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등대 9김 선장 : “딸꾹, 안으로 들어와. 밖에 춥잖아.”나 : “...”바닷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 내게 김 선장이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나는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김 선장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이것저것 내게 묻는다.김 선장 : “추우면 담요, 딸꾹, 담요 줄까?아니면 뭐, 커피라도 마실래?그것도 아니면, 딸꾹, 차라도?”나 : “...”김 선장 : “아 필요 없구나, 그러면, 딸꾹, 쉬어.”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항해하는 배.나는 김 선장에게 묻는다.나 : “왜 이렇게 잘해주려고 하지?”김 선장 : “왜긴.. 딸꾹, 너 이현우 동생이라매. 그래서 그렇지, 뭐..”나 : “..이현우가 뭐라도 해줬어?”김 선장은 배를 자동운전으로 걸어놓고는내 앞에 마주 앉는다.자기 안대를 벗는다.안대 속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조차도.다시 안대를 쓰는 김 선장.히히거리며 웃더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김 선장 : “이현우를 태웠을 때, 그때, 딸꾹, 네 명이 더 있었거든?지금은 이유도 생각 안 나는데, 아무튼 그 네 명이랑 시비가 붙은 거야, 나랑.내가 옛날 같았으면 다 줘패버리는 건데, 히히, 너무 늙었나 봐, 딸꾹.그 새끼들 중 하나한테 맞아서 눈이 터져버렸어.그렇게 쓰러진 채 한참을 처맞고 있었는데, 니네 형이 빠루를 잡더니, 네 명을 진짜 개 패듯이 패버리더라고.딸꾹, 나야 뭐, 헤롱헤롱 거리고 있었는데, 니 형이 그 네 명을 다 죽여버리고 바다로 던져버렸어. 히히. 그리고 나를 보살펴줬지. 딸꾹, 니네 형 싸움 졸라 잘하더라, 딸꾹.”나 : “..형, 아니, 이현우가 싸움을 잘했다고?..사람들도 죽이고?”그럴 리가 없는데.형이 누구랑 싸웠다는 건,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그리고, 형이 사람을 죽였다고?김 선장 : “어, 그렇다니까. 응급조치도 해줘서 과다출혈로 죽진 않았지.이 안대는 말이야, 너네 형을 기억한다는 의미야. 딸꾹, 날 살
Last Updated: 2026-07-12
Chapter: 등대 8- 김 선장남자 : “김 선장, 나야. 문 열어.”밤, 남자는 부둣가에 메인 작은 생선잡이 배에 들어가 조타실 문을 두드린다.나는 남자의 뒤에 선다.조타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남자 : “또 술이나 대판 퍼마셨나. 이봐! 김 선장! 김 선장!”정적남자 : “야이 씨발 삐꾸 새끼야! 문 열어!”문이 벌컥 열리며김 선장 : “누가.. 딸꾹, 누가 삐, 삐꾸새끼래! 뒤질래? 이 잡놈의 새..”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나온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는 남자.문밖의 남자를 바라보더니,김 선장 : “어.. 어! 자네 잘 지냈나? 오랜만이구먼. 웬일이야?”남자 : “김 선장, 오랜만에 일해야지.”김 선장 : “일? 뭔 일? 나 이제 생선잡이는 안 하는데?”남자 : “그거 말고, 전의 일 말이야.”김 선장은 딸꾹대며 남자 뒤의 나를 바라본다.그러곤 다시 남자에게 눈을 돌리며김 선장 : “..끝난 거 아니었어?”남자 : “원래 그게 맞긴 한데.. 아무튼 이 친구 좀 그 섬으로 데려다줘,”김 선장 : “싫어! 딸꾹, 나도 할 만큼 했어. 조사도 받고, 감옥에도 있다가 나왔다고! 딸꾹.에휴 시팔, 돈이 웬수지.. 그, 딸꾹, 그 돈 때문에 염병할 일 다 겪었어. 딸꾹.이제 몰라!”남자는 김 선장의 어깨를 두드린다.남자 : “나도 알아, 아는데.. 이 친구, 이현우 동생이야. 섬에서 건 전화도 받았대.”김 선장 : “뭐?”김 선장은 남자를 밀치고 내 얼굴에 두 손을 올려 자기 얼굴에 가까이 댄다.김 선장 : “이현우 동생? 어.. 딸꾹, 닮았네. 어, 닮았어. 근데 섬에서 직접 전화를 했다고? 딸꾹, 얘한테?”남자 : “어.”“그러면 데려다줘야지. 섬. 딸꾹, 오케이.”김 선장은 다시 조타실로 들어가 시동을 켜려고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한다.곧이어 배에 시동이 걸리며 조명이 밝게 켜진다.남자는 배 밖, 부둣가를 향해 뛰어가며남자 : “에이 씨발,
