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진정우가 단호하게 대답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저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자꾸 팀장님한테 다가가고 싶고, 잘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유혹이라는 것도...”사랑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면 인생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정우는 조용히 나를 놓아주었다.“들어가서 물 많이 마셔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하고요.”그는 말을 마치고 내 가방을 가리켰다.“카드 이리 줘요. 문 열어줄게요.”“아니에요.”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제가 할게요.”급히 카드를 꺼내 안으로 들어간 나는 문에 기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잠시 후 이소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내가 깰까 봐 조심스레 움직였다.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혼자서도 잘 자고 있었네.”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진정우가 이소희에게 나를 부탁한 모양이다.‘진정우...’나는 도대체 어쩌다 그와 얽히게 된 걸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꿈을 꿨다.꿈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꿈속에서 부모님을 보았다. 그들이 사고를 당했던 장면을 말이다.비록 사고 현장을 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경찰서에서 몰래 사건 파일을 뒤져서 사진을 본 적 있다. 그 끔찍한 장면은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악몽이 되었다.나는 강씨 가문에 간 초반에 악몽을 자주 꿨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거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꿈을 오늘 다시 꾼 것이다.일어나 보니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였다.최근 들어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났다.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말이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지만 다행히 머리도 아프지 않고 정신이 말끔했다.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몰랐던 것이다.안리영에게서 두 번의 전화
김희연은 전화가 통하자마자 집에 돌아와서 밥 먹으라고 했다. 밥은 핑계고 나한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만두 잘 먹었어요. 요즘 집에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놀이공원 쪽 일이 바빠서 쉬는 시간도 없어요. 언제 여유가 생기면 돌아갈게요.”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유형이도 참, 왜 너한테 급한 일을 맡겼다니? 내가 단단히 혼내주마.”김희연은 화난 척 말했다.“유형이 탓 아니에요. 이미 정해진 일이었어요.”그래도 강유형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래, 알았다. 일이 더 중요하지.”김희연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일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바쁘다고 해도 이제 그곳에 돌아갈 명분은 없었다.김희연도 자주 실망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별이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마치 나와 부모님, 그리고 나와 강유형처럼 말이다.나와 이소희는 조식을 먹으러 갔다. 그때도 진정우는 보이지 않았다.“진 기사님 저희랑 같이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또 먼저 갔죠?”이소희가 투덜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어깨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근데 진 기사님 언니한테 특별한 것 같아요. 어제도 저한테 언니 취한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한다고 했거든요. 두 사람 어제같이 술 마셨어요?”“아니요!”“그럼 진 기사님은 어떻게 알았어요?”이소희는 참 궁금한 게 많았다.“만났어요, 호텔 아래에서.”“아, 그렇구나.”이소희는 여전히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렇게 보지 마요. 저랑 진 기사님 그런 사이 아니에요.”나는 이소희가 미처 묻지 못한 질문에 답을 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런 사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비록 진 기사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단순히 얼굴을 좋아하는 느낌이랄까요? 연예인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저희같이 연예인
“네, 전등에 문제가 생겨서요.”내가 설명할 때 김희연은 이미 진정우가 일하고 있는 사다리 아래로 갔다.“안전장치도 없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안전이 제일이에요, 기사님.”역시 사모님다운 순간이었다. 김희연은 한눈에 문제점을 찾아냈다.사실 진정우는 계속 안전장치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내려왔다가 잠깐만 올라간다고 지금은 안 한 모양이다.“제가 주의시킬게요.”나는 곧 진정우에게 말했다.“왜 안전장치 없이 올라갔어요. 빨리 내려와요.”진정우는 순순히 내려와서 말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죄송합니다.”잘못을 인정하는 초등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내가 너무 거칠게 말했나 싶었다.김희연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님을 보호하자고 있는 안전장치예요. 먼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사랑하죠.”직장인이 아니라고 해도 재벌가 사모님은 사모님이었다. 하는 말의 기세가 남달랐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었다.“네, 사모님.”진정우가 대답했다.“오전 내내 힘들었죠. 제가 식사를 가져왔으니 얼른 드세요.”