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숙집을 구원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By:  popona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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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같은 얼굴의 청년 넷이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불면증 작가부터 까칠한 건축도, 오만한 의대생과 울보 유도선수까지. 억울한 암 투병 끝에 스물다섯으로 회귀한 순정은, 이 허우대만 멀쩡한 하숙생들을 향해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밥주걱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머, 총각들! 제 몸 귀한 줄 모르고 밥 안 먹으면 진짜 죽어!" 삼십 년 손맛이 담긴 따스한 집밥 한 상에 녀석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급기야 치맛자락을 잡고 질척이기 시작한다. 전생 50대 아줌마의 짱짱한 내공과 거침없는 오지랖으로 상처투성이 청춘들의 인생을 구원하는, 얼렁뚱땅 인생 2회차 힐링 로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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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다시, 스물다섯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췌장암 4기. 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통보했지만, 순정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등 뒤에서부터 명치까지 지져지는 듯한 통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몰려왔고, 그때마다 순정은 이불깃을 움켜쥐고 소리 없이 신음을 삼켰다.

진통제로도 가라앉지 않는 밤이 늘어갈수록,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병실 창밖으로 노을이 질 때마다 순정은 생각했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평생 남편과 시댁 눈칫밥을 먹고 살았던 세월이었다. 남들처럼 병실에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줄 자식도 없었다.

서른 해가 넘도록 한 지붕 아래 살을 맞대고 산 남편은, 정작 순정이 죽어가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실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55년의 인생 중 그나마 숨통이 트였던 건, 시장 골목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차렸던 반찬가게였다.

새벽마다 손수 무친 콩나물무침과 며칠씩 정성으로 삭힌 갓김치, 뭉근하게 고아낸 장조림을 사러 오는 단골들이 하나둘 늘었다.

입소문을 타면서부터는 문 열기도 전에 줄을 서는 날도 있었다.

순정은 그 시절이 유일하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피땀 흘려 번 돈조차 순정의 몫으로 남는 법은 없었다.

남편의 실패를 대신 메우다 보니, 어느새 흘러가 버린 세월이 삼십 년이었다.

언젠가 마트 진열대에서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던 캐시미어 목도리가 떠올랐다.

옷 한 벌 마음 편히 사 입은 적이 없었다.

좋아하던 딸기가 제철에 나와도, 순정은 늘 상처 난 못난이 과일을 골라 담았다.

친구들이 계모임에서 온천 여행을 간다고 할 때도 순정은 집에 남았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그 흔한 욕심 한 번 제대로 부려본 적이 없었다.

순정의 인생에서 '나를 위해서'라는 문장은 단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었다.

머리맡의 휴대전화는 며칠째 죽은 듯 조용했다.

끝내 안부 문자 한 통 보내지 않는 남편의 정적이 야속하다 못해 서글펐다.

이렇게 혼자 버려져 죽는구나 싶을 때마다, 순정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소리 죽여 울었다.

순정은 마지막 힘을 짜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억울했다. 단순히 아파서 억울한 게 아니었다.

평생을 남을 위해서만 갉아 먹히며 살았는데, 정작 나 자신으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억울했다.

"……다시 산다면."

순정의 입술이 힘없이 달싹였다.

"다시 산다면, 나는……"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순정의 의식은 새하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눈이 떠졌다.

천장이 낯설었다. 병실의 삭막한 흰 천장이 아니라, 노란빛이 감도는 익숙한 몰딩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순정은 숨을 멈췄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손등, 마디마디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부드러운 손가락이었다.

몸을 일으키는데도 어디 하나 삐걱거리는 곳이 없었다.

삼십 년 넘게 순정을 괴롭히던 오십견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큰거리던 무릎도, 명치의 통증도 흔적조차 없었다.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간 순정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울 속에는 스물다섯 살의 자신이 서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탱탱한 피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 눈가에는 주름 대신 촉촉한 물기만 어려 있었다.

