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계절이 시작될 때 I4월 초.겨울의 잔해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지만, 햇살은 이미 봄을 품고 있었다.서울 시내를 따라 흐르는 바람은 묘하게 설레는 기운을 실어와 곳곳에 흩뿌리고 다녔고, 곳곳의 벚나무 가지마다 분홍빛이 조심스럽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지원은 아침부터 괜히 들떠 있었다. 원래 주말에도 차분히 하루를 시작하는 타입인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 안에 묻어온 꽃향기가 괜히 마음을 간질거리게 했다.옷장을 열고 고민하는 지원.방 한 구석 거울 앞에서 옷장을 열어두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옷이야 늘 입던 것들이었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특별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스며들었다. 그게 허영인지, 아니면 어떤 다짐의 표현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하연아, 옷 골랐어?”지원은 방문 너머로 물었다.잠시 후,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조금 열리더니 하연의 얼굴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려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응. 이거 어때?”몸 전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어깨부터 내려오는 부드러운 크림빛 니트와 청치마, 그리고 발끝의 운동화까지, 조합만으로도 봄날을 그대로 입은 듯한 하연이었다. 아직은 완전한 개화 전이지만, 벚꽃보다 먼저 봄을 품은 사람 같았다.지원의 입가에서 순간적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예뻐. 진짜로.”그 한 마디가 방 안 공기를 바꿔놓았다.하연의 뺨은 순식간에 연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입술이 살짝 오므려졌다 풀렸다. 그 표정 하나에 지원의 가슴도 따라 두근거렸다.“언니는 뭐 입을 거야?”하연은 괜히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며 물었다.지원은 옷장 안을 훑으며 대답했다.“나? 벚꽃보다 눈에 덜 띄는 걸로.”“싫은데.”하연은 고개를 들어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제일 예뻤으면 좋겠어. 오늘은 나만 보기엔 아까운 날이잖아.”지원의 심장이 순간 기분 좋게 불안해졌다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우리가 기다리는 계절 II다음 날, 지원과 하연은 동네 작은 꽃가게에 들렀다.가게 안은 습기가 가득했고, 초록 잎에서 나는 흙 냄새와 촉촉한 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작은 전구들이 달려 있어 잎마다 빛을 머금고 있었다.하연은 한눈에 마음에 드는 화분을 발견했다. 잎이 길쭉하고 통통한 산세베리아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잎을 만졌다.“얘는 숨이 참 고요해 보인다.”지원도 곁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이 친구는 네가 말한 대로 집 공기를 맑게 해줄 것 같아.”"이름은 뭘로 짓지?"“몽실이가 있으니까.. 얘는 통통이?”“그건 너무 강아지 이름 같잖아.”“그럼.. 봄비?”“너무 감성적이다. 완전 인스타감성.”이름 논쟁은 끝이 없었다. 결국 가게 주인이 재촉하듯 웃으며 계산서를 내밀자, 둘은 그냥 나중에 정하자며 계산을 마친 후 품에 하나씩 화분을 안고 나왔다.저녁 무렵, 집에 돌아와 새 화분을 창가에 나란히 두었다. 몽실이 옆, 그리고 침실 창가 한쪽.밤이 되어 불을 끄고, 지원은 침대에 눕기 전 잠시 창가를 바라봤다. 고무나무 몽실이, 그리고 이제 막 가족이 된 산세베리아 두 그루. 그 작은 생명체들이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소리가 평온하게 들려온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연은 이미 지원의 손을 꼭, 붙잡고 잠에 빠져있었고, 지원은 그런 하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으으.."살짝 구겨진 미간이 귀여워 지원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그러다, 지원은 속으로 생각했다.사랑은 거창한 약속보다 이런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같이 화분을 고르고, 같은 밥상을 차리고, 같은 시간에 잠들고, 같은 아침에 눈을 뜨는 일. 그 모든 ‘같이’가 쌓여 결국 하나의 계절이 되는 것 같았다.*며칠 뒤, 지원은 거실을 둘러보다가 무심코 물었다.“이름 정했어?”하연은 책상에 엎드려 과제를 하다 고개를 들었다.“아직. 언니는?”지원은 창가에 놓인 두 화분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말했다.“왼쪽은 너, 오른쪽은 나. 둘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우리가 기다리는 계절 I3월 초의 공기는 참으로 오묘하고 기묘했다.따듯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겨울처럼 날카롭게 몸을 찌르지도 않았다. 길바닥에는 아직 겨울이 다 녹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가로수 가지 끝에는 연둣빛 싹이 채 피어나지 못한 채 매달려 있었다. 푸른 기척과 희뿌연 잔설이 공존하는, 계절의 모호한 틈새.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사람은 겨울 패딩을 목끝까지 여며 입고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가벼운 바람막이만 걸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지원과 하연의 집도 그 계절의 틈새에 있었다. 거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그 속에 묘하게 달큰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이제 곧 꽃이 터질 거라는 계절의 예고처럼.토요일 아침, 주방에서 나는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와 전기포트에서 김 오르는 소리가 어우러지던 순간, "다녀왔습니다~""오냐."