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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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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지호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0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 강채원은 사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죽고, 역모로 몰려 가문이 도륙된 세자빈 윤서아의 몸에서 눈을 뜬다. 배후는 늙은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노리는 귀비. 채원은 애원 대신 압도적 무력과 냉정한 계산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고, 아무도 믿지 않던 냉혹한 세자 이운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무너진다. 누명을 벗기고 복수하는 여정 끝에 왕좌 곁에 서는, 액션과 로맨스가 함께 가는 궁중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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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1. 중전의 선택
대전 앞뜰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중전의 말이 허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뜰에 모인 누구도 섣불리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대신들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까지 고개를 들었던 자들도 하나둘 시선을 떨궜다.이운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방금 그 한마디로 조정의 분위기가 통째로 뒤집힌 참이었다.그때 뒤쪽에서 걸어 나온 이가 있었다. 진원군이었다. 방금 당도한 듯, 걸음에 서두름이 없었다.대신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오나 마마, 신들은 그저……""더 들을 말은 없습니다."중전의 목소리가 그 말을 끊었다. 대신이 입을 다물었다."중전마마의 말씀, 지당하십니다."진원군이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신들이 공연한 걱정을 입에 담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진원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방금 전 오간 말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중전이 그를 바라봤다."대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다만 염려라는 것도, 한번 입 밖에 내면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지요.""중전마마께서 이리 나서 주시니, 저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전하의 보령이 염려스러운 때일수록, 왕실이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야지요."말은 더없이 공손했다. 하지만 진원군의 눈빛은 잠시도 중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마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대감의 뜻도 그러하시다니 다행입니다.""저야 늘 중전마마와 저하의 뒤를 든든히 받치고자 할 뿐입니다.""그 뜻, 전하께도 그대로 전해 드리고 싶군요. 지금 가장 듣고 싶어 하실 말씀일 테니."진원군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멈췄다."그리하지요. 중전마마의 뜻을 전하께 그대로 전해 올리겠습니다."이운은 그 짧은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승복이었지만, 속내까지 그러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중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눈은 웃지 않았다."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진원군이 다시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대신들도 뒤따라 흩어졌다.자리를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130. 위독
침전 안은 숨소리마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의가 밤새 맥을 짚고 또 짚었다. 손끝에 닿는 맥이 자꾸만 가늘어졌다.어의가 상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맥이 아침보다도 약해지셨습니다."상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말씀은……""오늘 내일을 넘기시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어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 밖에 낸 말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이 일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중전마마께만 먼저 아뢰어라.""예. 다른 이들에게는 전하께서 그저 기력이 쇠하셨다고만 하겠습니다."상선이 황급히 물러났다. 발걸음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그 소식은 그날 오후, 조정에 가장 먼저 닿았다.누군가 먼저 흘린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번지는 데는 한식경이면 충분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던 말이었다.병세가 깊다는 말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오늘 내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전하께서 며칠을 넘기기 어려우시다는 말이 사실입니까.""전하의 환후가 그리 깊으시다니……""국본께서 아직 조정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하신 터에, 이런 때일수록 종친 중 누군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그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국정에 공백이 생겨서는 아니 됩니다.""종친 중에서도 그만한 그릇을 지니신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누구도 이름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향은 분명했다.전에도, 또 얼마 전에도 똑같은 말이 나왔던 자리였다. 다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름은 하나로 모였고, 그때마다 모든 게 그 이름 쪽으로 기울었다.대전 한쪽에서 백건이 그 소문을 전했다."저하,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알고 있다.""저하, 지금 침전에 드시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상관없다.""종친이라는 말,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아니겠습니까."이운의 얼굴이 굳었다. 백건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129. 패를 쥔 신부