Last Updated: 2026-07-11
Chapter: 등대 7- 생선 창고 III남자 : “이거..”나 : “이거 뭐?”남자 : “이거.. 섬 전화야.”나 : “..뭔 소리야?”남자 : “섬에서 너한테 직접 연락을 한 거라고.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나는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린다.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정적이 자리할 무렵, 남자에게 말한다.나 : “일단 다 집어치우고,그러면 너가 아는, 너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참가자들 태운 배의 김 선장 정도라는 거지.”남자 : “..어.”나 : “그 등대가 있다는 섬에서 아마, 팔까 말까를 정해서 중국 배로 실어서 보내는 거고.”남자 : “그렇지.”나 : “..그러면 간단하네. 그 김 선장이랑 날 연결해줘.”남자 : “뭐 하려고.”나 : “뭘 하긴 뭘 해.”나는 팔짱을 끼며 남자에게 말한다.나 :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봐야지.그리고 끝까지 가지 않으면, 네 선에서 내가 정리될 것 같거든.”남자는 책상 밑에서 쥐고 있던 사시미 칼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둔다.남자 : “알고 있었냐?”나 : “모르는 게 더 이상하잖아.그렇게 한쪽 손만 계속 책상 밑에 두고 있으면.”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남자 : “..형이랑 비슷하네.”나 : “내가?”남자 : “어. 니네 형도 나한테 그 말 똑같이 했거든. 더 젠틀하게 말하긴 했지만.”나 : “젠틀은 니미.. 그냥 가식적인 거지.”남자 : “뭐,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고. 어쨌든 섬에서 너한테 직접 연락을 했다는 건..”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남자 : “따라와.”나 : “어디로 가는데.”남자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남자 : “김 선장이랑 연결해 달라매.”남자는 일어나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간다.나도 남자를 따라나선다.나 : "..근데 사업 빠그라졌다면서, 그러면 왜 나한테 말을 건 거야?"남자 : "그 부둣가에서 그러고 멍청히 서 있는 연놈들은 다 똑같아서.혹시나 한 거지."나 : "내가 경찰이었
Last Updated: 2026-07-05
Chapter: 등대 6- 생선 창고 II스마트폰은 동영상이 틀어져 있다.뉴스의 장면 중 하나다.여자 아나운서가 말한다.아나운서 : [..등대지기를 구한다는 광고에 대해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텐데요.높은 급여와 까다롭지 않은 대상 조건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그 광고가 사실은 참여자들을 중국으로 가져다 파는 인신매매 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우리나라의 동해를 지키는 해경이 지난 12일, 서해상 등록되지 않은 수상한 배를 수색한 결과, 한국에서 중국으로 사람들을 팔아넘기는 브로커 이 모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한국인들과 세 명의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했습니다. 검경은 합동 조사를 시작했으며,팔려간 사람들의 신원이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 피의자들로부터참여자들의 신원을 말소시키는 전문 업자가 있다는 점 등을 알아냈다고 밝혔습니다.