살짝 상기된 얼굴의 하연이 신발을 벗으며 불쑥 말했다.“언니, 우리 화분 하나 더 사자.”하연은 장봐온 마트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두고, 창가에 놓인 고무나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우리 몽실이, 혼자 있어서 겁나 외로워 보여.”지원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화분 옆에 걸린 커튼은 반쯤 젖혀져 있었고, 햇살이 사선으로 들어와 잎사귀 표면에 맑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연이 말하는 친구는 그들의 첫 공동 육아라 할 수 있는 존재, 지난 가을 입양해온 고무나무, 일명 몽실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왠지 모르게 휑한 느낌이 드는 거실 한쪽을 채우려 산 것이었는데, 어느새 집안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왜, 몽실이가 친구가 필요하대?”지원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필요하지. 사람이든 식물이든, 같이 있어야 심심하지 않잖아. 같이 얘기할 상대도 있어야 하고. 우리보단 같은 식물이 몽실이도 더 편하지 않겠어?”지원은 허리를 숙여 잎을 한 번 쓰다듬은 뒤, 하연을 바라보았다.“근데, 너는 도대체 몽실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맨날 보면 속닥속닥.. 몽실이한테 귀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서로에게 남긴 흔적들 II한편, 도심의 사무실.지원은 점심시간에, 무심코 휴대폰 사진첩을 넘기다 화면 한 장 앞에서 멈췄다. 작년 여름, 바닷가. 햇볕이 너무 강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하연은 모래 위에 [J+H]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같이 찍힌 그 옆에서 민망하다는 듯 웃고 있는 자신.그 당시에는 어린 장난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 +는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땐 파도에 금세 지워질 마음이라고도 조심스레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흔적은 지원의 가슴 한구석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지원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연은 단순히 지원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원의 일상, 습관, 생각 속 구석구석에 스며든 존재였다.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져 갔다.*저녁.현관문을 열자마자 지원의 코끝을 스친 건 된장국 냄새였다. 단순한 향기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단숨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향 같은, 안식 같은.“왔어요?”부엌에서 하연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지원은 대답 대신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보고 싶었어.”하연은 잠시 놀라듯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기대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 그냥 오늘은..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계속 들었어.”하연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마음, 매일 조금씩 주세요. 된장국처럼 오래 끓여서, 더 깊어지게.”지원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조금 짜도 괜찮아?”“괜찮죠. 그게 사랑이잖아요.”*식사 후, 하연은 다시 상자를 꺼내 지원 앞에 두었다.“이게 뭔데?”“우리 추억들이요.”뚜껑을 열자 지원의 눈이 커졌다. 버스표, 전시 티켓, 손편지 초안. 하나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이거.. 아직 가지고 있었네.”지원은 버스표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이날, 네가 처음 내 손 잡아줬지?”“네. 언니 손이 너무 차가워서.”하연은 웃으며 대답했다.지원은 순간 그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서로에게 남긴 흔적들 I눈을 뜨는 하연.비몽사몽인 채로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려하다가 이내, 번쩍. 커다랗게 눈을 떴다."하암.."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곤,"..언니?"조용히 지원을 불러본다.미동도 하지 않는 지원.지원의 눈 앞에 손바닥을 휘이휘이 저어본다."여전히 꿈나라 속이네.."괜히 지원의 코를 잡아당겨보는 하연.지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으응.. 아파.."코를 놓아주자 금세 다시 인상이 펴지며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져든 지원.그 모습에 소리없이 웃다가 지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는 하연.지원은 때맞춰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헤헤, 하며 미소지었다."귀엽다니까."하연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다가,행여 지원이 깰까 조심스레 침실을 나왔다.천천히 침실 문을 닫고는 거실로 나와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버튼을 누르는 하연.찬장에서 티백들을 보며 고민한다."어디 보자.. 오늘은.."갈등하던 손이 허브티에서 멈춘다.때마침 끓는 물.머그컵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아침의 햇빛은 유난히 부드럽게 집 안에 다가와 얇게 퍼지며 스며들고 있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 위에 하얀 직사각형을 그려냈다. 그 위에 놓인 식탁엔, 반쯤 마셔진 컵 속에 아직 식지 않은 허브티의 향이 은은히 향초처럼 거실을 맴돌았다.하연은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그 빛을 바라보다가, 마음속 깊이 저장해 두었던 기억 하나를 꺼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거실 구석, 버려두지도, 매일 챙기지도 않는, 오래된 상자였다. 바깥은 이미 손때가 묻어 다소 반질반질해져 있었고, 모서리에는 조금 뜯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자, 갖가지 것들이 보였다.하연은 상자를 들고 와 소파 앞에 놓았다. 두 손으로 뚜껑을 열자, 약간의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설지 않은 숨결들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안에는 티켓들, 종이 조각들, 몇 장의 사진이 가지런하지 않게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Last Updated: 2026-06-29
