 실종이 진정우 말대로 함소은 짓이라면 아무 위험도 없고 고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걱정되어 악몽까지 꾸었다.용은서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매달려 있는 꿈을 꾸었다. 브라운이 나를 악어 호수에 매달았을 때처럼, 꿈속에서 용은서는 계속 울면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언니, 살려줘요. 언니, 살려줘요 제발...”“은서야, 은서야...”“지원아, 깨어나 봐.”진정우가 나를 악몽에서 끌어냈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진정우를 보았다.진정우는 나를 꼭 안으며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박동을 들었다.“꿈에 은서를 봤는데 매달려 있었어...”“꿈은 다 반대니까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걔 엄마 짓인데 설마 자기 딸을 해치겠
진정우는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두 번 세게 눌렀다.“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니까.”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진정우의 손을 피했다.“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진정우는 내 머리를 감싸고 말했다.“그만 흔들어. 더 흔들면 어지러워.”“그럼 이유를 말해봐.”나는 진정우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진정우는 거짓말을 할 때면 눈동자에 빛이 없다. 전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때 나는 미처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교통사고를 낸 진짜 범인이 누구인 건 알고 있지?”진정우는 내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진정우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지원아, 너 속눈썹이 엄청 길구나. 어렸을 때랑 똑같네.”진정우가 또 화제를 돌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 생각을 말했다.“그 말은 용준호한테 보여주는 상처란 말이야?”“맞아. 내가 가짜 배성재라는 걸 용준호가 알게 해선 안 돼.”진정우는 그제야 인정했다.“근데 강진혁은 알잖아.”말을 꺼내자마자 강진혁과 용준호가 한 편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강진혁이 진정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용준호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배성재는 무슨 신분이야?”전에도 물었지만 진정우는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배성재가 관건인 것 같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포주. 뭔 말인지 알겠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알겠지만, 진정우가 그동안 포주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쩐지 이소희가 드래곤킹에서의 일을 쉽게 조사해 내더라니.“배성재가 그냥 일반 모델인 줄 알았는데, 가장 큰 범죄의 원천이었네.”“가장 높은 신분은 아니야. 위에 또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진정한 거물이고, 부하들이 전 세계 수십 개국에 퍼져 있어.”진정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보태어 설명했다.여러 국가가 연루된 국제 범죄인 만큼, 배후의 실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었다.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망치려는 벌레들은 항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약하고 상처받고 있는 것 같다.옛날에는 이득을 챙기기 위해 시집을 보냈고, 전쟁 시기에는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지금은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나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남자 모델이라며. 그럼 남자 모델도 고퀄리티로 고르는 거야?”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 기준이야.”이제야 왜 용준호한테 가짜라는 걸 들키려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드래곤킹은 가장 큰 수출 집단이다. 만약 배성재가 사칭이라는 걸 알면 진정우는 아무것도 조사해 낼 수가 없다.“강진혁은 이미 진짜 신분을 알았는데, 왜 용준호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일이 생기면 자신도 연루될 수 있을 텐데.”나는 그 점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강진혁이 똑똑한 곳이야. 드래곤킹에 강진혁 몫도 있다지만, 강진혁에 관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니까 두려울 게 없는 거야. 그리고...”진정우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드래곤킹에 일이 생기길 바랄 거야.”나는 강진혁이 어느 정도 야망을 품고 있는지를 떠올렸다.“드래곤킹에 일이 나면 국내 루트를 혼자 독점하려는 거겠지?”진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똑똑하네.”“진우 씨가 이쪽 산업을 통째로 뽑아버리면 어쩌려고?”나는 진정우한테 계속 질문했다. 이런 불법 산업은 여러 단계별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진정우가 몰래 잠입한 것도 그들을 송두리째 뿌리까지 뽑아버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진정우는 절대 작은 불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강진혁은 이미 해외에 있는 브라운과 헤르나와 결탁했어. 그자들은 신세대 불법 산업의 대표 주자들이야. 내가 이 낡은 루트를 완전히 망가뜨린다고 해도, 강진혁은 다시 자기만의 새 루트를 만들면 돼.”진정우는 강진혁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이유를 밝혔다.“그럼 강진혁부터 처리해야지. 다시 일어날 수 없게.”나는 오만한 강진혁의 생각에 참을 수 없었다.“그래. 강진혁을 처리하는 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야.”진정우는 나를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