아침 햇살이 처소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 서령은 그 빛을 등지고 홀로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그림자도, 종이에 적혀 있던 날짜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이 되자 몸은 평소처럼 움직였다.겁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저쪽이 서령을 지켜보고 있다면, 서령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할 일은 따로 있었다.서령이 문갑을 열어 하객 명단을 꺼냈다. 직접 초대한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몇몇 이름 옆에는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혼례 명목으로 꾸몄지만, 실은 서령이 고른 사람들이었다. 얼굴만 비출 이름과, 쓸모가 남은 이름을 서령이 직접 가려낸 결과였다.명단을 넘기는 손끝이 익숙했다. 누가 누구에게 신세를 졌는지, 누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서령은 전부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서령의 손가락이 한 이름 위에서 멈췄다.조명환. 호조의 낭관. 몇 해 전 진원군의 도움으로 자리를 지킨 자였다. 그때 받은 도움을 잊지 못해, 서령의 초대에도 두말없이 응한 사람이었다.서령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한식경 뒤, 조명환이 처소 밖에서 기척을 냈다. 걸음을 서둘러 온 기색이 역력했다. 서령이 들라 일렀다."아씨께서 소인을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앉으세요. 긴 얘기는 아닙니다."조명환이 자리에 앉으면서도 눈치를 살폈다."무슨 일이신지요.""몇 해 전 대감께서 도와주신 일, 기억하고 계시지요."조명환의 얼굴이 굳었다."잊을 리가 있겠습니까.""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대감께 누가 될 일이라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조명환이 눈을 들었다."무슨 말씀이신지……"서령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래 날짜와 수량만 적혀 있고, 받는 이의 이름이 비어 있는 기록이었다."이 거래, 대감의 이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더 커지기 전에, 어느 상단이 맡았는지 조용히 알아봐 주세요."조명환이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대감 이름이…… 말씀이십니까.""아직은 확실치 않습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128. 갈라진 세 사람
문이 닫힌 뒤에도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등잔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언성이 오간 자리였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 틀린 말은 아니다."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처음부터 내가 잘못 짚었는지도 모르지.""지금 와서 그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재경이가 원하는 대로 당장 쳐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느냐.""그건 아니잖아요. 저하도 아시면서."이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알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은 그 말이 더 아프게 들렸다."채원이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금은 쫓아가지 마시라고요.""내버려 두라는 것이냐.""오라버니는 원래 혼자 해온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냥 둬요."이운이 입을 다물었다.내가 잘못한 건가.그 물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채원이 이운의 얼굴을 살폈다."자책하지 마세요. 그때 저하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신 거예요.""전부는 아니었다. 한 사람밖에 살리지 못했어.""그래서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이러시는 거잖아요."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채원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그래도 수사는 계속해야죠. 의금부 도사 쪽, 다른 방법으로라도요."이운이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을 다시 불러라."그 말에 두 사람 다 다시 탁자 앞에 앉았다. 재경이 비운 자리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탁자 위의 문서도 그대로 펼쳐진 채였다.재경은 그 길로 동궁을 나섰다.밤공기가 차가웠다. 걸음은 빨랐지만 방향은 없었다.누구도 뒤쫓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혔다.문득 어릴 적 담장이 떠올랐다. 횃불과 비명, 그리고 형님의 마지막 뒷모습. 그 담장 너머의 풍경은 지금도 선명했다.아버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 그 얼굴이 가장 오래 남았다.그날 살아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은 지금도 그대로였다.재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물증을 기다릴 시간, 저는 없습니다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127. 여섯 번째 사람
동궁 밀실, 탁자 위에 문서 더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의 서늘한 공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채였다. 다섯 사람 모두 뜬눈으로 밤을 지샌 얼굴이었다.백건이 마지막 묶음을 내려놓았다."한도겸 사건의 취조 기록입니다.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가져왔습니다."채원이 맨 위의 문서를 펼쳤다. 취조 날짜와 관련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몇몇 진술에는 붉은 먹으로 표시가 남아 있었다. 표시된 자리마다 진술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백건의 눈 밑에는 밤새 기록을 찾아낸 피로가 짙게 어려 있었다.규현이 그 옆에 최근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이운과 재경은 탁자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의 손끝을 지켜봤다. 어젯밤의 앙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밤에만 접선했고, 가명을 썼고, 전부 제삼자를 거쳤어요. 