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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II

Penulis: 장순혁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4-01 14:57:26

회색빛의 찌뿌둥한 하늘.

지들끼리 어깨동무하며 가득 뭉친 구름이 제 몸을 슬슬슬 잘라내는 중이다.

주르륵 주르륵 잠시간의 멈춤도 없이 내리는 비.

비 덕분에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티셔츠는 여전히 눅눅했고, 수건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회색빛 구름들이 하늘을 덮었고, 바람은 하늘의 실수처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창문을 열자니 비가 오고,

닫자니 빨래 때문에 습하고..

이를 어찌해야한다는 말인가.."

노트 한 장을 찢어 종이 부채를 만든 뒤

안타까운 얼굴로 베란다 앞에 앉아 혼자 진지하게 상황극을 하는 하연.

"하연아.. 물 끓어.."

"경의 뜻대로 하겠소."

혼자 신나게 사극 놀이를 하던 하연이 지원의 말에 일어났다.

지원은 가디건을 걸친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가디건 위엔 목도리를 둘둘 감고, 머리엔 털방울 달린 비니까지 씌워져있었다.

하연이 억지로 우겨대며 자기 옷장을 탈탈 털어 지원에게 몽땅 뒤집어씌운 결과물이었다.

손에는 페퍼민트 차 대신

어제 지원이 하연에게 건내준 감기약과 해열제.

"아하, 잠깐만요."

지원은 종이부채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찻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꿀 한 스푼을 섞는다.

“자.. 꿀물 대령입니다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달한 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잔의 표면에 가만히 맺히는 김. 하연은 유리잔을 양손으로 감싸 밀어주며, 지원 앞에 살포시 앉았다.

“꿀물 오랜만이네."

"언니가 나 어렸을 때 감기 걸리면 맨날 끓여줬잖아요. 언니표 감기용 특제 꿀물.”

힘없이 웃는 지원.

"..그때는 너 진짜 귀엽고 자그마한 아가였는데."

생글생글 웃는 하연.

"저 귀여워요?"

"..정정. 귀여웠었고 자그마했었던 아가였었지."

어이없다는 표정의 하연.

"뭐야. 그럼 지금은 그게 전부 다 아니란 소리?"

지원은 조심스레 뜨거운 꿀물을 후후 불어 마신다.

만족스러운 얼굴.

"몰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지원을 슬며시 째려보는 하연.

"그 아가가 이제 나보다도 더 커서,

직접 꿀물도 끓여주고.

..시간 참 빠르다, 정말."

"..."

괜히 손만 내려다보며 꼬물거리던 하연.

문득, 지원에게 손을 건넨다.

"..나, 아직도 그때 생각나요. 오빠 장례식장에서 언니가 내 손 잡아줬을 때. 나 고아원 갈뻔한 거 언니가 데려가줬잖아요. "

"..그랬지."

하연이 건넨 손을 조심히 잡는 지원.

이젠 손 크기도 지원을 넘어서버린 하연.

지원은 하연의 손을 쓰다듬으며,

"한치수 큰 교복 입고 벙벙하게 다니던 울보가 어느새 고3이라니..

내년이면 성인이라니. 아이고.."

하연의 손을 내려두고 꿀물을 마시는 지원.

빨개진 귀로 괜히 딴청부리는 하연.

지원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스무살 되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스무살 되면요?"

"응. 남자친구라던지, 미팅이라던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운명같이 첫눈에 반하는 그런 것도 있고."

"..글쎄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왜 다 사랑 얘기 뿐?"

다분히 의도적으로 킥킥거리는 지원.

"아, 우리 아가씨 모솔이었지.

미안, 미안."

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하는 하연이다.

"뭐래, 나 인기 많거든요? 고백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귄 적은?"

"..."

"그럼 너가 모솔이지. 다른 게 모솔입니까?"

두 볼을 부풀리며 씩씩대던 하연.

"..좋아하는 사람은 있거든요?"

"정말? 진짜로?"

하연은 얼굴을 붉혀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걔가 누군데? 같은 반 애야?"

입술을 꼭 물고는 하연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몰라요.

근데 그 사람도 내가 자기 좋아하는지 모를 걸요."

"흠.. 완전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랑중이시네요? 우리 아가씨?"