수십 명이 넘는 피해자의 가족들은 미적지근한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남자는 자기 스마트폰을 도로 가져간다.나는 남자에게 묻는다.나 : “..그러면 형, 아니, 이현우도 팔려간 거야?”남자 : “아니, 아마도.”나 : “그러면 뭔데. 앞뒤가 안 맞잖아.”남자 : “에이, 씨발..”나 : “뭐냐고.”남자 :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이 정도야. 참여자들을 만나고, 인원을 체크 한 다음에, 그 새끼들을 교육장이 있는 섬으로, 김 선장 배에 태워 보낸다.이게 내 역할이야. 그 이상은 몰라.뉴스에 뜨고, 이 사업은 빠그라졌어. 나한테도 연락 한 번 안 온다고.”나 : “그러면 내 신상정보는 여기 왜 있는 거야.이현우가 안 팔려갔다는 건 또 어떻게 아는 거고.나한테 전화는 그럼 누가 한 거야, 대체.”남자는 다시 담배를 꺼내 피운다.남자 : “이현우는 그 계획 핵심 간부였어. 참여자가 어떻게 간부까지 된 건지는 나도 몰라.아무튼, 팔아버릴 연놈들 정하는 것도간부들 회의에 따라 정하는 거니까, 팔려가진 않았겠지.이
Last Updated: 2026-07-04
Chapter: 등대 5- 생선 창고 I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부둣가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한 생선 창고.남자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나도 남자를 따라 들어간다.창고 안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한쪽 벽은 상자째 쌓여있는 생선.그 반대 벽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남자가 문을 다시 닫는다.남자 : “이쪽으로.”남자는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나는 책상 앞 의자에, 남자를 마주 보고 앉는다.남자는 책상 위의 공책을 들어 한참을 이리저리 넘겨본다.그러다 마침내 찾은 듯, 책상에 공책을 펼쳐 내려놓는다.내가 볼 수 있게 공책을 돌려준다.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남자.담배와 라이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동시에 말한다.남자 : “이연우.. 이현우 동생, 맞지?”나는 공책을 보며 대강 답한다.나 : “예.”공책에 적혀있는 건 내 신상정보다.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학력, 그리고 가족관계서.아버지, 사망.어머니, 사망....이상하다.가족관계서에 나는 외동으로 적혀있다.형이 적혀있지 않다.나 : “이거..”내 말을 끊고 남자는 묻는다.남자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나 : “..여기로 오라던데요?”남자 : “누가?”나 : “전화 걸어보니까요.”나는 품속에서 너절한 서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준다.남자는 서류를 읽는다.난 책상 위의 담배를 집고 남자를 따라 담배를 피운다.남자는 그런 나를 흘깃, 바라봤다가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린다.곧이어 서류를 내려놓고는남자 : “이상하네.”나 : “이상하긴 하지.그나저나 너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뼛속까지 스며든 내 반골 기질.남자 : “꼬우면 너도 반말하고.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나 : “그렇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왜 내가 외동으로 적혀 있느냐야, 이 가족관계서에.”남자는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남자 : “형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냐?”나 : “그렇게 친하진 않았거든.”
