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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II

Author: 장순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1 14:57:26

회색빛의 찌뿌둥한 하늘.

지들끼리 어깨동무하며 가득 뭉친 구름이 제 몸을 슬슬슬 잘라내는 중이다.

주르륵 주르륵 잠시간의 멈춤도 없이 내리는 비.

비 덕분에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티셔츠는 여전히 눅눅했고, 수건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회색빛 구름들이 하늘을 덮었고, 바람은 하늘의 실수처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창문을 열자니 비가 오고,

닫자니 빨래 때문에 습하고..

이를 어찌해야한다는 말인가.."

노트 한 장을 찢어 종이 부채를 만든 뒤

안타까운 얼굴로 베란다 앞에 앉아 혼자 진지하게 상황극을 하는 하연.

"하연아.. 물 끓어.."

"경의 뜻대로 하겠소."

혼자 신나게 사극 놀이를 하던 하연이 지원의 말에 일어났다.

지원은 가디건을 걸친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가디건 위엔 목도리를 둘둘 감고, 머리엔 털방울 달린 비니까지 씌워져있었다.

하연이 억지로 우겨대며 자기 옷장을 탈탈 털어 지원에게 몽땅 뒤집어씌운 결과물이었다.

손에는 페퍼민트 차 대신

어제 지원이 하연에게 건내준 감기약과 해열제.

"아하, 잠깐만요."

지원은 종이부채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찻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꿀 한 스푼을 섞는다.

“자.. 꿀물 대령입니다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달한 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잔의 표면에 가만히 맺히는 김. 하연은 유리잔을 양손으로 감싸 밀어주며, 지원 앞에 살포시 앉았다.

“꿀물 오랜만이네."

"언니가 나 어렸을 때 감기 걸리면 맨날 끓여줬잖아요. 언니표 감기용 특제 꿀물.”

힘없이 웃는 지원.

"..그때는 너 진짜 귀엽고 자그마한 아가였는데."

생글생글 웃는 하연.

"저 귀여워요?"

"..정정. 귀여웠었고 자그마했었던 아가였었지."

어이없다는 표정의 하연.

"뭐야. 그럼 지금은 그게 전부 다 아니란 소리?"

지원은 조심스레 뜨거운 꿀물을 후후 불어 마신다.

만족스러운 얼굴.

"몰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지원을 슬며시 째려보는 하연.

"그 아가가 이제 나보다도 더 커서,

직접 꿀물도 끓여주고.

..시간 참 빠르다, 정말."

"..."

괜히 손만 내려다보며 꼬물거리던 하연.

문득, 지원에게 손을 건넨다.

"..나, 아직도 그때 생각나요. 오빠 장례식장에서 언니가 내 손 잡아줬을 때. 나 고아원 갈뻔한 거 언니가 데려가줬잖아요. "

"..그랬지."

하연이 건넨 손을 조심히 잡는 지원.

이젠 손 크기도 지원을 넘어서버린 하연.

지원은 하연의 손을 쓰다듬으며,

"한치수 큰 교복 입고 벙벙하게 다니던 울보가 어느새 고3이라니..

내년이면 성인이라니. 아이고.."

하연의 손을 내려두고 꿀물을 마시는 지원.

빨개진 귀로 괜히 딴청부리는 하연.

지원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스무살 되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스무살 되면요?"

"응. 남자친구라던지, 미팅이라던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운명같이 첫눈에 반하는 그런 것도 있고."

"..글쎄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왜 다 사랑 얘기 뿐?"

다분히 의도적으로 킥킥거리는 지원.

"아, 우리 아가씨 모솔이었지.

미안, 미안."

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하는 하연이다.

"뭐래, 나 인기 많거든요? 고백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귄 적은?"

"..."

"그럼 너가 모솔이지. 다른 게 모솔입니까?"

두 볼을 부풀리며 씩씩대던 하연.

"..좋아하는 사람은 있거든요?"

"정말? 진짜로?"

하연은 얼굴을 붉혀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걔가 누군데? 같은 반 애야?"

입술을 꼭 물고는 하연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몰라요.

근데 그 사람도 내가 자기 좋아하는지 모를 걸요."

"흠.. 완전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랑중이시네요? 우리 아가씨?"

주먹을 꼬옥, 쥐고 두 눈을 빛내는 하연.

"..스무살 되면은, 고백할 거에요.

진짜 좋아한다고."

"오, 멋있는데~"

마치 대견한 딸을 보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는 지원.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하연은,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나 억지로 밝게 웃으며

"자자, 마저 꿀물이나 드십쇼! 내일은 고깃국을 대접해드리겠습니다요!"

"..너 이제 사극 드라마 좀 그만봐."

"싫어용."

*

거실의 티비에서는 아홉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지원과 하연의 배경처럼 깔렸다.

