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색빛의 찌뿌둥한 하늘.
지들끼리 어깨동무하며 가득 뭉친 구름이 제 몸을 슬슬슬 잘라내는 중이다. 주르륵 주르륵 잠시간의 멈춤도 없이 내리는 비.비 덕분에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티셔츠는 여전히 눅눅했고, 수건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회색빛 구름들이 하늘을 덮었고, 바람은 하늘의 실수처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창문을 열자니 비가 오고,
닫자니 빨래 때문에 습하고.. 이를 어찌해야한다는 말인가.."노트 한 장을 찢어 종이 부채를 만든 뒤
안타까운 얼굴로 베란다 앞에 앉아 혼자 진지하게 상황극을 하는 하연."하연아.. 물 끓어.."
"경의 뜻대로 하겠소."
혼자 신나게 사극 놀이를 하던 하연이 지원의 말에 일어났다.
지원은 가디건을 걸친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가디건 위엔 목도리를 둘둘 감고, 머리엔 털방울 달린 비니까지 씌워져있었다. 하연이 억지로 우겨대며 자기 옷장을 탈탈 털어 지원에게 몽땅 뒤집어씌운 결과물이었다. 손에는 페퍼민트 차 대신 어제 지원이 하연에게 건내준 감기약과 해열제."아하, 잠깐만요."
지원은 종이부채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찻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꿀 한 스푼을 섞는다.
“자.. 꿀물 대령입니다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달한 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잔의 표면에 가만히 맺히는 김. 하연은 유리잔을 양손으로 감싸 밀어주며, 지원 앞에 살포시 앉았다.“꿀물 오랜만이네."
"언니가 나 어렸을 때 감기 걸리면 맨날 끓여줬잖아요. 언니표 감기용 특제 꿀물.”
힘없이 웃는 지원.
"..그때는 너 진짜 귀엽고 자그마한 아가였는데."
생글생글 웃는 하연.
"저 귀여워요?"
"..정정. 귀여웠었고 자그마했었던 아가였었지."
어이없다는 표정의 하연.
"뭐야. 그럼 지금은 그게 전부 다 아니란 소리?"
지원은 조심스레 뜨거운 꿀물을 후후 불어 마신다.
만족스러운 얼굴."몰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지원을 슬며시 째려보는 하연.
"그 아가가 이제 나보다도 더 커서,
직접 꿀물도 끓여주고. ..시간 참 빠르다, 정말.""..."
괜히 손만 내려다보며 꼬물거리던 하연.
문득, 지원에게 손을 건넨다."..나, 아직도 그때 생각나요. 오빠 장례식장에서 언니가 내 손 잡아줬을 때. 나 고아원 갈뻔한 거 언니가 데려가줬잖아요. "
"..그랬지."
하연이 건넨 손을 조심히 잡는 지원.
이젠 손 크기도 지원을 넘어서버린 하연. 지원은 하연의 손을 쓰다듬으며,"한치수 큰 교복 입고 벙벙하게 다니던 울보가 어느새 고3이라니..
내년이면 성인이라니. 아이고.."하연의 손을 내려두고 꿀물을 마시는 지원.
빨개진 귀로 괜히 딴청부리는 하연. 지원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스무살 되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스무살 되면요?"
"응. 남자친구라던지, 미팅이라던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운명같이 첫눈에 반하는 그런 것도 있고."
"..글쎄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왜 다 사랑 얘기 뿐?"다분히 의도적으로 킥킥거리는 지원.
"아, 우리 아가씨 모솔이었지.
미안, 미안."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하는 하연이다.
"뭐래, 나 인기 많거든요? 고백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귄 적은?"
"..."
"그럼 너가 모솔이지. 다른 게 모솔입니까?"
두 볼을 부풀리며 씩씩대던 하연.
"..좋아하는 사람은 있거든요?"
"정말? 진짜로?"
하연은 얼굴을 붉혀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걔가 누군데? 같은 반 애야?"
입술을 꼭 물고는 하연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몰라요.
근데 그 사람도 내가 자기 좋아하는지 모를 걸요.""흠.. 완전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랑중이시네요? 우리 아가씨?"
주먹을 꼬옥, 쥐고 두 눈을 빛내는 하연.
"..스무살 되면은, 고백할 거에요.
진짜 좋아한다고.""오, 멋있는데~"
마치 대견한 딸을 보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는 지원.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하연은,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나 억지로 밝게 웃으며"자자, 마저 꿀물이나 드십쇼! 내일은 고깃국을 대접해드리겠습니다요!"
"..너 이제 사극 드라마 좀 그만봐."