"내가…… 돌아온 거야?"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갈라지고 탁했던 오십대의 음성이 아니라, 맑고 여문 젊은 목소리였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손때 묻은 자개장, 창가의 화분, 그리고 벽에 걸린 작은 액자.

대학 졸업식 날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이층집, 대학을 갓 졸업하고 강태오와 동거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전생에서는 이 집도, 할머니와의 추억도 지켜내지 못한 채 흘려보냈었다.

순정은 침대에서 내려와 차분히 걸음을 옮겨보았다.

발목도, 무릎도, 허리도 어디 하나 시큰거리지 않았다.

순정은 저도 모르게 방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통증 없이 온전히 내 의지대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얼굴 가득 쏟아졌다.

마당의 감나무는 아직 어렸고, 담장 너머 골목에서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나긋하게 번지고 있었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싱그러운 아침 공기. 병실 소독약 냄새에 절어 있던 코로 살아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벅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강태오. 지금은 그저 순정에게 얹혀사는 백수 애인일 뿐이지만, 순정은 안다.

그 남자가 앞으로 삼십 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갉아먹을지.

그리고 병실에 혼자 남겨졌을 때, 망가진 가전제품 버리듯 외면하던 그 차가운 무심함까지.

"두고 봐."

순정은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또렷이 마주 보았다.

이렇게 젊고 건강한 몸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직은 막막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나를 버려가며 남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것.