Last Updated: 2026-06-28
Chapter: 등대 4- 오천항오천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하긴, 생선잡이 배들은 모두 새벽이 되자마자 나갈 테니까.오후 한시인 지금은생선을 잡으러 나갈 시간도생선을 잡으러 나갔던 배가 돌아올 시간도 아닌 것은 분명했다.부둣가에는 나가지 못한 배들, 쌓인 생선들을 손질 중인 아줌마들, 손수레에 얼음을 옮기며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는 남자뿐이었다.그 와중에 홀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오천항 끄트머리에멀거니 선 나.이곳저곳 고개를 돌려 둘러본다.그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등대지기 면접을 보러온 것 같은사람들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나 (생각) : ‘언제 온다는 거야?’그때 얼음을 옮기던 남자가 내 앞에서 넘어진다.수레에서 얼음이 요란스럽게 쏟아진다.남자는 중얼거린다.남자 : “에이씨, 진짜..”남자는 바닥의 얼음들을하나하나 줍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보던 나는남자를 도와 얼음을 수레에 담아준다.남자가 가늘게 웃으며 말한다.남자 : “아이고, 감사합니다.”나 : “별말씀을요.”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얼음을 집으려 할 때 남자가 내게 조용히 묻는다.남자 : “이름.”나 : “..예?”남자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얼음을 모으며 다시 묻는다.남자 : “이름.”나는 그런 남자를 바라본다.겉으로 보기에는 쓰러진 얼음을 요란스레 다시 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내 대답한다.나 : “..이연우요.”남자는 내 이름을 듣고잠시 동작을 멈춘다.이내 주변을 살펴보던 남자.수레에 도로 담은 얼음을 옆 바닷물에 쏟아버린다.바닥의 얼음들도 발로 쓸어 넣는다.나도 손에 쥐고 있던 얼음들을남자를 따라 바다에 집어 던진다.남자는 다시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남자 : “따라와.”남자는 조용히 말하고는, 뛰어가듯이 걷는다.나도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남자의 장화 모양을 따라오천항 바닥에 발자국들이 새겨지고그 발자국들을나는 말없이 바라보며남자를 따라 간다.
Last Updated: 2026-06-27
Chapter: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건 II다음 날 저녁, 지원은 하연을 데리고집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언니, 진짜로.. 집 보러 다니는 거예요?”“우리 둘이 살 집.이왕이면 창문 큰 데로.”부동산 직원은 둘을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은 듯단순히 자매쯤으로 여겼다.그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씁쓸했다.“두 분이 함께 지내실 거면, 이 집 구조 괜찮을 거예요.”하연은 집 도면을 바라보다작게 중얼였다.“함께라는 말, 되게 좋네요.”*밤, 돌아오는 길.지원은 문득 물었다.“진짜 괜찮아?”“뭐가요?”“사람들 말, 가족 반응, 미래 불확실한 거..그 모든 걸 다 감수하면서 나랑 같이 사는 거.”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언니.”“응?”“우리 언제부터 당연하게 같이 살 생각했는지기억 안 나요.근데 그만큼..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나 봐요.”“무슨 마음?”“이 사람이랑은,어떤 불편도 같이 견뎌보고 싶다.. 그런 마음.”*그날 밤, 둘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로를 바라보다가지원이 말했다.“이게.. 사랑을 미래로 옮기는 과정인가 봐.”“조금 불편하고,조금 불안하지만,그럼에도 계속 가고 싶은 길.”하연이 웃었다.“언니,우린 이미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마음부터.”사랑은 가벼운 설렘을 지나조금씩 삶이 되고 있었다.현실의 무게를 느끼며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그것이 바로,사랑을 진짜 미래로 데려가는 일이라는 걸두 사람은 이제야 알게 됐다.