지금 수법이랑 똑같네요."재경이 그 말을 듣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제가 쫓던 그 돈줄도, 날짜를 보면 전부 그믐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더 급하게 느껴집니다."채원이 재경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 눈빛도 평소와 달랐다.채원이 옛 기록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잠깐만요. 이 사람, 죽은 뒤에도 물건을 받아 갔다고 되어 있어요."규현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사망한 날짜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습니다."채원이 다음 장을 넘겼다."이런 기록이 또 있습니까?"백건이 다른 문서 묶음을 끌어왔다."찾아보겠습니다."백건이 묶음을 펼쳐 이름과 날짜를 하나씩 맞춰 나갔다.한참 뒤, 백건이 고개를 들었다."같은 수법으로 받아 간 기록이 네 건 더 있습니다. 전부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입니다."규현이 그 수를 세어봤다."그럼 옛 기록에서만 다섯입니다."채원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채원이 규현이 가져온 현재 장부를 내려다봤다."혹시 이 장부에도 같은 수법이 있을까요?"규현이 장부를 다시 펼쳤다. 군량을 받아 간 자들의 이름과 병적에서 옮겨 적은 기록을 차례로 대조했다.한 줄에서 손이 멈췄다."……여기도 있군요."이운이 고개를
Last Updated: 2026-10-24
Chapter: 126. 오래된 이름
폐가 마당, 어둠이 짙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낡은 기와 조각이 발밑에서 서걱거렸다.백건은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늦췄다.그림자가 백건에게 달려들었다. 팔부터 붙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백건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상대가 품에서 짧은 검을 뽑아 막아냈다.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켰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규현이 다급히 장부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서다 돌부리에 걸렸다. 몸이 기울며 장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끼워 두었던 낱장 몇 개가 튀어나왔다. 규현이 손을 뻗었지만, 종이들은 이미 수풀 사이로 흩어져 있었다.백건이 다시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상대가 검을 거두며 외쳤다."그만! 나다, 멈춰라!"백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익숙한 목소리였다."...재경이냐?"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재경이었다. 소매 한쪽이 길게 찢겨 있었고, 그 아래 팔뚝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백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칼을 거두는 손이 떨렸다."다쳤구나.""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재경이 팔을 움켜쥐었다."자네인 줄 몰랐네.""대체 누굴 쫓고 있었던 것이냐?""의금부 도사에게 돈을 나르는 자. 이 담장을 넘기에 뒤따라왔는데 놓쳤어."백건이 담장 너머를 살폈다."그자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그때 규현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젠장. 기록이 사라졌네."규현은 수풀을 뒤졌지만 끝내 종이를 찾지 못했다. 달빛만 수풀 위로 희미하게 번졌다."최근 두 달 치일세.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백건의 표정이 굳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이 사라진 이상, 남은 장부만으로는 의혹을 입증하기 어려웠다.재경이 주위를 둘러봤다."여기서 더 지체하면 우리까지 들키겠네. 일단 자리를 뜨세."재경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칼부림이 오간 자리였다. 지체할수록 위험했다. 세 사람은 서둘러 폐가를 빠져나갔다.그날
Last Updated: 2026-10-23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시집살이와 일,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한 채 버텨온 세월이었다. 남처럼 대면대면 살아온 남편도, 사춘기를 핑계로 등을 돌린 자식도 제 편은 아니었다. 그 끝에 암까지 찾아왔을 때, 제이는 밤새 빌었다. 단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이번엔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눈을 떠보니 스물다섯의 몸, 20년 전이었다. 아픈 곳 하나 없는 몸으로 살아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고도 짜릿했다. 이제 현제이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도, 사랑도, 엄마도 이번엔 모두 내 뜻대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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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4. 다시 태어난 계절 ( 에필로그 )
바둑판 위로 흰 돌이 놓였다."거참, 요즘 애들 장사 수완은 도무지 못 따라가겠구나."정 회장이 낮게 웃으며 바둑돌을 매만졌다. 명예회장이 된 지도 어느덧 몇 해, 그는 이제 회사보다 이 작은 바둑판 위의 승부에 더 열을 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정지훈이 검은 돌을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저도 처음엔 걱정했습니다. 회사를 나가서 새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는요.""그러게 말이다."정 회장이 혀를 찼다."콜드체인 사업을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자기는 새 사업을 하겠다고 나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제이가 회사를 나선 건 이 년 전이었다. 콜드체인 시스템을 완전히 안정화시키고, 후임자에게 모든 걸 인수인계한 뒤, 그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사업을 시작했다.전국 각지의 숨은 맛집을 직접 발로 뛰어 찾아내고, 그 레시피를 밀키트와 간편식으로 재현해 판매하는 프리미엄 미식 브랜드였다. 흔한 반찬가게가 아니었다. 까다로운 품질 검증을 거친 식재료, 쉽게 접하기 힘든 희소한 품종들, 유명 맛집의 시그니처 메뉴를 그대로 재현한 간편식까지, 그녀만의 안목이 담긴 상품들이었다."지난달 실적, 보고받으셨습니까."정지훈이 바둑돌을 굴리며 물었다."봤지. 매출이 벌써 우리 초기 콜드체인 사업 때보다 낫더구나."정 회장이 흡족한 얼굴로 답했다."신선도 유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더라. 냉장, 냉동, 실온까지 상품 특성에 맞춰 따로 포장해서, 다음 날 새벽이면 문 앞에 도착한다지.""제이 씨답죠."정지훈이 웃으며 답했다."어설프게는 안 하는 성격이니까요."같은 시각, 도심의 한 사무실에서 제이는 신상품 시식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남의 한 소문난 식당에서 삼 대째 이어온 비법을 재현한 국물 요리였다. 그녀는 시식용 그릇을 하나씩 확인하며, 직원들에게 세심하게 지시를 내렸다."이 정도 온도면, 배송 중에도 맛이 흐트러지지 않을 거예요."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예리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저녁, 제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103. 두 사람의 시작