주먹을 꼬옥, 쥐고 두 눈을 빛내는 하연.

"..스무살 되면은, 고백할 거에요.

진짜 좋아한다고."

"오, 멋있는데~"

마치 대견한 딸을 보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는 지원.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하연은,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나 억지로 밝게 웃으며

"자자, 마저 꿀물이나 드십쇼! 내일은 고깃국을 대접해드리겠습니다요!"

"..너 이제 사극 드라마 좀 그만봐."

"싫어용."

*

거실의 티비에서는 아홉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지원과 하연의 배경처럼 깔렸다.

지원은 소파에 기댄 채, 역시 하연이 강제로 건넨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고, 하연은 그 옆에 반쯤 누워 앉은, 상당히 불량한 자세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감기로 그렇게 고생했으면, 감기 걸려있는 사람이랑은 좀 떨어지시지요?”

“내성 생겨서 괜찮아요.

그리고 나 없으면 언니 심심할까봐. ”

"근데 왜 이마가 이렇게 따끈따끈하실까?"

지원은 피할 틈도 없이, 

하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차마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만화책 속에 얼굴을 파묻는 하연.

지원은 그대로 무심결에 하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은 뉴스에 몰입했다.

쿵 쿵 쿵

행여 입이라도 열면 이 격한 심장 소리 울려퍼질까,

꾹꾹 아랫입술 물어가며 참는 하연이었다.

같지만 다른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정.

길고 조용한 시간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

다음날, 점심 무렵.

감기 기운 하나 없이 개운하게 깨어난 지원은 주방에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며칠간 하연과 간호하고, 간호받고를 주고받다보니, 미처 장을 보지 못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반찬통 두 개와 사과 한 알, 유통기한 조금 지난 요구르트 팩 하나.

그야말로 괴멸적인 상태.

지원은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동실을 열었다.

“우리 김치볶음밥 해먹을까?”

“..언니 지난번에 김치볶음밥 만들다 김치에 불질렀잖아요. 난 119에 전화할뻔 했는데..”

“그건, 프라이팬이 문제였지. 내 문제는 아니었어.”

소파에 널브러져있던 하연은 지원이 도마와 칼을 꺼내는 소리에 급히 허리를 펴고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 지원보다 먼저 앞치마를 둘렀다.

"뭐야.. 이 무시받는 기분은.."

"..같이 하면 빠르잖아요. 헤헤.."

지원이 하연과 나란히 선 채, 다소 서툰 손놀림으로 김치를 꺼냈다.

하연은 칼을 들어 다진 김치를 다지다, 옆에서 어설프게 프라이팬을 달구는 지원을 슬쩍 바라봤다.

“언니.”

“왜?”

"이런 주말도 나름 괜찮네요.”

“뭐가?”

“그냥..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적인 주말.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지원은 대꾸하는 대신,

올리브유가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하연이 다진 김치를 털어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하루라고.”

“저는 좋아요. 엄청 엄청. 많이 많이.”

하연은 칼을 내려놓고, 잠시 옆에서 김치 볶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글지글.

기름에 익는 김치 냄새, 타지 않게 주걱을 돌리는 지원의 손,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졌다.

"또 김치에 불내기 전에 밥이나 퍼오시죠?"

"넵."

부디 이런 시간이 영원했으면.

남몰래 하연은 바랐다.

*

밥을 먹고 난 후, 둘은 나란히 베란다 창 앞에 앉아 있었다.

빨래 건조대를 만지작거리는 지원.

“햇빛도 없고, 빨래도 안 마르고.. 

오늘 같은 날은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래도 밥은 먹었잖아.”

“우리 둘이 같이 한거니까요.”

지원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흐린 하늘, 덜 마른 셔츠, 습하고 축축한 공기.

그러다, 나른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너무 조용하면.. 가끔 무서워.”

하연이 돌아보았다.

“왜요?”

“아무 일도 없고, 그냥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면, 이 지구에 나 혼자 떨어진 외계인이 된 것 같거든.

되게 옛날부터 고립된 채로, 아무것도 없이 살아만 있는 것 같아서.”

하연은 천천히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언니. 오늘은 저랑 있었잖아요.

내가 해줄게요. 외계인이랑 친구.”