Last Updated: 2026-07-13
Chapter: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는 건 I봄이 깊어가는 어느 평일 저녁.퇴근 후의 서울은 따뜻하고 붐볐다.지원과 하연은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한강 근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따끈한 파스타와 와인이 놓였다.“요즘엔 어때요? 일.”하연의 질문에, 지원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복잡해.새 프로젝트 맡았는데, 이직 고민도 같이 하니까 머리가 아프더라.”“이직하면.. 회사 근처로 이사 가요?”지원은 하연을 바라봤다.“그 얘기, 하려고 했어.”“ .응?”“이직하면, 좀 더 외곽으로 갈 수도 있어.조용하고, 넓은 집.너랑 같이 살기 더 편한 곳으로.”하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진짜요?”“응. 우리, 이제 진짜 함께 사는 걸한 번 제대로 해보자.”하연은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 조용히 웃었다.“그거, 좀 감동이에요.”“감동만?”“..그리고 좀.. 무서워요.”지원은 고개를 갸웃했다.“왜?”“같이 살고, 미래를 계획한다는 게좋기만 한 게 아니니까.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을지도 몰라요.”지원은 그 말에 진지해졌다.“하연아,너한텐 아직 먼 이야기일 수도 있어.나보다 경험도 적고,이런 관계를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렵잖아.”“응..”“하지만 나한텐 네가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가장 오래 옆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야.”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식사 후, 한강을 따라 걸으며지원이 말했다.“나는 가끔..우리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너한텐 짐이 될까 봐 걱정돼.”“왜요?”“사람들이, 너한테 뭐라 하진 않아?”하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끔 친구들이 물어봐요.‘요즘 누구 만나?’ 같은 거.”“그리고?”“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정도로 말해요.”지원은 하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손을 천천히 잡았다.“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거야.”하연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언니,그런 거 다 감수하고도,나는 언니랑 있는 게 훨씬 좋아요.”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조용한 흔들림의 징조 II식탁에 앉은 둘 사이엔오랜만에 낯선 공기가 감돌았다.“하연아.”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요즘 무슨 일 있어?”하연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요. 그냥..언니가 자꾸 멀리 느껴져서요.”“멀리?”“언니가 바쁜 거 아는데,그래도.. 난 가끔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요.”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도 그래.너무 좋아서,그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어.”“..그게 왜요?”“너한텐 나 하나뿐인데,나는 너한테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하연은 그 말에 눈을 감았다.“근데 언니.그런 식이면.. 나도 언니한텐 하나뿐이에요.나도 언니 잃는 게 무서운 사람인데.”지원은 고개를 숙였다.말없이 하연의 손등을 감싸며,이런 감정이 꼭 싸움처럼 커지지 않게 조심하려 애썼다.“우리,서로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가끔 오해를 부르나 봐.”“맞아요.그게 문제예요.우린 서로 너무 좋아해서,작은 틈에도 금이 가는 것 같아요.”그날 밤,지원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잠든 줄 알았던 하연의 어깨에조심히 이마를 댔다.“다음부턴 꼭 말해줘.혼자 서운해하지 말고.”“..응.”“그리고, 나 너한테 멀어질 생각 없어.아무리 바빠도,항상 너한테 돌아올 거야.”하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알아요.그래서 아직, 괜찮아요.”사랑이란 게늘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작은 불안, 사소한 틈,말 한마디가 못다한 감정들.그럼에도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다시 손을 내미는 일.그게 결국,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침대 위 두 사람의 온도는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었다.그리고 그 조용한 흔들림을 지나그들은 다시,조금 더 단단해졌다.
Last Updated: 2026-07-09
Chapter: 조용한 흔들림의 징조 I일요일 저녁.비가 내렸다.계절의 틈에 걸친 봄비는 유난히 차가웠고,거리는 젖은 우산들로 가득했다.지원은 작업실에서 평소보다 늦게 나왔다.회의가 길어졌고, 클라이언트 요청으로 급하게 수정할 게 생겼다.조용히 휴대폰을 확인하니하연에게서 온 메시지가 여러 개.[하연오늘 비 와요][하연우산 챙겼어요?][하연밥은요?]그리고 마지막으로,2시간 전의 메시지 하나.[하연저 먼저 잘게요조심히 와요]지원은 괜히 마음이 쿡 찔렸다.별말 아닌데도,그 “조심히 와요”라는 말 속에뭔가 지친 숨결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집에 들어섰을 때,하연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불은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TV는 무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안 잤네.”지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기다리다가, 그냥 멍하니 있었어요.”지원은 코트를 벗으며 다가갔다.“미안. 회의가 길어졌어.”“괜찮아요. 그런 줄 알았어요.”하연은 웃었지만,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늦은 저녁, 식사는 시켜 먹기로 했다.지원이 주문을 하고,하연은 아무 말 없이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라면 먹게?”“그냥.. 배고파서 먼저 먹을게요.”“말하지. 방금 주문했는데.”“말해도 바뀌는 거 없잖아요.”지원은 그 말에 순간,작은 파문처럼 퍼지는 감정을 느꼈다.서운함,그리고 죄책감.