지원은 소파에 기댄 채, 역시 하연이 강제로 건넨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고, 하연은 그 옆에 반쯤 누워 앉은, 상당히 불량한 자세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감기로 그렇게 고생했으면, 감기 걸려있는 사람이랑은 좀 떨어지시지요?”

“내성 생겨서 괜찮아요.

그리고 나 없으면 언니 심심할까봐. ”

"근데 왜 이마가 이렇게 따끈따끈하실까?"

지원은 피할 틈도 없이, 

하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차마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만화책 속에 얼굴을 파묻는 하연.

지원은 그대로 무심결에 하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은 뉴스에 몰입했다.

쿵 쿵 쿵

행여 입이라도 열면 이 격한 심장 소리 울려퍼질까,

꾹꾹 아랫입술 물어가며 참는 하연이었다.

같지만 다른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정.

길고 조용한 시간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

다음날, 점심 무렵.

감기 기운 하나 없이 개운하게 깨어난 지원은 주방에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며칠간 하연과 간호하고, 간호받고를 주고받다보니, 미처 장을 보지 못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반찬통 두 개와 사과 한 알, 유통기한 조금 지난 요구르트 팩 하나.

그야말로 괴멸적인 상태.

지원은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동실을 열었다.

“우리 김치볶음밥 해먹을까?”

“..언니 지난번에 김치볶음밥 만들다 김치에 불질렀잖아요. 난 119에 전화할뻔 했는데..”

“그건, 프라이팬이 문제였지. 내 문제는 아니었어.”

소파에 널브러져있던 하연은 지원이 도마와 칼을 꺼내는 소리에 급히 허리를 펴고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 지원보다 먼저 앞치마를 둘렀다.

"뭐야.. 이 무시받는 기분은.."

"..같이 하면 빠르잖아요. 헤헤.."

지원이 하연과 나란히 선 채, 다소 서툰 손놀림으로 김치를 꺼냈다.

하연은 칼을 들어 다진 김치를 다지다, 옆에서 어설프게 프라이팬을 달구는 지원을 슬쩍 바라봤다.

“언니.”

“왜?”

"이런 주말도 나름 괜찮네요.”

“뭐가?”

“그냥..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적인 주말.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지원은 대꾸하는 대신,

올리브유가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하연이 다진 김치를 털어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하루라고.”

“저는 좋아요. 엄청 엄청. 많이 많이.”

하연은 칼을 내려놓고, 잠시 옆에서 김치 볶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글지글.

기름에 익는 김치 냄새, 타지 않게 주걱을 돌리는 지원의 손,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졌다.

"또 김치에 불내기 전에 밥이나 퍼오시죠?"

"넵."

부디 이런 시간이 영원했으면.

남몰래 하연은 바랐다.

*

밥을 먹고 난 후, 둘은 나란히 베란다 창 앞에 앉아 있었다.

빨래 건조대를 만지작거리는 지원.

“햇빛도 없고, 빨래도 안 마르고.. 

오늘 같은 날은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래도 밥은 먹었잖아.”

“우리 둘이 같이 한거니까요.”

지원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흐린 하늘, 덜 마른 셔츠, 습하고 축축한 공기.

그러다, 나른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너무 조용하면.. 가끔 무서워.”

하연이 돌아보았다.

“왜요?”

“아무 일도 없고, 그냥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면, 이 지구에 나 혼자 떨어진 외계인이 된 것 같거든.

되게 옛날부터 고립된 채로, 아무것도 없이 살아만 있는 것 같아서.”

하연은 천천히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언니. 오늘은 저랑 있었잖아요.

내가 해줄게요. 외계인이랑 친구.”

피식, 웃는 지원.

"근데 그럼 언니는 어디서 온 외계인인 거에요?

화성? 금성? 아니면 태양계 밖?"

"..쓸데없이 너무 구체적이네."

"모든 작품은 구체적인 설정이 기본값인 법."

"만화책 그만 봐."

"싫어용."

*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하연.

뻗친 손을 내리자 다시 눈꺼풀이 묵직하게 오르내렸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밤.

하연의 옆구리를 툭툭 치는 지원.

"착한 고3은 벌써 잠에 들었어야하는 시간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쿨하고 예쁘고 나쁜 고3이라.."

"아, 그러세요?"

하연의 손목을 붙잡고 하연의 방으로 끌고가는 지원.

하연은 쫄래쫄래 따라갈 뿐.

하연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지원.

"으음.."

점점 눈꺼풀이 닫혀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하연의 눈깜빡임.

지원은 하연이의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잠시 토닥거려주다가

"잘 자."

한 마디를 남기고 방 불을 끄며,

조심스레 문까지 닫고난 뒤에야 지원도 기지개를 켰다.

피곤한 얼굴로 티비를 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불 속에 파묻혀 바로 잠을 청하려다 

"아, 맞다."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검색을 시작한다.

"고3한테.. 좋은.. 음식.."

캡쳐까지 하며 블로그, 카페 글들을 읽는 지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른하고도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안엔 분명 두 사람의, 각자만의 처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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