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연은 내가 한 말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참으로 난처해 보였지만 이 모든 건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나연 씨, 더 볼 일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요.”내 말은 조롱이 아니라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녀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테니까. 특히 이런 위험한 장소는 피하는 게 맞았다. 혹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이 묘해졌다.더 할 말도 없었고, 내내 쌓였던 불만도 털어냈으니 이제 돌아설 참이었다.그때 뒤에서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원 씨, 정말 강유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이제 그 사람과 함께할 마음이 정말 없나요?”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한테 넘길게요.”넘겨준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강유형이 보이는 유치하고 과격한 행동들을 보면 그는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와 끝난 뒤로 오히려 더 나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런 걸 보면 조나연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순간적인 충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넘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럼 앞으로는 유형 씨와 다시는 엮이지 말아 주세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조나연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강유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책임져 줄 남자를 잃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려면 20억 원 정도 줄래요? 그럼 나도 산속에 들어가서 편히 살게요. 그럼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테니.”내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예전
진정우는 평소 나에게 친절했고, 성실하고 듬직한 성격이라 이소희를 차별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약속한 20분 뒤 그의 방으로 갔다. 아마 나를 10분 정도 기다리게 한 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예상대로, 문을 열어 준 그는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고 편안한 옷차림에 호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들어오세요.”방 안에 들어서자 그의 노트북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무슨 문제 생긴 건가요?”“테이블 위에 있는 파일이에요. 열어보세요.”그가 말을 마치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노트북 앞에 앉아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바탕화면이 깔끔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서 파일이 가득해서 놀랐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파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요.”“‘YLC’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그의 말을 따라 찾으려 했지만, 드라마를 너무 오래 본 탓인지 눈이 피로해서인지 그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없는데요, 정우 씨.”나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그는 마침 국화차를 우려내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제가 찾을게요.”그가 다가오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그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다시 파일을 찾으려 했지만, 여전히 찾기 어려웠다.“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조건 변경은 없습니다. 보상도 필요 없어요... 네, 협상 여지는 없어요.”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너무 빨리 통화를 끝내서 나는 미처 파일을 찾지도 못한 채였다. 그의 모든 파일 이름이 알파벳 약자로 되어 있어서 찾기가 유난히 어려웠다.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는 우려낸 차를 내 옆에 조용히 놓았다.“여기요.”“감사합니다.”나는 차를 건네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의 팔이 내 뒤로 넘어와 반쯤 나를 감싸는 듯한 자세로 화면을 가리켰다.“여기 있네요.”그의 낮고
내가 너무 솔직했나 싶어 순간 민망해졌다. 진정우도 당황했을 것 같았다.그런데 그는 바로 거리를 두는 대신 반쯤 기대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그래요?’이렇게 태연하게 나올 줄이야.나는 그를 올려다봤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파일을 못 찾으신다길래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시력이 안 좋아서...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찾을 것 같았어요.”그럴듯한 말에 내가 괜히 혼자 오해한 건가 싶어 살짝 머쓱해졌다.진정우는 내 옆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뭔가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슬쩍 쳐다보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다.그가 체크해 둔 파일에는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충분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밤에 부를 정도는 아닌 것 같아, 혹시 일부러 핑계를 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시 그를 슬쩍 보았지만, 진정우는 태블릿에만 집중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걸지도 몰라, 그가 표시해 둔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고개를 들었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진정우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태블릿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그가 늘 든든하게 일하는 사람이라 잠도 별로 안 자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이 잠든 걸 보니 안쓰러웠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얼마나 피곤했을까.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잠든 그의 얼굴은 눈매가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피부는 비록 하얗진 않지만 건강한 피부색이어서 더 남자답게 느껴졌다.높고 오뚝한 콧날은 위에서 비치는 조명에 비쳐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빛나 보였다.오늘 이소희가 지쳐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니 진정우는 그보다 훨씬 더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요 며칠 나와 여기저기 현장을 뛰어다니며 온 힘을 다해 애쓴 걸 옆에서 지켜봐 온 터라,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였다.그때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진정우가 반팔