바로 그때, 방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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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루루원
루루원
고생한 인생의 2막이 기대됩니다.
2026-08-28 12:54:45
3
0
95 Chapters
2화. 서른 해의 그림자
"야, 순정아. 물 좀 가져와."방문이 벌컥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순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팬티 차림으로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강태오.씻고 나온 듯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대충 넘기며, 순정의 방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저 낯짝.순정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서른 해 가까이 함께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순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어, 목마르다니까. 얼음 잔뜩 넣어서 시원한 걸로 가져다 줘. 빨리."강태오가 늘어진 팬티 차림 그대로 순정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옆구리를 긁적이며 리모컨을 찾았다.그러더니 화장대 위에 놓인 순정의 작은 지갑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제 주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 세어보는 손길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야, 근데 너 지갑에 현금 이거밖에 없어? 나 오늘 형들 만나기로 했는데, 몇만 원만 더 줘 봐."순정이 기가 차서 가만히 바라보자, 강태오는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핀잔을 늘어놓았다."너 나 못 믿냐? 인맥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다 나중에 사업 밑천이라니까?"그 뻔뻔한 몸짓과 말 한마디에, 순정의 머릿속으로 지난 삶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젊을 적부터 그랬다.결혼하고 몇 년은 그럭저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더니, 치킨집을 한다며 순정의 적금을 몽땅 털어 넣었다.반년 만에 문을 닫았다.그다음엔 중고차 매매를 한다고 대출을 끌어다 썼고, 그다음엔 지인의 꾐에 넘어가 이름도 모르는 투자에 손을 댔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다.때마다 남은 빚은 고스란히 순정의 몫이었다. 순정의 이름으로, 순정의 신용으로, 순정의 앞으로.순정이 새벽마다 파출부 일을 나가고 밤늦도록 반찬가게를 지키는 동안, 남편은 안방에 드러누워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고 있었다.지붕에서 비가 새도, 명절 제사상을 차려야 해도 그의 손은 늘 비어 있었다.설거지 한번, 걸레질 한번 제 손으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순정이 몸살로 앓아누운 날에도, 밥은 어디 있냐고 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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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등짝 스파이크
순정의 손이 강태오의 멱살을 낚아채는 데는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삼십 년간 꾹꾹 눌러 담아온 분노가 한 번에 터져 나온, 단호하고 매서운 손길이었다."어어, 야! 뭐, 뭐 하는 거야!""내 인생에 너 같은 기생충은, 다시는 없다."순정은 그대로 팬티 바람의 강태오를 방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강태오가 발버둥을 쳤지만 순정의 손아귀는 흔들림이 없었다.마당으로 끌려 나온 강태오의 짐들이 창문 밖으로 하나둘 날아들었다.낡은 슬리퍼, 즐겨 입던 트레이닝복, 손에서 놓지 못하던 게임기까지."야, 임순정!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미쳤냐고? 아니, 이제야 정신이 든 거지."순정이 마당에 나뒹구는 강태오의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짝, 하는 소리가 골목까지 울렸다."아야! 이 여자가 진짜!""두 번 다시 이 집 앞에 얼씬거리면, 그땐 등짝이 아니라 어디가 터지는지 봐."강태오는 씩씩거리며 뭐라 대들려 했지만, 순정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스물다섯 살 여자애의 눈빛이라기엔 너무나 서늘하고 노련한 눈빛이었다."너 진짜 후회한다? 나 아니면 어디 가서 이만한 남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강태오가 팬티 바람에 가방으로 몸을 어설프게 가린 채,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리며 소리쳤다.순정은 코웃음을 쳤다."그 후회, 삼십 년 동안 실컷 해봤으니까 됐고. 얼른 꺼져.""뭐, 뭐라고? 삼십 년? 너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사귄 지 삼 년도 안 됐는데!"강태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순정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마당구석에 떨어진 그의 옷가지를 쥐어짜듯 집어 들어 얼굴에 냅다 던져버렸다."악! 이 여자가 진짜!"강태오는 민망함과 서늘한 아침 바람에 몸을 떨며, 마당 바닥에 나뒹구는 트레이닝복 바지와 티셔츠를 허겁지겁 껴입기 시작했다.속옷 차림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앞뒤도 안 맞게 옷을 꿰어 입는 꼬라지가 보기만 해도 눈물겹게 찌질했다.순정은 그 꼴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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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하숙 놓습니다
