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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지호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시집살이와 일,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한 채 버텨온 세월이었다. 남처럼 대면대면 살아온 남편도, 사춘기를 핑계로 등을 돌린 자식도 제 편은 아니었다. 그 끝에 암까지 찾아왔을 때, 제이는 밤새 빌었다. 단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이번엔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눈을 떠보니 스물다섯의 몸, 20년 전이었다. 아픈 곳 하나 없는 몸으로 살아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고도 짜릿했다. 이제 현제이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도, 사랑도, 엄마도 이번엔 모두 내 뜻대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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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0. 접어야 할 카드
박진철의 서재, 늦은 밤.정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박진철은 이미 낡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여전히 그 낡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기자들, 이미 부르셨습니까."정지훈이 먼저 물었다."아니."박진철이 낮게 답했다."네 전화를 받고, 잠시 미뤘다."정지훈은 그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실장님."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 온 건, 막으러 온 게 아닙니다. 부탁드리러 온 겁니다."박진철의 눈빛이 흔들렸다."제 이야기를, 실장님의 방식으로 세상에 꺼내지 말아 주십시오."정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제 어머니의 이름이, 이렇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걸,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박진철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낡은 봉투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내가……"한참 만에,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가 정말로 원했던 게 뭐였는지, 요 며칠 계속 생각했다."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처음엔 정의라고 믿었다.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아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옳은 일이라고.그런데 지금, 네 어머니 이름을 팔아서라도 이기려는 나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이게 정말 정의였을까, 아니면 그냥 사십 년 묵은 내 오기였을까.""실장님…….""네 말이 맞다."박진철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이건 정의가 아니라, 내 복수였어.정 회장이 가진 걸 빼앗아서, 내가 대신 채워 넣고 싶었던 거다. 그 마음을, 너를 위한 거라고 스스로 속여왔던 거고."정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실장님이 절 키워주신 그 마음까지, 전부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그건 진심이었다."박진철이 힘주어 답했다."그것 하나만은, 하늘에 맹세코 진심이었어."정지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습니까."박진철은 오랫동안 낡은 봉투를 응시했다. 사십 년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89. 마지막 카드
박진철의 사무실, 늦은 밤.책상 위에 놓인 지분 현황표에는, 붉은 표시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그동안 공들여 확보해온 중립 지분들이, 제이의 간담회 이후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는 오랫동안 그 표를 응시하다가, 결국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봉투를 다시 꺼냈다.정지훈의 신원을 증명할 서류가 담긴 바로 그 봉투였다.지훈이 도와주지 않겠다면.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 손으로 직접 세상에 알리는 수밖에.다음 날 아침, 그는 몇몇 신뢰할 만한 기자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했다.정 회장가의 숨겨진 핏줄, 그리고 사십 년 전의 스캔들. 이보다 더 확실하게 판을 뒤집을 카드는 없었다.같은 시각, 정지훈의 호텔 방.그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박 실장님이 곧 기자들에게 당신 이야기를 터뜨리실 것 같습니다."준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정지훈은 순간 숨이 막혔다."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실장님이 지분 확보에서 밀리고 계세요. 궁지에 몰리시니까, 결국 당신을 명분으로 쓰기로 결심하신 것 같습니다."정지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사십 년 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건 결코 그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막을 방법이 있습니까.""저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준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실장님보다 먼저, 당신 입으로 직접 상황을 정리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정지훈은 오랫동안 침묵했다."제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진실을요."수화기 너머로 제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실장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요.이건 이제 실장님과 정 회장님의 싸움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이기도 하니까요."정지훈은 창밖의 서울 야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원치 않았던 이 싸움의 한복판에, 결국 자신이 서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알겠습니다."그가 낮게 답했다."제가 직접, 입장을 정리하겠습니다."같은 시각, 박진철은 기자들과의 만남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88. 이미 아는 미래