진정우는 내 손을 더 꽉 잡았고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 뒤 힘을 빼며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는 손을 살짝 문지르며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정우 씨가 표시해 둔 부분은 다 수정했어요. 지금 확인해 보시겠어요?”하지만 진정우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괜찮아요. 가서 쉬세요.”“아... 그럼 좋은 밤 되세요.”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때 진정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순간 깜짝 놀랐다. 방금 뭐라고 했지? 지원아...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부모님뿐이었고 친구인 안리영조차도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정우가 나를 지원아라고 부른 것이다.놀라서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문 좀 닫아 주시겠어요?”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진정우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고르며 복도 벽에 잠시 기대었다.시간이 지나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꾸만 방금 진정우와의 눈 맞춤과 그가 내 손을 잡고 파일을 열어주던 순간이 떠올라서 마음이 복잡해졌다.결국 나는 스스로 머리를 가볍게 치며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고도 잡생각을 지우려고 휴대폰을 켜 보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먼저 안리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그 자식은 아직 무사해. 피를 꽤 많이 흘렸어.]그 말에 웃음이 나서 답장을 보냈다.[다음엔 더 세게 때려야지.]안리영은 답이 없었다. 아마 이미 잠들었거나 관리를 받고 있는 중일 것이다.그녀와의 대화창을 닫고 이번엔 신지태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전부 강유형과 관련된 얘기였다.메시지 1: [전 남친 머리통을 가격하다니. 멋있는데?]메시지 2: [몰래 말하는 건데, 잘했어.]메시지 3: [예전에 이 정도 배짱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메시지 4: [유형이는 맞아야 정신 차릴 사람이지. 뭔가 충격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여전히 그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진정우가 내 꿈에 두 번째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나는 문득 그와 예전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난번 꿈에서 나를 업어준 남자 뒷모습에 점이 있었는데, 그 점이 진정우에게도 있었다.그리고 어제, 그가 나를 ‘지원아’라고 불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이소희의 말 한마디가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언니, 왜 다시 자러 들어왔어요?”잠이 유난히 많은 이소희가 알람 없이 일어난 거였다.나는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다시 자러 들어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히히.” 이소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언니, 혹시 정우 씨랑...”“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왜 그런 생각만 해요?”“성인 남녀가 다 미혼인데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뭐가 이상하죠?”이소희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반박했다.“그렇다고 남자와 여자가 쉽게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잖아요.”이소희는 침대에서 내 쪽으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내게 다가왔다.“언니, 듬직한 정우 씨가 유혹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네?” “그냥, 그렇게 점잖은 남자가 당당하고 멋지게 여자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이소희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직접 경험해 보면 되죠.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걸 소희 씨는 볼 수 없잖아요.” 나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소희도 나와 함께 일어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언니가 겪어보고 저한테 이야기해 주세요.”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흘끗 보며 말했다.“영상이라도 찍어서 보내줄까요?”“좋아요! 좋아요!” 이소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나는 이소희에게 이불을 던졌고 그녀는 재빠르게 받아서 턱에 대며 말했다.“언니, 어제 정우 씨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그녀가 이렇게 묻자 갑자기 진정우가 내게 다가와서 문서를 찾아주던 장면과
