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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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By:  장순혁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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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자 오빠가 갑작스레 죽고 고아였던 새언니와 시누이는 갈데가 없다 둘이서 살게 되며 벌어지는 로맨틱 GL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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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장례식장

고아.

흔히 길거리 나다니는 사람들 중 아무나 골라도 있을, 남들 다 있는 부모, 형제따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

그러니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소중하고,

제게서 떠나가는 사람이 한없이 밉다.

고아인 지원이 마찬가지로 고아인 남편에게 옆자리를, 품을 내준 것은 어쩌면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웠고, 괴로웠으니까.

외로웠을 것이고, 괴로웠을 것임을 지원은 가슴이 찢어져라 공감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리 밀어내고 냈지만은 

남편은 다가왔고,

지원이 남편에게 밉고 나쁜 말들을 뱉어도

남편은 지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웃으며 옆을 지켰다.

어느 순간 그게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았던건,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그렇게 남편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지원.

세상이 주는 밝은 빛이라는 것은 언제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구 하나일 뿐이라는걸, 그때의 지원은 몰랐다.

결혼식을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차에 치여 허무하게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고,

홀로 남겨진 지원은 멀거니 남편의 영정 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훌쩍.. 훌쩍..

오빠.."

지원의 옆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아이.

남편의 유일한 피붙이인 남편의 여동생, 하연.

갓 중학생이 되어 살짝 큰 교복을 입은 하연은 장례식 내내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지원과 같은 완벽한 고아.

그것이 하연이었다.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지원은 어른이니 혼자라고 해도 어떻게든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모든 장례식이 끝나고,

납골당 한켠에 남편이 본인만의 공간을 마련한 후,

남편과 하연이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갈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처음보는 남편의 친척이란 이들의 쑥덕거림이 지원의 귀에 스며들어왔다.

"..그나저나 하연이는 어쩌지?"

"난 못 데리고 살아. 애들만 셋인데 우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고."

"누구는 안 빠듯해?

차라리 그냥 고아원으로.."

그 옆, 복도 벽에 걸터앉은,

두 눈이 새빨개진 하연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이.

아니, 어쩌면 다 알면서도.

그 모양새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지원.

터덜터덜 모여있는 그들에게로 걸어가

"내가 책임질 거에요."

놀라는 남편의 친척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얼굴에서 역겨운, 짐 하나 덜어냈다는 기쁨이 얼핏 보인다.

그게 지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구역질을 자아내게 했지만,

지원은 이를 악 물고 참아냈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한테 간섭하지 말고 살아요.

이제와서 가족행세라도 할 생각 말고."

지원이 하연에게 다가가,

하연의 신발을 신겨주며

"아가씨.

저랑 가요."

지원은 자리를 박차고 납골당을 떠난다.

작고 말랑한 하연의 손을 단단히 잡고.

*

그리고 지금.

"언니! 하얀색 양말 못봤어요?"

"거기 서랍에 있겠지~"

"없는데?"

서랍을 구석구석 들쑤시느라 난장판이 된 방.

지원은 앞치마를 입고,

한 손에 뒤집개를 든 채로 하연의 방으로 들어온다.

능숙하게 장롱 속에 손을 집어넣고 양말을 꺼내 건네주는 지원.

"이게 양말이 아니면 뭘까~?"

"헤헤.."

머쓱하게 웃어보이는 하연.

지원은 그런 하연을 보며 피식, 웃고는

"밥 다 됐으니까 먹으러 와.

일주일 연속 지각하는 고3이 어딨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엉클어버리는 지원.

"아, 쫌!"

"빨리와!"

지원은 하연의 방을 나간다.

혼자 남은 하연.

엉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다가,

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본다.

"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하연.

고3 하연은 남몰래 연분홍빛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새언니를.

*

식사를 끝마친 후,

설거지를 하는 지원과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있는 하연.

"언니, 나 갔다올게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목소리.