강태오를 내쫓은 다음 날부터, 순정은 팔을 걷어붙였다. 전생에서 순정이 유일하게 자신 있어 했던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손맛, 하나는 억척스러움. 시장 골목 반찬가게를 하던 시절 갈고닦은 그 손맛과, 삼십 년을 버텨낸 그 억척스러움을 이번 생에는 오롯이 자신을 위해 써먹을 참이었다. "할머니, 저 이 집으로 하숙 놓을게요." 순정은 마루에 걸린 할머니의 흑백 사진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진 속 할머니는 여전히 인심 좋은 얼굴로 웃고 계셨다. 이 집 마당에서 상추를 뜯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이던 그 손, 저녁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 밥 한 끼 먹이던 그 넉넉함. 순정은 그걸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저도 할머니처럼 해볼게요. 사람들 모이고, 웃음소리 나고, 밥 냄새 나는 집으로 다시 만들어볼거예요." 순정은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부모님이 바빠 이 집에 맡겨졌을 때, 할머니는 늘 순정의 밥그릇에 고기 한 점을 더 얹어주며 "많이 먹어야 야무지게 큰다"고 하셨다. 그 손맛과 그 마음이, 이제는 순정의 것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순정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낡은 방 세 개를 도배하고, 삐걱거리는 마루를 손수 사포질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 기둥에는 새로 파란 페인트를 칠했고, 곰팡이가 슬어 있던 화장실 타일도 하나하나 락스로 닦아냈다. 무거운 원목 상상을 혼자 번쩍 들고 마루로 옮기는데도 허리에서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전생 같으면 파스를 세 장씩 붙이고 한의원으로 뛰어갔을 일이었다. 순정은 짱짱한 제 팔뚝과 허벅지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어우, 몸이 가벼우니까 노동을 해도 피로가 안 쌓이네!" 팔을 위로 뻗어 도배지를 붙일 때마다 어깨뼈가 시원하게 늘어났다. 전생의 오십대 시절에는 오십견 때문에 팔 한 번 제대로 올리지 못해 끙끙댔고, 조금만 서서 청소를 해도 무릎 뼈마디가 모래알처럼 서걱거렸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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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흙빛 얼굴의 총각
순정은 마당을 쓸다 말고 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네, 여기 맞아요. 들어와요." 대문을 열자, 청년이 비틀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순정은 순간 숨을 삼켰다. 며칠은 못 잔 듯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그늘 아래로도 이목구비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 짙은 눈썹 아래 서늘하게 깊은 눈매, 날렵하게 뻗은 콧대, 핏기 없이 창백한데도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선. 큰 키에 어깨는 넓은데 몸은 야위어서, 셔츠 안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는데도, 그마저 화보처럼 보였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등에 짊어진 백팩 하나가 그의 마른 몸을 더 위태로워 보이게 했다. 순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렇게 잘생긴 총각이 왜 이 몰골로 돌아다니나. 굶어 죽기 직전인 얼굴로 저렇게 이목구비가 반듯할 일인가. 콧대는 조각한 듯 곧게 뻗었고, 옅게 마른 입술 색조차 묘하게 시선을 붙드는 구석이 있었다. 저러다 며칠만 더 안 먹으면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낯빛인데, 얼굴만은 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 전생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몰라도, 지금 순정의 눈에는 저 얼굴이 아니라 저 낯빛이 먼저 들어왔다. "강이현이라고 합니다. 근처에 조용한 하숙집 있다고 해서……" 이현은 입술을 바짝 말리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본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작은 작업실 골목을 기웃거릴 때도, 세상은 온통 그를 재촉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마감을 독촉하는 편집자, 본가의 눈치를 보며 은근히 거리를 두는 친척들. 사흘 동안 맹물로 배를 채우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시야가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 순정은 그런 이현의 기운을 단번에 알아채고 혀를 쯧쯧 찼다. 오십 년 평생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본 순정의 눈에 저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완벽한 영양실조이자 제 몸을 방치한 자의 몰골이었다. "거기,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구경한 게 언제야? 빵이나 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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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열네 시간의 잠
이현은 얼떨결에 입안에 들어온 전을 씹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상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뭔가 뜨거운 게 명치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며칠째 아무것도 넘기지 못했던 위장이 갑자기 요란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접시로 손을 뻗었다. 이현은 스스로도 낯설었다. 평소라면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 따위 입에 대지도 않았을 텐데, 순정이 내민 전 한 조각에 삼 일간의 경계심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씹을수록 고소한 기름 냄새와 짭조름한 간이 입안 가득 퍼졌고, 그 익숙한 듯 낯선 온기에 눈시울이 뜨끈해질 뻔했다. "어머, 총각 배가 많이 고팠구나." 순정이 흐뭇한 얼굴로 귤을 까서 이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현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순정이 건네는 대로 받아먹었다. 낯선 사람의 손에서 받아먹는 음식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게, 이현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기…… 사실 저 마감이 코앞이라서요. 