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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작가: 꽃길
“그럼 같이 먹어.”

강유형은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동의해 버렸다.

조나연이 앉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생선구이네. 요즘 딱 먹고 싶던 참이었어.”

“그럼 거위 간도 하나 더 시켜줄까?”

강유형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디저트도 하나 추가해 줘.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딸기 소스 올린 거. 음료는 오렌지 주스로 할게,”

조나연이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지원 씨도 오렌지 주스 한잔하실래요?”

“괜찮아요. 저는 물만 마실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포크에 꽂힌 거위 간을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맛에 은은한 우유 향까지...

“유형 씨, 전에 몇 번 사다 준 거위 간도 여기 거야?”

조나연의 말에 내 씹는 동작이 멈췄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응.”

그가 이곳의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아는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사다 줬던 거였고 나는 오늘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상하는 차원에서.

순간 내 입 안의 거위 간 맛이 변했고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래서 이 근처를 지나가다 거위 간 냄새가 익숙하다고 느꼈나 봐.”

조나연이 웃으며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따스함이 마치 그물처럼 나를 감싸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분명 자주 데리고 오셨겠어요. 그래서 이곳 거위 간 맛이 좋다는 걸 알고 저한테 사다 주신 거겠죠.”

가슴에 꽂힌 칼로 부족해 두 번 더 비트는 느낌이 이런 걸까. 지금 나는 그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는 나연 씨만큼 복이 없나 봐요.”

조나연의 웃음이 잠시 굳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 씨가 저랑...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무슨 복이 있겠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당황했다.

한 마디에 어떻게 울어버릴 수가 있지?

“윤지원!”

강유형이 강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휴지를 꺼내 조나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생각하지 마. 지금 울면 아이에게 좋지 않아.”

“석진 씨가 있었다면 이렇게 혼자 외롭게 밥 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조나연이 말하며 강유형이 건넨 휴지로 눈가를 닦았다.

“미안해요. 임신해서 감정 기복이 심해요. 분위기 망쳐서 죄송해요. 그만 가볼게요...”

그녀가 일어서려 하자 강유형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네가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래. 게다가 음식도 이미 주문했잖아. 이곳 생선구이 한번 먹어봐. 정말 맛있어.”

강유형이 그녀의 손을 놓고 생선 살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려 했다.

이를 본 내가 말했다.

“강유형, 왜 네 젓가락으로 나연 씨한테 음식을 집어줘? 공용 젓가락을 써야지.”

내 말에 강유형의 생선을 든 손이 공중에서 멈췄고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조나연이 강유형을 잠깐 쳐다보더니 배려심 있게 말했다.

“유형 씨,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먹을게.”

강유형은 생선을 자기 접시에 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내 접시를 가져와 생선 살을 집어 가시를 발라냈다.

예전에 나는 생선 가시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강유형이 있을 때면 항상 그가 내 생선 가시를 발라주곤 했다.

강유형은 항상 이랬다. 한 대 때리고 사탕 하나를 쥐여주는 식이었다.

“지원 씨, 유형 씨가 정말 잘해주네요.”

조나연이 감탄했다.

“나한테 잘 안 해주면 누구한테 잘해주겠어요.”

나는 생선 살을 집어 입에 넣고 한 입 먹은 뒤 계속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잘해준다면 그건 문제겠죠. 그렇죠, 나연 씨?”

조나연이 다시 강유형을 힐끗 보며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이 눈빛과 말투... 내가 눈이 멀지 않는 한 그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나연 씨, 아이는 몇 개월 됐어요?”

나는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강유형이 나를 불렀다.

“지원아, 네 거위 간 식어가. 식으면 맛 없어져.”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내가 조나연에게 이 질문을 하는 걸 막으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이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내가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을까?

만약 아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이 여자에게 너무 신경 쓰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의 약혼녀는 나였다.

“지금은 맛이 별로야.”

그가 조나연에게 거위 간을 사다 줬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 나는 한 입도 먹고 싶지 않았다.

강유형은 내 말투가 좋지 않음을 알아채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

방금 전 식당에 들어섰을 때의 따뜻하고 행복했던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역시 두 사람의 세계에는 제삼자가 끼어들 수 없나 보다.

마침 그때 조나연이 주문한 거위 간과 디저트 그리고 음료가 나왔다. 종업원이 음식을 놓고 정중하게 물었다.

“거위 간을 잘라드릴까요?”

“괜찮아요.”

조나연이 거절하고 강유형을 보며 말했다.

“유형 씨가 잘라줘. 전에도 항상 유형 씨가 잘라줬잖아. 크기도 딱 좋게.”

“나연 씨.”

나는 다시 말을 꺼냈다.

“식당에서 음식 자르는 서비스를 해주니까 유형이한테 부탁하지 마세요. 어차피 제 생선 가시도 발라야 하고 바쁠 테니까요.”

조나연은 순간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미안해요 지원 씨.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제가 직접 자르면 돼요.”

“윤지원!”

강유형이 또다시 강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나연이는 다른 사람 손을 거친 음식을 안심해서 먹지 못해. 지금 아이를 임신 중이라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해.”

“허.”

나는 즉시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연 씨 앞에 있는 음식 중에 다른 사람 손을 거치지 않은 게 뭐가 있어?”