"어, 잘 갔다와~"

하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발 밑창을 탁탁 턴다.

"언니! 나 갔다온다고요!"

그제야 고무장갑을 벗지도 못하고 하연에게 다가가는 지원.

하연은 어리광부리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지원은 그런 하연을 꼬옥 안아준다.

"어이구..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친구들이랑 싸우지말고, 또.."

"뭔.. 내가 애도 아니고."

"애 맞거든."

그때, 하연은 그제야 만족한듯 지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현관문을 연다.

"갔다올게요!"

팔짱을 낀채 피식, 웃다가 손을 흔들어주는 지원.

하연은 발개진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다 훽, 가버린다.

지원은 한동안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본다.

"참.. 그 울보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커서는.

그나저나 얼굴은 왤케 빨갛지?

감기라도 걸렸나?

이따가 감기약이라도 사놔야겠네."

다시 설거지를 하러가는 지원이다.

*

"여."

"하이."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둘.

하연과 그녀의 친구 시원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길을 걷다가,

시원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하연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푸핫! 왜 또 지X이야!"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대며 웃는 둘.

"표정 봐, 시X!"

하연은 후다닥 도망가듯 뛰어가고,

시원은 그런 하연을 붙잡아 억지로 팔짱을 낀다.

"아, 쫌!"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넉살좋게 밀어붙이는 시원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이는 하연이다.

"숙제는 했냐?"

"지X. 고3한테 뭔 숙제야.

고3에게 숙제란 있어도 없는 것!"

"아니, 진짜라니까?

어제 윤리 때 선생님이 수험생은 숙제 안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생각이라고..

아..

너 퍼잤구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원.

하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넌 오늘 뒤졌다.

내가 바로 꼬댈거야."

어깨를 들썩이는 하연.

하연의 어깨에 얼굴을 부딪힌 시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 시X.

뼈 맞았어."

"축하해."

그런데도 여전히 하연에게 엉겨붙는 시원이다.

그렇게 장난치며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학교.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엎어지는 하연.

"나 잔다. 깨우면 뒤짐. 딴 애들이 깨워도 너가 뒤짐."

시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참.. 이런 년이 어떻게 입학할 때부터 시험 볼 때마다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지 몰라.

야, 솔직히 말해봐. 너 컨닝.."

시원의 말을 끊으며 중지를 들어올리는 하연.

"X까시고."

하연의 쿨한 말에 에휴, 한숨만 내뱉는 시원.

"잘 자라."

"..."

"벌써 자냐?"

답 없는 하연의 뒷통수에 시원은 주먹을 쥐었다가 만다.

곧이어 교실로 들어오는 선생님.

"자, 자!

다들 왔니?"

"네.."

맥빠진 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

선생님은 그 소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교탁을 탁! 탁! 친다.

"자, 왜들 이렇게 힘이 없어!

이제 수능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자는 애들 좀 옆에 애들이 깨워줘라, 좀.

저거, 대놓고 자는 애 누구니, 저거!"

하연을 향하는 선생님의 손가락.

시원은 대신 대답한다.

"하연인데요, 오늘 아프대요."

한숨을 내뱉는 선생님.

"쟤는 뭐, 맨날.. 아니다.

하연이 아프면 보건실 갔다 오라고 그래.

알았지, 시원아?"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 끝에 붙여 손 붙여 경례를 하는 시원.

"넵!

알겠습니다!"

"그래, 다들 조금만 더 참자.

수능만 끝나면 너네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니까, 응? 알았지?"

"네~"

선생님은 그렇게 교실을 나선다.

잠시들 수근거리다가 이내 다시 자기들 공부하는 것들에 몰두하는 학생들.

"나도 내 공부 해야지.."

가방을 뒤적거리는 시원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하연이 시원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쳐자고있는거 아니었냐?

깼으면, 그럼 니가 대답하든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뒤집고는 다시 잠에 드는 하연.