삼 일째 거의 못 잤고……" "그러니까 얼굴이 그 모양이지. 방은 있으니까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요." "네? 아직 계약도……" "계약은 이따 하고, 일단 씻고 좀 자요. 사람이 삼 일을 굶고 밤을 새우면 죽어요, 죽어. 젊다고 몸이 안 상하는 줄 알지?" 이현은 뭐라 반박하려다, 순정의 눈빛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다정한데 단호한, 묘하게 거스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현은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순정의 말투에 이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이현의 주변에는 이렇게 다짜고짜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부유한 본가에서는 이현을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늘 뒷전에 두었고, 명절이라고 얼굴을 비쳐도 곁에 앉히기는커녕 문간에서 인사만 시켰다. 작업실에서는 담당 편집자가 마감만 재촉할 뿐, 이현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런데 초면인 이 여자는, 이현의 얼굴빛만 보고도 대뜸 밥부터 먹였다. 이현은 순정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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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공구 가방을 든 남자
밥상을 물린 이현은 방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마루 끝에 우두커니 섰다."저기, 사장님.""사장님은 무슨. 그냥 누나라고 해요."순정이 설거지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저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 월세는…… 부르시는 대로 드릴게요.""어머, 총각. 하숙집이 무슨 경매도 아니고, 부르는 대로가 어딨어. 원래 방값에 밥값 얹은 만큼만 받을 거야."이현은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지금껏 이현 주변의 사람들은 늘 값을 매기고 조건을 따졌다.본가 사람들은 이현을 서자라는 값으로 매겼고, 업계 사람들은 이현의 웹툰 조회수로 값을 매겼다.그런데 이 여자는 이현에게서 아무것도 재려 들지 않았다. 그저 밥그릇 하나를 더 놓을 뿐이었다."그럼……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겠습니다.""그래요, 잘 생각했어. 짐은 내일 옮겨 와요."이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층으로 올라간 그때, 대문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철제 공구함이 부딪히는 소리가 짤랑 울렸다.순정은 그 소리에 잠시 손을 멈췄다. 오늘 하루에만 벌써 두 번째 낯선 발소리였다.순정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전생 같으면 이런 소란이 성가시게 느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 대문 밖의 인기척들이 하나같이 반가웠다.순정이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마당으로 나가보니, 대문 앞에 낯선 청년이 서 있었다.어깨에 커다란 공구 가방을 둘러멘 채, 목에는 줄자를 걸고 있었다.큰 키에 균형 잡힌 체형에, 팔뚝은 노동으로 다져진 듯 단단한 잔근육이 실하게 잡혀 있었다.짙은 애쉬빛이 도는 브라운 머리칼 아래로 뚜렷한 이마와 콧날이 곧게 뻗어 있었고, 밝은갈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서늘하면서도 시원한 인상을 풍겼다.무뚝뚝하게 다문 입매와 살짝 찌푸린 미간이 잘생긴 얼굴에 은근한 까칠함을 더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체크 셔츠 아래로 팔뚝의 핏줄이 얼핏 도드라져 보였다.순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인가, 잘생긴 총각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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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어디를 함부로
다음 날 아침, 순정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부엌을 분주히 오갔다.머리는 뒤로 대충 말아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했고, 앞머리 몇 가닥만 흘러내리게 둔 채였다.헐렁한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 위로는 알록달록한 잔꽃무늬 앞치마를 둘렀다.162cm의 작은 몸이 커다란 냄비 앞에서 국자를 휘두르는 모습은 얼핏 보면 그저 여리여리한 아가씨 같았지만, 뚝배기를 번쩍 들어 옮기는 손놀림에는 예사롭지 않은 힘이 실려 있었다."어이구, 도경 총각. 벌써 나와 있었어?"마당에서는 도경이 벌써 사다리를 세워두고 대문 경첩을 살펴보고 있었다.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에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단단하게 잡힌 근육 선이 도드라져 보였다.목에는 어제 그대로 줄자를 걸고 있었고, 발치에는 드라이버와 펜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아침부터 소음 내면 다른 분들 깨실까 봐요.""우리 도경이 은근히 배려심 있네."순정이 국자를 든 채로 다가가 도경의 팔뚝을 툭 쳤다.그 팔뚝이 순정의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하게 느껴져, 순정은 속으로 감탄했다. 노동으로 다져진 몸이 확실히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실했다."우리, 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희 어제 처음 보지않았나요?.""어허, 하숙집 식구가 됐으면 다 우리지. 까칠하게 굴지 마요."도경은 대꾸 대신 다시 경첩으로 시선을 돌렸다.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순정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대신 대문 기둥에 손을 짚고 도경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드라이버를 쥔 손놀림이 꽤나 야무졌다. 확실히 눈썰미도, 손끝도 예사롭지 않은 총각이었다."오늘 아침은 뭐 드십니까.""콩나물국이랑 계란말이 그리고 제육볶음. 총각도 이제 이 집 식구니까 얼른 씻고 와요.""저는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습니다.""그런 게 어딨어. 아침을 안 먹으니까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한 거야. 사람이 배가 든든해야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법이라고."도경이 뭐라 반박하려다, 순정의 단호한 눈빛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이 마치 잔소리 앞에서 슬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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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월세 열 배 내겠습니다
