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성이가 샤워실로 달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는 밤을 지새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안경을 고쳐 쓴 민우였다.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민우는 순정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어색한 듯 기침을 한 번 '흠흠' 하고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민우야, 국 따뜻할 때 먹어.""어…… 어, 고맙다."순정이 내어주는 국그릇을 받아 들며 민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지난밤의 무방비했던 데이트 신청의 여운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감돌고 있었다.뒤이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성이 머리를 털며 주방으로 들어섰다."와! 누나, 진짜 살 것 같아요! 아침에 누나가 어깨 안 빌려줬으면 나 오늘 훈련하다 기절했을지도 몰라요."태성이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민우 옆에 털썩 앉아 밥공기를 집어 들었다.민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태성을 흘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너 또 아침부터 순정이한테 치댔냐?""형은 몰라도 돼요!"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한창 숟가락질을 시작할 무렵, 마루 건너편 도경의 방 문이 드르륵 열렸다.밤새 모형 작업과 과제 크리틱 준비를 마친 도경이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다.도경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여전히 사포 가루와 본드 자국이 살짝 남아 있었다.도경은 식탁에 앉기 전,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 싸개 같은 것을 순정 쪽 식탁 구석에 툭 내던지듯 놓았다."어? 도경아, 이게 뭐야?"순정이 찌개 국자를 들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보자, 도경은 무심하게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숟가락을 챙겼다."보면 몰라? 주방 정리대."순정이 보자기를 풀어내자, 안에서 하얗고 매끄러운 아크릴과 자작나무 합판을 정교하게 결합해 만든 2단 양념통 정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기성품이 아니었다. 하숙집 주방 싱크대 모퉁이의 좁은 홈 크기에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도록 맞춤 제작된, 도경의 세심한 설계 물건이었다."이걸…… 네가 직접 만든 거야?"순정이 감탄하며 정리대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모서리
새벽녘의 서리 친 가을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쯤, 하숙집은 가장 차갑고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어젯밤 이현이 사준 족발 상자의 잔해는 이미 깨끗이 치워졌고, 민우와 도경도 각자의 방에서 가을 밤을 하얗게 지새운 뒤였다.하지만 선발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체대생 태성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다.새벽 5시 반, 태성은 이미 트레이닝복을 갖쳐 입고 마당으로 나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씽, 씽, 씽' 소리를 내며 줄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조용한 하숙집에 울려 퍼졌다.유도 전공인 태성에게 이번 시기는 그야말로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때였다.오전과 오후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대비한 피 터지는 실기 훈련과 대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에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중간고사 이론 문제집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후…… 후……."어깨너머로 가쁜 숨을 내쉬던 태성이 줄넘기를 거두고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태성의 온몸에서는 따끈한 열기와 함께 땀 냄새가 풍겨 나왔다.단단한 근육이 잡힌 등줄기가 거칠게 위아래로 꿈틀거렸다.그때, 주방 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침거리 재료를 확인하러 나온 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순정은 툇마루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태성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갔다."어머 태성아! 이 새벽부터 훈련하고 온 거야? 날도 차거운데 땀 그렇게 흘리고 서 있으면 감기 걸려."순정이 얼른 주방에서 따뜻한 타월을 가져와 태성의 어깨에 둘러주었다.태성은 어깨에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어 순정을 바라보았다.땀에 젖어 이마에 착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얼굴과 피로가 그득한 눈동자가 드러났다."누나……."태성이 멍한 눈으로 순정을 부르더니, 별안간 툇마루에 서 있는 순정의 허리춤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그리고는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순정의 어깨와 가슴팍 쪽에 큼지막한 머리를 덥석 얹어버렸다."어, 어?"태성의 갑작스러운 밀착이 이어지자 순정이 당황해 굳어버렸다.태성
10월 중순의 밤은 깊어갈수록 차가워졌다.하숙집 마당을 둘러싼 담벼락 위로 가을 서리가 살포시 내앉을 무렵, 민우의 방은 여전히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의대 본과 2학년의 중간고사는 말 그대로 피 말리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심혈관계 질환의 기전과 임상 양상', '약물 작용 기전과 부작용'. 이름만 들어도 아득해지는 단어들이 사방 1미터짜리 작은 책상 위에 사태처럼 쏟아져 있었다.민우는 며칠째 제대로 누워보지도 못한 채, 책상 앞에 꽂꽂이 앉아 두꺼운 전공 서적과 씨름하고 있었다.새벽 2시 반. 민우는 뻑뻑해진 눈을 감으며 쓰고 있던 도수 높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안경을 벗자 샤프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던 평소의 인상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긴 속눈썹 아래로 피로가 짙게 깔린 눈매와 조금은 무방비해진 표정이 나타났다.늘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의대생 한민우의 패기 뒤에 숨겨진 20대 청년의 피곤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민우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타들어 가듯 바짝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마침 주방에는 순정이 툇마루 쪽 문을 살짝 열어둔 채 가을 밤공기를 쐬며 멸치 육수를 우려내고 있었다.시험기간 동안 제대로 밥도 못 먹고 밤을 새우는 하숙집 식구들이 아침에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국을 끓여두려는 참이었다."어, 민우야. 아직 안 잤어?"순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뚜껑을 닫으며 뒤를 돌아보았다.민우는 안경을 쓰지 않아 형체가 살짝 뭉개져 보이는 순정을 향해 걸어왔다.평소라면 차분하고 각 잡힌 걸음걸이었겠지만, 지금은 며칠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는 듯 걸음이 어설펐다."어…… 순정아. 너 왜 안 자고 있어?"민우가 잠에 취한 듯 나지막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안경을 벗은 민우의 눈동자가 순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점이 살짝 풀린 듯하면서도 묘하게 깊은 눈빛이었다."내일 아침에 먹을 국 좀 끓이느라. 너 눈이 왜 그래? 안경은 어디 두고 나