"..휴.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니.

걍 마저 주무세요~"

하연은 다시 중지를 들어올리고는

자그맣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든다.

"아오, 진짜.

이걸 그냥.."

시원의 말은 이미 꿈나라에 도달한 하연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하다.

"..잠이나 자라. 어."

하연의 등을 조심히 토닥여주는 시원.

*

그릇들을 뒤적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하연.

그런 하연의 뒤에서 지원이 살며시 하연에게 다가와 안았다.

"언니.. 저 사실.."

지원이 하연의 입술에 입술을 맞춰 하연의 말을 끊는다.

"..쉿.

말 하지 않아도 알아.

나도 사실 너를.."

*

"우와!"

모두가 공부하느라 조용한 교실,

하연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선이 다들 하연에게 쏠린다.

옆 자리에 앉은 시원이 하연을 끌어내리듯 앉히며,

"드디어 미쳤냐?

쳐 자다 갑자기 왜 지X이야!"

하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 아니, 그..

꿈이었나?

휴..

어.. 그게.."

"쪽팔리니까 아가리 닫아.."

그제야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얌전히 앉는 하연.

시원은 그런 하연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개꿈이라도 꾼거야?"

"..아니..

개꿈은커녕 로또라도 사야될 법 한.. 꿈.."

"그건 수능 끝나고 사시고,

그렇게 좋은 꿈이면 다시 쳐 자기나하세요.

지X 그만하고."

"..응.."

쿵쿵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혹시라도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을까,

행복한 기대를 품으며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하는 하연.