“정우 씨가 언니 월급을 주겠죠? 맞죠?”이소희가 진정우를 보며 물었다.나는 진정우가 그녀의 말에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외로 대답했다.“소희 씨가 괜찮다면, 뭐...”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이소희가 내 팔을 살짝 꼬집으며 눈을 깜박였다. 분명히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진정우, 오늘은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이소희의 장난을 이렇게 받아준다고?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난 돈 걱정 없어요. 안 갈 거예요.”“언니...”그때 진정우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아침을 먹고 있을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번호가 떴다. 나는 그녀가 해결책을 찾았을 거라 생각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네, 아주머니.”“지원아, 이렇게 일찍 전화해서 미안해.”아주머니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괜찮아요. 말씀하세요.”나는 두유를 마시며 대답했다.“그 임대 문제 말이야. 상대방과 얘기해 봤는데 동의하지 않았고 보상도 싫대. 그래서 이 일은...”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걱정하지 마. 그 임대인에 대해 내가 다 알아봤어. 범죄 전과도 없고 나쁜 취미도 없고 외모도 괜찮고, 그리고 예전에...”그때, 진정우가 나를 불렀다.“팀장님, 그 계란후라이 한 조각 나한테 줄 수 있어요?”진정우가 내 접시에 있는 계란후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나는 순간 당황해서 집주인 아주머니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결국 “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고 진정우를 바라보았다.“만약 싫으면 뭐...”진정우는 말없이 계속 삶은 계란을 까고 있었다.“정우 씨, 제 계란후라이 드세요.”이소희가 자기 계란후라이를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요.”진정우는 차갑게 거절했고 나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진정우가 삶은 계란을 한입에 넣는 모습을 보니 나는 갑자기 목이 메는 듯했다.그는
어색함은 정말 컸지만 진정우가 알게 된 것도 괜찮았다.진정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자리를 떠났다. 이소희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나는 사실 그와 더 이상 발전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화를 내든 오해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우리는 단지 우연히 만난 사이였고 나는 다시 사랑을 할 생각이 없었다. 상처를 한 번 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아침을 먹은 후 나는 이소희를 일터로 데려다주고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어제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오늘 아침 면접 초대가 왔다. 이렇게 빠른 반응이 오히려 더 놀라웠지만 어쨌든 일은 빨리 시작하는 게 좋으니 다행이었다.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강진혁의 차를 봤다. 그는 차를 멈추고 내리더니 뒷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차에서 내렸다.그들이 나를 찾으러 온 거였다.“안녕하세요, 아줌마.”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지원아...”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때 강진혁이 종이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엄마, 이렇게 우시면 지원이가 더 놀라잖아요. 얘기할 거면 울지 말고 하세요.”그러자 아줌마는 티슈를 받고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지원아,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나는 강진혁을 쳐다봤다.“네가 전화도 안 받았고 문자도 안 받으니까 엄마가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아침 일찍 나를 깨워서 오자고 했어. 유형이가 한 일은 이미 엄마가 다 알고 계셔.”나는 아줌마가 이 일로 나를 찾아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아줌마, 근처 카페나 식당에서 이야기 좀 하죠. 아줌마도 아침 못 드셨을 거예요.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요.”그러자 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밥맛이 없어.”“그럼 이야기만 해요.”내 설득에 아줌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강진혁을 보며 말했다.“그럼 오빠는 소희 씨랑 현장에 가 있어요. 저는 아줌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계속 내가 할 말을 이어갔다.“아줌마, 저는 이미 퇴사했어요. 그리고 다른 곳에도 지원해서 오늘 면접을 봤어요.”“뭐? 그렇게 빨리?”아줌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 유형이와 혼인 신고를 하려던 그날부터 저는 퇴사를 고려하고 있었어요.”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전혀 죄책감 없이 말했다.“유형이와 같은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건 서로 불편할 것 같았어요. 그가 제 퇴사를 원하지 않아도 저는 놀이공원 프로젝트가 끝난 후 회사를 떠날 생각이었어요.”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 강진혁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잖아. 너희가 불편하다면 다른 부서로 가거나 지사에서 일하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니?”“제가 다른 곳으로 가면 고생하거나 힘들까 봐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떠나고 싶어요. 다른 일고 해보고 싶고요.”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아줌마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어떻게 이렇게까지... 네가 내 아들과 결혼 안 한다고 해도 괜찮은데 회사를 떠나는 건 너무 하잖아? 지원아, 정말 우리를 완전히 떠날 거니?”그녀의 슬픈 표정에 나는 마음이 약간 무거워졌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인데 가슴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자주 찾아뵐 거예요.”그러자 아줌마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남자 친구가 생겨서 그래? 너와 유형의 과거 때문에 불편해할까 봐 이러는 거야?”그 말을 듣자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와 강유형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아니에요. 남자 친구가 없어요. 혹시 제가 연애를 한다고 해도 강유형은 제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어요.”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렇다면, 제발 회사에 남아줘.”그녀는 애원하며 말했다.“적어도 아줌마가 너를 보고 싶을 때 전화를 걸면 언제든지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어.”그 말에 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흔히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