김희연은 다시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진정우는 인사를 하고 나서 밥 먹으러 갔다. 김희연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몸 튼튼하니 일 잘하게 생겼네.”나는 김희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강유형과 똑같이 진정우를 얕보고 있었다.오늘 김희연이 찾아온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강유형에게서 진정우에 관해 전해 들은 모양이다.“저희 엔지니어예요. 전등을 담당한.”내가 설명을 보탰다.김희연은 재벌가 사모님이다. 대단한 사람이라면 수없이 만났기에, 지금도 그냥 싱긋 웃기만 했다.“배고프지? 사무실에 가서 밥 먹자. 우리 밤 먹으면서 얘기해.”나에게는 다시 부드러운 태도로 돌아왔다. 나도 거절하지 않고 따라갔다.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기사는 이미 음식을 펼쳐 놓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먹는 것과 이소희 등이
김희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유형이 이 자식 때문에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거니? 세상에 나쁜 남자도 있겠지만, 좋은 남자가 훨씬 많아.”김희연은 성격이 좋고 말도 잘했다. 50대가 됐는데도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쓸 줄 알았다.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좋은 남자라고 해도 아직은 생각 없어요. 조금은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생각하려고요.”김희연이 소개해 주는 걸 막기 위해 한 말이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서로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하긴.”이 두 글자를 듣고 나는 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반전이 찾아왔다.“그래도 연애는 빨리해야지. 안 그러면 좋은 남자 다 뺏긴다?”나는 피식 웃었다. 김희연도 따라 웃었다.“우리 지원이처럼 착하고 예쁜 애를 누가 만날까? 웬만한 복으로는 안 될 거야.”김희연이 또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칭찬만 들으면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이제는 받아 치는 방법이 생겼다.“아주머니 말대로 최고의 남자랑 만날 거예요. 최고라는 생각이 안 들면 차라리 기다릴래요.”“맞아, 그 말은 나도 동의해. 아무나 대충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상처받았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랑 어울리며 복수하는 것도 안 되지.”이상한 사람이란 곧 진정우일 것이다.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 그래요. 제가 누군가 만난다고 해도 최고라고 생각해서 만난 걸 거예요.”나는 신중하게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한 말이다. 강유형을 포기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김희연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그녀와 10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내가 커가는 것을 곁에서 본 사람이 나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그러면 다행이고.”이 말을 마지막으로 화제는 끝났다.나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때 김희연이 갑자기 물었다.“너 얼마 전 본가에 돌아갔다며?”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봤다.“유형이한테서 들었어. 유형이가 그래도 널 걱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김희연을 보낸 다음에야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돌아갔을 때 이소희만 보이고 진정우는 보이지 않았다.“진 기사님은요?”“김 기사님이 불러서 잠깐 그쪽에 갔어요. 근데 언니 시어머님이 직접 오신 걸 보면 혹시...”“저 유형이랑 헤어졌어요. 누가 와도 소용없어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나는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이소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집안 뭐든 다 좋은데 딱 남자주인공만 별로네요.”이소희의 말이 정확했다. 그 집안은 뭐든 다 좋았다. 그러나 내 남편은 집안이 아닌 강유형이었다. 강유형이 별로이면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었다.나와 이소희는 진정우를 거의 반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챙겨가지 않은 핸드폰은 휴식 구역에 놓여 있었다.“진 기사님은 여자친구가 없는 게 분명해요. 핸드폰도 놓고 다니는 걸 봐요.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24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거예요.”이소희가 나름 전문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고 시간을 확인했다.“제가 김 기사님한테 가서 확인해 볼게요.”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가면 일이 보름,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밀릴 거예요.”나는 순간 멈칫했다. 진정우가 간다니 말이다.‘이게 무슨 말이지?’내가 들어가려고 할 때 고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어진다고 해도 저희 측 책임입니다. 기사님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상황을 파악한 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제가 허락 못 해요.”나를 발견한 고준석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팀장님, 이건 대표님 뜻입니다.”“대표님 뜻이라고 해도 안 돼요. 이쪽 책임자는 저예요. 대표님이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나는 패기 넘치게 받아쳤다.고준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저 말을 전하는 사람에 불과했다.그렇다고 해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돌아가서 대표님한테 전하세요. 제
