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송도 앞바다를 집어삼킨 해무는 아침이 되어도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층 펜트하우스의 통유리창 너머는 온통 잿빛 안개뿐이었다. 세상을 차단한 듯한 고요 속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서늘한 습기가 미세하게 객실 안으로 스며들었다.제이는 가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의 붉은 줄 자국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준호가 꼼꼼히 발라준 연고 덕에 화끈거림은 가라앉았지만, 밧줄에 조여들던 순간의 감각은 여전히 피부 표면에 생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신체적 피로보다 제이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역공의 판이었다.고급스러운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어제 태안의 눅눅한 염전 바닥에서 거칠게 굴러먹던 이영민의 싸구려 휴대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제이는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테이블 앞으로 가만히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준호 역시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묵묵히 섰다. 간밤에 서로에게 기대며 나누었던 다정한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이미 사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걷어낸,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냉철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제이가 손을 뻗어 먼지 낀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화면이 켜지자마자 액정 위에 여러 개의 미확인 메시지 수신음이 끈질기게 울려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최근 며칠간의 송수신 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채우고 있는 번호였다. 제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번호로 주고받은 마지막 문자 메시지들을 조용히 쓸어내렸다.[일은 끝났나?][왜 보고가 없어. 당장 연락해.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라.]어조는 명령조였고 거만했다. 발신인은 철저하게 추적을 피하고자 차명 휴대폰을 사용했겠지만, 이영민 같은 밑바닥 인간에게 천문학적인 거금을 쥐여주며 자신들을 납치하라고 등 떠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이영민이 제시간에 보고를 안 하니 피가 마르는 모양이네요."제이가 액정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감정도 배제되어 있
정 회장의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제이의 몸은 이미 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평생을 물류 현장에서 구르며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육체였다. 마흔다섯의 고단한 삶을 지나 다시 얻은 스물다섯의 육신은 분명 생기 넘쳤지만, 태안의 차디찬 염전 바닥에서 겪은 물리적 공포와 정 회장과의 피 말리는 독대까지 연이어 겪은 뒤였다. 극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의 끈이 느슨해지자마자,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의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서울과 인접하면서도 삼촌의 감시망을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는 곳. 준호가 택한 은신처는 인천 송도의 한 초고층 호텔 펜트하우스였다.철컥, 육중한 객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사막의 정적처럼 고요하게 내려앉았다.통유리창 너머로 서해의 검푸른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졌지만, 제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의 따뜻하고 정돈된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순간, 그녀는 뼈가 마디마디 부서져 내리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며 가죽 소파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마치 실이 끊어진 종이인형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제이 씨!”준호가 황급히 다가가 제이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몸이 깃털보다 가볍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서늘한 가죽 소파 위에서 옅게 떨고 있는 제이의 이마에는 끈적한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평소라면 이 상황에서도 노트북부터 켜고 다음 수를 계산했을 여자였다. 제이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본 준호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독한 소유욕과 분노, 그리고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뒤늦은 공포가 소용돌이쳤다.“준호 씨…… 난 괜찮아요. 잠깐, 잠깐 눈만 붙이면…….”제이가 풀린 눈으로 간신히 입술을 뗐지만, 준호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잘라냈다.“가만히 있어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준호는 가볍게 제이를 안아 올렸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제이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뺨을 기댄 채 힘없이 흔들렸다.준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넓고 호화
차갑게 식은 새벽안개를 뚫고 달리는 차 안에서, 제이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거친 소금바닥을 짚었던 손끝에 여전히 미세한 모래알이 만져지는 듯했다. 몸 깊은 곳에서 피로가 묵직하게 밀려왔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회귀하기 전, 마흔다섯의 나이로 쓸쓸한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시절 대기업의 정 회장이라는 존재는 하늘 위에 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발버둥 쳐도 말 한마디 섞어볼 수 없었을 절대적인 권력자.하지만 지금의 제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거대한 저택의 문을 열고 있었다.회장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자,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소리 없는 위압감이 사방을 압도했다.정 회장은 이른 아침부터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으로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흙먼지와 소금기가 미처 다 가시지 않은 제이와 준호의 옷차림에 닿았다.“이 이른 시간에 예의도 없이 무슨 일이냐.”낮게 울리는 정 회장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동시에 손자의 행보를 시험하려는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준호가 한 걸음 나서려 했지만, 제이가 먼저 준호의 팔을 가볍게 누르며 정 회장의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안녕하세요, 회장님. 이른 아침부터 정중하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저희의 행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어제 납치를 당했었습니다.”폭탄 같은 선언이 비서도 없는 고요한 집무실 안을 강타했다. 정 회장의 희끗한 눈썹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제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그 구차하고 더러운 곳을 빠져나와, 지금 바로 회장님을 뵙기 위해 달려오는 길입니다.”“…….”“회장님께서 저에게 계열사 사장 자리를 주시며 능력을 입증하라 하셨을 때, 저는 앞으로의 10년 계획을 머릿속에 이미 다 그려두었습니다.” “ 그리고 그 10년을 움직이는