몇 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예식장을 정하고, 청첩장을 돌리고, 자잘한 준비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사이, 어느새 봄이 완연해져 있었다.결혼식 날 아침, 신부 대기실 거울 앞에 앉은 제이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듯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하얀 드레스, 곱게 올린 머리, 살짝 붉게 물든 뺨까지,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창밖으로는 이미 하객들이 하나둘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긴장되세요?"메이크업을 마무리하던 스태프가 화장솜을 정리하며 물었다."조금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스태프도 그런 그녀를 보며 따라 웃었다.그 긴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벅찬 설렘에 가까웠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대기실 문이 열리고 정 회장이 들어섰다.지팡이를 짚은 걸음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그는 한동안 말없이 제이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참 곱구나."정 회장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우리 가족이 되어줘서, 고맙다."뒤이어 정지훈이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따라 그의 옷차림도 평소보다 한층 정갈했다.그의 옆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조희진이 함께였다.결혼식 며칠 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조희진은 제이의 손을 꼭 잡으며 몇 번이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었다."예쁘다, 정말."조희진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는 제이의 손을 다시 한번 가만히 감싸 쥐었다."이렇게 좋은 날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정지훈은 그 옆에서 말없이 미소 지었다.식이 시작되기 직전, 준호가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제이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향했다.문이 열리자, 턱시도를 입은 준호가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잠시 숨을 멈춘 듯 굳어졌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이였지만, 오늘의 그녀는 또 다른 얼굴처럼 낯설고도 눈부셨다."예쁩니다. 정말로."그
Last Updated: 2026-09-19
Chapter: 102화. 다시 걷는 봄
퇴원 날 아침, 제이는 병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짐을 정리했다. 며칠 동안 머물렀던 병실이지만, 막상 떠나려니 묘한 아쉬움과 후련함이 동시에 밀려왔다."몸은 좀 어떠세요?"준호가 그녀의 짐가방을 대신 들며 물었다."많이 가벼워졌어요, 정말로."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컨디션도 아주 좋고요. 이렇게 빨리 퇴원할 줄은 몰랐어요."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회복도 예상보다 빨랐다. 퇴원 후 몇 가지 생활 수칙을 지키고, 정기적인 추적 검사만 잘 받으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제이는 그제야 마음 깊이 안도할 수 있었다.간호사가 마지막 퇴원 서류를 건네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짚어주었다. 준호는 그 하나하나를 꼼꼼히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넘기는 그의 손끝에는 조금의 소홀함도 없었다."당분간 무리한 운동은 피하시고, 식사도 천천히 규칙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물은 충분히 드시는 게 좋고요."간호사가 웃으며 덧붙였다."보호자분이 더 열심히 들으시네요."준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병원 로비를 지나 정문을 나서는 순간, 제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전생에서는 이 문을 이렇게 걸어 나가지 못했다.병원 냄새와 약 봉투, 점점 짧아지던 의사의 말.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제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 병실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던 그 마지막 계절도.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서늘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제 발로 이렇게 걷고 있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왜 그러세요?"준호가 걸음을 멈춘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스쳤다."아니에요."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냥, 이 순간이 새삼 감사해서요."병원을 나서는 길, 봄바람이 부드럽게 두 사람을 스쳤다."오늘은 집에 가서 쉬셔야 합니다."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드레스 한 벌 보는 것도 안 돼요?"제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안 됩니다.""한 시
Last Updated: 2026-09-18
Chapter: 101. 낯익은 얼굴