피식, 웃는 지원.

"근데 그럼 언니는 어디서 온 외계인인 거에요?

화성? 금성? 아니면 태양계 밖?"

"..쓸데없이 너무 구체적이네."

"모든 작품은 구체적인 설정이 기본값인 법."

"만화책 그만 봐."

"싫어용."

*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하연.

뻗친 손을 내리자 다시 눈꺼풀이 묵직하게 오르내렸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밤.

하연의 옆구리를 툭툭 치는 지원.

"착한 고3은 벌써 잠에 들었어야하는 시간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쿨하고 예쁘고 나쁜 고3이라.."

"아, 그러세요?"

하연의 손목을 붙잡고 하연의 방으로 끌고가는 지원.

하연은 쫄래쫄래 따라갈 뿐.

하연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지원.

"으음.."

점점 눈꺼풀이 닫혀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하연의 눈깜빡임.

지원은 하연이의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잠시 토닥거려주다가

"잘 자."

한 마디를 남기고 방 불을 끄며,

조심스레 문까지 닫고난 뒤에야 지원도 기지개를 켰다.

피곤한 얼굴로 티비를 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불 속에 파묻혀 바로 잠을 청하려다 

"아, 맞다."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검색을 시작한다.

"고3한테.. 좋은.. 음식.."

캡쳐까지 하며 블로그, 카페 글들을 읽는 지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른하고도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안엔 분명 두 사람의, 각자만의 처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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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건 II

    다음 날 저녁, 지원은 하연을 데리고집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언니, 진짜로.. 집 보러 다니는 거예요?”“우리 둘이 살 집.이왕이면 창문 큰 데로.”부동산 직원은 둘을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은 듯단순히 자매쯤으로 여겼다.그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씁쓸했다.“두 분이 함께 지내실 거면, 이 집 구조 괜찮을 거예요.”하연은 집 도면을 바라보다작게 중얼였다.“함께라는 말, 되게 좋네요.”*밤, 돌아오는 길.지원은 문득 물었다.“진짜 괜찮아?”“뭐가요?”“사람들 말, 가족 반응, 미래 불확실한 거..그 모든 걸 다 감수하면서 나랑 같이 사는 거.”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언니.”“응?”“우리 언제부터 당연하게 같이 살 생각했는지기억 안 나요.근데 그만큼..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나 봐요.”“무슨 마음?”“이 사람이랑은,어떤 불편도 같이 견뎌보고 싶다.. 그런 마음.”*그날 밤, 둘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로를 바라보다가지원이 말했다.“이게.. 사랑을 미래로 옮기는 과정인가 봐.”“조금 불편하고,조금 불안하지만,그럼에도 계속 가고 싶은 길.”하연이 웃었다.“언니,우린 이미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마음부터.”사랑은 가벼운 설렘을 지나조금씩 삶이 되고 있었다.현실의 무게를 느끼며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그것이 바로,사랑을 진짜 미래로 데려가는 일이라는 걸두 사람은 이제야 알게 됐다.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건 I

    봄이 깊어가는 어느 평일 저녁.퇴근 후의 서울은 따뜻하고 붐볐다.지원과 하연은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한강 근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따끈한 파스타와 와인이 놓였다.“요즘엔 어때요? 일.”하연의 질문에, 지원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복잡해.새 프로젝트 맡았는데, 이직 고민도 같이 하니까 머리가 아프더라.”“이직하면.. 회사 근처로 이사 가요?”지원은 하연을 바라봤다.“그 얘기, 하려고 했어.”“ .응?”“이직하면, 좀 더 외곽으로 갈 수도 있어.조용하고, 넓은 집.너랑 같이 살기 더 편한 곳으로.”하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진짜요?”“응. 우리, 이제 진짜 함께 사는 걸한 번 제대로 해보자.”하연은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 조용히 웃었다.“그거, 좀 감동이에요.”“감동만?”“..그리고 좀.. 무서워요.”지원은 고개를 갸웃했다.“왜?”“같이 살고, 미래를 계획한다는 게좋기만 한 게 아니니까.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을지도 몰라요.”지원은 그 말에 진지해졌다.“하연아,너한텐 아직 먼 이야기일 수도 있어.나보다 경험도 적고,이런 관계를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렵잖아.”“응..”“하지만 나한텐 네가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가장 오래 옆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야.”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식사 후, 한강을 따라 걸으며지원이 말했다.“나는 가끔..우리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너한텐 짐이 될까 봐 걱정돼.”“왜요?”“사람들이, 너한테 뭐라 하진 않아?”하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끔 친구들이 물어봐요.‘요즘 누구 만나?’ 같은 거.”“그리고?”“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정도로 말해요.”지원은 하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손을 천천히 잡았다.“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거야.”하연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언니,그런 거 다 감수하고도,나는 언니랑 있는 게 훨씬 좋아요.”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조용한 흔들림의 징조 II