"싫어용."
*거실의 티비에서는 아홉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지원과 하연의 배경처럼 깔렸다. 지원은 소파에 기댄 채, 역시 하연이 강제로 건넨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고, 하연은 그 옆에 반쯤 누워 앉은, 상당히 불량한 자세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감기로 그렇게 고생했으면, 감기 걸려있는 사람이랑은 좀 떨어지시지요?”
“내성 생겨서 괜찮아요.
그리고 나 없으면 언니 심심할까봐. ”"근데 왜 이마가 이렇게 따끈따끈하실까?"
지원은 피할 틈도 없이,
하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차마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만화책 속에 얼굴을 파묻는 하연.
지원은 그대로 무심결에 하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은 뉴스에 몰입했다.
쿵 쿵 쿵
행여 입이라도 열면 이 격한 심장 소리 울려퍼질까,
꾹꾹 아랫입술 물어가며 참는 하연이었다.같지만 다른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정.
길고 조용한 시간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점심 무렵.
감기 기운 하나 없이 개운하게 깨어난 지원은 주방에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며칠간 하연과 간호하고, 간호받고를 주고받다보니, 미처 장을 보지 못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반찬통 두 개와 사과 한 알, 유통기한 조금 지난 요구르트 팩 하나. 그야말로 괴멸적인 상태. 지원은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동실을 열었다.“우리 김치볶음밥 해먹을까?”
“..언니 지난번에 김치볶음밥 만들다 김치에 불질렀잖아요. 난 119에 전화할뻔 했는데..”
“그건, 프라이팬이 문제였지. 내 문제는 아니었어.”
소파에 널브러져있던 하연은 지원이 도마와 칼을 꺼내는 소리에 급히 허리를 펴고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 지원보다 먼저 앞치마를 둘렀다.
"뭐야.. 이 무시받는 기분은.."
"..같이 하면 빠르잖아요. 헤헤.."
지원이 하연과 나란히 선 채, 다소 서툰 손놀림으로 김치를 꺼냈다.
하연은 칼을 들어 다진 김치를 다지다, 옆에서 어설프게 프라이팬을 달구는 지원을 슬쩍 바라봤다.“언니.”
“왜?”
"이런 주말도 나름 괜찮네요.”
“뭐가?”
“그냥..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적인 주말.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지원은 대꾸하는 대신,
올리브유가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하연이 다진 김치를 털어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이게 뭐 그리 대단한 하루라고.”
“저는 좋아요. 엄청 엄청. 많이 많이.”
하연은 칼을 내려놓고, 잠시 옆에서 김치 볶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글지글. 기름에 익는 김치 냄새, 타지 않게 주걱을 돌리는 지원의 손,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졌다."또 김치에 불내기 전에 밥이나 퍼오시죠?"
"넵."
부디 이런 시간이 영원했으면.
남몰래 하연은 바랐다.*
밥을 먹고 난 후, 둘은 나란히 베란다 창 앞에 앉아 있었다.
빨래 건조대를 만지작거리는 지원.“햇빛도 없고, 빨래도 안 마르고..
오늘 같은 날은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래도 밥은 먹었잖아.”
“우리 둘이 같이 한거니까요.”
지원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흐린 하늘, 덜 마른 셔츠, 습하고 축축한 공기. 그러다, 나른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너무 조용하면.. 가끔 무서워.”
하연이 돌아보았다.
“왜요?”
“아무 일도 없고, 그냥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면, 이 지구에 나 혼자 떨어진 외계인이 된 것 같거든.
되게 옛날부터 고립된 채로, 아무것도 없이 살아만 있는 것 같아서.”하연은 천천히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언니. 오늘은 저랑 있었잖아요.
내가 해줄게요. 외계인이랑 친구.”피식, 웃는 지원.
"근데 그럼 언니는 어디서 온 외계인인 거에요?
화성? 금성? 아니면 태양계 밖?""..쓸데없이 너무 구체적이네."
"모든 작품은 구체적인 설정이 기본값인 법."
"만화책 그만 봐."
"싫어용."
*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하연.
뻗친 손을 내리자 다시 눈꺼풀이 묵직하게 오르내렸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밤. 하연의 옆구리를 툭툭 치는 지원."착한 고3은 벌써 잠에 들었어야하는 시간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쿨하고 예쁘고 나쁜 고3이라.."
"아, 그러세요?"
하연의 손목을 붙잡고 하연의 방으로 끌고가는 지원.
하연은 쫄래쫄래 따라갈 뿐.하연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지원.
"으음.."