Chapter: 우리는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 II저녁 6시.지원은 노트북을 덮었다. 탁,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녀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온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지원 “으.. 배 안 고파? 뭐 시켜 먹을까?”지원이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하연에겐 그 부드러움이 다가오지 않았다.싱크대를 가리키는 하연.“먹었어.”하연은 짧게 대답했다.“같이 먹지 왜..”“언니 바빠 보여서.”그 말은 중립적인 어조로 나왔지만, 그 안에 서늘한 결이 분명히 섞여 있었다.“..하연아.”“괜찮아.”지원은 그 괜찮아,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식탁 위의 물컵 속에서 물결이 작게 흔들렸다. 지원은 물컵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가 하연이 앉은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물컵을 하연에게 조심스레 건넸다.“미안해. 아까 그건..”“언니, 나 이해해.”하연은 물을 마셨다. 유리컵에 입술이 닿는 순간, 물의 차가움이 혀끝을 스쳤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마음속 빈 곳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근데 이해만 하고, 감정은 말 안 해주면내가 뭐가 괜찮고 뭐가 안 괜찮은지 모르잖아.”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 속에는 가라앉은 실망이 있었다.“그럼 말해줄까? 오늘 하루 종일 나 그냥.. 괜히 기대했나 싶었어.”지원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내가 그랬구나. 미안해. 하연아, 난 늘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걸 표현하는 데 서툴러.”하연은 고개를 숙였다.“알아. 그래서 가끔 더 서운한 거야.”“..서운하면, 말해줘. 네가 너무 참고, 조용히 웃고 넘기니까 내가 더 바보처럼 구는 거야. 언니가 바보같은 짓 할 때마다 똑똑한 하연이가 지적해주면 안될까?”담요에 푹, 고개를 숙이는 하연.“내가 언니한테.. 당연해지는 거 같아서 무서웠어.”그 한마디가 지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숨이 잠시 막혔고, 동시에 미안함이 몰려왔다.“하연아, 넌 절대 당연한 존재가 아니야. 나는 그냥, 너랑 있는 게 너무 편해서 이런 날이 평생 갈 거라 착각했던 거
Last Updated: 2026-06-26
Chapter: 등대 5- 생선 창고 I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부둣가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한 생선 창고.남자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나도 남자를 따라 들어간다.창고 안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한쪽 벽은 상자째 쌓여있는 생선.그 반대 벽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남자가 문을 다시 닫는다.남자 : “이쪽으로.”남자는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나는 책상 앞 의자에, 남자를 마주 보고 앉는다.남자는 책상 위의 공책을 들어 한참을 이리저리 넘겨본다.그러다 마침내 찾은 듯, 책상에 공책을 펼쳐 내려놓는다.내가 볼 수 있게 공책을 돌려준다.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남자.담배와 라이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동시에 말한다.남자 : “이연우.. 이현우 동생, 맞지?”나는 공책을 보며 대강 답한다.나 : “예.”공책에 적혀있는 건 내 신상정보다.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학력, 그리고 가족관계서.아버지, 사망.어머니, 사망....이상하다.가족관계서에 나는 외동으로 적혀있다.형이 적혀있지 않다.나 : “이거..”내 말을 끊고 남자는 묻는다.남자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나 : “..여기로 오라던데요?”남자 : “누가?”나 : “전화 걸어보니까요.”나는 품속에서 너절한 서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준다.남자는 서류를 읽는다.난 책상 위의 담배를 집고 남자를 따라 담배를 피운다.남자는 그런 나를 흘깃, 바라봤다가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린다.곧이어 서류를 내려놓고는남자 : “이상하네.”나 : “이상하긴 하지.그나저나 너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뼛속까지 스며든 내 반골 기질.남자 : “꼬우면 너도 반말하고.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나 : “그렇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왜 내가 외동으로 적혀 있느냐야, 이 가족관계서에.”남자는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남자 : “형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냐?”나 : “그렇게 친하진 않았거든.”