    식탁에 앉은 둘 사이엔오랜만에 낯선 공기가 감돌았다.“하연아.”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요즘 무슨 일 있어?”하연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요. 그냥..언니가 자꾸 멀리 느껴져서요.”“멀리?”“언니가 바쁜 거 아는데,그래도.. 난 가끔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요.”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도 그래.너무 좋아서,그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어.”“..그게 왜요?”“너한텐 나 하나뿐인데,나는 너한테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하연은 그 말에 눈을 감았다.“근데 언니.그런 식이면.. 나도 언니한텐 하나뿐이에요.나도 언니 잃는 게 무서운 사람인데.”지원은 고개를 숙였다.말없이 하연의 손등을 감싸며,이런 감정이 꼭 싸움처럼 커지지 않게 조심하려 애썼다.“우리,서로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가끔 오해를 부르나 봐.”“맞아요.그게 문제예요.우린 서로 너무 좋아해서,작은 틈에도 금이 가는 것 같아요.”그날 밤,지원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잠든 줄 알았던 하연의 어깨에조심히 이마를 댔다.“다음부턴 꼭 말해줘.혼자 서운해하지 말고.”“..응.”“그리고, 나 너한테 멀어질 생각 없어.아무리 바빠도,항상 너한테 돌아올 거야.”하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알아요.그래서 아직, 괜찮아요.”사랑이란 게늘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작은 불안, 사소한 틈,말 한마디가 못다한 감정들.그럼에도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다시 손을 내미는 일.그게 결국,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침대 위 두 사람의 온도는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었다.그리고 그 조용한 흔들림을 지나그들은 다시,조금 더 단단해졌다.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조용한 흔들림의 징조 I

    일요일 저녁.비가 내렸다.계절의 틈에 걸친 봄비는 유난히 차가웠고,거리는 젖은 우산들로 가득했다.지원은 작업실에서 평소보다 늦게 나왔다.회의가 길어졌고, 클라이언트 요청으로 급하게 수정할 게 생겼다.조용히 휴대폰을 확인하니하연에게서 온 메시지가 여러 개.[하연오늘 비 와요][하연우산 챙겼어요?][하연밥은요?]그리고 마지막으로,2시간 전의 메시지 하나.[하연저 먼저 잘게요조심히 와요]지원은 괜히 마음이 쿡 찔렸다.별말 아닌데도,그 “조심히 와요”라는 말 속에뭔가 지친 숨결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집에 들어섰을 때,하연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불은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TV는 무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안 잤네.”지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기다리다가, 그냥 멍하니 있었어요.”지원은 코트를 벗으며 다가갔다.“미안. 회의가 길어졌어.”“괜찮아요. 그런 줄 알았어요.”하연은 웃었지만,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늦은 저녁, 식사는 시켜 먹기로 했다.지원이 주문을 하고,하연은 아무 말 없이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라면 먹게?”“그냥.. 배고파서 먼저 먹을게요.”“말하지. 방금 주문했는데.”“말해도 바뀌는 거 없잖아요.”지원은 그 말에 순간,작은 파문처럼 퍼지는 감정을 느꼈다.서운함,그리고 죄책감.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사랑은 어쩌면, 습관처럼 II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지원은 하연이 장바구니에 몰래 넣어둔 딸기 우유를 발견했다.“이거 또 넣었지?”“왜요? 언니 좋아하잖아요.”“...”“언니는, 아기입맛이 귀여운 거 모르죠.”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장바구니를 바꿔 들었다.“무겁다. 내가 들게.”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말했다.“언니, 나 요즘 진짜 많이 웃는 거 같아요.”“그래?”“네.이런 거.. 너무 좋잖아요.별거 아닌 거, 같이 하고아무 일 없어도 같이 있고.”지원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바람에 잔머리가 흩날리고,그늘 아래에도 미소가 묻어 있었다.“..나도 그래.”*밤.샤워를 마친 하연은 드라이기 소리를 줄이며 말했다.“언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지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덮고,잠시 고개를 기울였다.“사랑?글쎄..하루에도 몇 번씩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고,그걸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네가 알아줄 것 같아서 안심하는 마음?”“..너무 좋다.”하연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지원 옆에 앉았다.“나는요,사랑이란 게 꼭 타오르는 불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오히려 이렇게..습관처럼, 다정하게 흘러가는 게 더 어렵고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해요.”지원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했다.“그럼 우리, 지금 사랑 잘하고 있는 거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어 말했다.“매일매일, 더 잘하고 있어요.”*불을 끄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잠드는 밤.다정한 말보다,익숙한 숨소리와나란히 있는 손끝이 더 진하게 사랑을 말해주는 시간.함께 사는 일이 사랑을 습관처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사랑했기에 이 모든 습관이 더없이 특별해진 거였다.그리고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두 사람의 가장 빛나는 날로 남는다.내일도,아무 일이 없어도,둘은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사랑은 어쩌면, 습관처럼 I