점점 눈꺼풀이 닫혀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하연의 눈깜빡임.
지원은 하연이의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잠시 토닥거려주다가"잘 자."
한 마디를 남기고 방 불을 끄며,
조심스레 문까지 닫고난 뒤에야 지원도 기지개를 켰다. 피곤한 얼굴로 티비를 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불 속에 파묻혀 바로 잠을 청하려다"아, 맞다."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검색을 시작한다.
"고3한테.. 좋은.. 음식.."
캡쳐까지 하며 블로그, 카페 글들을 읽는 지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른하고도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안엔 분명 두 사람의, 각자만의 처음이 있었다.난장판이 된 하연의 방.옷가지, 이불, 베개들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폭풍.그 어지러운 폭풍 한가운데에서, 나른한 향기 폴폴 풍겨대는 것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하연."내가.. 남는 베갯잇을 어디다가 뒀더라.."무릎으로 기어다니며 다시 한 번,방 안 구석구석 서랍 하나까지 뒤져보는 하연."이씨.. 베갯잇에 다리라도 달린거야, 뭐야.야, 이 정도면 눈치껏 나와라, 내가 작정하고 찾아야겠니? 넌 나한테 들키면 죽어, 그니까 빨리 순순히 자수하도록."베겟잇 세탁할 때가 되서 세탁기에 던져놓고,하얀 속베개에, 그 전에 미리 세탁해놓은 새 베갯잇을 씌우려고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에서 골똘히 생각에 집중하는데,"..방 안에 없나? 세탁기에 있나? 언니가 나 몰래 세탁기 돌렸나? 내 베갯잇만? 나 골탕먹이려고?!..그건 아니겠지. 그럼 어디있는거야 대체.."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질러진 방 안을 다시 정리하는 하연.팽개친 옷들을 다시 개고, 이불을 집어넣고, 베개들을 깔끔하게 털고 방 안을 정돈한다.태풍 속 같던 방 안이 다시 한 번 평화로운 밀밭처럼 깔끔히 잠잠해졌다."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나한테도 필살기가 있다는 말씀.."하연의 필살기란 바로.."언니! 내꺼 베갯잇 못봤어요?"거실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목소리."음.. 글쎄?아, 그거 저번에 빨래 갤 때 너껀 너가 정리한다고 방에 가져가지 않았어?""맞아요! 근데 방에 없어요!""내가 찾으면 너 큰일난다, 아주.""히잉."시무룩한 얼굴로 자기 방에서 나와 지원의 옆, 거실 소파에 털썩 쓰러지는 하연."빨래 갤 때던, 빨래 갠 거 가져갈 때던, 늘 두던 자리에 두라고 했지.""언니는 모르는 저만의 기분 전환 인테리어 방식이라구요.""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아무데나 쑤셔박는다고 하지, 아마?"뾰루퉁, 입술을 내밀며 쳇, 하는 하연."베개 빌려줘?""...""베개 없이 자면 불
장보기가 끝난 후, 둘은 마트 근처 벤치에 앉았다.커다란 장바구니는 발밑에 두었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꼭 오래된 친구처럼도 보였다."겨울에 아이스크림이라니.""원래 아이스크림은 겨울이 제철인 법이에요."하연은 장바구니를 슬쩍 발끝으로 찼다."왜 가만 있는 장바구니한테 시비 걸어."“발 심심해서요.그나저나 진짜 같이 살면 이런 느낌일까..”“우리 지금 같이 살고 있는데?”“아니, 그냥.. 더 오래. 진짜 가족처럼.”지원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갸웃했다.“지금도 충분히 가족 같은데.”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부르르, 떠는 하연.지원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하연의 패딩 지퍼를 목끝까지 올려준다."그니까 뭔 아이스크림이야.""원래 아이스크림은 추울 때 먹는 거에요.""..그건 그거고, 우리 가족 맞잖아. 같이 살고, 같이 먹고."“..그렇죠. 근데, 언니가 말하는 가족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사실 나도 잘 몰라.”지원은 웃었다.아이스크림이 살짝 녹아내렸다.하연이 그것을 보고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 주며, 무심히 말했다.“그래도 좋기는 좋아요. 명확한 이름 없이도 둘이 있을 수 있어서.”지원은 조용히 하연을 바라봤다.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하연의 귓가는 조금 붉었다.아이처럼, 혹은 어른처럼도 보이는 하연은,그 중간 어디쯤에서 애매하게 서 있는 사람 같았다.*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해 넣고, 둘이 함께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시계를 잠시 쳐다보고는 지원이 하연에게 물었다.“저녁은 뭐 먹고 싶어?”“음.. 언니가 해주는 거라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세상에서 그 말이 제일 무책임한 거야, 알아?