“윽, 컥……!”소금 먼지가 섞인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이영민은 단 한 줌의 공기도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했다. 등허리를 짓누른 준호의 무릎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이영민의 손발이 비참하게 버둥거릴 때마다 준호의 아귀힘은 목뼈가 부러질 듯 그의 덜미를 바투 조였다.“누구야.”낮게 가라앉은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의 비서나 직원들에게 쓰던 정중한 존댓말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섬뜩했다.“이영민 씨. 당신 뒤에서 자금 대주고, 제이 납치하라고 부추긴 쥐새끼. 누구입니까.”“내, 내가…… 미쳤다고 말할 것…… 아악!”말끝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준호가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올렸다. 관절이 비틀리는 극심한 고통에 이영민의 비명이 텅 빈 염전 창고 천장을 때렸다. 준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말해.”“윽! 끄으으윽……!”“내 인내심 바닥내지 마세요. 내 여자가 이런 썩은 소금 구덩이에 갇혀 있었던 시간에 비하면, 당신 손가락 몇 개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니까.”서늘하게 내려앉는 준호의 경고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마찰음이 울리자,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이영민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돈이고 배후고 간에, 당장 이 괴물 같은 정준호의 손귀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사, 삼촌! 네 삼촌이라고! 정 부회장!”이영민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그분이 시켰어! 난 그냥 시키는 대로 사람만 보낸 거야! 돈도 다 그쪽에서 대줬단 말이야!”준호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제이 역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이영민을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준호가 짓누르는 힘을 아주 미세하게 늦추자, 이영민이 흙먼지를 뱉어내며 거칠게 헐떡였다.“정 부회장님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지시했습니까.”제이가 차갑고 일정한 톤으로 물었다. 이영민은 제이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압도되어, 살기 위해
“경호단은 창고 뒤편 갯벌 초입까지 물리세요. 불빛 하나, 담뱃불 하나라도 새어 나가선 안 됩니다.”준호의 명령은 낮고 엄호했지만, 그 음절마다 서린 온도는 섭씨 영도에 가까웠다. 사설 경호원들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진 후, 폐염전 창고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사방이 바다와 갯벌로 막힌 고립된 지형. 환기창 틈새로 들어오는 밤바람은 끈적하고 짠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부식된 철재의 비린내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준호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평생을 유복하게 자란 그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디뎌본 적 없을 더럽고 음습한 낙후 지대. 제이가 이런 퀴퀴하고 차가운 바닥에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준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준호의 눈동자는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배후가 누구인지 사설 정보망을 총동원해 샅샅이 뒤집어엎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준호 씨.”그의 터질 듯한 침묵을 깬 것은 제이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제이는 준호의 다부진 팔뚝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준호의 살결에 제이의 온기가 닿았다.“지금 섣불리 움직여서 배후를 캐내려 들면 꼬리가 잘려요. 이영민을 잡으면, 싫어도 그 실체가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조금만 더 침묵을 유지해요.”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거부하는 이성적인 제동. 준호는 제이의 손길에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회귀하기 전,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구차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쥐덫을 놓은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어둠 속을 지켰다.스산한 바람 소리만 가득하던 염전에 고요를 깨는 이질적인 소음이 틈입한 것은 늦은 새벽, 인적이 완전히 끊긴 시각이었다.사각, 사각.습기를 머금은
가슴뼈 안쪽에서 거친 맥박이 끊임없이 뛰어댔다.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잔상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경찰에 신고는 마쳤지만, 정식 수사 절차가 개시되고 추적반이 움직이기를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일 분 일 초가 흐를 때마다 제이의 목을 조여오는 시간의 흐름이 사정없이 흘러가고 있었다.준호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운전대를 쥔 손가락 끝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네잎클로버를 찾겠다며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던 제이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지독하게 맴돌았다.혼자 두지 말아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서늘하게 긁어내렸다.따르릉, 하며 비서실장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연결된 것은 가속 페달을 밟은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본부장님, 통신사 협조를 받아 현 사장님의 휴대전화 기지국 신호 최종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위치가 생각보다 아주 외딴곳입니다.]"어디입니까. 당장 말씀하세요."[태안 외곽의 버려진 염전 지대입니다. 반경을 좁혀보려 해도 워낙 허허벌판이라 전파가 인근 기지국 하나에만 희미하게 걸쳐 있습니다. 그 주변을 위성 지도로 조회해 보니, 지금은 가동을 멈춘 소금 창고 건물 몇 채와 폐허가 된 집들뿐입니다. 사방이 펄과 바다로 막혀 있는 고립된 구역입니다.]염전 창고.그 단어가 들려온 순간, 제이가 홀로 어둠 속에 결박되어 있을 축축하고 소금기 가득한 공간의 실루엣이 뇌리를 스쳤다. 자금줄이 완전히 묶여 사채업자들에게 코너까지 몰린 이영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음습한 은신처였다. 사방이 바다와 갯벌로 가로막힌 고립된 영토. 그곳은 침입하기도, 탈출하기도 까다로운 최악의 무대였다."당장 사설 경호팀 그쪽으로 이동시키세요. 저도 지금 출발합니다."준호는 전화를 끊어 조수석 시트 위로 내려놓았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도로 바닥을 긁었고, 세단은 붉게 물들어가는 서해안의 도로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생각도 머릿속에 담아둘 여유는 단 한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