물류 데이터 전면 공개를 결정한 그날 오후, 제이는 곧바로 임시 기자간담회를 소집했다.회의실 안,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시범 사업 초기부터 사고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제이는 흔들림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공개된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제로 지적된 건들은 신규 시스템 도입 초기에 흔히 발생하는 경미한 배송 지연이었습니다. 실제 손실이나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그래도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한 기자의 질문에 제이는 잠시 여유롭게 웃었다."검증되지 않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렸다."신선식품 콜드체인과 실시간 배송 시스템은, 조만간 이 업계의 표준이 될 겁니다.지금은 낯설고 도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몇 년 안에는 이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은 유통사가 오히려 도태될 겁니다."회의실 안에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그렇게 확신하시는 근거가 있습니까?"제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하게 답했다."근거는 이미 시장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점점 더 빠르고, 더 신선한 것을 원합니다.그 흐름은 되돌릴 수 없어요. 저는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먼저 그 방향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회귀 전, 이미 그 미래를 두 눈으로 지켜봤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스마트폰 몇 번의 터치로 새벽마다 신선한 식재료가 문 앞에 도착하던 세상.그녀에게는 이미 지나간 미래였고, 실패할 수 없는 확신이었다.간담회가 끝난 뒤, 준호가 낮게 물었다."오늘 발언, 너무 과감했던 거 아닙니까?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요구받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어요."제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확신이 있어요, 준호 씨. 이건 도박이 아니에요."준호는 그녀의 눈빛에서 단순한 자신감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87화. 흔들리는 표심
박진철은 총회 안건을 확정한 뒤로, 곧바로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정지훈을 잃은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그는 오랜 인맥을 총동원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중립 지분 주주들을 하나씩 접촉하기 시작했다."현 사장이 아무리 유능해 보여도, 결국 스물다섯짜리 애송이입니다."그는 한 원로 주주와의 자리에서 낮게 읊조렸다."신선식품 사업이라는 것도, 검증 안 된 도박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회사의 미래를 그런 모험에 맡기시겠습니까."그의 말은 교묘했다. 사실과 왜곡을 절묘하게 섞어, 듣는 사람이 스스로 의심을 키우게 만드는 화법이었다.같은 시각, 제이의 사장실."박 실장님이 개별적으로 주주들을 만나고 계신 것 같아요."제이가 보고를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신선식품 사업 자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여론을 만드시는 것 같은데."준호가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저희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실적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요.""마침 좋은 소식이 있어요."제이가 태블릿 화면을 그에게 돌려 보였다."콜드체인 시범 물류망, 이번 주부터 정식 가동에 들어갔어요.초기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아요. 배송 지연율이 기존 대비 삼십 퍼센트 이상 개선됐고요."준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 수치라면, 중립 주주들 설득하는 데 확실한 무기가 되겠습니다."두 사람은 곧바로 실적 자료를 정리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주주들에게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며칠 동안, 준호와 제이는 하루도 쉬지 못한 채 여러 주주들을 만나러 다녔다.어떤 자리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마주하기도 했고, 또 어떤 자리에서는 이미 박진철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쉽지 않네요."늦은 밤, 차 안에서 제이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실장님이 사십 년 동안 쌓아온 인맥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어요."준호가 운전대를 잡은 채 낮게 답했다."그래도 조금씩 저희 쪽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만난 세 분 중 두 분은,
Last Updated: 2026-09-07
Chapter: 86. 멈출 수 없는 걸음
박진철은 서재에 홀로 앉아, 정지훈이 다녀간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다.찻잔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낡은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주주총회,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건 부탁입니다.'정지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십 년 가까이 키워온 아이의 부탁이었다.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단단하게 세워온 신념이 하루 사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하지만 박진철은 곧 고개를 저었다."이제 와서 멈추면……."그가 낮게 중얼거렸다."그 사십 년이 전부 헛것이 되는 거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한쪽의 낡은 액자를 바라보았다.회사가 처음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되던 시절, 셋이서 함께 찍었던 빛바랜 사진이었다.젊은 정 회장과, 젊은 자신, 그리고 그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조희진."희진아."그가 사진 속 얼굴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내가 지금이라도 멈추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럴 순 없다."그는 휴대폰을 들어 법무팀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예정대로 진행한다. 