아무거나만큼 무서운 대답은 없을걸.”“그러면.. 고등어 샀잖아요. 고등어 구워먹어요.”지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등어 구워줄게. 그 대신 너가 설거지 해.”입술을 삐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일주일 중 유이하게 알람이 울리지 않는 날. 언제나 소란스러운 집안이 조용하다.침대 위엔 곤히 자고있는 지원이 보인다.한줄기 햇빛이 서서히 기울어지다 지원의 감긴 두 눈위에 드러눕는다.움찔거리는 지원의 눈꺼풀.고개를 몇번이고 까딱거리다가 결국,"으으!"이불 속에서 온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켜는 지원.잠에서 깨어나고도 베개 위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뒹굴거리다, 손을 뻗어 침대 위를 더듬거리더니 잡힌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한다.10시 37분.멀거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지원.햇빛은 여전히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고, 창문 너머에선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원쪽을 바라보는 고양이.지원이 손을 흔들자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사라진다.지원도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새침하긴. 지가 고양이야, 뭐야."방 밖은 조용했다.하연이는 아직 자고 있나, 싶었지만, 싱크대 쪽에서 작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하연아?”잠긴 목소리.지원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반쯤 부은 얼굴로 거실로 나섰다.그러자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머리띠를 이마에 질끈 묶은 하연이,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 위를 행주로 박박 닦고 있었다.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휴, 하며 한숨을 내뱉는 하연의 눈에 잠에서 덜 깨보이는 듯한 지원이 보였다.“어? 언니 일어났어요?..상태가 어째.. 아직 제대로 일어나진 않은 것 같긴 한데, 아무튼.”다시 길게 하품을 뱉는 지원.“..너 무슨 행사라도 있어? 우리 집에서 오늘 뭐 하나? 파티? 미드에서 나오는 것처럼?왜 그렇게 아침부터 온 집 안을 때 빼고 광내시는지 물어봐도 되나?”“할 거 없는 주말엔 역시 대청소죠. 옛날에 오빠가 맨날 그랬거든요. 쉬는 날에 집 안 정리라도 좀 하라고.”“..그래, 그랬었지.”다시 하품을 하는 지원을 보고 하연은,“언니 아직 피곤해보이는데 좀 더 자요.”지원은 하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연의 약간 타긴 했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이 거실 식탁 위에 펼쳐졌다.계란프라이, 간장 두른 참치김치볶음, 애호박볶음, 그리고 진한 된장국.“오, 생각보다 비주얼은 나름 괜찮은데?”“‘생각보다’는 좀 빼주시죠. 뭔 생각을 하셨길래 그런 말이 나오시나요..”지원은 젓가락을 들었다.애호박볶음를 한 젓갈 집어먹어보고,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을 한 숟갈 떠먹어봤다.소금기가 살짝 강했지만, 왠지 그런 게 더 좋았다.하연의 어설픈 진심과 노력이 식사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해서.“맛있어.”“진짜요?”“응. 진짜 맛있어, 하연아.”그 말을 듣고나서야 하연도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그 순간, 둘은 동시에 조용히 웃었다.지원은 아무 말 없었지만, ‘고마워’라는 말이 눈빛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그저 묵묵히 하연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먹을 뿐.*그날 밤, 둘은 동네 카페에 앉아있었다.지원은 창가 쪽, 하연은 맞은편.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떼 사이에 놓인 건, 아마도 정적일테지만 그리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빨대로 라떼를 빙글빙글 돌리다, 얼음을 콕콕 찔러대던 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 진짜 싫어요?”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손끝을 탁자 위에 탁탁 두드리던 지원이 고개를 들어 하연과 눈을 마주쳤다. 의아한 얼굴.“무슨 오해?”“그러니까.. 우리 사이요.우리가 평범한 사이는 아니잖아요.전 새언니와 전 시누이가 단둘이 같이 사는게..조금, 아니, 조금 많이, 이상하잖아요.”지원은 잠시 생각하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흠.. 뭐, 남들이 보기엔 이상할법도 하지.그런데 어쩌겠어.우리 둘이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가 이렇게 버젓이 세상에 존재하는걸.물론 당연히 오해라면 싫지. 근데 오해가 아니라 착각이라면 좀 다를지도 몰라.”“착각?”“응. 착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 말이 맞다고 스스로 믿는 거잖아. 오해는 타인이 하니까 억울하고,그런데 착각은 본인이 지 마음대로 하