수술실 앞, 제이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이동 침대에 누워 있었다.형광등 불빛이 눈부시게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금방 끝날 겁니다."준호가 그녀의 손을 마지막으로 꽉 잡으며 말했다.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정말로."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아직 마취 전이라 정신은 또렷했다."오히려 준호 씨가 더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요.""티가 많이 납니까."준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수술실 밖에서, 결과 나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기다리겠습니다.아무 걱정 말고, 편안하게 다녀오세요."간호사가 다가와 이동 침대를 조용히 밀기 시작했다.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복도에 나직이 울렸다. 제이는 마지막으로 준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금방 다시 만나요."수술실 문 안으로 침대가 들어섰다.밝은 조명 아래, 마스크를 쓴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낯선 기계음과 소독약 냄새가 사방을 채웠다. 마취과 의사가 그녀의 팔에 조심스럽게 주삿바늘을 꽂았다."숫자를 거꾸로 세어보실래요? 열부터요.""열, 아홉, 여덟……."의식이 흐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여섯을 채 세기도 전에, 제이의 눈꺼풀이 힘없이 감겼다.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어렴풋이 들려온 기계음만이 희미하게 귓가에 맴돌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제이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마취가 덜 풀린 몸은 여전히 무겁고 나른했다.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자, 낯선 회복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병실 등급과 상관없이 잠시 함께 머무는 공용 공간이었다.커튼으로 구획된 침상들 사이로, 흐릿한 형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녀의 침상 바로 옆,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한 남자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지친
Last Updated: 2026-09-17
Chapter: 100. 낯익은 통증
건강검진 예약일 아침, 제이는 준호와 함께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이른 시간이었지만, 대기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긴장하지 마세요."준호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매년 이맘때쯤 받던 거잖아요.""긴장 안 해요, 정말로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차가웠다.회귀 전, 이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마흔다섯의 나이로 마주했던 그 진단명, 그리고 이미 손쓸 수 없었던 그 순간이.그때는 증상이 나타나고도 한참을 미루다가, 결국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았었다.이번 생에서는 다를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매년 거르지 않고 검진을 받아온 것도, 결국 그 오래된 두려움 때문이었다.간호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옅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진료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다녀올게요.""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준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답했다.그의 시선이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문을 향해 있었다.내시경 검사가 끝난 뒤, 의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흐릿한 모니터 화면 위로 위 내벽의 사진들이 여러 장 떠 있었다."위 안쪽에서 작은 병변이 하나 발견됐습니다."제이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그 단어가, 오래된 두려움을 순식간에 되살렸다."조직검사를 진행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크기나 위치로 봤을 때 초기 단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다행히 증상이 거의 없으셨는데도 이렇게 일찍 발견하신 게, 정말 다행입니다.보통은 이런 초기 병변은 스스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거든요."제이는 화면 속, 작게 표시된 그 병변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대기실로 나온 준호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왔다."어떻게 됐
Last Updated: 2026-09-17
Chapter: 99. 반가운 소식
다음 날 아침 일찍, 제이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어젯밤의 기억이 여전히 꿈결처럼 느껴졌다.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반지 위에 부딪혀 은은하게 빛났다."실감이 안 나요."그녀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준호가 그녀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네며 옅게 웃었다."저도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도,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연습까지 하셨어요?"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요.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대사를 맞춰봤는지 모릅니다.그런데도 막상 당신 얼굴을 보니까, 준비했던 말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그냥 말하게 되더군요."준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제이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다."준호 씨도 그렇게 긴장할 때가 있으시네요. 평소엔 그렇게 침착하시더니.""당신 앞에서는, 늘 그렇습니다."그날 오후, 두 사람은 정 회장의 본가를 함께 찾았다.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정지훈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이 집을 드나드는 그였다."저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 회장과 정지훈의 시선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 향했다.제이가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정 회장의 눈이 커졌다."이거…….""어제, 제가 청혼했습니다."준호가 담담히 말했다."제이 씨가, 받아주셨고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 회장의 얼굴에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그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드디어……."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드디어 좋은 소식을 듣는구나.요즘 이 늙은이한테 이런 기쁜 소식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지훈이가 돌아온 것도, 회사가 이렇게 자리 잡은 것도, 이제 너희 둘까지,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정지훈도 환하게 웃으며