총회 안건, 변경 없다."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흔들렸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사십 년 동안 걸어온 그 길 위에 스스로를 세워놓았다.같은 시각, 제이의 사장실."박 실장님 쪽에서 총회 안건에 변경이 없다는 공문이 왔습니다."비서의 보고에 제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예상은 했지만, 정지훈 씨 부탁도 소용없었나 보네요."준호가 서류철을 넘기며 말했다."법무팀에서 확인한 결과, 삼촌 지분 이전 건의 절차적 하자는 확실합니다.관리 권한과 소유권 이전은 별개의 사안인데, 그 경계를 명백히 넘으셨어요.""그럼 총회 당일, 그 부분을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면 되겠네요."제이가 서류에 표시를 남기며 답했다."동시에 우호 지분 확보도 계속 진행해야 해요. 법리로만 밀어붙이기엔, 표 대결에서 지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요.""이미 절반 가까이는 확보했습니다."준호가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85. 두 아버지 사이에서
다음 날 아침, 정지훈은 홀로 박진철의 자택을 찾았다.준호와 제이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이 대화만큼은, 누구의 개입도 없이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해내고 싶었다.초인종을 누르자, 박진철이 직접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스쳤다."지훈아."박진철의 목소리가 떨렸다."연락도 없이…… 어떻게 여기를.""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정지훈은 담담히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서재, 낡은 가죽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제가 왜 실장님 곁으로 곧장 돌아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정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진철은 씁쓸하게 웃었다."짐작은 했다. 그 두 사람이 널 설득했겠지.""아니요."정지훈이 고개를 저었다."제 발로 걸어간 겁니다. 그리고 어제, 정 회장님을 직접 만나고 왔습니다."박진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그래서."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그 사람이 뭐라고 하더냐. 사과라도 하더냐.""사과했습니다."정지훈이 낮게 답했다."버린 게 맞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박진철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와서 그깟 말 몇 마디로 사십 년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으냐.""아니요. 그럴 수 없다는 거, 저도 압니다."정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실장님. 저는,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박진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지금 뭐라고 했느냐.""실장님이 사십 년 동안 절 키워주신 거,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실장님은 제게 진짜 아버지였습니다. 그 마음, 조금도 변한 적 없습니다."정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하지만 정 회장님도, 제 핏줄인 아버지예요. 원망스럽고, 밉고, 용서가 되지 않아도,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일에, 저는 동참할 수 없습니다."박진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사십 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아느냐! 네 어머니가 그 반지하 방에서 홀로 널 키우는 동안, 그
Last Updated: 2026-09-05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0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 강채원은 사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죽고, 역모로 몰려 가문이 도륙된 세자빈 윤서아의 몸에서 눈을 뜬다. 배후는 늙은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노리는 귀비. 채원은 애원 대신 압도적 무력과 냉정한 계산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고, 아무도 믿지 않던 냉혹한 세자 이운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무너진다. 누명을 벗기고 복수하는 여정 끝에 왕좌 곁에 서는, 액션과 로맨스가 함께 가는 궁중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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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신태오의 말
임금은 의금부 당상의 보고를 듣자마자 손을 들었다.“신태오를 대전으로 들라.”잠시 뒤 나장들이 사내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신태오는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왼손의 엄지가 잘린 자리와 검지 사이의 붉은 점이 등불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대전 양옆에 선 대신들이 낮게 술렁였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초여드레 밤, 세자빈의 출궁 기록을 네가 적었지.”신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임금의 목소리가 대전을 눌렀다.“궁문 장부를 고친 죄만으로도 네 목숨은 남기기 어렵다. 네가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해라.”신태오의 입술이 잠깐 떨렸다.김태겸이 앞으로 나섰다.“전하, 죄인이 살길을 찾으려 거짓을 꾸밀 수도 있습니다. 장부 하나가 잘못되었다 하여 윤정명 사건을 다시...”“병조판서는 물러서라.”임금의 말에 김태겸의 입이 다물렸다.“지금은 이 자의 말을 듣겠다.”이운은 신태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누가 시켰지.”신태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조필규의 사람입니다.”“이름을 말해라.”“모릅니다. 밤에 왔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조필규의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그자가 조필규 나리의 명이라고 했습니다. 초여드레 자시 전, 세자빈마마께서 서문을 나갔다고 적으라 했습니다.서문을 지키던 사람들에게는 왕명으로 궁 안쪽의 순찰을 도우라 했고요.”채원이 차분히 물었다.“통행패는.”신태오가 고개를 들었다.“없었습니다.”“수행한 나인은.”“적지 않았습니다.”“그런데도 내 출궁을 장부에 적었다.”“예.”채원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그날 밤 자신은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장부 속의 윤서아는 서문을 지나 윤정명 사가로 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김태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빈마마께서 궁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과 윤정명 사가에 역모의 물건이 없었다는 사실은 별개입니다.죄인의 장부 한 줄을 물고 늘어져...”“대감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신 듯 말씀하십니다.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49. 서문의 기록