강유형의 말투는 아주 사나웠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마침 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진정우의 손을 놓았다.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되잡았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청평에서 오향설이 나에게 못되게 굴 때, 그는 딱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는 눈빛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면서 말했다.“괜찮아. 강유형 사람 안 잡아먹어.”진정우는 더 이상 나를 막지 않았고, 나는 강유형의 뒤를 따라갔다.고준석도 당연히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강유형이 멈춰 서며 네 일이 아니라고 호통쳤다. 겁에 질린 고준석은 바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강유형은 계속해서 걸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일단 불러 세웠다.“충분히 멀리 온 것 같은데, 그냥 지금 말하면 안 돼?”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멈춰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말하라고. 나 아직 할 일 있어. 업무 시간에 방해하지 마.”그제야 강유형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바로 손을 들어서 내 팔을 꽉 붙잡았다.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것도 잠시 그가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차가운 숨결과 10년간 사랑했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콧날은 거의 내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너 이제 날 협박할 줄도 알아?”내 등이 벽에 짓눌려 아팠다.강유형은 이렇듯 충동적이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나는 항상 조심스럽게 맞춰 가면서 지냈다.그러나 이제는 이런 그가 역겹게만 느껴졌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너 때문에 공사 기간이 영향받지 않길 바랄 뿐이야.”강유형은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너 정말 그 진정우라는 사람이랑 만나는 거야?”“아니.”
나는 강유형이 한 말을 웃으며 넘겼다.“설마 나 대신 걔랑 착각한 거야?”“나... 나는...”나는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강유형, 나랑 키스한 게 몇 번인데?”내 말을 들은 강유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우리는 3년 넘게 사귀었지만 손잡고 포옹한 것 말고는 스킨십이 거의 없었다.가끔 손이나 볼, 이마에 입맞춤했고, 입술에 닿을 때도 겨우 스치는 정도였다.내 말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그래, 내가 한 번 실수로 걔한테 키스한 거 맞아. 근데 진짜 그 순간 충동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어.”“그럼 자고 나서야 의미가 생긴다는 거야?”내가 비꼬듯 묻자 강유형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천박한 놈으로 보여? 그런 놈이었으면 진작에 너랑 잤겠지. 오늘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고.”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내가 그와 잤으면, 지금처럼 문제 삼지도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무슨 논리야?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아나? 여자가 남자 하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그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안 잔 거 아니야?”그의 말이 더는 상처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반격할 무기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강유형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윤지원, 계속 이렇게 할 거야?”“뭘?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네가 자꾸 얽매이고 과거를 들추니까 이렇게 된 거지.”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끝났다고? 네가 나랑 헤어진 게 결국 진정우 만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둘의 과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청평에선 같이 살았잖아.”강유형이 내가 청평에서 지내던 일을 알고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그 얘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진정우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생각할 줄이야.“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 그러든지. 어차피 정우를 만난 건 너랑 헤어진 후였
당구장.신지태가 도착했을 때, 강유형은 당구공을 힘껏 치고 있었다. 딱 봐도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풀러 온 게 분명했다.신지태는 조용히 옆에 있는 큐대를 들어 다가가며 말했다.“평소처럼 한 판 할래?”강유형은 대답 없이 계속 공만 쳤다. 하지만 연달아 몇번이고 공이 들어가지 않자, 큐대를 탁자 위에 던지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신지태는 큐대를 내려놓고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또 지원이 때문에 화난 거야?”“누가 걔 때문이라고 했어? 내 앞에서 그런 얘긴 꺼내지 마.”강유형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신지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지원이 말고는 널 이렇게까지 화나게 할 사람 없잖아. 그 애가 널 떠나려 하니까 이제 참기 힘든 거지?”신지태의 말은 늘 그렇듯 정곡을 찔렀다.그 순간 강유형이 돌아서서 신지태의 옷깃을 움켜잡았다.“그만하라고!”“내가 뭘?”신지태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강유형은 한마디 하려다 결국 손을 놓았다. 신지태에게 윤지원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면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윤지원은 열 살 남짓이었을 때 강씨 집안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강유형은 그녀를 미래의 아내라고 생각했다.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가족처럼 지켜주고 싶었다.10년 동안 그렇게 그녀를 지켜왔고, 결국 내 여자 친구로 만들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그런데 이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 다른 남자를 위해 강유형과 맞서기까지 하니 꼭 자기 물건을 빼앗긴 기분이었다.“왜 내가 이렇게 화나는지 너도 잘 알잖아.”강유형은 신지태를 노려보았다.“넌 지원이를 진짜 사랑하니까.”신지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사랑? 웃기지 마. 그냥 익숙해진 거야. 마치 네가 왼손으로 당구 치는 것처럼.”신지태는 여전히 고집부리는 강유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런데