“언니, 오늘 일찍 끝난다 그랬나요?아닌가? 내일이었나?오늘 아니면 내일이었던 것 같은데.언니! 언제에요?! 네?!”하연의 목소리가 요란스럽게 거실을 가로질러 들려왔다.지원은 욕실에서 양치질을 마치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대답했다.“응, 오늘~ 원래 오후 일정들 좀 빡빡했는데, 마지막 거 하나 취소 됐다 했잖아.”“그럼.. 우리 저녁은 집에서 밥 먹어요. 제가 만들게요.”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리모컨을 누르며 티비를 틱틱, 채널을 바꿔대는 하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우리 집 유일한 고3님이 야자는 오늘도 그렇게 스무스하게 빠지시려고?""공부보다 언니가 더 소중한데 어떡해요.소중한 언니 잘못! 내 잘못 아님! 만약 쌤이 언니한테 전화하면 나 아프다 그래줘요~"지원은 거울 속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어제 하연이 시원이한테서 ‘커플 같아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 어쩐지 하연의 말투가 조금 더 다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니, 원래도 다정한 편이긴 했는데.. 그게 꼭 무언가를 굉장히 의식하고 던지는 말처럼 느껴졌다.괜히 튕겨보는 지원.“그래요. 근데요, 저기요, 고3님. 너 수능 얼마 안남은 거 알지요?”"그럼요.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합법적으로 술 마실 수 있는 날!"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원."..나는 거기까지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아무튼! 제가 저녁 준비할테니까 그렇게 아십쇼!갑자기 일이 잡힌다거나, 갑자기 회식 가야 된다거나, 갑자기 갑자기스러운 그런거 없기에요!꼭 빨리 오는 거에요! 만약 회사가 야근시키면 내가 가서 깽판놓을거임!""어떻게?""음.. 회사 문 손잡이들마다 식용유를 발라놓는다던지..?""네, 네~ 손바닥 미끌거리기 전에 퇴근할게요~"집 안에는 아침 특유의 잠잠한 햇살이 노크도 없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작은 베란다 창에 걸린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채 미처 다 말리지 못한 지원의 머리칼에도 잔잔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출근 복장인 정장과 셔츠를 옆에 두고, 지원은
“너가 여긴 웬일이냐. 학교 말고, 교복 안입고 밖에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어.. 이 이쁜 언니는 누구..?”시원은 자연스레 자리에 다가와 앉고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하연은 익숙한 듯 웃으며 말했다.“우리 오빠.. 아니, 오빠 와이프. 지원 언니. 언니, 이쪽은 내 친구 시원이에요. 내 유일한 친구.”시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리액션 좋은 건 고딩들 특징인가? 어딜가나 똑같네."반가워요."시원에게 손을 건네는 지원.시원이 두 손으로 악수를 받는다.그러나 둘이 손를 맞잡자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는 하연이다.“아..! 아, 맞다. 하연이한테 들었던거 같아요. 그 말대로 겁나 예쁘시네요.근데 진짜 친언니처럼 생겼다. 둘이 완전 잘 어울려요.”“응?”"..손은 좀 떼고 얘기하지?"하연이 직접 힘주어 둘의 손을 어거지로 떼어낸다.그러나 시원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그러니까.. 아, 뭐라 해야 되지? 아. 진짜 커플처럼? 어울린다고 해야 되나?얼굴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되나? 갑자기 맞는 표현이 생각이 안나네.”테이블에 일순간 찾아온 정적.카페의 백색소음 속에서도 시원의 말은 또렷했다.하연은 순간 커피를 들다 말고, 애매한 자세로 멈춰버렸다.지원은 웃으며 시원에게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가족이에요. 사이 좋은 새언니와 시누이.”“그럼 진짜 친한 새언니에요? 완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아요. 아, 아닌가? 드라마에서는 새언니랑 시누이면 완전 관계 박살나던데. 서로 죽일듯이 미워하고. 근데 언니랑 하연이는 되게 분위기 좋은 것 같아요. 오히려 친자매 바이브. 아닌가? 요즘 트렌드에는 이런데 더 드라마같을 수도? 약간 웹드라마 재질?""그럼요. 가족인데요. 세상 천지에 하나밖에 없는.그나저나 우리 하연이 학교에서는 좀 어때요?친구들은 많아요? 수업시간에 딴짓하지는 않죠?혹시 엎어져 잔다거나 하지는..?"뭔가 학부모 면담같은 느낌.하연의 째려보는 시선을 느끼고선 어쩌라고, 라는 듯이 말을 이어가는 시원."맨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