내관은 떨리는 손으로 출입부를 바쳤다.“초여드레 자시 전, 세자빈마마께서 서문으로 나가셨다고 적혀 있사옵니다.”대전 안의 시선이 다시 채원에게 쏠렸다.채원은 장부를 보지 않았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신은 알 수 없었다.다만 최억쇠가 본 것이라며 외운 날짜와 시각이 이 기록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이운이 내관에게 손을 내밀었다.“내가 보겠다.”그는 출입부를 받아 한 줄씩 훑었다. 붓으로 적힌 글씨 아래에는 서문 당직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이운의 표정이 달라졌다.“여기 적힌 당직자가 누구냐.”내관이 장부를 들여다보았다.“병조 별감 신태오입니다, 저하.”대전 안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신태오는 며칠 전 동궁에서 세자빈을 향해 칼을 뽑았다.그가 나인을 죽이려 한 자객과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의금부에 올라가 있었다.김태겸이 입을 열었다.“신태오가 당직이었다고 하여, 출입 기록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맞습니다.”이운이 말했다.“그러니 기록이 만들어진 절차를 확인해야 합니다.”“세자빈이 자시가 넘어 궁문을 나가려면, 출궁을 허락한 명과 동행한 궁인의 이름이 함께 남아야 하지 않습니까.”임금이 내관에게 물었다.“그러하냐.”“그러하옵니다. 특히 세자빈마마께서는 홀로 궁문을 나가실 수 없사옵니다.”“그 기록에는 무엇이 적혀 있느냐.”내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세자빈마마의 성함과 서문을 나간 시각만 있습니다.”“출궁을 허락한 명은?”“없사옵니다.”“동행 궁인은?”“적혀 있지 않사옵니다.”김태겸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이운이 장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신태오는 세자빈이 나간 것을 확인한 자가 아니라, 세자빈이 나갔다고 적은 자다.”“저하.”“허락도, 동행한 사람도 없는 출궁이 궁문을 통과했다는 말이냐.그 기록을 믿으려면 신태오 하나의 말을 믿어야 한다.”김태겸이 낮게 말했다.“세자빈마마께서 허락 없이 몰래 나가셨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채원이 그를 돌아보았다.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48. 기억나지 않는 외출
“세자빈마마셨습니다.”최억쇠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이 조용해졌다.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몸에 남은 기억 속의 최억쇠는 마차를 끌던 사람이었다.말이 놀라면 먼저 고삐를 잡고, 어린 서아가 울면 몰래 엿을 쥐여 주던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을 역모의 한가운데 세웠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본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말해라. 창고 안에 무엇이 있었지.”최억쇠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칼이었습니다.”“몇 자루였느냐.”사내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서른 자루였습니다.”채원이 고개를 들었다.대전 안의 몇몇 신하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앞서 의금부가 읽은 대장간 장부에는 초아흐레 새벽 칼 서른 자루를 수레에 실었다고 적혀 있었다.그런데 최억쇠가 본 밤은 초여드레였다.“방금 뭐라고 하였느냐.”채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최억쇠가 대답하지 못했다.“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상자 하나가 넘어지며 칼집 든 칼이 보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상자 안의 칼이 정확히 서른 자루였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긴 상자가 다섯 개였습니다. 하나에 여섯 자루씩….”“상자를 열어 보고 말 한 것이냐?”“아니옵니다.”“그럼 누가 하나에 여섯 자루라고 말해 주었느냐?”최억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김태겸이 나섰다.“상자 수와 크기를 보고 짐작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마부로 오래 일한 자라면 무기 상자의 모양도 알았을 것입니다.”채원은 김태겸을 보지 않았다.“짐작한 숫자가 공교롭게도 다음 날 대장간에서 나왔다는 칼의 수와 같다는 말씀이군요.”“그 칼만 윤정명 사가에 있었다는 증거도 없지요.”“그렇다면 최억쇠에게 다른 무기를 보았다고 말하게 하셨어야 했습니다.”대전 안에서 짧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최억쇠의 시선이 바닥을 헤맸다.손등은 떨리고 있었다. 채원은 그 손이 예전처럼 고삐를 잡을 때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최억쇠.”임금이 불렀다.“네가 본 칼은 몇 자루였느냐.”사내는 답하지 못했다.“모른다면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47. 두 번째 목격자
김태겸의 말이 끝나자 대전 안이 술렁였다.“다른 목격자라니.”임금이 물었다.김태겸은 한쪽으로 비켜섰다.“윤정명 사가에서 오래 일했던 자입니다.집안이 무너진 뒤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이번 재조사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왔습니다.”“누가 그자를 데려왔느냐.”“의금부에 넘겼습니다. 오늘의 심문에는 의금부 관리들이 함께 지켜보게 하였습니다.”임금이 내관에게 손을 들었다.“들라 하라.”잠시 뒤,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의금부 나장 둘 사이로 들어왔다.오십 줄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허리를 깊이 굽히는 모양은 익숙했다.채원의 눈이 사내의 얼굴에서 멈췄다.낯이 익었다.기억이라기보다, 몸 어딘가에 남아 있던 감각이었다.비가 오던 날 마차를 대령하던 손. 어린 서아에게 말 안장에 오르는 법을 가르치며 웃던 목소리.“이름이 무엇이냐.”“최억쇠라 하옵니다. 윤정명 대감 댁에서 마부로 일했습니다.”사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의금부 당상이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윤정명 사가의 옛 호적과 마구간 인부 명단을 대조했습니다. 