Last Updated: 2026-09-16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한성유통 외동딸 윤서는 돈과 권력을 맞바꾼 정략결혼으로 정치 명문가의 아들 남태호와 결혼한다. 하지만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고, 결국 무정자증까지 밝혀진다. 윤서가 물려받을 막대한 재산을 탐내는 시어머니는 남씨 핏줄의 손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태호 아이가 아니어도 돼. 남씨 피만 섞이면 되니까.” 그녀가 고른 남자는 남편의 이복형제 배도혁. 시어머니는 두 사람을 한집에 가둔 채 명령한다. “임신하면 내보내 줄게.” 그렇게 남편의 형제와 아이를 가져야만 끝나는 끔찍한 동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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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 원본이 말한 것
봉인 테이프는 최미연의 변호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뜯겼다.디지털 분석실의 분석관이 외장하드를 복제 장비에 연결했다. 원본에는 손대지 않고 사본을 떠서 그 사본만 열어 보는 절차였다. 복제가 끝나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화면에 폴더 하나가 나타났다. 날짜별로 정리된 파일이 사흘 치였다. 카메라 번호가 붙은 영상과, 그와 별도로 저장된 음성 파일이 있었다.“스피커 송출 기록까지 따로 남아 있네요.”분석관이 말했다. 별장 녹화기는 카메라 영상과 스피커로 내보낸 소리를 함께 저장하는 장비였다.변호사의 얼굴이 굳었다.---첫날 파일은 오후 다섯 시 십이 분에서 시작했다.현관이 열리고 윤서가 들어왔다. 거실을 둘러보며 남편을 부르는 목소리.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 얼마 뒤 도혁이 들어오고, 문이 다시 잠겼다.그리고 스피커가 켜졌다.'둘 다 왔구나.'수사관은 음성 파일의 볼륨을 높였다. 최미연의 목소리는 녹음 파일 속 카페에서보다 훨씬 또렷했다.'태호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남씨 집안 대는 이어야 하니까.''윤서는 건강하고. 도혁이 너도 남씨 핏줄이잖아.'화면 속 윤서가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저 이런 거 안 해요. 문 여세요.'도혁이 현관으로 가서 문을 몇 번이고 밀었다. 스피커에서는 도혁의 출생과 윤서 아버지의 연구소 이야기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협박이었다.수사관이 메모를 멈췄다.“채윤서 씨 진술하고 단어 하나 안 틀리네요.”---그날 밤 영상은 짧았다.자정이 조금 넘어 두 사람이 이층 복도에 나란히 섰다. 도혁이 방 하나를 가리켰고, 윤서가 그 방으로 들어갔다. 도혁은 복도 반대편 끝 방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문이 닫혔다.다음 날 아침 일곱 시가 넘을 때까지 복도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둘째 날 밤도 같았다. 각자 다른 방, 닫힌 두 개의 문, 그리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복도.그사이 스피커는 몇 번이고 켜졌다. 아이 얘기, 협박, 회유. 그리고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안 합니다.---사흘 치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81화. 잠긴 서재
최미연은 여섯 시 반에 눈을 떴다.거의 자지 못했다. 밤새 머리맡에 둔 서랍 열쇠를 몇 번이나 손으로 확인했다. 날이 밝으면 외장하드를 꺼내 갤러리 수장고로 옮길 생각이었다. 작품 운송 상자 안이라면 누구도 열어 보지 않을 것이다.세안도 하지 않은 채 가운만 걸치고 서재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 복도는 아직 어두웠다.서재 문을 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맨 아래 서랍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한 번, 그리고 곧바로 또 한 번.최미연의 손이 멈췄다. 이 시간에 이 집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없었다.복도 쪽에서 가사도우미의 발소리가 들렸다. 체구가 작은 여자는 평소처럼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향하고 있었다.“열지 마.”최미연이 서재 문을 열고 낮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인터폰 화면 앞에 선 도우미가 얼어붙은 얼굴로 돌아봤다.“사모님, 경찰이라고…….”현관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최미연 씨 자택 맞습니까. 압수수색 영장 집행하러 왔습니다. 문 열어 주십시오.”최미연은 서재로 돌아섰다. 서랍에 꽂힌 열쇠가 그대로 보였다. 지금 저 서랍을 열어 외장하드를 꺼낸다 해도 숨길 곳이 없었다. 창밖 정원에도 이미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그녀는 열쇠를 뽑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서재 문을 닫았다.---수사관 다섯 명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맨 앞의 수사관이 영장을 펼쳐 보였다.“별장 감금 및 강요 사건, 그리고 남태호 씨 자택 카메라 설치 사건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실시합니다. 대상은 이 집 서재와 진성갤러리 관장실입니다.”“카메라 사건은 또 뭐예요. 그건 별장하고 상관없잖아요.”“두 사건 모두 피의자가 최미연 씨입니다. 별장 사건 수사팀이 영장을 신청하면서, 아드님 댁 카메라 사건을 맡은 팀의 압수 대상도 함께 묶어 청구했습니다. 그쪽은 카메라 설치와 관리에 관한 자료입니다.”“변호사부터 부르겠어요.”“부르셔도 됩니다. 집행은 진행합니다.”최미연은 휴대폰을 들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사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80. 별장의 목격자