    “언니, 양말 또 뒤집어 놨죠.”하연의 목소리가 조용한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세탁기 앞에서 양말을 정리하던 그녀는익숙한 포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지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잼을 바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알아요. 근데 오늘에만 벌써 세 번째잖아요.”하연은 양말을 뒤집으며 웃었다.투덜거리지만,표정엔 지겨움보다는 익숙한 다정함이 스며 있었다.지원은 뻔뻔하게 말했다.“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하면?”“그럼.. 평생 내가 뒤집어줘야죠, 뭐.”“그 말, 녹음해놔야겠다.”*주말 아침,햇살이 창문을 가득 메웠다.하연은 청소기를 돌리고,지원은 커피를 내렸다.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말이 없어도, 따로 말하지 않아도동선이 겹치지 않는 건오랜 습관처럼 몸에 밴 리듬이었다.“우리, 완전 부부 같지 않아요?”하연이 말했다.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닦으며.지원은 고개를 돌렸다.“뭐야, 갑자기.”“아니, 그냥.서로 뭐 안 물어봐도뭐 필요한지 아는 거 보면 그렇잖아요.”지원은 조용히 웃었다.“그러게.우리 그렇게 됐네.”*점심 무렵, 동네 마트에 함께 나섰다.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길,길가에 핀 유채꽃을 하연이 먼저 발견했다.“언니, 저거 봐요.”“음. 벌써 봄 같네.”“봄이 아니라, 이제 진짜 봄이에요.입춘도 지났고.”“그럼 우리도 새 계절에 맞게 바꿔볼까?”“뭐요?”지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이불.너 그 핑크색 이제 좀 지겹지 않아?”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거 언니가 골랐잖아요.귀엽다고.”“지금은 네가 더 귀여우니까이불은 바꿔도 돼.”하연은 터질 듯 웃었다.“아 진짜, 언니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습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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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아침.희미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며 방 안에 부드러운 금빛을 제멋대로 흩뿌리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봄바람은 아직 마음 속에서 겨울을 오롯이 보내지는 못했다는듯 아직까지는 살짝 싸늘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닿는 온도가 묘하게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하연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눈을 떴다. 아직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따사로워서,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커튼을 젖히자,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이제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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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이렇게 살 것 같던, 각자 눈코뜰새없이 바쁘던 평일들을 견디며 보내고, 일요일 오전.세상 평화로운 햇살은 미지근하게 투명한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고, 아파트 벽에 부딪혀 반사된 빛은 따뜻한 빛으로 거실 바닥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런 느긋한 오전, 하연의 방에서는 아주 희미하고 일정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흐응.."이리저리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그에 더해 코를 고는 건지, 숨을 고르는 건지 모를 조용한 소리는, 오히려 방 안의 적막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언니."지원은 이불 속에 몸을 반쯤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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