최억쇠는 십이 년간 그 집 마부로 적혀 있습니다.”임금의 시선이 사내에게 다시 향했다.“네가 달아난 뒤 어디에 있었느냐.”“서문 밖 장터를 떠돌았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짐을 나르며 살았습니다.”“그런 네가 어찌 병조판서를 찾아갔지.”최억쇠가 움찔했다.“제가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저를 아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윤정명 대감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다 하여… 제가 본 것을 말하면 되겠느냐 물었습니다.”김태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그자가 제게 온 까닭은, 예전에 병조에 말을 납품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의금부에 넘겼을 뿐입니다.”채원은 김태겸을 잠시 바라봤다. 너무 매끈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따져 물어도, 최억쇠가 그날 밤 무엇을 보았는지는 사라지지 않았다.“대감이 잡혀가던 날 밤,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저까지 붙들리면 아내와 아이도 죽을까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46. 초여드레의 증언
다음 날 대전에는 평소보다 많은 신하들이 들어와 있었다.채원은 이운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맞은편에는 김태겸이 서 있었다.어제 동궁에서 신태오가 칼을 꺼냈다는 보고를 들었을 텐데도, 그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대전 양옆에는 대신들만 서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사건 관련자만 들라는 명이었다.임금이 말했다.“윤정명 사건을 다시 살필 만한 근거가 있는지, 오늘 대전에서 듣겠다. 의금부는 기록을 읽어라.”의금부 당상이 앞으로 나왔다. 손에는 박칠성의 처음 진술과 대장간 장부, 수레 장부가 들려 있었다.“박칠성은 초여드레 밤, 윤정명 사가의 서쪽 창고에서 칼 여러 자루를 보았다고 진술했습니다.”당상이 첫 장을 내려놓고 다음 장을 폈다.“대장장이의 장부에는 초아흐레 새벽, 칼 서른 자루를 만들고 수레에 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무기값은 조필규의 마부가 냈고, 수레 역시 그 마부가 마련했습니다.”대전 안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일었다.“또한 그 마부는 수레를 윤정명 사가 근처까지 끌고 갔으며, 서쪽 담 부근에서 흉터가 있는 사내에게 넘겼다고 진술했습니다.”김태겸이 입을 열었다.“그 진술로 윤정명이 무죄가 됩니까.”당상이 고개를 숙였다.“아직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감.”“그렇다면 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미 끝난 일을 다시 어지럽히는 것입니까.박칠성은 칼 서른 자루만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고 안에 무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채원이 김태겸을 보았다. 그는 박칠성의 거짓말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그 진술의 빈틈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임금이 채원에게 시선을 옮겼다.“빈궁은 할 말이 있느냐.”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박칠성의 말 하나로 제 아비와 오라버니들은 죽었습니다.”대전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그가 본 무기가 무엇이든, 그는 무기가 들어오기 전날 이미 창고에서 봤다고 말했습니다.누군가에게 그날과 그 장소를 외워서 말하라 지시받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증언입니다.”대신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45. 다시 열린 대전
대전 문이 열리자 채원은 걸음을 늦췄다.임금은 어좌에 앉아 있었고, 귀비는 그보다 한 걸음 아래에 자리했다.귀비의 곁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옅은 연분홍 치마에 단정한 머리.눈길을 내리지도, 먼저 올리지도 않는 얼굴이었다.김서령이었다.채원이 대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여인은 채원의 옷자락과 손목을 살폈다.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는 시선과는 달랐다.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해야 자신에게 이로운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채원은 대전 가운데에 섰다.“빈궁, 신태오 별감을 잡았다 들었다.”임금의 목소리가 내려왔다.“예, 전하.”“병조 별감이 동궁 정문까지 와서 세자와 빈궁에게 칼을 겨눴다더구나.”“그자가 나인을 죽이려 한 자객의 명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려 했습니다.”귀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세자께서야 동궁의 일을 살피실 수 있습니다.하지만 빈궁이 직접 그 자를 대면할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이미 한 번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으셨습니까.”채원은 고개를 들었다.“그자가 저희집 사건을 입에 올렸습니다.”“이조판서 집안의 죄여부는 의금부가 다시 조사 중입니다. 빈궁이 앞장설 일은 아니지요.”“저희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입니다.”귀비의 미소가 아주 옅게 움직였다.“그래서 더 조심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조정에서는 빈궁이 아비의 일에만 매달려 동궁을 어지럽힌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임금이 채원에게 물었다.“신태오가 네게 무엇을 말했지.”“박칠성에게 초여드레 밤의 말을 시킨 자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대전 안이 조용해졌다.“누구냐.”“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자는 병조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귀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신태오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 아무 이름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자입니다.그 말 하나로 조정을 다시 흔들 수는 없습니다.”"저희 집안은 박칠성의 한마디로 가문이 몰락했습니다. 해서 저는 신태오의 말만 믿지 않을 것입니다."채원의 목소리는 흔들