경찰서 진술실에 들어온 남자는 모자를 벗어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예순 가까운 나이였다. 작업복 소매 끝이 해져 있었고, 손등에는 마른 흙이 남아 있었다. 산 중턱 별장의 관리동에서 몇 해를 살아온 사람이었다.“편하게 앉으세요. 오늘은 당시 상황을 확인하려고 모셨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수사관의 말에도 관리인은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쳤다. 경찰이 연락하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그였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아침이었다.“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채윤서 씨가 별장에 처음 도착한 날, 현관 앞에서 맞이한 사람이 선생님 맞습니까?”“네. 제가 맞았습니다.”“그때 채윤서 씨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관리인이 모자챙을 만지작거렸다.“남편분이 안에 계신다고 했습니다.”“안에 남태호 씨가 있었습니까?”“……없었습니다.”수사관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그럼 왜 그렇게 말씀하셨죠?”“사모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며느님이 오면 안으로 들여보내라고요.”“그다음엔요?”관리인은 한참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며느님이 거실로 들어가신 뒤에 제가 현관문을 잠갔습니다. 밖에서요.”진술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얼마 뒤에 배도혁 씨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을 열어 드리고, 들어가시자마자 다시 잠갔습니다.”“누가 시킨 겁니까?”“사모님이요. 며칠 전에 전화로 지시하셨습니다.”관리인은 그날의 통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본채 관리하는 사람은 다 빼라고 하셨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까지요. 저만 관리동에 남아서 문을 지키라고. 그리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님이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냉장고는요? 두 사람이 사흘 동안 먹은 음식은 어디서 나왔습니까?”“제가 채웠습니다. 사모님이 사흘은 버틸 만큼 넣어 두라고 하셔서요.”수사관이 고개를 들었다.“사흘이요? 처음부터 사흘이라고 하셨습니까?”“네. 그래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손님을 모시는데 왜 밖에서 문을 잠그라
Last Updated: 2026-10-25
Chapter: 79. 대체 배우
목요일 아침 여덟 시, 도혁은 소속사 차 뒷좌석에서 기사를 다시 읽고 있었다.밤사이 기사는 백 건을 넘겼다. 처음 실린 캡처 두 장이 제목만 바꿔 가며 끝없이 복사되고 있었다.“형, 그만 봐요.”운전석의 매니저가 백미러로 그를 봤다. 도혁은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법무팀장님한테 하나만 부탁해 줘요.”“뭘요?”“선배님 변호사한테 전해 달라고요. 오늘 회의에서 채윤서 씨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고.”매니저가 잠시 말이 없었다.“형 출연이 걸린 회의예요. 그런 얘기부터 전할 때예요?”“지금 제일 먼저 전해야 하는 얘기라서...”도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 속 C씨가 누구인지 세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 일은 영원히 두 사람의 밀회가 될 것이다.---열 시 정각, 제작사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테이블 한쪽에는 제작사 대표와 제작부장, 투자사에서 온 이사가 앉아 있었다. 감독은 창가 끝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제작사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할게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늘은 일정 얘기만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젯밤 기사가 나왔고, 아침부터 투자사 전화가 끊이질 않습니다.”“압니다.”제작부장이 서류 두 개를 내밀었다.“하나는 분량 조정안입니다. 배우님 출연 장면을 전체의 사십 퍼센트 정도 줄이는 안이에요. 다른 하나는…….”그가 두 번째 서류를 조금 늦게 밀었다. 표지에 적힌 제목은 짧았다.[대체 배우 검토안]배우 세 명의 이름과 일정이 표로 정리돼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도혁과 같은 소속사였다.“둘 다 검토 중이라는 겁니다.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도혁은 대체 배우 검토안을 덮고 분량 조정안을 펼쳤다. 잘려 나간 장면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대부분 주인공과 함께하는 장면이었다.“분량 조정은 받아들이겠습니다.”제작부장이 놀란 얼굴을 했다. 투자사 이사가 곧바로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그럼 이 합의서에도 서명해 주시죠. 일정 지연에 관한 정
Last Updated: 2026-10-24
Chapter: 78. 남아 있는 목소리
윤서는 오전에 낸 두 줄짜리 입장문이 기사로 옮겨지는 걸 차 안에서 확인했다. 댓글은 여전히 거칠었다. 그래도 어젯밤처럼 한쪽으로만 쏠리지는 않았다. 수사 중이라는 단어 하나가 사람들의 손을 조금 멈추게 하고 있었다.변호사 사무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기사 캡처 두 장이 출력돼 놓여 있었다.변호사는 그 옆에 서류철 하나를 펼쳤다.“먼저 현재 상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찰이 별장 관리업체에서 확보한 건 출입 기록과 차량 번호, 근무자 연락처입니다. 녹화 자료는 없습니다.”“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경찰이 확인했을 때 별장 녹화기는 초기화돼 있었고, 카메라도 이미 철거된 뒤였습니다. 원본은 없습니다.”윤서는 출력물 속 닫힌 문을 내려다봤다.“그런데 이 캡처는 있잖아요.”“그렇습니다.”“편집본이 있다는 건, 누군가 초기화 전에 복사했다는 뜻이에요.”윤서가 고개를 들었다.“그 별장에 카메라를 달고, 사흘 내내 그 화면을 보면서 스피커로 말한 사람. 그걸 가진 사람은 한 명이에요.”변호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도 같은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는 떠올린 이름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문제는 그게 추정이라는 겁니다. 최미연 씨가 원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 사흘을 최미연 씨가 지시하고 통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상무님과 배도혁 씨의 진술뿐이고요.”“진술 말고 다른 게 있으면요?”“있습니까?”윤서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파일 목록을 내리다 한 곳에서 손을 멈췄다.“별장에서 나온 뒤에 시어머니를 한 번 만났어요. 그때 녹음했어요.”변호사의 눈이 커졌다.“들어 보시겠어요?”카페의 소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찻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 그리고 최미연의 목소리.'이혼하지 마.'윤서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바라보며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다시 들어도 그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녹음은 이어졌다.'별장에서 그렇게까지 하고도요?''그건 방법이 잘못됐던 거고.