시원은 한숨을 푸욱,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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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고아.흔히 길거리 나다니는 사람들 중 아무나 골라도 있을, 남들 다 있는 부모, 형제따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그러니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소중하고,제게서 떠나가는 사람이 한없이 밉다.고아인 지원이 마찬가지로 고아인 남편에게 옆자리를, 품을 내준 것은 어쩌면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외로웠고, 괴로웠으니까.외로웠을 것이고, 괴로웠을 것임을 지원은 가슴이 찢어져라 공감했으니까.처음에는 아무리 밀어내고 냈지만은 남편은 다가왔고,지원이 남편에게 밉고 나쁜 말들을 뱉어도남편은 지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언제나 웃으며 옆을 지켰다.어느 순간 그게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았던건,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그렇게 남편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지원.세상이 주는 밝은 빛이라는 것은 언제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구 하나일 뿐이라는걸, 그때의 지원은 몰랐다.결혼식을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차에 치여 허무하게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고,홀로 남겨진 지원은 멀거니 남편의 영정 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훌쩍.. 훌쩍..오빠.."지원의 옆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아이.남편의 유일한 피붙이인 남편의 여동생, 하연.갓 중학생이 되어 살짝 큰 교복을 입은 하연은 장례식 내내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지원과 같은 완벽한 고아.그것이 하연이었다.'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지원은 어른이니 혼자라고 해도 어떻게든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모든 장례식이 끝나고,납골당 한켠에 남편이 본인만의 공간을 마련한 후,남편과 하연이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갈 때에는아무런 도움도,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처음보는 남편의 친척이란 이들의 쑥덕거림이 지원의 귀에 스며들어왔다."..그나저나 하연이는 어쩌지?""난 못 데리고 살아. 애들만 셋인데 우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고.""누구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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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언니이이..”침대에 푹 파묻힌 채, 인어처럼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누워있는 하연. 애처롭다 못해 구슬퍼보이는 얼굴로 애달프게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지원을 불렀다."언니..! 살려줘요.. 아이고 나 죽네!"“응? 왜?”지원은 설거지를 끝내고 시계를 힐끔 올려다봤다.짧은 시침과 긴 분침이 그 자태도 고고하게,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흠..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입시생 고3 하연이, 제트기 타고 날아가도 지각이겠네."그러나 여전히 침대 속에 파묻힌 하연의 몸뚱이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다.이미 열려있지만 매너있게 하연의 방문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가는 지원.“하연아, 이런 말하기 나도 새삼스럽기는 한데 너 지금 학교 지각인 거 알지?”“나 아파요.. 온몸이 쑤시고, 열도 나는 것 같고..으에취!”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리는 하연.하연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지만, 그나마 그 안에 잔뜩 담긴 것은 순수한 억울함.지원은 웃으며 천천히 하연이 곁으로 다가갔다.“어쩐지 어제부터 그러더라니..”"어제가 왜요..""너 어제 얼굴 되게 새빨겠어."지원이 등교하는 하연을 꼬옥 안아주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어 뜨끔, 하는 하연.“..사람이 일관되게 행동해야죠.. 후우..에.. 에취! 이거 봐! 콧물!”이불 안, 하연의 작은 몸에서 신음 소리가 참 길게도 났다."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언니.. 나 죽어요.."지원은 티슈를 뽑아들고,한 손은 하연의 뒷목에,티슈를 든 손은 하연의 코에 가져다댔다."자, 흥!""..언니. 나 정말, 정말로 아프긴한데 진짜.. 내 나이가 이제 그 정도는 아니야..""시끄럽고, 흥!""흥.."다량의 설레임과 약간의 자괴감.이정도 스킨쉽이면 그깟 자괴감쯤이야, 하연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코를 내민 채 가만히 지원의 손길을 느끼기로 했다."으.."표정을 한껏 구긴 후, 휴지통에 축축한 티슈를 버리는 지원.하연은 충격받은 얼굴로"언니.. 내가 더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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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II
회색빛의 찌뿌둥한 하늘.지들끼리 어깨동무하며 가득 뭉친 구름이 제 몸을 슬슬슬 잘라내는 중이다.주르륵 주르륵 잠시간의 멈춤도 없이 내리는 비.비 덕분에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베란다에 널어놓은 티셔츠는 여전히 눅눅했고, 수건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회색빛 구름들이 하늘을 덮었고, 바람은 하늘의 실수처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창문을 열자니 비가 오고,닫자니 빨래 때문에 습하고..이를 어찌해야한다는 말인가.."노트 한 장을 찢어 종이 부채를 만든 뒤안타까운 얼굴로 베란다 앞에 앉아 혼자 진지하게 상황극을 하는 하연."하연아.. 물 끓어..""경의 뜻대로 하겠소."혼자 신나게 사극 놀이를 하던 하연이 지원의 말에 일어났다.지원은 가디건을 걸친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게다가 가디건 위엔 목도리를 둘둘 감고, 머리엔 털방울 달린 비니까지 씌워져있었다.하연이 억지로 우겨대며 자기 옷장을 탈탈 털어 지원에게 몽땅 뒤집어씌운 결과물이었다.손에는 페퍼민트 차 대신어제 지원이 하연에게 건내준 감기약과 해열제."아하, 잠깐만요."지원은 종이부채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찻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꿀 한 스푼을 섞는다.“자.. 꿀물 대령입니다요.”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달달한 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잔의 표면에 가만히 맺히는 김. 하연은 유리잔을 양손으로 감싸 밀어주며, 지원 앞에 살포시 앉았다.“꿀물 오랜만이네.""언니가 나 어렸을 때 감기 걸리면 맨날 끓여줬잖아요. 언니표 감기용 특제 꿀물.”힘없이 웃는 지원."..그때는 너 진짜 귀엽고 자그마한 아가였는데."생글생글 웃는 하연."저 귀여워요?""..정정. 귀여웠었고 자그마했었던 아가였었지."어이없다는 표정의 하연."뭐야. 그럼 지금은 그게 전부 다 아니란 소리?"지원은 조심스레 뜨거운 꿀물을 후후 불어 마신다.만족스러운 얼굴."몰라."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지원을 슬며시 째려보는 하연."그 아가가 이제 나보다도 더 커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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