Last Updated: 2026-07-08
Chapter: 사랑은 어쩌면, 습관처럼 II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지원은 하연이 장바구니에 몰래 넣어둔 딸기 우유를 발견했다.“이거 또 넣었지?”“왜요? 언니 좋아하잖아요.”“...”“언니는, 아기입맛이 귀여운 거 모르죠.”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장바구니를 바꿔 들었다.“무겁다. 내가 들게.”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말했다.“언니, 나 요즘 진짜 많이 웃는 거 같아요.”“그래?”“네.이런 거.. 너무 좋잖아요.별거 아닌 거, 같이 하고아무 일 없어도 같이 있고.”지원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바람에 잔머리가 흩날리고,그늘 아래에도 미소가 묻어 있었다.“..나도 그래.”*밤.샤워를 마친 하연은 드라이기 소리를 줄이며 말했다.“언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지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덮고,잠시 고개를 기울였다.“사랑?글쎄..하루에도 몇 번씩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고,그걸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네가 알아줄 것 같아서 안심하는 마음?”“..너무 좋다.”하연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지원 옆에 앉았다.“나는요,사랑이란 게 꼭 타오르는 불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오히려 이렇게..습관처럼, 다정하게 흘러가는 게 더 어렵고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해요.”지원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했다.“그럼 우리, 지금 사랑 잘하고 있는 거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어 말했다.“매일매일, 더 잘하고 있어요.”*불을 끄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잠드는 밤.다정한 말보다,익숙한 숨소리와나란히 있는 손끝이 더 진하게 사랑을 말해주는 시간.함께 사는 일이 사랑을 습관처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사랑했기에 이 모든 습관이 더없이 특별해진 거였다.그리고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두 사람의 가장 빛나는 날로 남는다.내일도,아무 일이 없어도,둘은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Last Updated: 2026-07-07
Chapter: 사랑은 어쩌면, 습관처럼 I“언니, 양말 또 뒤집어 놨죠.”하연의 목소리가 조용한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세탁기 앞에서 양말을 정리하던 그녀는익숙한 포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지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잼을 바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알아요. 근데 오늘에만 벌써 세 번째잖아요.”하연은 양말을 뒤집으며 웃었다.투덜거리지만,표정엔 지겨움보다는 익숙한 다정함이 스며 있었다.지원은 뻔뻔하게 말했다.“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하면?”“그럼.. 평생 내가 뒤집어줘야죠, 뭐.”“그 말, 녹음해놔야겠다.”*주말 아침,햇살이 창문을 가득 메웠다.하연은 청소기를 돌리고,지원은 커피를 내렸다.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말이 없어도, 따로 말하지 않아도동선이 겹치지 않는 건오랜 습관처럼 몸에 밴 리듬이었다.“우리, 완전 부부 같지 않아요?”하연이 말했다.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닦으며.지원은 고개를 돌렸다.“뭐야, 갑자기.”“아니, 그냥.서로 뭐 안 물어봐도뭐 필요한지 아는 거 보면 그렇잖아요.”지원은 조용히 웃었다.“그러게.우리 그렇게 됐네.”*점심 무렵, 동네 마트에 함께 나섰다.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길,길가에 핀 유채꽃을 하연이 먼저 발견했다.“언니, 저거 봐요.”“음. 벌써 봄 같네.”“봄이 아니라, 이제 진짜 봄이에요.입춘도 지났고.”“그럼 우리도 새 계절에 맞게 바꿔볼까?”“뭐요?”지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이불.너 그 핑크색 이제 좀 지겹지 않아?”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거 언니가 골랐잖아요.귀엽다고.”“지금은 네가 더 귀여우니까이불은 바꿔도 돼.”하연은 터질 듯 웃었다.“아 진짜, 언니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습관이야.”
Last Updated: 2026-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