강유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나연은 곧바로 억울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유형 씨, 지원 씨한테 화내지 마. 이러면 내가 그만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강유형이 또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신경 쓰지 마. 지원이가 생리 기간이라 기분이 안 좋은 거야. 평소에도 말투가 이래.”

강유형은 정말 대단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아래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정말 생리가 시작됐어. 그런데 생리대를 안 가져왔네. 가서 하나 사다 줄래?”

강유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며칠이 생리 기간인 거 알면서 가방에 안 챙겼어?”

“내 생리 주기까지 기억하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은 눈에 닿지 않았다.

강유형은 화가 난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일어섰다.

“두 사람 먼저 먹어. 나 금방 다녀올게.”

식탁에는 나와 조나연 둘만 남았지만 우리 둘 다 음식을 먹지 않고 그저 침묵 속에 있었다.

몇 초 후 조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원 씨, 지금 저를 싫어하시죠?”

‘제법 눈치가 있네.’

나도 꾸밈없이 말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당신이 정말 불편해요.”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유형은 제 약혼자예요. 우리는 곧 혼인신고를 할 거고요. 당신이 자꾸 강유형을 찾고 심지어 한밤중에 불러내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요?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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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씨, 오해하지 마세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고 싶었다.방금 그녀가 침구를 고를 때 한 말을 생각하니, 그녀가 묵인한 남자친구가 강유형이었다.“강유형에게 사주시는 거예요?”그녀가 선택한 침구는 블루 그레이 색으로 확실히 강유형이 좋아할 만한 색상이었다.그러나 그건 예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나에게 동화되어 그가 좋아하는 색이 많이 밝아졌다.조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몇 초를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 남동생에게 사주는 거예요.”나는 이런 수작을 한 그녀와 실랑이하기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강유형은 나연 씨와 같이 살겠대요?” 조나연의 아이가 사고가 나면 안 된다고 했으니 24시간 지키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지.“지원 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조나연은 감정이 격해졌다.“강유형에게 침구까지 샀는데, 왜 그런 말을 못 하죠?”나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반문하였다.“지원 씨는 너무 질투심이 많네요. 유형 씨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조나연의 말에 나는 웃었다.“왜 웃어요?그녀는 억울하면서도 경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말했다.“강유형은 아무리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남의 유혹에 잘 넘어가더라고요.”“지원 씨의 말이 듣기가 거북하네요.”조아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제 말이 틀렸어요? 나연 씨는 어제 저에게 해명한다고 회사에 찾아왔지만, 사실은 강유형을 만나고 싶은 거죠?”어젯밤에 나는 꿀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난 후 문득 깨달았다.조나연이 어제 회사에 나타나서 일부러 남의 차에 치여 넘어진 것이다. 이로써 강유형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걱정하게 하고 끌어안게 한 것이다.조나연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저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세요?”이에 나는 반문을 하였다.“그럼 강유형이 어제 왜 커피숍에 나타났는지 변명해 보세요.”조나연은 순간 입을 다물고 눈에는 나에게 들킨 난감한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17화

    물건 사러 갔다가 조나연 같은 여자 때문에 기분이 잡쳤지만 내가 밥 먹는 데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는 곱창국수 한 그릇을 먹은 후, 회사에 갔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강우형의 어머니인 김희연의 전화를 받았다.내가 이틀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아서 전화하는 것은 정상이었다.“아줌마.”“지원아, 네 친구 집에만 있지 말고 오늘 집에 들어와. 아줌마가 김치만두를 만들었어.” 김희연의 말에 나는 웃고 싶었다. 강유형은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핑계를 대신 찾아준 듯하다.나는 이미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기로 결정했기에 강씨 저택에 가서 짐도 정리해야 했다. “아줌마, 오늘 저녁에 돌아갈게요.”곧 퇴근할 때 이소희가 다가왔다.“지원 님, 괜찮으세요?”“왜요?”나는 어리둥절했다.“회사에서 늘 가십거리나 헛소문이 많잖아요. 그런 거 듣지 마세요. 강 대표님이 지원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 눈을 봤잖아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무슨 의미인지 안 그녀는 핸드폰을 뒤로 숨겼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리 줘요.”나의 압박하에 이소희는 핸드폰을 주면서 그녀들의 비밀 채팅방을 오픈했다. 내용은 어제 직원들이 논의한 것과 비슷했으나 조나연과 강유형의 과거 정보까지 캐냈다.강유형, 조나연, 그리고 조나연의 돌아가신 남편 임석진은 대학 동창일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에 삼각관계라고 하였다.내가 처음 들은 정보였다. 가십거리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핸드폰을 이소희에게 돌려주고 나는 운전해서 떠났지만 강씨 저택에 돌아가지 않고 신지태를 찾아갔다.그는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도착할 때 그는 마침 당구를 치고 있어서 나를 보자 같이 치자고 하였다.“두 판 할래?”예전에 강유형과 온 적이 있었는데 당구도 강유형이 가르쳐준 것이다.나는 겉옷을 벗고 큐대를 잡고 신지태와 같이 당구를 쳤다.“잘하네. 역시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잘 배웠어.”그는 강유형을 칭찬한 것이다.“지태야, 대학교 때 강유형과 같이 다녔

최신 챕터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6화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5화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4화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3화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2화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1화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800화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9화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제798화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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