Last Updated: 2026-06-28
Chapter: 등대 4- 오천항오천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하긴, 생선잡이 배들은 모두 새벽이 되자마자 나갈 테니까.오후 한시인 지금은생선을 잡으러 나갈 시간도생선을 잡으러 나갔던 배가 돌아올 시간도 아닌 것은 분명했다.부둣가에는 나가지 못한 배들, 쌓인 생선들을 손질 중인 아줌마들, 손수레에 얼음을 옮기며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는 남자뿐이었다.그 와중에 홀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오천항 끄트머리에멀거니 선 나.이곳저곳 고개를 돌려 둘러본다.그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등대지기 면접을 보러온 것 같은사람들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나 (생각) : ‘언제 온다는 거야?’그때 얼음을 옮기던 남자가 내 앞에서 넘어진다.수레에서 얼음이 요란스럽게 쏟아진다.남자는 중얼거린다.남자 : “에이씨, 진짜..”남자는 바닥의 얼음들을하나하나 줍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보던 나는남자를 도와 얼음을 수레에 담아준다.남자가 가늘게 웃으며 말한다.남자 : “아이고, 감사합니다.”나 : “별말씀을요.”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얼음을 집으려 할 때 남자가 내게 조용히 묻는다.남자 : “이름.”나 : “..예?”남자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얼음을 모으며 다시 묻는다.남자 : “이름.”나는 그런 남자를 바라본다.겉으로 보기에는 쓰러진 얼음을 요란스레 다시 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내 대답한다.나 : “..이연우요.”남자는 내 이름을 듣고잠시 동작을 멈춘다.이내 주변을 살펴보던 남자.수레에 도로 담은 얼음을 옆 바닷물에 쏟아버린다.바닥의 얼음들도 발로 쓸어 넣는다.나도 손에 쥐고 있던 얼음들을남자를 따라 바다에 집어 던진다.남자는 다시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남자 : “따라와.”남자는 조용히 말하고는, 뛰어가듯이 걷는다.나도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남자의 장화 모양을 따라오천항 바닥에 발자국들이 새겨지고그 발자국들을나는 말없이 바라보며남자를 따라 간다.
Last Updated: 2026-06-27
Chapter: 등대 3- 다시, 장례식엄마가 죽었다.엄마의 장례식장은 아버지의 장례식장과 달랐다.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혼자 앉아 엄마의 사진을 바라봤다.울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형과 다르니까.기도하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정말 형과 다르니까.다르고 싶었던 건지, 달라지고 싶었던 건지.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희미하게는 같았다.손님도, 통곡도 없이 엄마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나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집 문 앞에는 세금고지서, 우편, 광고지 등등이 쌓여있었다.그것들은 모조리 집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거실 바닥에 대충 앉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흰 봉투가 하나 끼워져 있음을 알았다.고개를 갸웃하며, 내용물을 꺼냈다.찢어진 것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너덜너덜하게 감은 종이였다.펼쳐보았다.그 언젠가, 형이 내게 준 서류였다.내가 찢어버렸던, 등대지기를 구한다는 서류.내용은 같았다.[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그러나 달랐던 것은 맨 밑 여백에 적힌 두 문장의 글.형의 글씨체로 적힌,+82 050 – 3967등대로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뚜루루뚜루루달칵남자 목소리 : “나흘 후, 십삼 시, 서해 오천항.”달칵뚜뚜뚜전화가 끊겼다.나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다가, 불현듯 일어나 낡은 가방에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그러다, 가방을 팽개치고 지갑만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어차피
Last Updated: 2026-06-21
Chapter: 등대 2- 병이 짙어지다 II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병실에 갔더니 형이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으면 형은 말없이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고, 형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내가 병실을 나갈 때,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놀랐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형을 돌아보니 형은 품속의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러고는 나보다 먼저 병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쳐봤다. [등대지기 모집. 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 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 모집 인원 – 00명. 