대문 밖 가로수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선선한 가을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루 끝 제일 명당에 식빵을 굽고 앉아 있던 고양이 알밤이가 귀를 쫑긋거렸다.가문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하숙집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 싶었지만, 그 평화는 한가함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이었다.이 작고 낡은 하숙집에 '중간고사'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평소 시끌벅적하던 하숙집 마당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것은 지난주부터였다.세 명의 대학생과 한 명의 웹툰 작가, 그리고 집안일을 맡은 순정까지. 하숙집의 시계는 전혀 다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아…… 심혈관계 기전 파트 여기서부터 어디까지냐……."새벽 1시, 주방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온 민우의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의대 본과 2학년의 중간고사는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이었다.벽돌보다 두꺼운 전공책 세 권에, 강의 자료와 필기 노트가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질환의 기전과 진단, 치료 방식까지 머릿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했기에 민우는 며칠째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다.민우가 멍한 눈으로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 마시고 있을 때, 마루 건너편 방 문이 스르륵 열리며 도경이 들어왔다.도경의 손과 팔뚝에는 우드락 본드와 자른 스티로폼 가루, 아크릴 가루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시험공부도 공부지만, 당장 다음 날 아침 제출해야 하는 설계 과제 모형과 크리틱 준비 때문에 도경은 셋 중 가장 늦게까지 작업하는 사람이었다."순정아, 찬물 좀 더 있냐?"도경이 주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무심하게 물었다.그러나 정수기 앞에 서 있는 건 순정이 아니라 퀭한 눈의 민우였다."나다. 순정이는 벌써 자러 들어갔어.""아, 민우냐. 눈이 아주 핏빛이네. 공부 많이 했냐?""말도 마라. 전공책 페이지 넘어갈 때마다 내 수명도 같이 넘어가는 기분이다."도경이 건조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컵에 맹물을 채웠다.그때,
폭풍이 휩쓸고 간 하숙집 마당에는 이상하리만치 아득하고 적막한 정적만이 감돌았다.골목 밖으로 멀어져 가는 엔진 소리가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대문 밖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만이 마당 구석에 쌓인 낙엽을 쓸어낼 뿐이었다.형들을 끌고 간 세단이 골목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이현은 마당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평생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숨통을 죄어오던 거대한 가문의 그림자가, 너무나 허무하고도 완벽하게 치워진 탓이었다.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기도 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기도 했다.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매일 밤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의 근원이 한순간에 사라진 느낌이었다.마루 끝에 서 있던 태성이 침을 꿀깍 삼키며 순정의 소매를 슬쩍 당겼다."……누나.""응?""저 할아버지…… 진짜 이현이 형 할아버지 맞아요? 분위기 진짜 장난 아니다. 나 아까 진짜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도경이 조용히 걸어 나와 이현의 옆 마루 끝에 툭 앉았고, 민우 역시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따뜻하게 우려낸 차 두 잔을 가져와 상 위에 내려놓았다.그 누구도 이현에게 거창한 질문을 던지거나, 그의 숨겨진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그가 대기업 가문의 서자이든, 어마어마한 부잣집 손자이든 하숙생들에게는 그저 함께 밥을 먹고 살을 맞대며 지내는 '이현이 형'일 뿐이었다.가문이나 배경 따위는 이 하숙집 안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그때, 순정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과 찌개를 들고 나왔다.구수한 냄새가 마당에 퍼졌다. 뚝배기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의 향이 방금 전까지 흐르던 차가운 가문의 냄새를 완전히 밀어냈다."자, 다들 식기 전에 앉아. 밥 먹자. 고기 탄다."이현이 멍한 눈으로 순정을 바라보았다.방금 전까지 가문의 거물이 다녀가고 거친 폭풍이 지나
강 회장은 천천히 이현을 향해 돌아섰다.평생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살아온 권력자의 눈빛이, 마당 한가운데 수척하게 서 있는 어린 손자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그 시선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가문이라는 이름 뒤에서 벌어진 추악한 학대를 마주한 수장의 서늘하고 무거운 자괴감이 그 눈밑에 짙게 깔려 있었다."내 집안일로 남에게 신세를 지는 건 가문의 수치다만…… 네가 정 이 하숙집에 머물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회장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마당 전체의 분위기를 단번에 눌러버릴 만큼 묵직했다."손주를 구박하는 차가운 집안보다는, 이 곳이 너한테 더 나았던 모양이니."말을 마친 강 회장은 이현의 앞을 꿋꿋하게 막아서고 있던 순정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정중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거대 재벌 그룹의 회장이 일개 하숙집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대문 옆에 바짝 엎드려 있던 이현의 이복형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평생 남 위에 서서 명령만 내리던 회장이 타인에게 숙이는 모습은, 두 형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이 모자란 아이를 거두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식구 하나 품지 못하는 집안 어른들보다 낫군요. 앞으로도 이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순정은 회장이 풍기는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하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강 회장의 서늘한 눈빛이 순정의 당돌한 기개와, 그 뒤에서 이현을 감싸듯 경계하며 서 있는 하숙생들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겉보기만 화려하고 차갑던 본가의 대저택보다, 이 낡고 좁은 하숙집 마당이 이현에게 더 따뜻한 울림이었음을 늙은 수장은 말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회장은 순정의 눈빛을 가만히 담아낸 뒤, 다시 이현을 바라보며 묵직한 한마디를 덧붙였다."언제든 도움이 필요하거나, 저 모자란 놈들이 너를 다시 괴롭히려 들거든 참지 말고 내 비서에게 바로 연락해라. 내 무심함 때문에 가문에서 유령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