이현이 하숙집에 짐을 옮긴 지 사흘째 되던 날, 순정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작업실로 돌아가야 할 이현이 좀처럼 짐을 챙기지 않았다.옷가지 몇 벌과 노트북만 들고 왔다던 처음 말과 달리, 어느새 방 안에는 태블릿과 펜, 참고 서적들까지 조금씩 늘어나 있었다.순정이 청소하러 방문을 열 때마다, 이현의 짐은 매번 조금씩 더 늘어 있었다."어머, 이거 언제 다 옮겼대."순정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엽게 느껴져 굳이 캐묻지 않았다."총각, 작업실은 안 가도 돼요?"아침상을 차리던 순정이 묻자, 이현이 젓가락을 든 채 순간 멈칫했다.헐렁한 검은 후드티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이 며칠 전보다는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여전히 가늘고 여려 보였다."여기가 작업이 잘돼서요."창백하던 얼굴에 옅게 혈색이 돌아온 이현이었다.다크서클도 며칠 사이 조금은 옅어져 있었고, 마르고 긴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쥐는 손놀림에도 힘이 붙어 보였다.서늘하게 처져 있던 눈매도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다.순정은 그 변화가 내심 뿌듯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다."그래요, 편한 대로 해요."이현이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신기하다는 듯 순정을 바라보았다."저 사실…… 삼 년 가까이 하루에 두세 시간도 제대로 못 잤어요. 약을 먹어도 안 되고, 병원에 가도 그때뿐이고. 근데 여기 온 첫날부터 열네 시간을 내리 잤잖아요. 그날 이후로 매일 밤 열 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감겨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그게 뭐 대수라고. 사람이 배부르고 마음 편하면 다 그런 거야.""저한테는 대수예요. 마법 같아요, 진짜로...누나, 아무래도 이 집…… 일반 하숙집이 아니라 'HP/MP 완전 회복 마법 스팟' 같은 거 아니에요? 누나가 해준 밥 먹으면 무슨 힐링 포션 먹은 것처럼 몸에 전율이 돈다니까요.“이현이 숟가락을 들고 대단한 진리라도 깨달은 듯 눈을 반짝이자, 순정은 주걱을 든 채 멍하니 이현을 바라보았다.에이치피? 엠피? 힐링 포... 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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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작가 총각, 방 꼴이 이게 뭐야
며칠 뒤, 순정은 이현의 방문 앞에서 코를 틀어막았다."총각, 안에 있어요?"대답이 없었다. 순정은 슬쩍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빈 배달 용기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벗어둔 옷가지와 콘티 스케치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창문은 며칠째 닫혀 있었는지 퀴퀴한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이현은 그 한복판, 태블릿 앞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창백한 옆얼굴이 드러났는데, 그 와중에도 이목구비만은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다."어머,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데서……"순정은 팔을 걷어붙였다.마당에서 빗자루와 고무장갑,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챙겨 온 순정은 곧바로 방으로 쳐들어갔다. 지나가던 도경이 그 기세를 보고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무슨 일이에요.""어, 도경 총각. 이 총각 방 좀 봐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야."도경이 방문 안을 들여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방이 아니라 창고네요.""그렇지? 그러니까 좀 도와줘요. 무거운 거 옮기는 것만.""알겠어요."도경이 순순히 팔을 걷어붙이고 들어왔다.순정은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청소에 열을 올렸다.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현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칼이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뭐, 뭐 하세요……""뭐 하긴, 청소하지! 총각, 이 방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았대?""내 작업 창작 공간 건들지 마세요. 저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겁니다."이현이 예민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지만, 순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빈 용기부터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그 손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능숙한지, 이현은 말릴 틈도 없이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질서는 무슨. 이건 그냥 어질러 놓은 거지!""그거 나름의 배치가 있는 거라니까요.""그럼 저 컵라면 그릇도 나름의 배치야? 곰팡이가 필 지경인데?"이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순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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