월 급여 700만원. 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무슨 뜻이지? 나보고 하라는 걸까? 엄마는 자기가 돌볼 테니? 기분이 나빴다. 언제까지 아빠 행세를 할 건지. 나는 서류를 찢어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병실 밖, 벽에 형이 기대고 서 있었다.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형은 구태여 나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던 걸까. 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형을 본 적이 없다. 형은 소리도 없이 존재를 감췄다. 엄마의 옆에는 그때부터 나만 있었다, 나만. 형도 없이. 나만. 엄마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
Last Updated: 2026-06-20
Chapter: 등대 1- 등대 (prologue)[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아버지의 죽음단순히 말하자면 안타까운 사고였다.내 아버지의 죽음은.여덟 살과 아홉 살 사이, 그 언저리에서 내가 잰걸음을 놀릴 무렵에 일어난, 사고.초등학교 교실에서 방과 후에 남아 받아쓰기를 연습하던 나에게담임 선생님께서 다가와근처 가까웠던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내 손을 잡아 이끌고 향하신.그 병원에서 아버지는 누워계셨다.아니, 쓰러져계셨다.아니, 아니다.당시의 나는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했으니누워계신 동시에 쓰러져계셨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아버지.나의 아버지.언제나 따스한 웃음을 지으시며나와 눈을 마주치시고는내게 오늘 학교는 어땠냐고,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느냐고,내게 물으시던나의 아버지.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웃음을 짓지도 않으시고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던 아버지.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삐빅거리는 기계음만 들려주신 아버지.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며같이 보곤 했던 뉴스에, 아버지가 아침마다 펼쳐보시던 신문에 나오곤 했던,그래, 뉴스나 신문에서 매일 같이 나왔던음주 운전자가 차로 치어버린 불쌍한 피해자.그런 피해자가 되어버리신 아버지.아버지는 그 수없이 많은 기삿거리 중 하나였다.아마 그 밤,다른 이들의 저녁 식사 시간의자그마한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리신나의 아버지.남겨진 가족들은 그 피해자의 가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다시 말해 특
Last Updated: 2026-06-14
Chapter: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아프다고로 나는 살아있다아픔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해당 부위의 존재를 명명백백하게 느낀다아프기 전에, 우리는 그 뼈를, 근육을, 피부를 느낄 수 있었을까?사실상 아픔이란 그들의 비명일지도 모른다자기도 이곳에 존재한다고,자기도 이곳에서 숨 쉬며 살아 있다고,자기도, 자기도 살아 있다고내 몸이지만 역겨움이 올라온다동족혐오일까?자기와 비슷한 걸 보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자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되려 더 나을 거다나는 나 자신을 싫어한다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압도적으로 내가 뽑힐 거다내가 나를 만난다면 난 죽기 직전까지 주먹을 날리고,마지막 한방을 날려 죽여버릴 것이다그러나 나는 고통을 두려워한다그렇기에 죽지 못했다죽음과 고통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밧줄이 목을 조이는 그 잠깐의 고통조차 나는 참아내지 못했다아픈 건 싫으나 죽고는 싶다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불이 붙기 위해서는 장작이 바짝 마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갓 잘린 나무는 수분기가 많아 불을 붙여도 불이 붙지 않고 연기만 매캐하게 풍겨나온다나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그러나 언제 마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나조차도그렇기에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한다그러니 지금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껏 지겹게 내리지 않았는가고작 그런 판단들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복잡하게 단순한, 지금의 나때로는 나를 위해 나를 배재할 수 있어야 한다끊긴 밧줄이 눈에 들어온다인터넷으로 주문한 밧줄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다현대 사회에게는 필수인 인터넷의 문제다모든 걸 쉽게 살 수 있는 대신,모든 것의 가치는 옅어진다그렇다고 해도, 직접 만지고 무게를 가늠해봤자 그 본질을 알아챌 수 있지는 못하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모든 것이 그렇다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그러나 그 본질을 알아볼 수
Last Updated: 2026-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