Last Updated: 2026-09-08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벚꽃이 흩날리던 스무 살 봄. 놀이공원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남자, 강휘웅은 윤지호의 첫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 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호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뜻밖의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끝났다고 믿었던 첫사랑이 다시 찾아온 순간,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설렘과 그리움 사이. 잊고 있던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는 청춘 로맨스. 죽어 있던 연애세포를 깨우는 간질간질한 수채화 같은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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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외전3. 짧은 여유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외전2. 어느 하루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Last Updated: 2026-09-07
Chapter: 외전1. 결혼식날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83.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
Last Updated: 2026-09-05
Chapter: 82. 지호야
휴가 둘째 날, 다 함께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물놀이를 하거나 파라솔 아래 누워 여유를 즐겼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낯설던 리조트 풍경이, 하루 만에 벌써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오후 늦게, 지호는 잠시 바람을 쐬러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해가 조금씩 기울며, 바닷바람도 한결 선선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지호는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 지호를 발견한 진섭이 자연스럽게 옆에 따라붙었다.“같이 걸어도 돼요?”“네, 좋아요.”지호가 웃으며 자리를 내주듯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진섭이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두 사람은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여기 오니까, 예전에 우리 같이 갔던 우유니가 생각나요.”진섭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하늘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가,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연이었다.“저도 가끔 생각나요. 그때 그 새하얀 소금사막.”“그때는 정말, 평생 못 잊을 것 같았거든요. 지금도 그래요. 꼭 다시 한번 가 볼 거예요.”지호가 아득한 눈빛으로 수평선을 바라봤다.“지금이라도 가시게요?”진섭이 웃으며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사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지호가 웃으며 답했다.“그때는 마음이 복잡해서 그 풍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진섭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지호가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오래도록 곱
Last Updated: 2026-09-04
Chapter: 81. 포상휴가
〈가면의 집〉의 여파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종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관련 화제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가장 극적인 변화를 맞은 건 송경숙이었다.한동안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 침체기를 겪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보여 준 노련한 연기로 완전히 재평가받았다.각종 시상식에서 러브콜이 이어졌고, 인터뷰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는 날이 이어졌다.후배들 사이에서는 "역시 연기는 관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놀랍게도 종영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송경숙은 벌써 차기작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진섭에게도 변화는 마찬가지였다.각종 브랜드의 CF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영화 시나리오까지 몇 편이나 검토 중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무명에 가까웠던 배우가, 이제는 어디를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매니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제안서를 들고 진섭을 찾아왔다.정작 본인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직 얼떨떨한 눈치였다.지호에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러 제작사에서 차기작 논의를 위한 미팅 요청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 오는 전화, 쌓여 가는 제안서들. 개중에는 꽤나 매력적인 조건을 내건 곳도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놓칠세라 서둘러 일정을 잡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조금만, 정말 조금만 쉬고 싶다.'몇 달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원고와 씨름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던 수정 작업, 촬영장을 오가며 쌓인 피로, 방영 내내 마음을 졸이던 나날들.몸도 마음도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태였다.지호는 당장 다음 작품에 뛰어들기보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하기로 했다.그런 지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건 그즈음이었다.제작사에서 주요 배우와 작가진을 위한 포상휴가를 준비했다는 연락이었다.행선지는 동남아의 한 휴양지.촬영 내내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라며
Last Updated: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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