이 한 방은 강진혁을 향한 것이자 강씨 가문의 체면에 날린 일격이었고 동시에 그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역시 용진표였다. 본색을 드러낼 땐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명백히 아들을 대신해 분풀이를 한 것이다.“이 자식아, 네 아버지도 생전에 감히 나한테 아니오라고 하지 못했어.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것이냐.”그는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실크 손수건으로 사람을 때린 손을 천천히 닦았다.강진혁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눈동자 밑바닥엔 살기를 담은 분노가 깔려 있었지만 겉으론 억지웃음을 지으며 피 묻은 입가를 닦았다.“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예의도, 규칙도 몰랐습니다.”그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나는 안다. 그건 그저 잠시 몸을 낮춘 것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이미 조시언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운 판에 용진표까지 자극했다간 내일 세운 계획은 아예 무산될 것이다.용진표가 오늘 조문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에 온 것도 결국엔 그를 윽박지르기 위함이었다. 내일은 아마 큰 소동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하지만 내일은 본래 강두식의 발인이 예정되어 있었다.나는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어쩌면 이것도 업보인 셈이었다.선과 악은 결국 되돌아오고 하늘은 공평하게 그 누구도 쉽게 용서하시지 않는다.강진혁이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내리자 용진표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돌아섰다.강진혁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용진표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마치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는 참았다.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는 인내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때 김희연이 다가가 그의 입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려 했으나 그는 조용히 몸을 피했다.“아주머니, 구급상자 좀 가져와 주세요”김희연이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필요 없어요”강진혁은 단호히 거절했다.김희연이 뭔가를 더 말하려 했
조시언은 강두식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김희연에게 다가가 애도의 뜻을 전했다.그 모습은 마치 그가 정말로 단지 조문하러 온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들게 했지만 조금 전 지하 주차장에서 강진혁과 벌인 격렬한 대치전을 생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엄마.”강유형도 김희연에게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맺힌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옷 갈아입고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렴.”강유형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 아래 옷을 갈아입은 그는 김희연의 곁에 나란히 섰다.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이 흩어지는 건 당연했다.강씨 가문은 강유형의 손에서 강진혁에게로 넘어간 뒤 눈에 띄게 힘을 잃었다. 게다가 강진혁이 용씨 가문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류도 감지되었다.이런 때일수록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조시언 씨를 모셔다드려!“조시언이 막 애도를 마친 순간 강진혁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조시언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쫓듯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전 우리 리영이를 기다려야 하거든요.”조시언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단번에 뜻을 알아채고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난 지원이와 함께 있을 거야.”나는 당연히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군가가 김희연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고 안리영도 내 옆에 있겠다고 했으니 조시언은 자연스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강진혁의 눈빛엔 거슬린다는 기색과 도발적인 분노가 아른거렸지만 이곳은 장례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럼 조시언 씨는 접견실에서 잠시 쉬시죠.”강진혁의 목소리는 차디차고 딱딱했다.조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리영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조용히 자리를 나섰다.하지만 그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문 밖엔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의미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