Last Updated: 2026-10-23
Chapter: 77. 윤서가 본 것
윤서가 기사를 본 건 자정이 조금 지나서였다.잠이 오지 않아 켜 둔 휴대폰에 회사 비서실장의 메시지가 먼저 들어왔다.[상무님, 기사 보셨습니까. 링크 보내드립니다.]링크를 누르자 흐릿한 캡처 두 장이 떴다. 별장 거실의 소파, 그리고 이층 복도 끝에서 닫히는 방문.모자이크 너머로도 자신이었다.윤서는 휴대폰을 쥔 채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부엌. 자신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 사진은 그 문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 들어와 있었다.윤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 붙지 않은 콧등이 욱신거렸다. 기사 본문을 끝까지 읽었다. 한성유통의 여성 임원 C씨. 사흘.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마지막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제작사는 내일 오전 배도혁의 출연 유지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다.내일이 아니었다. 시계는 이미 목요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오전이었다.윤서는 도혁의 번호를 띄웠다가 화면을 껐다.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변호사들이 서 있었다. 이 밤에 그가 받을 전화 중에서, 자신의 전화가 가장 위험할 터였다.대신 댓글 창을 열었다. 회사 이름, 직함, 시댁의 성까지 누군가 차례로 적어 올리고 있었다. 별장에 갇혀 있던 사흘이, 낯선 사람들의 손끝에서 밀회가 되어 가고 있었다.새벽 두 시,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괜찮니.]윤서는 한참 그 세 글자를 보다가 답했다.[괜찮아요. 주무세요.]괜찮지 않다는 걸 아버지도 알 것이었다. 그래도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고마웠다.---아침 일곱 시, 첫 전화는 홍보실장이었다.“상무님, 밤사이 기사가 서른 건 넘게 나왔습니다. 댓글에 실명까지 돌고 있습니다.”“알아요.”“일단 오전 중에 입장문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초안을 보내드려도 될까요?”“보내 주세요.”초안은 오 분 만에 왔다. 세 문단이었다. 회사와는 무관한 개인사, 당사자의 깊은 유감, 그리고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겠다는 약속.윤서가 답장을 쓰기
Last Updated: 2026-10-23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벚꽃이 흩날리던 스무 살 봄. 놀이공원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남자, 강휘웅은 윤지호의 첫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 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호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뜻밖의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끝났다고 믿었던 첫사랑이 다시 찾아온 순간,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설렘과 그리움 사이. 잊고 있던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는 청춘 로맨스. 죽어 있던 연애세포를 깨우는 간질간질한 수채화 같은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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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외전5. 다섯 살
유치원 정문 앞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흘러 있었다.색색의 풍선과 현수막이 걸린 마당에는, 새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과 그 손을 붙잡은 부모들로 가득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하늘은 유난히 맑고 청명했다.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지호도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그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엄마, 저기 봐! 풍선이야!”지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다섯 살이 된 지민이는, 어느새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서툴렀던 발음도, 이제는 제법 야무졌다.“그러네. 이따가 선생님이 나눠 주실 거야.”지호가 웃으며 지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줄지어 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바로 지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큰 키. 동그랗고 맑은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까지도.누가 봐도, 아빠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처음 지민이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나가던 다른 학부모들도, 지민이를 보며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많이 컸네.”옆에서 함께 걷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약간의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이제 곧 아이 곁을 떠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쉬운 눈치였다.그런 그의 모습이, 지호는 새삼 낯설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그러게. 벌써 다섯 살이라니.”지호도 감회에 젖은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처음 이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밤새 뒤척이던 신생아 시절, 열이 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들,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순간,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 주던 그날까지.그 하나하나가 지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그 조그맣던 아기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유치원에 입학하고 있었다.“선생님이랑 인사하고
Last Updated: 2026-09-10
Chapter: 외전4. 두 가지 소식
시간은 다시 한 계절을 지나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업실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린 건 오후 무렵이었다. 한창 원고 마감에 몰두하던 지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낯선 번호였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전화를 건 사람은 20살 지호가 응모했던 단편 공모전 관계자였다. 지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죄송한데, 어떤 일로…….”“그때 당선작이었던 「첫사랑」 있잖아요. 그 대본이, 이번에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됐어요.”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정말요? 그게, 진짜예요?”“네, 진짜예요. 제작사 쪽에서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판권 계약 관련해서 곧 연락드릴 거예요. 축하드려요.”몇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도, 지호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 오늘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며칠째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지호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진료실에 들어서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의사가 건넨 소식에, 지호는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한 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작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 지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이 소식을 어떻게, 언제 전해야 할지, 지호는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저녁에 조용히 이야기할지, 아니면 깜짝 놀래켜 줄지, 마음이 자꾸만 오락가락했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첫사랑」 소식이 겹쳐서 찾아온 것이었다.하루에 이렇게 큰 소식이 두 개나 겹치다니, 지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
Last Updated: 2026-09-09
Chapter: 외전3. 짧은 여유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외전2. 어느 하루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Last Updated: 2026-09-07
Chapter: 외전1. 결혼식날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83.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
Last Updated: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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